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Who Is ?]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정동영은 민주평화당 대표다.

2020년 총선에서 진보야권 통합을 통한 제3지대 구축에 공을 들이고 있다.

문화방송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 정치에 입문했다. 대통령선거 후보로 대통령에 도전했지만 실패한 뒤 정계를 은퇴했다가 돌아와 민주평화당 대표를 맡았다.

1953년 7월27일 전북 순창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한 뒤 문화방송에 입사해 정치부 기자로 활동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해 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 의원을 지냈고, 참여정부 시절 통일부 장관을 역임했다. 대통합민주신당 대통령 후보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낙선한 뒤 고향에서 물러나 있다가 국민의당 소속 의원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국민의당에서 탈당한 뒤 민주평화당으로 소속을 옮겼다.

현장형 정치인으로 집값 안정을 주창하며 민생 밀착행보에 주력하고 있다. 그러나 잦은 당적 변경에 따른 부정적 이미지가 자리잡고 있다.

경영활동의 공과
[Who Is ?]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가 2019년 12월12일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열린 '선거법 개정안 본회의 상정 및 후퇴 중단 촉구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평화당 총선 1호 공약으로 '20평 아파트 100만 호 1억 원에 공급' 내걸어
민주평화당은 2020년 1월20일 제21대 총선 1호 공약으로 '20평 아파트 100만 호를 1억 원에 공급'방안을 내놨다.

민주평화당의 총선 1호 공약은 공공부문이 토지를 보유한 채 건물만 분양하는 방식으로 주택 공급을 추진해 집값을 안정시키면서 무주택 서민, 청년, 신호부부 등의 주거불안과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 목표를 갖고 있다.

소비자 분양대금으로 건축비를 마련한 뒤 다른 사업비는 국민연금과 공무원연금 등 공적 기금을 활용해 재원을 마련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정동영은 최고위원회의에서 공약을 공개하며 "기존의 분양 위주 또는 민간건설사 위주의 공공주택 개발 방식을 탈피해 저렴한 공공주택 공급, 공공의 자산 증가를 기초로 하는 주택 공급방식의 대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4+1협의체 통해 선거법 개정안 통과
정동영은 민주평화당 대표로서 2019년 12월에 더불어민주당과 바른미래당, 정의당, 대안신당 등과 ‘4+1협의체’를 통해 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는데 적극적 역할을 했다.

정동영은 2019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민주평화당의 역사적 소명은 선거제 개혁에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선거법 개정안의 본회의 통과는 자유한국당의 반대에 순탄치 않았다.

자유한국당은 선거법 개정안, 검찰개혁법안 등 패스트트랙 법안의 처리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벌였다.

패스트트랙 법안의 본회의 처리가 지연되면서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선거법 개정안보다 검찰개혁법안을 먼저 처리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정동영은 이 원내대표의 제안에 “지난 4월 패스트트랙 법안을 상정할 때 분명한 합의문이 있다”며 “선거법 개정안을 먼저 처리하자는 것으로 이를 뒤집을 수는 없다”고 반발했다.

4+1협의체가 선거법 개정안의 구체적 내용을 놓고 합의를 보는 과정도 평탄하지는 않았다.

석패율제 도입과 구체적 연동률, 연동률 캡 등을 놓고 협의체 내 정당들 사이에 의견이 갈렸다.

결국 연동률 50%, 연동률 캡 30석으로 4+1합의체 내 정당들이 합의를 봤고 선거법 개정안은 2019년 12월27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민주평화당 비당권파 의원 10명 집단 탈당
‘변화와 희망의 대안정치연대’ 소속 민주평화당 의원 10명이 2019년 8월12일 집단으로 탈당했다.

당시 탈당한 의원은 원내대표였던 유성엽 의원을 비롯해 천정배, 박지원, 장병완, 김종회, 윤영일, 이용주, 장정숙, 정인화, 최경환 의원 등이다.

정동영은 의원들의 집단탈당을 놓고 “10명의 의원이 탈당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며 참으로 유감”이라면서도 “민주평화당은 구태정치로부터 해방을 선언한다”고 말했다.

