[이공순 Global Watch] 아베 신조와 보리스 존슨, 그리고 바보들의 행진

▲ 미국 중앙은행은 스웨덴과 영국 시스템을 절반씩 따왔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비즈니스포스트] 세계 최초의 중앙은행은 스웨덴 중앙은행이다. 17세기 중반에 설립되었다. 속사정이 좀 있는데, 당시 스웨덴 최대 은행이었던 Stockholms Banco가 파산한 뒷처리를 위해 설립된 것이었다.

Stockholms Banco는 매우 '선진적'인 은행이었다. 유럽 은행 최초로 bank note(지폐)를 발행했다. bank note 소유자들이 원하면 언제든지 금속화폐(금화, 은화)로 바꾸어 준다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가지고 있던 자산 이상으로 bank note를 남발한 탓에 결국 환매 요구를 견디지 못하고 파산했다. 당시로서는 사기극이었고, 요즘에도 사기극이다. 단, 제국이 하면 사기극이라고 안 부른다.

스웨덴 중앙은행은 설립 초기에는 매우 엄격하게 운영되었다(의회 감독하에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초반에는 이 역시 credit note라는 이름으로 지폐를 발행하기에 이르른다.

영국 중앙은행은 족보로 따지면 세계 8번째 중앙은행이다. 그런데 다른 중앙은행들과는 사정이 달랐다. 17세기 후반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영국은 군비를 확충하려고 했다. 특히 전함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당시 영국 왕실은 전함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래서 영국은 금융가들에게 '화폐 독점 발행권'을 주고 국채를 발행하여 이 자금을 마련했다. 이 전함들로 영국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세계의 패권국가가 되었다. 즉 영국 중앙은행은 처음부터 전비 충당을 위해 국가와 자본가가 결탁한 소산이었던 것이다.

미국 중앙은행은 스웨덴과 영국을 절반씩 따왔다. 독립전쟁 비용 마련을 위해 중앙은행을 설립했고, 독립 후 파산처리했다. 남북전쟁 때도 북부는 중앙은행을 설립했다가 역시 파산 처리했다.

지금의 미국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은 스웨덴 타입에 더 가깝다. 1907년 미국의 금융 자본가들 사이에 '도박판'이 벌어졌다. 은(silver)을 둘러싸고 공매도 세력과 은 독점 소유 세력 사이에 대규모 금융 투기가 발생한 것이다.

미국의 금융가들은 완전히 두 패로 나뉘어져 모든 재산을 건 베팅을 했다. 당시 영국 로스차일드 은행의 미국 대리인이었던 J.P. Morgan이 은 독점 세력의 편을 들었고, 공매도 세력은 파산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은행들의 연쇄 파산이 발생했으며(미국 은행의 1/3이 파산했다), J.P. Morgan은 파산한 은행들을 하나씩 줏어 먹었다. 1909년에는 그는 미국 전체 은행의 40%를 사실상 장악하기에 이른다.

은행 연쇄 파산의 결과로 미국 산업, 특히 농업은 극심한 불황에 빠진다. 디플레이션이 너무 심해서 기업과 농민들은 부채를 갚을 수가 없었다. 금융의 투기판이 실물 경제를 파탄낸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부자들의 공황이라고 불리는 1907년의 공황(panic of 1907)이다.

연준은 이같은 상황 속에서 탄생했다. 금융가들의 도박이 전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고 전체 은행 시스템이 한 사람의 손에 독점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였던 것이다. 연준 법안 논의를 위한 의회 청문회에서 J.P. Morgan은 왜 어떤 은행들에게는 자금을 지원하고 다른 은행들은 지원하지 않았느냐는 의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내 맘이다".

