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Who Is ?]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은 1910년 2월12일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호암(湖巖)이다. 부유한 지주 이찬우의 둘째로 태어났다.

지수보통학교 3학년으로 입학했고 같은 해 9월 서울 수송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학했다.

중동중학교에 입학했으나 2년 뒤 중퇴했다.

1926년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후손인 박기동의 사녀 박두을과 고향에서 결혼했다.

일본의 와세다대학교 전문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다가 건강악화와 유학생활에 대한 회의가 겹쳐 대학을 자퇴하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진주의 지수보통학교, 서울의 수송보통학교, 중동중학교, 와세다대학까지 연속 네 번이나 중퇴했다.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설립해 사업을 시작했는데, 토지사업으로 200만 평의 대지주가 됐다.

자본금 3만 원으로 삼성그룹의 모체인 삼성상회를 세웠다. 삼성상회는 만주와 북경에 국내산 과일과 건어물을 수출하는 회사였다. 삼성의 삼(三)자는 "크고 강하다"는 뜻으로 사용했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여서 택했다고 알려졌다.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했는데, 창립 2년 만에 삼성물산의 수입업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삼성물산은 설립 1년 만에 수입업자 가운데 7위로 올라섰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모든 것을 잃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세워 다시 무역업을 하게 됐다. 단순히 삼성물산에서 그치지 않고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해 제조업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제일제당은 삼성그룹 최초의 제조업이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설탕 생산 공장을 지니게 됐다.

그 뒤 동방생명, 신세계백화점, 안국화재보험, 전주제지, 성균관대학교 등을 인수해 경영했다.

중앙개발, 고려병원, 한국비료, 삼성전자, 제일합섬, 삼성중공업을 세웠다. 동양방송, 중앙일보 등을 세워 TV, 라디오 방송업계까지 진출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인 한국경제인협회를 창설하여 1961년부터 1987년까지 오랫 동안 초대 회장을 맡았다.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설립해 삼성그룹 육성의 기반을 만들었다. 삼성석유화학, 삼성중공업을 세워 중화학공업에도 진출했고 그 뒤로 용인자연농원, 삼성 정밀 등을 세웠다.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합병해 삼성전자로 단일화하고 상호를 삼성전자로 바꿨다. 그 뒤 삼성반도체 통신을 세웠다.

이 외에도 삼성문화재단, 삼성사회복지재단 등도 설립하여 이사장에 취임했다. 또 백화점과 호텔경영에도 참가하는 등 많은 회사를 설립해 인수하거나 합병하여 재벌기업을 형성했다.

금탑산업 훈장을 비롯해 세계 최고경영인 상들까지 모두 받아 한국경제계를 대표하는 기업가로 자리잡았다.

고미술품에도 관심이 있어 수많은 미술품을 소장해 오다가 호암미술관을 건립했다. 국악과 서예에도 관심을 가졌다. 보스턴대학교에서 명예 경영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7년 11월 77세에 폐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병철의 묘소는 현재 용인에버랜드에 위치하고 있다.

장남인 이맹희에게 그룹의 경영을 맡겼다가 의견충돌을 겪었다. 결국 삼남인 이건희에게 그룹을 넘겨줬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호암 이병철은 말수가 적고 감정표현이 많지 않은 절제된 성격의 소유자다. 즉 차가운 말을 구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간결하고 함축적인 촌철살인을 날린다.

어렸을 때 호기심이 많았다.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큰 그림을 그리고 세부사항을 치밀하게 점검하는 등 숲과 나무를 동시에 봤다.

특히 신사업에 진출할 때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사업을 벌일 때 점검하는 포인트들은 ‘90 항목 사업성 검토서’를 매뉴얼로 정착시켰다.

신규사업을 검토할 때 삼성의 경영이념과 합치하는지, 기업의 목적과 부합하는지, 기존의 제품보다 품질향상 성과가 있는지, 제품이 생산된 뒤 가격인하 효과가 있을 수 있는지 등을 점검하도록 했다. 또 자금조달문제, 기존사업들과 시너지 문제 등을 집중으로 점검해 객관화하도록 했다.

이런 문제에 대한 조사분석이 끝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최종 점검토록 매뉴얼화했다.

치밀한 재정관리와 인사관리로 오늘날 삼성그룹의 조직력을 다졌다.

미래지향적 사업확장으로도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전자사업에 진출하기 위해 이 분야에 진출해있던 럭키금성그룹과 불화를 일으킬 만큼 기업의 발전을 위해 비정한 측면도 보였다.

사업의 다각화를 통해 국가경제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평생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 등의 경영이념을 추구했다. 사후에도 경영학자들이 그의 호암정신을 연구하고 있을 정도다.