비당권파 의원들은 2020년 총선에서 바른미래당의 노선과 공천권 문제 등으로 갈등이 깊어졌다.

비당권파 의원들은 당 운영방식을 놓고도 정동영을 비판했다. 정동영이 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주현 최고위원을 임명하는 등 당을 일방적으로 운영한다며 2019년 6월17일부터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민주평화당 대표
정동영은 2018년 8월5일 민주평화당 전당대회에서 최경환, 유성엽, 민영삼, 이윤석, 허영 등과 경쟁해 68.57%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민주평화당 대표로 선출됐다.

이로써 정동영은 10여 년 만에 중앙정치 무대에 복귀했다. 2020년 21대 총선까지 민주평화당을 이끈다.

정동영은 당대표 공약으로 내세운 ‘현장으로 달려가는 민주평화당’이라는 구호처럼 대표 선출 다음 날인 8월6일 부산 한진중공업 현장 최고위원회로 첫 공식 일정을 시작했다. 부산 한진중공업 현장은 '희망버스'로 상징되는 한진중공업과 쌍용차 해직자 분향소가 마련돼 있는 곳이다.

부산 한진중공업 현장을 방문한 뒤 김해 봉하마을로 이동해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에 참배하고 덕수궁 대한문 앞 쌍용자동차 시민분향소에 조문을 했다.

정동영은 2018년 9월 3차 남북 정상회담에 정당 대표로 참가해 북한을 방문했다.

정동영은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서울에 오시면 환영받을 것”이라는 환담을 건넸다. 김 위원장은 “아직 서울에서 환영받을 만큼 일을 하진 못했다”고 대답했다.

△국민의당 탈당과 민주평화당 입당
정동영은 2018년 2월 국민의당을 탈당하고 국민의당 개혁파가 추진한 민주평화당에 합류했다.

정동영은 2016년 정계에 복귀하면서 국민의당을 선택했으나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바른정당과 합당하려 하자 국민의당을 탈당했다.

안 대표가 대표 자리를 걸고 합당을 결정하는 당원 투표를 제안하자 정동영은 “안철수의 불통정치”라며 “박정희식 골목독재”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결국 정동영은 박지원 의원 등 합당 반대 세력과 함께 평화개혁연대를 출범했다. 평화개혁연대는 2018년 2월6일 민주평화당으로 창당했다.

정동영은 6·13 지방선거에서 민주평화당 전북도지사 후보로 차출될 가능성이 제기됐으나 직접 출마하는 대신 민주평화당 후보들의 유세를 지원했다.

민주평화당은 기초자치단체장 5석과 광역자치단체 의원 3석, 기초자치단체 의원 49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국민의당으로 정계복귀
정동영은 2016년 2월18일 국민의당에 합류하면서 정계에 복귀했다.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정동영은 서울 관악을 무소속 후보로 출마했지만 3위로 낙선하면서 고향인 순창군에서 자숙기를 보냈다.

정동영은 2016년 4월 치러진 20대 총선에서 전주병 지역구 국민의당 후보로 출마했다.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47.7%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4선에 성공했다.

정동영은 국민의당 소속이 된 뒤 2017년 7월 정부의 사드배치를 비판했다. 정동영은 4년8개월 만에 국회 본회의장 단상에 올라 안보 목적으로 사드배치를 했지만 오히려 안보와 국익 두 마리 토끼를 놓친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동영은 2017년 8월 국민의당 전당대회에서 당대표에 도전장을 냈으나 안철수 후보에 700표가량 차이로 2위로 밀려 낙선했다. 다만 호남권, 특히 전북지역의 절대적 지지를 확인하면서 정치적 입지를 확인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취임 후 바른정당과 합당을 추진하자 정동영은 언론 등을 통해 안철수 대표를 비판했다. 10월 바른정당과의 합당이 사실상 무산되자 정동영은 안 대표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선 출마
정동영은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후보로 출마했으나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정동영은 2007년 7월3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중산층과 통하는 대통령', '중소기업과 통하는 대통령', '중용의 정치로 통합력을 발휘하는 대통령’이라는 3중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는 “적극적인 중산층 창출 정책으로 5년 내에 중산층이 70%인 나라를 만들 것”이라며 “과거의 제왕적 대통령 시대와 비교되는 '중통령' 시대를 열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10월15일 대통합민주신당 경선에서 이해찬 손학규 후보들을 꺾고 대선 후보로 확정됐다. 후보 수락연설에서 “돈있고 땅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약육강식 경제, 이명박식 경제를 단호히 거부한다”고 이명박 후보와 대립각을 세웠다.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은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참패하는 등 여론이 좋지 않았다. 결국 대통합민주신당으로 열린우리당이 흡수됐다. 대통합민주신당은 당시 민주당 탈당파와 한나라당 탈당파가 함께 있는 상황이었다.