연준은 도박판을 없애는 장치는 아니다. 다만 그 도박으로 인해 판이 박살이 났을 때, 모두에게 즉 모든 은행에게 공평하게 자금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는 기구로 출발했다. Lender of last resort(최종 대출자)라는 명칭은 여기서 생겨난 것인에, 그 뜻은 경제를 살리는 최종 화폐 발행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은행들에게 구제 금융을 해주는 최종 보루라는 뜻이다.

그러나 동시에 연준은 영국 중앙은행의 선례도 뒤따랐다. 미국이 1차대전에 참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연준이 미국 정부의 국채를 사주었기 때문이었다.

1차대전 이후 유럽의 산업 시설이 파괴되고 영국은 금 태환제를 폐기하면서 경제는 곤두박질치고 화폐의 신뢰성은 크게 약화되었다. 당시 미국은 세계 최대의 무역 흑자국이었고, 달러화는 금과 태환(6:1) 화폐였기 때문에 유럽의 금은 엄청난 규모로 미국으로 흘러들어왔다. 1920년대는 동시에 미국의 보호무역주의가 극성을 부리던 시기였다.

미국으로 수출은 막힌 반면에 미국으로부터 수입은 계속 커져갔고, 이렇게 미국으로 흘러들어간 화폐(금)은 미국 금융 시장에 엄청난 버블을 야기했다. 이 버블은 1929년에 결국 터졌다. 버블이 터지고 디플레이션이 발생하자 미국은 달러화를 희석시킬, 즉 인플레를 야기하기 위해 화폐 가치를 낮출 방안은 모색했다.

1933년 2월 루즈벨트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한 첫번째 행동은 금/달러 교환 비율을 기존의 6:1에서 34:1로 낮추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달러화를 들고 있던 역외 투자자들은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런던에서 발행되던 Finacial Times는 이를 두고 "역사상 가장 사악한 디폴트'(the wickest default)라고 미국을 비난했다.

이것이 미국의 세 번째 파산이었다. 물론 테크니컬리는 파산이 아니다. 그러나 돈을 떼어먹었다는 점에서는 분명한 파산이었다.

네 번째 파산은 1971년 닉슨 금태환제 폐지였다. 미국은 60년대 이후에는 막대한 달러 유출을 겪었다. 공식 무역 통계상으로는 70년대 초반까지 수출 초과의 흑자였지만, 실제로는 해외주둔 미군 비용 및 차관, 이전 소득 등오로 말미암아 적자 상태였다.

유럽은 전후 경제를 복구하면서 달러를 긁어모았고 미국이 월남전을 핑계로 계속 재정적자를 기록하면서 국채를 발행하자 보유하고 있던 달러를 금으로 바꾸어 달라고 요구했다. 금태환제 폐기 직전의 마지막 한 해 동안만 해도 미국 보유 금의 30%가 넘는 환매 요구가 들어왔다.

세계 최대의 금 보유국인 미국은 금과 달러를 분리시킴으로서 이를 해결했다. 이것이 70년대 인플레이션, 또는 스태그플레이션의 진정한 원인이었다.

돈 떼 먹는 국가를 누가 신용하는가? 이를 우아하게 중앙은행 용어로 말하면, '신뢰'(credibility)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것이 2차대전 전후 글로벌 금융 체제, 브레튼우즈 체제의 마지막이 되었다.

실은 브레튼우즈 체제는 그 보다 훨씬 이전인 1960년에 사실상 형해화되었다. 50년대 후반부터 미국은 이미 보유하고 있던 금보다 훨씬 많은 달러화를 발행하기 시작했으며, 유럽 국가들이 이에 불만을 터뜨리자 1960년 런던 금 시장(London Gold Pool)을 개설하여 이 불만을 달래기에 이른다.

