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Is ?]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김용원 임주연 기자
2017-11-29 08:3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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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 생애

    이건희는 삼성전자 회장이다.

    탁월한 경영능력과 승부사 기질로 오늘의 '삼성'을 만들어낸 한국의 대표적 경영인이다.

    2014년 급성심근경색으로 병상에 눕게 되면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있다.

    1942년 1월9일 경상남도 의령에서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본 와세다대학교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원에서 MBA 과정을 마쳤다.

    중앙일보 산하 동양방송 이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삼성 비서실과 삼성물산, 삼성그룹 부회장 등을 거치며 경영수업을 받았다. 이병철 창업주의 사망 뒤 후계자로 삼성그룹 회장에 올랐다.

    1993년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표현으로 유명한 삼성그룹 ‘신경영’을 선언한 뒤 선진 경영시스템과 조직문화를 도입하며 대대적 변화를 추진했다.

    반도체 등 핵심사업에 과감한 투자를 벌여 삼성전자를 세계에서 손꼽히는 기업으로 키워냈다. 삼성그룹의 계열사들도 모두 각 사업분야에서 대표적 기업으로 자리잡았다.

    불법적인 경영권 승계와 정경유착, 비자금 조성 등의 논란에 휩싸이며 기소됐지만 집행유예를 선고받으며 실형을 면했다. 이를 계기로 한때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정재계를 통틀어 한때 한국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로 꼽혔다.

    한국경제성장에 가장 큰 공을 세운 경영인이지만 재벌중심의 경제구조를 강화하며 사회 전반에 부정적 영향도 끼쳤다는 평가도 받는다.

    ◆ 경영활동의 공과

    △삼성전자의 ‘반도체 신화’ 결실
    삼성전자는 2017년 인텔을 제치고 사상 처음으로 전 세계 반도체매출 1위 기업으로 자리잡았다. 강력한 반도체 호황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삼성전자는 대부분의 수혜를 독점하며 기록적 성장을 이뤄냈다.

    반도체는 ‘규모의 경제’가 경쟁력에 영향을 가장 크게 미치는 산업인데 삼성전자가 지난 수십년 동안 이어왔던 기술과 생산투자가 마침내 결실로 나타났다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전자의 반도체사업은 이건희가 직접 진출을 결정하고 공을 들여 키워낸 대표적 사업으로 꼽힌다.

    이건희는 이병철 창업주가 1974년 한국반도체 인수를 결정하면서 반도체사업에 진출하도록 적극 설득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장기간 흑자전환에 고전하던 반도체를 성장동력으로 바꿔낸 일등공신으로 꼽힌다.

    인수 당시 이건희는 직접 사재를 들일 정도로 의욕을 보였으며 사업진출 초기부터 직접 도시바와 NEC 등 일본 반도체기업 관계자들을 만나고 공부에 매진해 관련지식을 쌓아왔다.

    이후 삼성그룹이 거금을 들여 반도체 연구개발단지를 구축하고 D램 개발에 성과를 내는 등 반도체사업을 본격화하는 기반을 갖추는 데 이건희가 대부분의 작업을 결정하고 지휘했다. 이건희가 처음 삼성그룹 회장에 오른 1988년 처음으로 반도체사업에서 흑자를 내며 ‘이건희 사업’으로 상징성을 더했다.

    이건희는 1990년대 중후반 반도체가 전 세계적으로 큰 불황기를 맞았을 때도 기술개발과 시설투자를 줄이지 않고 공격적 육성전략에 계속 힘을 실었다. 이후 낸드플래시 사업진출 결정과 세계에서 가장 앞선 고용량 D램 등 메모리반도체 기술개발, 반도체 공장단지 준공 등을 모두 진두지휘하며 ‘공격경영’을 강화했다.

    오너일가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재벌기업의 특징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이고 성공적 사례가 이건희의 삼성그룹 반도체사업 투자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이건희는 반도체사업 진출 초기부터 전 세계에 반도체공장을 짓겠다는 목표를 강조해왔는데 삼성전자가 중국 시안과 미국 등에 모두 반도체공장을 확보하며 이런 목표도 이뤄졌다.

    삼성전자는 적어도 향후 수년동안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인공지능과 자율주행, 사물인터넷 등 4차 산업혁명의 핵심으로 꼽히는 분야도 모두 반도체를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어 삼성전자가 전 세계 전자업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반도체는 한국 전체 수출실적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성이 높다. 삼성전자 반도체 협력업체만 따져도 약 140곳으로 2,3차 협력사 등을 포함하면 삼성전자의 반도체사업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 삼성전자 실적.