반면 노조불안정, 일등주의 등에 집착하고 경영하는데 1인 카리스마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일을 시작하기 전 수많은 조건을 고려하고 계산했지만 결정하고 나면 단박에 밀어붙였다.

반도체사업에 진출하기로 하면서 스스로 어려운 반도체분야에 대해 ‘죽기살기’ 식으로 공부하고 연구하려 했다.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게 아니라, 모르면서 그냥 넘어가는게 부끄러운 것이라 생각했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36년4월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설립해 사업을 시작했다. 1938년3월 자본금 3만 원으로 삼성그룹의 모체인 삼성상회를 세웠다.

삼성물산을 세우고 제일제당, 제일모직 등을 세워 제조업도 시작했다. 1969년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만들었다. 1970년대 삼성석유화학, 삼성중공업을 세워 중화학공업에도 진출했다.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통합해 1984년8월 상호를 삼성전자로 바꿨다. 1982년 삼성반도체 통신을 세웠다.

1955년~1963년 삼성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기업을 인수하면서 자산은 28배, 매출은 19배, 영업이익은 31배 증가했다.

1961년 5.16군사정변이 발발했을 때 부정축재자 제1호로 지명됐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만나 재벌의 재산몰수보다 재벌을 통한 국가경제 건설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부정축재한 돈으로 공장을 지어 회사의 주식을 정부에 내놓는 방안을 제안했다.

1982년 보스턴대학교의 요청으로 18년 만에 미국에 가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미국 기업을 방문하고 나서 반도체사업을 시작해야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했다.

1983년 일본 도쿄에서 반도체산업 진출을 선언했다. 이후 같은 해 삼성전자가 64K D램의 독자개발에 성공했다. 1992년 메모리 반도체시장 세계 1위에 올랐다. 후발주자의 추격조차 용인하지 않는 철옹성을 구축했다.

미국의 반도체 벤처 기업인 ‘마이크론’, 일본의 ‘샤프’와 기술을 제휴했다. 반도체 전문가인 진대제, 권오현, 황창규 등을 영입했다.

반도체사업에 뛰어든 지 1년 만에 64K D램 개발을 완료해 수출했다. 당시 금성(LG전자)의 격차를 반도체로 갈라놓았다.

◆ 학력

1922년3월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입학해 같은 해 9월 서울 수송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학했다.

1926년 4월 중동중학교에 입학했으나 2년 뒤 중퇴했다.

1930년 일본의 와세다대학교 전문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다가 중퇴했다.

1982년 미국 보스턴대학교에서 명예경영학박사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아버지 이찬우(李纘雨)와 어머니 권재림(權在林)의 2남2녀 중 막내다.

부인인 박두을씨와 사이에 3남5녀를 뒀다.

장남은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 차남은 이창회 새한미디어 회장, 삼남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다.

장녀는 이인희 한술그룹 고문, 차녀는 이숙희 씨, 삼녀는 이순희 씨, 사녀는 이덕희 씨, 오녀는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이다.

이맹희 회장의 장남인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지금의 CJ그룹을 구축했다. 막내딸인 이명희 회장은 신세계그룹을 경영하고 있다. 신세계그룹은 최근 이명희 회장의 외아들인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경영책임을 맡고 있다.

이병철은 삼성그룹의 경영권은 이건희 회장에게 물려줬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아버지를 대신해 삼성그룹을 이끌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장녀인 이부진은 호텔신라 사장을 차녀인 이서현은 삼성물산 패션부문 사장을 맡고 있다.

◆ 상훈

1979년 금탑산업훈장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우수한 경영자에게 수여되는 세계최고경영인상을 받았다.

198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다.

1995년 제2회 한국경영사학회 창업대상을 받았다.

◆ 상훈

1979년 금탑산업훈장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우수한 경영자에게 수여되는 세계최고경영인상을 받았다.

198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다.

1995년 제2회 한국경영사학회 창업대상을 받았다.

어록


“이제 보통학교에서 배울 건 그리 많지 않다. 단기간에 끝낼 수 있게 속성과가 있는 중등학교로 옮기고 싶다.” (1923년 보통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긍지 없는 민족은 얼굴이 없는 것과 같다. 긍지를 버린 민족은 자기를 버린 것과 같다. 문화재는 바로 그 민족, 그 국민의 얼굴이며 마음이다.” (해방전후)

“지금 하는 사업이 인류에 도움이 되는지 확인하고 인재를 중시하며 다른 회사와 공존공영 관계를 중시해야 한다는 점을 3대 경영철학으로 삼으라. 굉장히 훌륭한 기술을 가진 젊은이. 앞으로 IBM과 대적할 만한 인물이다.” (1983년 11월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와 집무실에서 만났을 때)