정동영은 대선 투표결과 이명박 후보와 530만 표 차이를 나타내며 2위에 머물렀다. 이는 2017년 치러진 19대 대선 전까지 대선에서 1위와 2위의 최다 격차로 남았다. 여당의 지지율 약세와 호남 출신 후보의 약점을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열린우리당 시절
정동영은 참여정부 시절 열린우리당 의장을 두 차례 역임했다. 통일부 장관도 맡았다.

열린우리당은 2003년 새천년민주당의 쇄신을 주장하면서 분당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열린우리당으로 당을 옮겨 여당이 됐다.
정동영은 열린우리당에서 초대 의장을 맡았다.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역풍으로 지지율이 상승세를 이어가며 2004년 17대 총선에서 152석을 차지했다. 과반 의석은 확보했으나 개헌선까지는 미치지 못해 절반의 성공으로 평가받았다.

정동영은 2004년 7월 통일부 장관에 취임했다. 참여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도 같이 맡아 했기 때문에 부총리급 위상이었다.

정동영은 1994년 기자로서 통일부를 출입했는 데 10년 뒤 장관이 됐다. 취임 직후 468명에 이르는 대규모 탈북자가 동남아시아의 한 국가에서 입국하면서 북한이 '최대 적대행위'로 규정하는 사태를 겪기도 했으나 2004년 12월 개성공단을 첫 방문하는 등 개성공단 활성화에 기여했다.

정동영은 2005년 12월 지방선거를 위해 열린우리당으로 복귀했다. 이듬해 2월 다시 한번 열린우리당 의장을 맡았다.

그러나 참여정부의 부동산정책 실책 등으로 여당을 향한 여론이 좋지 않았고 결국 열린우리당은 광역자치단체장을 고작 1석만 차지하는 등 대패했다.

정동영은 지방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2006년 6월 열린우리당 의장에서 물러났다.

△정치 입문
정동영은 1996년 당시 김대중 총재의 권유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정치를 시작했다.

정동영은 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전주시 덕진구로 출마해 전국 최다 득표(9만7857표)를 해 국회에 입성했다.

그 뒤 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해 새천년민주당에서 천정배 신기남 의원과 더불어 새천년민주당의 개혁운동을 이끌었다. 2000년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까지 올랐다.

정동영은 이런 인지도를 바탕으로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노무현 후보에 밀려 대선 후보가 되지 못했다.

△문화방송(MBC) 시절
정동영은 문화방송에 입사해 기자에서 앵커가 됐다.

정동영은 기자 시절 5·18 민주화운동 현장의 특파원으로 취재했지만 취재내용은 보도되지 못했다. 정동영은 정치부 기자 생활을 하다 마감뉴스 0시 앵커를 맡기도 했다.

정동영은 주미 특파원으로 지내면서 웨일스대학교에서 언론학 석사를 받았다. 걸프전과 독일 통일 등 역사적 사건을 현장에서 취재하기도 했다.

귀국한 뒤 뉴스 앵커로 지내면서 1995년 6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순발력 있게 현장 중계하면서 인지도를 높였다.

비전과 과제/평가

◆ 비전과 과제
[Who Is ?]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가 2020년 1월23일 서울 용산역에서 최경환 대안신당 대표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정동영은 2020년 총선을 통해 거대 양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 외에 제3지대를 구축하고자 한다.

정동영이 원내 제3지대 구축에 성공하려면 진보야권의 통합이 필수다.