브레튼우즈는 민간의 금 매매를 금지하는 것을 핵심 원칙으로 했는데, 상업은행들 사이의 금 매매 허용은 이미 더 이상 브레튼우즈 체제가 지속하는 것이 불가능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70년대의 혼란기는 global currency였던 달러화 체제가 붕괴하면서 빚어진 결과였다. 원유가 상승이나, 미국 노동시장 진입 인구의 증가(베이비붐 세대의 진입) 따위는 보조적인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70년대 말에는 아무도 미 국채를 사주려 하지 않아 당시 대통령이었던 카터가 직접 국채 세일즈에 나서기도 했다. 이를 '카터 본드'라고 불렀다.

이를 '정리'한 것이 레이건 정권이었다. 그는 전세계 자본가들에게서 합의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대신에 보조 날개로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가 선정되었으며(나중에 유로화로 발전), 미국은 제조업 기반을 포기하는 대신에 금융 제국주의로 전화하기로 했다. 이것이 globalization의 시작이었다.

globalization 체제는 1990년 대 말 완성되었는데, 그 정점은 정말 짧았다. 고작 10년도 가지 못했다. 자본의 가치 증식 욕구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는 사례였다. 2008년 금융 위기가 발생하고, 연준이 미 국채를 매입하는 동시에 세계에 달러를 공급하는 것으로 '돌려 막았다'.

그런 점에서 2008년 위기는 흔히 1920년 대공황에 비교하는 것과는 달리, 실은 1907년 패닉에 더 가깝다.

중앙은행이 국채를 매입하는 양적완화(QE)는 사실은, default의 다른 형태일 뿐이다. 더 정확하게는 국채의 노골적인 default를 저지하기 위해, 중앙은행을 동원하는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다(이 눈속임의 대표적인 사례가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의 QE는 debt monetization이 아니다라는 발언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모든 QE는 매우 비극적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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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베 신조 전 총리 사망 이후 일본 정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아베 전 총리가 2020년 도쿄 총리관저를 떠나고 있다. <연합뉴스>

근대 들어서 최초의 QE는 1930년대 일본에서 비롯되었다. 1931년 당시 일본 재무장관이었던 다카하시 코레키요는 대공황이 닥치자 일본 중앙은행을 동원해 국채를 매입토록 하면서, 정부는 대대적인 재정 지출 확대에 나섰다. 그리고 후대에 아주 성공적이라고 평가받았다.

어디에 썼길래 성공적? 일본 정부는 이 자금으로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 만주국을 세우고 식민지를 확장했다. 일본은 영국의 전례(중앙은행의 전비 조달)을 따랐던 것이다.

그리고 역사에는 트위스트가 있다. 코레키요는 1935년 갑자기 QE를 중단하고 긴축에 나선다. 그가 왜 이같은 정책 변화를 시도했는지는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그러나 필자의 추측으로는 국제적 압력 때문이었을 것으로 본다. 코레키요는 '국제 전문가'였다. 그가 출세 가도를 걷게된 것도 러일 전쟁 당시 미국 은행가와 영국의 로스차일드로부터 대출을 받아와 전비를 조달했기 때문이었다. 이 일로 평민 출신은 코레키요는 작위를 받고 정계에 입문한다. 1920년대에는 수상까지 지냈다.

코레키요가 QE를 중단하고 긴축에 나서자 중국 대륙 진출 야망에 불타던 군부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 1936년, 천황제 강화를 외치며 일단의 우익 청년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와중에 당시 재무장관이던 코레키요는 청년 장교들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일본 정치에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남겼다. 쿠데타는 실패했지만, 군부 앞에서는 그 누구도 무사할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1937년 대본영은 중국 상하이를 전면 공격하면서 중일 전쟁을 일으킨다. 태평양 전쟁은 그 연장선 위에 있었다.

미국의 연준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경험을 했다. 1936년 연준은 긴축에 들어갔다. 금리를 인상한 것이다. 그러나 고작 한 해만에 경기는 다시 침체 직전까지 추락했고 연준은 다시 완화적 정책으로 돌아섰다.

