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 관리자일 뿐이다.”

이동걸 KDB산업은행 회장이 정성립 대우조선해양 대표이사 사장을 두고 한 말이다. 산업은행과 현대중공업의 ‘빅딜’ 과정에서 정 사장이 배제됐다는 지적이 나오자 정 사장은 논의에 낄 필요가 없다며 일축한 것이다.
 
산업은행 자회사 대우조선해양 사장을 향한 이동걸 예의가 아쉽다

이동걸 KDB산업은행 회장.


이 회장은 단호했다. 문제삼을 만한 일도 아니라고 잘랐다.

앞으로도 이 문제로는 흔들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보여준 것이다. 구설에 오를 여지를 차단하려는 마음에 일부러 더욱 강도 높은 발언을 쏟아낸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 회장의 발언은 씁쓸함을 남긴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회사를 맡아 힘겹게 이끈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나"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물론 이 회장의 말이 다 틀리지는 않다.

산업은행이 현대중공업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대우조선해양의 의견이 반영될 필요는 없다. 정 사장의 의견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임시 관리자일 뿐'이라는 표현은 지나침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정 사장이 대우조선해양 수장으로 보낸 4년여의 시간은 결코 쉽지 않았다. 정 사장은 대우조선해양이 내리막길에 들어섰을 때 취임해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산업은행은 전임 사장 이후 공백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던 대우조선해양의 새 수장으로 정성립 사장을 선택했고 정 사장도 고심 끝에 이를 받아들였다. 당시 그는 부담스럽긴 하지만 대우조선해양에 애착이 강한 만큼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4년 가까이 거센 바닷바람을 맞은 사람을 놓고 이제와 '임시 관리자일 뿐'으로 치부하는 이 회장의 발언을 다른 산업은행 자회사 대표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이 회장의 말대로라면 산업은행 아래 있는 대우건설 대표, KDB생명 대표, 그리고 앞으로 유창근 사장의 뒤를 이어 올 현대상선의 새 대표 모두 임시 관리자일 뿐이라는 말이 된다.

대형 조선사를 이끄는 자리는 단순히 ‘관리’만 하는 자리는 아니다.

정 사장의 인맥은 대우조선해양의 수주에도 큰 도움을 줬다. 그는 2015년 취임도 하기 전에 내정자 신분으로 그리스 출장길에 올라 안젤리쿠시스그룹에서 유조선 2척을 수주하기도 했다.

정 사장이 사의를 밝힌 뒤인 25일에도 수주에 성공했다. 역시 안젤리쿠시스그룹에서다.

그리스 최대의 해운사 안젤리쿠시스그룹은 대우조선해양 최대의 ‘단골’로 꼽힌다. 안젤리쿠시스 회장이 “항상 미스터 정을 믿는다”고 말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화다.

“옥포조선소에서 직원 4만여 명이 선임자의 잘못으로 멍에를 쓴 채 살아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옥포 앞바다에 빠져죽겠다는 각오로 자구계획안을 꼭 이행해 대우조선해양을 살리겠다.”

정 사장은 2016년 국회에서 열린 조선해운산업 구조조정 청문회에서 울먹이며 이렇게 말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 수많은 사람 앞에서 보인 눈물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는 2017년 3월부터 2018년 5월까지는 임금도 전혀 받지 않았다. 4년 동안 욕도 많이 먹었다. 정 사장은 한 인터뷰에서 '하도 욕을 많이 먹어서 오래 살겠다'는 질문을 받자 "뱃사람이 다 된 덕분에 아직은 견딜 만하다"고 대답한 일도 있다.

이동걸 회장이 자극적 발언으로 구설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지난해 국감에서는 여러 회사를 놓고 “애초에 인수해선 안 될 회사”라는 거친 말을 쏟아내 경영 정상화에 힘쓰는 여러 사람들을 맥 빠지게 했다.

산업은행 회장은 결코 쉬운 자리가 아니다.

수많은 기업의 구조조정에서 생사의 열쇠를 쥐고 있는 만큼 행동만큼이나 말 역시 신중해야 하는 자리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영국 소설 '오만과 편견'은 인간의 속된 욕망과 생활의 논리를 합리적 시각에서 묘사하면서도 재기발랄한 위트, 현실 풍자와 비판까지 곁들인 수작으로 꼽힌다. 

그동안 과감한 표현으로 흥미를 주고 때로는 풍자와 비판까지 담은 이 회장의 발언이 이번에는 '오만과 편견'과 같은 수작의 느낌이 아니라 어떤 말도 거침없이 할 수 있다는 '오만'과 말만 던지고 자신은 책임에서 빠져 나가려는 '핑계'만 있는 씁쓸함이 강하게 풍겨온다고 하면 지나칠까?

앞으로 누가 산업은행 자회사 대표로 가려고 할까. 이 회장의 말대로 그저 임시로 관리만 하고 싶은 사람만 갈 수도 있는 일이다. [비즈니스포스트 조은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