민주평화당의 지지율은 1%대에서 맴돌 정도로 낮다.

여론 조사기관인 리얼미터의 1월5주차 주간집계에 따르면 민주평화당의 지지율은 1.6%다.

제21대 총선에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돼 다당제에 유리하게 선거제도가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정당 득표율 최소 3%는 넘어야 의석 확보가 가능하다.

정동영은 2020년 1월30일 민주평화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선거제 개혁이 명령하고 있는 본격적 다당제시대의 개막을 위해 제3의 축이 필요하다”며 “민주평화당은 통합을 위해 분명한 원칙을 제시하면서 선거제 개혁 이후 새로운 정치판을 짜는데 능동적 자세로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정동영은 통합을 위한 원칙으로 ‘분열 반성’, ‘개혁야당의 정체성’, ‘연동형 선거제 완성과 분권형 대통령제 실현’ 등 세 가지 원칙을 들기도 했다.

민주평화당의 주요 통합 상대인 대안신당의 최경환 대표는 정동영의 제안을 놓고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말했다.

다만 통합의 다른 축인 바른미래당이 손학규 대표의 사퇴 거부 등 당내 갈등 심화로 내홍을 겪고 있다는 점은 진보야권 통합의 주요 변수다.

정동영은 지역구에서 승리로 의원직도 지켜야 한다.

정동영의 지역구는 전북 전주병이다.

더불어민주당에서는 김성주 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전주병 출마를 선언해 20대 총선에 이어 다시 한번 맞대결을 펼칠 가능성이 크다.

정동영은 20대 총선에서 6만1662표를 얻어 김 전 이사장을 989표 차이로 따돌렸다.

◆ 평가
[Who Is ?]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가 2020년 1월1일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린 신년인사회에 참석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동영은 현장형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정동영은 노동과 환경, 통일 문제와 관련된 모든 현장에 직접 찾아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단순히 얼굴만 비추고 언론 보도를 위한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현장에서 당사자들과 함께한다.

민주평화당 대표로 선출된 다음 날 첫 행보도 희망버스 현장이나 쌍용차 분양소를 찾는 것도 이런 현장정치를 하기 위함인 것으로 풀이된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추미애 법무부 장관 등 더불어민주당 내 주요인사들과도 인연이 깊다.

정동영은 이 대표와 서울대 문리대 72학번 동기다. 정동영은 이 대표의 권유로 정치를 시작했다.

추 장관과는 1996년 새정치국민회의를 통해 함께 정치에 입문했다. 정동영이 2007년 제17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을 때 추 장관은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정당을 자주 옮긴 탓에 철새라는 비판도 받는다. 새정치국민회의로 정치인 생활을 시작해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대통합민주신당, 통합민주당, 무소속, 민주통합당, 새정치민주연합, 무소속, 국민모임, 국민의당을 거쳐 2018년 현재 민주평화당 소속이다.

민주당이 이름이 자주 바뀐 것도 있지만 그 점을 고려해도 이동이 잦았던 것으로 평가된다.

정동영은 2015년 3월 철새라는 비판을 수용하면서도 정확한 방향으로 날아가는 새라며 정치적 노선으로는 일관적으로 향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개성공단의 출발에 기여한 점을 가장 큰 업적으로 꼽는다. 정동영은 2004년 7월부터 2005년 12월까지 통일부 장관을 지냈다.

개성공단은 2003년 6월에 착공식을 한 뒤 정동영이 통일부장관이던 2004년 10월부터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 사무소를 개소했다. 2004년 12월에는 시범단지 분양기업의 생산품이 처음으로 반출됐다. 2005년 9월에는 본단지 1차 24곳 입주기업이 선정됐다.

종교는 천주교로 다윗이라는 세례명을 갖고 있다.

혈액형은 A형이다. 주량은 맥주 1병, 담배는 피우지 않는다.

다른 의견은 존중하고 같은 의견을 함께 추구한다는 의미의 구동존이(求同存異)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사건사고


△이용주 민주평화당 의원 음주운전
이용주 민주평화당 의원의 음주운전사건이 터져 민주평화당에 부담을 안겼다.