    △스마트폰과 가전 등의 ‘품질경영’ 자리잡아
    이건희는 삼성전자의 ‘품질경영’을 강조하면서 제품경쟁력에 힘을 실어 스마트폰과 가전, TV 등 완제품에서도 삼성전자를 글로벌 1위 기업으로 키워냈다.

    1995년 애니콜 휴대폰에서 불량률이 10%를 넘자 이건희 지시로 이 제품을 모두 임직원 앞에서 불태워버린 ‘애니콜 화형식’이 대표적 사례다. 이건희는 1993년 신경영을 선언하며 품질을 최우선으로 할 것을 강조하고 삼성전자의 제품경쟁력 확보를 강력히 요구했다.

    공교롭게 삼성전자가 제품에서 품질 논란을 겪은 최악의 두 사건은 모두 이건희가 경영에서 물러난 사이 벌어졌다. 삼성전자의 지펠 냉장고 폭발사고가 났던 2009년은 이건희가 삼성특검 사건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있을 때다.

    이건희는 당시 크게 화를 내며 냉장고 21만 대를 모두 리콜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삼성전자의 품질신뢰 회복을 당부했다. 이 사건은 이건희가 삼성그룹 경영에 복귀하는 계기가 됐다.

    2016년 갤럭시노트7 폭발사고로 대규모 리콜이 발생한 것도 이건희가 와병으로 경영일선을 떠난 사이 벌어졌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당시 책임경영을 강조하는 의미로 오너일가 사상 처음 삼성전자 등기이사에 올랐다. 결국 박근혜 게이트와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 등 악재가 겹쳤지만 삼성전자는 갤럭시노트7 사태를 딛고 이듬해 스마트폰사업을 완전히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신경영 선언으로 삼성그룹 대변신
    삼성그룹의 ‘신경영’ 선언은 이건희가 1993년 독일 프랑크프루트에서 위기의식을 강조하며 내놓은 것으로 지금의 삼성그룹을 만든 전환점으로 꼽힌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이건희의 말은 삼성그룹이 성장해온 역사와 성격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자리잡았다.

    삼성그룹은 1993년 3월부터 4개월에 걸쳐 미국 로스엔젤레스와 일본 도쿄, 독일과 영국 등에서 1800명 이상의 임직원을 대상으로 글로벌 회의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당시 회의는 평균 8시간, 최대 16시간 연속으로 이어졌다. 이건희는 이런 ‘마라톤 회의’를 통해 삼성그룹이 살아남고 성장하려면 완전히 변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강조했다.

    삼성전자의 일본법인 고문이 삼성그룹의 문제점을 파악해 제출한 보고서가 이건희의 신경영 선언에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보고서에는 삼성전자의 기술개발 수준과 임직원의 노력, 경영자의 자세 등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었다.
     
    신경영 선언은 삼성을 세계 1등으로 만들기 위한 품질경쟁력 강화와 선진국 기업문화 도입, 개혁과 변화의 중요성 등을 강조한 것으로 현실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위기의식을 뼈대로 한다.

    특히 이건희는 신경영에서 경영자와 임원을 포함한 전 임직원의 변화가 중요하다며 사람 중심의 개혁을 강조했다. 이런 기조에서 1993년 임원 승진자 규모는 299명으로 역대 최대를 보이며 조직쇄신에 박차를 가했다. 또 모든 임직원이 7시에 출근해 4시에 최근하도록 하는 7-4제 도입도 시도하며 국내 다른 재벌기업보다 변화에 앞서나가려는 노력도 보였다.

    삼성그룹이 신경영 선언 이후 꾸준한 급성장기를 이어오고 있는 만큼 이건희의 경영능력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꼽히고 있다.

    △삼성자동차 실패
    이건희는 취임 초기인 1987년부터 비서실에 자동차사업 진출방안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기아자동차를 인수하려 했지만 실패한 뒤 일본 닛산자동차와 기술협력을 맺고 1995년 삼성자동차를 설립했다.

    하지만 치열한 경쟁환경과 비효율적 투자구조, 외환위기 등이 겹쳐 삼성자동차는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결국 실패한 사업으로 남게 됐다. 

    ▲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011년 7월29일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서 열린 선진제품 비교전시회에서 권오현 삼성전자 회장에게 반도체 사업 현황 및 신기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 평가

    이건희는 특유의 승부사 기질로 지금의 삼성그룹을 만들었다.