일본과 같은 '정변'은 나지 않았지만(일부 자본가들이 군부와 결탁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시도는 있었다. 포섭 대상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밀고한 탓에 이 시도는 무산되었다), 역시 전쟁으로의 길은 피해가지 못했다.

8일 피습을 받아 숨진 전 일본 총리 아베 신조도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아베는 기묘한 인물이다. 언뜻 보기에는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노선을 취한 것 같이 보이지만, 실은 그는 일본적 관점에서는 '민족주의적' 정치인이었다.

미 군정 하에서 탄생한 평화헌법을 개정한다는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미국의 의사에 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일본이 '주권'을 되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베는 일본이 미국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국내적으로는 충분히 개헌을 밀고나갈 세력을 확보했으면서도 매우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일본은 70년대까지만 해도 진보적 언론에서는 자신들을 미국의 식민지라고 부르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을 정도였다. 한국에서는 그런 표현을 쓰면 국가보안법으로 잡혀가 치도곤을 당하던 시절이었다.

흔히 아베 시절 일본의 '혐한'에 눈이 가려져 한국에서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지만, 아베의 대외노선은 표면적으로는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동아시아에서의 세력 균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신들의 주권적 지위를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일본의 국내적 국수주의는 일본의 역사나 미국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아마도 불가피한 왜곡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아베는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자초했다고 비판하기까지 했다. 중국은 아베 사망 이후 공과가 뒤섞인 평가를 내놓았지만, 러시아는 깊은 애도를 표시했는데, 이는 바로 아베의 이같은 스탠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베의 죽음으로 일본 정치는, 말하자면, 안전핀이 빠진 것이나 다름없다.

일본 정치 전체가 1930년대와 같은 길을 가게될 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의 서구 어느 국가도, 내부의 불만을 잠재울 도리는 없다. 그들이 QE를 다시 하든 안 하든, 이미 상관없다. 너무 늦었다. 그러길래, 길이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가지 말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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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브렉시트 이후를 제대로 대비했는가? 존슨 총리가 보수당 대표 사임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서양의 또 다른 섬나라인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는 약간 다른 범주에 속한다. 세계 지도자라는 사람들 모두가, 하나도 예외없이, 어딘가 덜 떨어진 사람들, 사악하기 그지 없으면서도 스스로는 인류를 위해 헌신한다는 자기확신에 사로잡힌 위험한 정신질환자이기는 하지만, 존슨은 그 정도가 매우 심하다.

만일 중2병 환자의 글로벌 사례를 꼽는다면 절대로 존슨을 빼놓을 수가 없다. 문제는 어떻게 이런 사람이 영국 총리가 될 수 있었느냐 하는 점이다.

그는 저열하고 상습적인 거짓말쟁이이며(거의 병적이다), 업무 수행 능력은 형편없다. 머리나 잘 빗고 다녔으면 좋겠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존슨에게는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그는 선거는 잘 치렀다. 영국 엘리트들에게는 가장 공포스러운 적인 제레미 코르빈 전 노동당 당수를 상대하기에는 가장 좋은 얼굴 마담이었다. 왜 존슨은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었을까?

지난 2011년 영국 런던 폭동 당시 영국은 충격에 빠졌다. 폭동이야, 언제 어디서든 날 수 있다. 문제는 런던 폭동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저소득 빈민층이나 이민자가 아니라, 멀쩡해 보이는 중산층들이 중심이었다는 점이다.

이 폭동에 딱히 무슨 정치적 구호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데올로기적으로 대립선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어느날 갑자기 길거리에 나와서 약탈을 했다. 그게 런던 폭동이었다(2013년 영국 '가디언'에서 학자들과 함께 폭동의 성격과 주요 참여자들에 대한 포괄적인 조사를 한 리포트를 발표했다. 필자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즉, 사회적 규범이, 다시 말해 사회 자체가 붕괴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영국의 대중들을 보고 있노라면, 로마 제국 시절의 '무산자들'(프롤레타리아의 어원이 여기다)을 환기시킨다. 빵과 서커스, 끊임없는 혼란과 몰려다니기, 그리고 이 무질서한 사회 속에서 그들을 선동하는 데는 불타오르는 제국의 수도를 보며 시를 지은 곱슬머리 황제가 적격이다.