이용주 의원은 2018년 10월31일 오후 10시55분 올림픽대로 동호대교에서 잠실 방향으로 가는 차량 가운데 음주가 의심되는 차량이 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적발됐다. 당시 이용주의 혈중 알코올 농도는 0.089%로 면허정지 수준이다.

논란이 커지자 정동영은 2018년 11월2일 “이 의원의 음주운전 문제로 국민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이용주를 당기윤리심판원에 회부에 징계 여부와 수위를 정하기로 했다.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서 지각 논란
정동영은 2018년 9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에 정당 대표로 동행했다. 하지만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이정미 정의당 대표와 함께 잡아둔 회담일정을 어겨 논란이 됐다.

9월18일 여야 3당 대표는 3시30분 만수대의사당에서 안동춘 북한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리금철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림룡철 조국통일위원회 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서기국 부국장과 면담하기로 했으나 면담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안동춘 부의장은 취재진에 “수고했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으며 북측 관계자들은 “이런 경우가 어디 있느냐.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3당 대표들은 일정에 착오가 있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윤영찬 청와대 홍보수석이 앞서 직접 면담일정을 브리핑한 데다 1시간 이상 늦은 데 비판이 제기됐다.

여야 3당 대표는 9월19일 같은 장소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안동춘 부의장, 리금철 부위원장과 면담을 했다. 김 상임위원장은 2005년 통일부 장관 시절 정동영과 만난 기억을 떠올렸다.

김 상임위원장은 “다른 동무들을 통해 들었는데 남녘에서 정동영 선생이 지금 무슨 활동을 벌이는지 모르겠다고 하니까 ‘백의종군한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그러더라”며 웃었다. 정동영이 “10년 전에 뵀을 때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하자 김 상임위원장은 “통일 위업을 성취할 때까지 영원히 이 모습대로 활기 있게 싸워나가자”며 “민족의 대의는 통일”이라고 말했다.

△노인 폄하 논란
정동영은 노인의 투표권을 무시하는 발언을 해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다.

정동영은 2004년 3월 17대 총선을 앞두고 국민일보의 대학생 총선기자단 팀과 인터뷰에서 "(이번 총선에서) 60대 이상 70대는 투표를 안 해도 괜찮다"며 "그분들은 집에서 쉬셔도 된다"고 말했다.

정동영은 20대와 30대 젊은 유권자들의 투표를 독려하기 위해 한 말이라고 해명했지만 대한노인회 등에서 정동영의 정계 은퇴를 요구하며 항의 집회를 열었다.

한선교 한나라당 대변인은 "정 의장 발언은 60~70대를 반대세력으로 선전하며 20~30대 결집을 유도한 의도적 발언으로 의심된다"고 공격했다.

박영선 열린우리당 대변인은 “60, 70대를 거론한 부분은 어린 학생기자들에게 미래의 주역임을 강조하다 나온 얘기”라며 “정치적 관심이 높은데도 정작 투표는 잘 안 하는 20, 30대에게 투표를 하도록 독려하려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발언의 파장이 커지자 정동영은 결국 비례대표 후보를 사퇴해 17대 국회 입성에 실패했다.

경력/학력/가족
◆ 경력
[Who Is ?]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가 2020년 1월1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하고 있다. <연합뉴스>

1974년 유신반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됐다.

1978년 문화방송에 입사했다.

1980년 문화방송 정치부 기자로 활동했다.

1983년 문화방송 뉴스데스크 보조앵커를 맡았다.

1986년 문화방송 0시뉴스 앵커로 활동했다.

1989년 문화방송 LA특파원으로 미국에서 근무했다.

1993년 문화방송 통일전망대 앵커로 활동했다.

1994년 문화방송 뉴스데스크 앵커를 맡았다.

1996년 새정치국민회의 당무위원을 맡아 정치를 시작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전주시 덕진구)으로 새정치국민회의와 새천년민주당에서 활동했다.

1996년 새정치국민회의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대변인으로 일했다.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제16대 국회의원(전주시 덕진구)으로 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에서 활동했다.