    삼성전자의 주력사업으로 자리잡은 반도체와 휴대폰 등은 대규모 연구개발과 공장증설에 선제적 투자가 앞으로 10년 이상의 경쟁력을 결정할 수도 있는 분야로 꼽힌다. 이건희가 반도체와 휴대폰사업을 주력으로 키우기 위해 초반에 성과를 보기 어려운 상황에도 과감한 투자를 벌여 삼성전자가 현재 반도체와 스마트폰 세계 1위 기업으로 자리잡게 됐다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전기차 배터리와 바이오의약품 등 삼성그룹 계열사들이 뛰어든 신사업도 이건희가 진출 초기부터 대규모 적자를 감수하며 공격적 투자를 이어왔다. 이런 사업들은 이제 강력한 미래 성장동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건희는 “항상 일등이 되어야 한다”는 ‘제일주의’를 강조하는데 이런 집념과 승부욕이 삼성그룹을 국내 재계 부동의 1위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타고난 경영능력과 추진력, 사업감각도 경영에 뛰어든 초기부터 인정받았다.

    이건희는 이병철 창업주의 셋째아들로 형인 이맹희 전 CJ그룹 명예회장과 이창희 전 새한그룹 회장을 제치고 삼성그룹 경영 후계자에 올랐다. 이를 놓고 다양한 관측이 나오지만 이병철 창업주는 이건희의 경영능력이 뛰어나 그룹을 물려주기로 결정했다는 뜻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1987년 이건희가 삼성그룹 제2대 회장으로 오르자마자 소비에트연방의 붕괴 조짐과 중국의 경제개방 등 국제적으로 큰 변화가 이어졌다. 이건희는 취임 직후부터 이런 대격변기에 대응해 그동안 내수시장에 집중됐던 삼성그룹의 사업을 글로벌화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이건희는 이병철 창업주가 제시했던 제3대 경영이념인 ‘자율경영’과 ‘기술중시’, ‘인간존중’을 계승하면서 더 발전시킨 ‘삼성경영학’을 앞세웠다. 동양의 유교윤리에 기반했던 삼성경영학에 서구적 합리주의와 경쟁주의를 접목한 것이다. 또 기업이 언제나 위기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위기경영’을 앞세워 시장변화에 꾸준히 대응할 수 있는 체질을 갖춰내는 데 주력했다.

    이 결과로 이건희는 1997년 외환위기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모두 성공적으로 극복하며 삼성그룹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능력을 보였다.

    하지만 이건희는 한국사회에 장기간 부정적 영향을 끼친 재벌중심의 기업구조가 자리잡는 데도 일조했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한다.

    삼성그룹은 지주사체제를 갖추지 않은 가운데에서도 삼성 비서실과 전략기획실, 미래전략실로 계속 이름을 바꿔온 비공식 조직을 통해 오너일가가 모든 계열사에 절대적 영향력을 갖출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의 경우 이건희를 포함한 오너일가의 지분율이 높지 않은데도 미래전략실의 지배 아래 놓여 투자와 사업계획, 인사 등이 좌우됐다. 2017년 2월 박근혜 게이트에 휘말려 미래전략실이 해체될 때까지 이런 구조가 계속 자리잡았다.

    이건희는 세금포탈과 금품수수, 불법 경영승계를 위한 편법 사용 등 다양한 의혹에 휘말리며 일부 혐의로는 검찰수사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재벌기업의 단점으로 꼽히는 불투명한 지배구조와 정경유착 등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사안들이 모두 이건희 시대에 일어났다.

    '영화광'과 '자동차광'으로 유명하다.
     
    이건희는 초등학교 때 부모와 떨어져 형과 일본 유학길에 올랐는데 민족차별과 문화차이 등으로 외로운 유년기를 보내며 영화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약 10년 동안 1200편 정도의 영화를 볼 정도로 틈만 나면 영화관으로 향했고 이를 통해 영어와 일본어 등을 공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유학 시절에는 자동차에 빠져 1년 반 동안 차를 여섯 번이나 바꾸고 직접 자동차를 분해하며 내부 구조를 공부할 정도로 깊은 탐구심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도 수많은 희귀 외제차를 개인 소장용으로 두고 있다.

    삼성그룹이 실패로 마감하고 말았던 자동차사업에 뛰어든 것도 이건희의 남다른 자동차 사랑 때문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스포츠에도 관심이 많다. 고등학생 때 레슬링부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전국대회에서 입상을 한 적도 있다.

    ▲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008년 4월11일 차명계좌 등에 대한 특검수사를 받은 뒤 나오고 있다.