“삼성이 이번에 반도체에 대규모 투자를 한 것은 충분한 투자 여력이 있어서만은 아니다. 오로지 우리나라의 반도체산업을 성공시켜야만 첨단산업을 꽃피울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삼성의 모든 가용자원을 총동원해 이 사업의 추진을 결심했던 것이다.” (1983년 반도체사업 진출을 선언하면서)

“제가 이룩한 기업체 중 어디에도 제 꿈과 피가 어리지 않은 곳이 없다. 그야말로 피땀을 흘리고 뼈를 깎는 노력으로 이룬 결실이다. 하지만 개인생활을 영위하는 범위를 훨씬 초과하는 재산을 제가 개인적으로 소유하여 사장하거나 방치하는 것보다 사회를 위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이제 영원히 저의 손을 떠나 돌아오지 않을 이 재산이 새로운 공익재단이 사업활동을 하는 데에 기여하기를 바란다.” (1965, 삼성문화재단을 설립하면서)

"세계를 돌아보면 전통있는 민족, 격조 높은 국민은 예외 없이 좋은 미술관을 가지고 있다. 선을 사랑하고 미를 아낄 줄 아는 사람들의 문화수준은 그만큼 높다.” (1965)

“기업은 사람이다. 기업은 문자 그대로 업을 기획하는 것인데 세상의 많은 이들은 사람이 기업을 경영한다는 이 소박한 원리를 잊고 있는 것 같다.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이 널리 퍼져 있지만 돈을 버는 것은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사람인 것이다. 나는 일생의 80퍼센트를 인재를 모으고 육성하는 데 보냈다. 삼성의 발전도 그런 인재를 많이 기용한 결과인 것이다.” (1980년 7월 3일 전국경제인연합회 이병철 강연에서)

◆ 평가

호암 이병철은 말수가 적고 감정표현이 많지 않은 절제된 성격의 소유자다. 즉 차가운 말을 구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간결하고 함축적인 촌철살인을 날린다.

어렸을 때 호기심이 많았다.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큰 그림을 그리고 세부사항을 치밀하게 점검하는 등 숲과 나무를 동시에 봤다.

특히 신사업에 진출할 때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사업을 벌일 때 점검하는 포인트들은 ‘90 항목 사업성 검토서’를 매뉴얼로 정착시켰다.

신규사업을 검토할 때 삼성의 경영이념과 합치하는지, 기업의 목적과 부합하는지, 기존의 제품보다 품질향상 성과가 있는지, 제품이 생산된 뒤 가격인하 효과가 있을 수 있는지 등을 점검하도록 했다. 또 자금조달문제, 기존사업들과 시너지 문제 등을 집중으로 점검해 객관화하도록 했다.

이런 문제에 대한 조사분석이 끝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최종 점검토록 매뉴얼화했다.

치밀한 재정관리와 인사관리로 오늘날 삼성그룹의 조직력을 다졌다.

미래지향적 사업확장으로도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전자사업에 진출하기 위해 이 분야에 진출해있던 럭키금성그룹과 불화를 일으킬 만큼 기업의 발전을 위해 비정한 측면도 보였다.

사업의 다각화를 통해 국가경제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평생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 등의 경영이념을 추구했다. 사후에도 경영학자들이 그의 호암정신을 연구하고 있을 정도다.

반면 노조불안정, 일등주의 등에 집착하고 경영하는데 1인 카리스마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일을 시작하기 전 수많은 조건을 고려하고 계산했지만 결정하고 나면 단박에 밀어붙였다.

반도체사업에 진출하기로 하면서 스스로 어려운 반도체분야에 대해 ‘죽기살기’ 식으로 공부하고 연구하려 했다.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게 아니라, 모르면서 그냥 넘어가는게 부끄러운 것이라 생각했다.

◆ 기타

별명이 '돈병철'이었다.

어린 시절 공부보다 장난치며 노는 것을 더 즐겨했다. 싸움을 잘하지는 않았지만 지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무엇보다 입담이 좋아 꼬치꼬치 이치를 따지고 들어 상대를 질리게 만들었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으면 집에까지 쳐들어가 결말을 짓곤 했다.

어릴 적 자신이 골목대장이긴 했지만 ‘무기는 힘이 아니라 입’이었다고 떠올렸다.

경영자들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골프 치는 것을 좋아했다. 필드 위에서 수많은 경영자, 정치가, 학자, 문화계 인사와 만났다. 생을 마감하기 한 달 전 몸이 여의치 않은 상태에서 골프장에서 골프를 쳤다.

저서로 <우리가 잘 사는 길>과 자서전 <호암자전>이 있다. 자신의 자서전인 ‘호암자전’에서 “여러 장사를 하다 망해 봤으며 노름에 빠져 달 그림자를 밟으며 집으로 돌아온 날이 많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삼성그룹의 무노조 원칙을 유훈으로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