2000년 한국인터넷정보학회 초대회장을 맡았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과 2001년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을 역임했다.

2004년 열린우리당 의장으로 선출됐다.

2004년 통일부 장관 겸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에 올랐다.

2005년 열린우리당 상임고문으로 복귀했다.

2006년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 겸임교수를 맡았다.

2006년 열린우리당 의장에 올랐다.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제17대 대통령 후보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2009년 제18대 국회의원(전주시 덕진구)에 선출됐다.

2010년부터 2011년까지 민주당 상임고문과 최고위원을 맡았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선거 출마(서울 강남구을, 민주통합당)했으나 낙선했다.

2012년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통령후보 선거대책위원회 '미래캠프' 산하 남북경제연합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13년부터 2014년까지 민주당 상임고문을 지냈다.

2014년부터 2015년까지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을 맡았다.

2015년 4.29 재보선 국회의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 관악구을에 출마해 낙선했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의당 소속으로 전주시병에 출마해 당선됐다.

2018년 민주평화당 대표에 선출됐다.

◆ 학력

1966년 전주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69년 전주북중학교를 졸업했다.

1971년 전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9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했다.

1988년 영국 웨일즈대 카디프대학원에서 언론정보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전라북도 도의원을 지낸 정진철씨와 이형옥씨 사이 4형제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1981년 6월14일 민혜경씨와 결혼해 아들 둘을 두고 있다.

장남 정욱진씨는 스탠포드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한 뒤 콜롬비아대학교에서 로스쿨을 졸업했다.

차남 정현중씨는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 상훈

2000년 백봉 라용균 선생기념사업회 2회 백봉신사상을 수상했다.

2001년 한국언론인연합회 올해의 정치인상을 수상했다.

2006년 7월 통일부 장관에서 퇴임하면서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 기타

2019년 3월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가 공개한 재산 신고내역에 따르면 정동영은 2018년보다 2억8646만 원 늘어난 14억8392만 원의 재산을 신고했다. 정도영은 본인 명의의 전북 순창 토지를 비롯해 배우자 및 장남과 함께 소유한 강남 도곡동 아파트, 여의도 아파트, 경기 고양시 상가 등을 신고했다.

저서로 1999년 '개나리아저씨', 2007년 '개성역에서 파리행 기차표를', 2007년 '중산층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2010년 '트위터는 막걸리다', 2013년 '10년 후 통일', 2014년 '정동영 아저씨의 한반도 통일 이야기'를 출간했다.

제33보병사단(현 17사단) 사단 본부대 행정병으로 군 복무를 시작해 육군 병장으로 전역했다.

어록
[Who Is ?]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가 2020년 1월2일 국회에서 열린 민주평화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선거제 개혁이 명령하고 있는 본격적 다당제시대의 개막을 위해 제3의 축이 필요하다. 민주평화당은 통합을 위해 분명한 원칙을 제시하면서 선거제 개혁 이후 새로운 정치판을 짜는데 능동적 자세로 나설 것이다.” (2020/01/30, 국회에서 열린 최고의원회의에서)

“어떤 정치든 명분과 가치가 먼저인데 반문연대만으로는 명분이 될 수 없다. 민주평화당은 개혁연대의 길을 생각한다.” (2020/01/22, 국회에서 열린 ‘연동형 선거제 흔드는 꼼수정당 퇴치를 위한 긴급토론회’에서)

“선거제 개혁을 만들어낸 민주평화당이 이번 총선에서 힘을 얻게 되면 분권형 대통령제로 가겠다. 정치개혁과 다당제는 민주평화당의 존재이유다.” (2020/01/14, 전북 전주시온성교회에서 열린 ‘민주평화당 전주시민 정치개혁 보고대회’에서)

“호남에서 민주평화당과 더불어민주당의 1대1 구도를 만들겠다.” (2020/01/07, 전북도당에서 열린 신년하례식에서)

“문재인 정부 집권 2년 만에 서울에서 1천조 원, 전국에서 2천조 원 땅값이 상승했다. 해방 이후 단기간에 최고로 땅값을 올렸다.” (2019/12/03, 국회에서 열린 경제정의 실천 시민연합과 마련한 기자회견에서)