    ◆ 사건사고

    △차명계좌 의혹 커져
    삼성그룹은 이건희의 세금포탈 혐의가 드러나면서 2008년 4월22일 대국민 사과문 및 경영쇄신안을 통해 세금을 모두 납부하겠다고 밝혔다. 또 삼성특검 당시 조세포탈 수단으로 지적한 차명계좌는 과거 경영권 보호를 위해 명의신탁한 것으로 모두 이건희의 실명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삼성그룹과 이건희가 약속한 차명계좌 실명전환과 누락된 세금 납부 약속은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한겨레의 2017년 10월16일 보도에서 나타났고 최대 수조 원이 국고에 환수되지 않고 이건희에게 넘어간 것으로 드러났다.

    금융감독원이 국회 정무위원회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2008년 조준웅 특검 시 확인된 은행별 차명계좌 및 실명전환 현황’ 자료에 따르면 64개 은행계좌 가운데 1개만 실명전환됐고 나머지 957개 증권계좌에서는 실명전환 기록이 나타나지 않았다. 금융당국은 이건희가 차명계좌를 통해 세금을 누락했는지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자택공사 비리의혹
    이건희는 자택공사를 회사 돈으로 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주택 인테리어를 공사하는 데 100억 원 이상이 들어갔는데 삼성그룹 계열사 직원이 매번 차명계좌로 발행한 수표 등을 대금으로 내줬다는 것이다. 자택의 공사대금으로 쓰인 수표가 삼성비자금 계좌와 연계돼 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경찰은 2008년 10월부터 2015년 3월까지 이건희 등 오너일가의 주택 인테리어를 공사할 때 삼성그룹 관계자들이 공사를 맡은 회사에 세금계산서를 발급하지 말 것을 요구한 정황을 포착했다. 이에 따라 2017년 서울 한남동에 있는 이건희 자택 관리사무소와 삼성물산 등을 압수수색했다.

    △경영권 불법승계와 삼성특검
    2000년 6월29일 법학 교수 43명이 이건희의 경영권 불법승계 혐의를 고발했다. 1996년 에버랜드 전환사채(CB•일정 기간이 지난 뒤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채권)를 헐값에 발행해 이들이 본인이나 제3자에게 재산상 이익을 주고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것이다.

    1996년 10월 비상장기업인 에버랜드는 주당 8만5천 원대인 에버랜드 CB를 주당 7700원에 발행했다. 곧 이건희 등 개인주주와 중앙일보, 삼성물산 등 법인주주들이 실권한 뒤 실권주 125만4천 주를 이재용 부회장에게 배정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에버랜드 CB를 싼값에 산 뒤 주식으로 교환해 에버랜드 최대주주에 올랐다. 당시 에버랜드 이사진은 자사 지분 62.5%에 해당하는 CB를 96억 원에 발행했는데 이는 경영권 프리미엄에도 미치지 못하는 돈을 받고 이건희 자녀들에게 회사를 넘긴 셈이다.

    2007년 10월29일 삼성 법무팀장이었던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그룹 차명계좌에 들어있던 비자금 의혹을 제기했다. 이후 이건희 일가의 경영권 불법승계와 비자금 조성, 정관계 로비 의혹 등을 줄줄이 폭로했다. 이는 조준웅 특검의 ‘삼성특검’으로 이어졌고 삼성그룹과 이건희 등 오너일가는 강도높은 검찰수사를 받았다.

    2008년 4월 차명계좌가 적발되고 1천억 원대의 세금포탈 혐의가 드러나면서 이건희는 삼성 경영쇄신안을 발표했다. 삼성과 관련된 모든 직책을 내놓고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에게 경영권을 맡기면서 경영에서 퇴진했다. 증여세를 피하면서 삼성 그룹의 지분을 물려받으려 했다는 의심을 받은 이건희의 아들 이재용 부회장도 최고고객책임자(CCO)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건희는 배임과 조세포탈 등의 혐의로 불구속기소돼 2009년 8월 14일 파기환송심서 징역 3년, 집유 4년, 벌금 1100억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2009년 12월 대통령 특별 단독사면을 받아 2010년 삼성전자 회장으로 다시 경영일선에 복귀했다.

    경영권 불법승계 의혹과 관련해 대법원은 2009년 배임죄를 적용한 원심을 깨고 에버랜드 CB 저가 매각과 관련해 이건희에게 무죄를 선언했다. 