존슨은 문화적으로 가장 낮은 의미에서 '포풀리스트'였다. 그의 정치적 자질은 영국 대중들의 '교양'을 가장 솔직하게 반영한다. 영국의 대중들은 존슨이 자신들과 같은 인물이었기에 지지한 것이다. 이제는 대가를 치를 때 왔다. 존슨이 실각한 이유는 파티게이트 거짓말 때문이 아니다. 진짜 이유는 최종적으로 존슨을 수렁으로 몰아넣은 리시 수낙 전 재무장관의 사임의 변에 은근슬쩍 담겨 있다.

"영국은 엄청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우리(존슨과 수낙)는 둘 다 낮은 세금, 고성장 경제, 그리고 세계적 수준의 공공 서비스를 원한다. 그러나 이는 오직 우리가 힘들게 노력하고 희생을 감수하며 어려운 결정들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희생을 감수', '어려운 결정들', 이것이 바로 수낙이 존슨을 저격한 이유이다. 존슨은 대중들에게 영합하는 정치인이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희생을 감수'하도록 강요하는 정책들을 시도할 수 없었다. 브렉시트 이후 영국 사회는 수많은 난제들이 산적해 있지만, 존슨은 사실상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시간만 끌고 있었다.

만일 그가 진정으로 브렉시트 이후를 제대로 대비하려 했다면, 그는 대중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수밖에 없다. 아마도 그 결과로 그는 대중들에게서 외면받을 것이며, 이건 존슨의 정치 사전에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보수당은 급기야는 인기 없는 정책은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는 수상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총대를 매야할 사람이 우크라이나로 유람이나 다니고 있으니, 까딱하면 자신들이 다 뒤집어 쓸 판이다. 반란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다. 누가 차기 총리가 되든, 영국 대중들의 삶은 고단해질 것이다. 뿌린대로 거두는 법이다.

1984년, 바바라 투크만이라는 미국의 역사학자가 '바보들의 행진'(The March of Folly)이라는 책을 냈다. 트로이전쟁에서 베트남전쟁에 이르기까지 왜 제국들이 오히려 자신들에게 손해가 되는 멍청한 결정을 했을까를 분석한 역사서였다.

역사 속의 터무니 없는 결정들이 단순히 어리석음의 탓은 아니다. 다만, 그들의 자신의 이해관계에 충실하게, 그리고 자신들만의 세계관 속에서 '최적의' 판단들을 했을 뿐이다. 이를 게오르그 루카치는 '부분적 합리성, 총체적 비합리성'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역사는 그렇게 흘러간다.

그 책이 나오기 10년 쯤 전에 한국에서 같은 제목의 영화가 나왔다. 중학교 까까머리 시절에 영화관에서 그 영화를 보았다. 아마도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판 바보들의 행진은 하도 바보 같은 체제 하에서 차라리 바보로 살기를 택하는 청년들의 이야기이다.

불가피하게 선택한 것이든, 혹은 그것이 자신들에게 최선이라고 생각한 어리석음이든, 어느 쪽이든 우리는 바보에서 못 벗어났다. 머리를 박박 밀어야 하는 학교가 너무나도 싫었던 필자는 장발 단속을 피해 달아나던 장면에서 울려나온 송창식의 삽입곡 '왜 불러'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귀 속에서 맴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지나간 역사는 죽은 역사다. 그리고 우리는 끊임없이 그 역사를 불러내고 있으며, 역사는 아마도 심드렁하게 '왜 불러'하고 대꾸하고 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유령이며, 이 유령은 세계를 휩쓸고 있다. 살아있는 사람이 보고 싶다. 이공순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