“지난 4월 패스트트랙 상정에는 분명한 합의문이 있었다. 선거제 개혁 선 처리 뒤 사법개혁이 명백한 여야4당의 합의다. 이를 뒤집을 수 없다.” (2019/10/14, 국회에서 열린 민주평화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오늘 민주평화당은 구태정치로부터 해방을 선언한다.” (2019/08/12, 국회에서 열린 민주평화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당내 비당권파의 집단 탈당을 놓고)

“좌고우면하지 않고 제3당을 목표로 총선을 준비하겠다. 바른미래당 내 개혁그룹, 정의당, 시민사회와 힘을 모으고 녹색당과 청년당을 포함해 새로운 정치세력과도 연대, 연합하겠다.” (2019/08/05, 당 대표 취임 1주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청와대와 5당 대표 회동이 열리게 될 것으로 보이는데 그 자리에서 선거제 개혁과 함께 권력 분산을 위한 헌법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할 것이다.” (2019/07/15, 국회에서 열린 민주평화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북핵 문제 해결에 대화와 평화가 아닌 플랜B는 있을 수 없다. 아무리 나쁜 평화라도 전쟁보다 낫다.” (2019/05/06, 호주 시드니 스트라스필드 골프클럽 연회장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바른미래당이 내부 정리가 된다면 국민의당 시절 한솥밥을 먹던 분들과는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당 대 당 통합으로 갈 수 있다고 본다.” (2019/04/11, BBS라디오 ‘이상휘의 아침저널’에 출연해)

“거대 양당은 서민경제에는 관심 없고 기득원 유지와 창출만을 위해 늘 싸우는 정치만 하고 있다. 기득권 정치를 깨트리려면 다양한 계층이 국회로 가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다당제가 정착돼야 한다.” (2019/03/27, 민주평화당 충북도당 개편대회에서)

“5·18 희생자들을 짓밟은 극우보수 세력 준동에 상하이 임시정부 요인들은 하늘에서 개탄하고 있을 것이다.” (2019/02/20,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한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민주평화당의 역사적 소명은 선거제 개혁에 있다.” (2019/01/16, 2019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힘없고 돈 없고 의지할 곳 없는 약자 편에 서라고 정동영에게 기회를 주셨다고 믿는다. 정의당보다 더 정의롭게 가는 것이 평화당의 목표이며 민주당의 우클릭을 지켜보고만 있지 않겠다.” (2018/08/05, 민주평화당 대표로 선출된 자리에서)

“이제 가면무도회는 끝났다. 안철수 대표는 지금까지 써온 개혁과 합리의 가면을 벗고 보수와 우향우의 길을 가고 있다. 정당은 정체성을 먹고 산다. 밥 먹여주는 민주주의와 평화주의가 바로 국민의당을 접고 민주평화당의 깃발을 올린 이유다.” (2018/02/08, 전북일보의 기고문에서)

“정당이라는 것은 정체성이 핵심이다. 묻지마 통합이라는 것은 정체성 변경을 야기하기 때문에 심각한 것이다. 정당이 사람 몸으로 말하면 척추에 해당하는 것이 정체성인데 정체성을 가볍게 여기면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가 없다.” (2017/10/26, cpbc 가톨릭평화방송 라디오 ‘열린세상 오늘! 김혜영입니다’에서 바른미래당과 통합 무산을 놓고 한 인터뷰)

“사드는 하나의 무기체계가 아니라 국민의 삶을 겹겹이 둘러싼 국제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구조를 뒤흔드는 문제다. 사드배치를 배치한 뒤 경제가 흔들리고 북한 비핵화의 문이 닫히고 평화통일의 길은 영영 멀어지게 된다면 아무리 대통령이 결정했다 해도 국민 대표인 국회가 초당적으로 지혜를 모아야 한다. 시대착오적 대결 구도가 다시 한반도 주변으로 형성된 것이다. 미래로 가야 하는데 왜 지구상에서 한반도만 후퇴하는가.” (2016/07/19, 사드 배치를 놓고 국회에서 열린 긴급현안 질문에서)

“참여정부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됐을 당시 조건부 찬성했다. 미래를 꿰뚫어 보지 못했던 안목의 부족함을 고백한다. 반성한다.” (2011/10/21, 국회 경제분야 대정부질문에서)

“국민 여러분의 선택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이명박 당선자가 나라를 위해 잘 해주실 것을 바란다. 진실의 편에 서서 끝까지 믿고 지지해 주신 한 분 한 분 국민 여러분에게 머리 숙여 뜨거운 감사를 표한다.” (2007/12/20,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낙선한 뒤 기자간담회에서)

“창당한 뒤로부터 두 달 동안 우리는 서로 치열하게 경쟁했고 그 과정에서 상처도 생겼고 분열도 생겼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만 된다면 12월의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2007/10/15,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 지명대회에서)

“중산층과 통하는 대통령, 중소기업과 통하는 대통령, 중용의 정치로 통합력을 발휘하는 대통령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대통령상이다. 3중(三中)주의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선 과거와 구별되는 신중도 노선이 필요하다.” (2007/07/03, 제17대 대통령 출마 선언식에서)

“2007년 시대정신은 대통합이다. 대통합의 ‘마중물’이 되기 위해 당을 떠나기로 했다. 정치 입문 11년 동안 단 한 번도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우리당의 잘못된 과거와 과감하게 단절하겠다.”(2007/06/18, 열린우리당 탈당을 밝힌 기자간담회에서)

“정치인의 궁극적 목표는 민족의 평화와 통일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언론에 있을 때도 통일부 출입하며 북핵 제네바 협정 맺는 과정을 취재했다. 10년 전과 비교할 때 상전벽해를 느낀다. 특히 개성공단에 관심을 갖고 있다. 우리 경제를 살리고 통일로 다가서는 새로운 희망이다. 1단계는 교류협력 경제분야에 힘쓰고, 2단계로 상대적 비대칭분야였던 군사적 신뢰 구축에도 노력하겠다.” (2004/06/30, 통일부장관에 취임한 뒤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20~30대 젊은이들의 투표 참여를 독려한다고 한 말이 크게 잘못됐다. 어르신들께서 나라의 건설과 민주화에 기여했듯이 젊은이들도 나라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2004/04/02, 노인 폄하 발언 논란에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

“'미래는 20대와 30대들의 무대다. 그런 의미에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면 60대 이상 70대는 투표 안 해도 괜찮다. 꼭 그분들이 미래를 결정해놓을 필요는 없다. 그분들은 어쩌면 이제 무대에서 퇴장하실 분이니까... 그분들은 집에서 쉬셔도 되고 20대, 30대는 지금 뭔가 결정하면 미래를 결정하는데 자기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기 때문에 투표를 해야 한다.” (2004/03/26, 총선과 관련해 노컷뉴스-국민일보 인터뷰에서)

“야당은 즉각 탄핵안을 철회해야 한다. 그 뒤 노무현 대통령의 대국 사과가 있을 것이다. 노 대통령과 4당 대표와의 회담을 통해 대화로 정국을 풀어가야 한다.” (2004/03/10,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안 표결을 앞두고 연합뉴스와의 전화인터뷰에서)

“그동안 물리적 저지를 불사하겠다는 당내 의견이 있었으나 날치기와 몸싸움은 2003년으로 끝냈으면 한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다수결로 탄핵안을 발의하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탄핵안은 명분도 없을 뿐 아니라 국민의 지지를 받을 리 없기 때문에 발의해 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다.” (2004/03/09,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한국CEO포럼 조찬강연회에서)

“4.15총선의 최소 목표는 대통령 탄핵저지선인 100석이며 달성하지 못하면 승리라고 볼 수 없다. 승리하지 못하면 당연히 (의장직을) 물러나겠다.” (2004/02/19, 중견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 참석해서)

“차떼기 자금 등 불법 정치자금을 국고에 환수하는 특별법을 즉각 제정해야하고 단호한 공천혁명을 통해 세력교체와 세대교체를 이룩해내겠다.” (2004/01/11, 열린우리당 의장을 수락하는 연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