    △정경유착과 삼성X파일 사건
    이건희는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조성사건에 연루돼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았다. 이건희가 검찰에 출두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건희는 250억 원의 비자금을 제공한 혐의를 받았지만 검찰은 이건희를 불구속기소했다. “국내외 경제에 미치는 파장 등을 폭넓게 검토했다”는 게 이유였다.

    1996년 9월 이건희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항소를 포기했다. 하지만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지 1년 만인 1997년 개천절에 사면복권됐고 1998년 4월 경영에 복귀했다.

    2005년에는 이른바 ‘삼성X파일’ 사건이 터졌다. 삼성 임원진이 정치권과 검찰에 금품제공을 논의한 것이 녹음파일 형태로 폭로된 것이다. 이건희의 지시로 홍석현 전 중앙일보 사장이 대선자금을 나눠주는 심부름을 한 게 아니냐는 의혹도 일었다.

    당시 미국에 체류 중이던 이건희는 서면조사만 받고 무혐의처분을 받았다. 오히려 이 사건을 폭로한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검찰조사를 받고 사법처리됐다.

    △끊임없는 사망설
    이건희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직후부터 계속 언론 등을 통해 사망설이 흘러나왔다.

    2014년 한 매체는 ‘이건희 회장 5월16일 오전 사망’이라는 보도를 내놓았다. 2016년 6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건희의 사망설이 나와 한때 삼성전자 주가가 급등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2017년 8월 이재용 부회장이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 심리로 열린 삼성그룹 전직 임원들과 공판에서 “이건희 회장님이 살아계실 때부터”라고 말한 뒤 곧 “건재하실 때부터”라고 말을 정정한 뒤에도 사망설이 돌았다.

    삼성그룹 관계자들은 이건희의 건강상태에 이상이 없다며 사망설을 부인했다. TV조선의 ‘탐사보도 세븐’은 2017년 11월7일 이건희가 병실에서 TV를 보고 있는 모습을 포착했다며 관련 영상을 보도했다.

    △삼성 경영권과 유산상속 놓고 분쟁
    이병철 창업주의 셋째 아들인 이건희가 두 형을 제치고 삼성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은 배경을 놓고 다양한 관측이 나왔다. 첫째인 이맹희 전 CJ그룹 명예회장과 이창희 전 새한미디어 회장이 이병철 창업주를 고발한 사건이 원인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1966년 삼성그룹은 일본에서 사카린 원료 등을 밀수하다 적발됐다. 이병철 창업주는 이를 계기로 사임하며 비료공장을 국가에 헌납했고 이창희 전 회장이 법적 책임을 지며 구속됐다. 이맹희 전 명예회장이 이 때부터 삼성그룹 총수 대행을 맡아왔다.

    1969년 이병철 창업주와 삼성그룹의 비리를 고발하며 처벌을 요청하는 탄원서가 청와대에 제출됐다. 이병철 창업주는 이맹희 전 명예회장을 의심했고 이창희 전 회장도 용의선상에 올랐다. 이병철 창업주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이맹희 전 명예회장이 삼성그룹 직책을 대부분 포기하도록 하며 이창희 전 회장은 미국으로 떠나도록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통해 장남과 차남이 후계구도에서 멀어지며 이건희가 자연스럽게 경영권 승계자로 자리잡게 됐다는 관측이 가장 유력하다.

    이맹희 전 명예회장은 이건희와 재산상속 문제 등을 놓고 오랜 갈등을 빚은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이병철 창업주의 차녀 이숙희씨와 함께 이건희에 2012년 유산분할 청구소송까지 제기했다. 당시 이건희는 언론을 통해 “이맹희씨는 이미 우리 집에서 퇴출당한 양반인데 나와 아버지를 고발했다. 나를 쳐다보지도 못할 양반”이라며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였다.

    소송전은 결국 삼성그룹과 CJ그룹 차원의 문제로 번졌고 결국 이건희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이건희의 성매매 동영상 촬영을 주도한 인물이 CJ그룹 직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이 사건은 다시 주목받았다.

    ▲ 1970년대 중반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암수술을 받은 뒤 처음으로 야외에 모인 가족들. 왼쪽부터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이건희 회장, 이병철 창업주, 이명희 신세계 회장.

    ◆ 경력

    1966년 중앙일보 산하 동양방송 이사로 입사했다.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을 맡았다가 1979년 삼성그룹 부회장으로 이동했다. 1987년 이병철 창업주가 사망한 뒤 삼성그룹 회장에 올랐다.

    1998년 삼성그룹 차원의 임원직을 폐지하며 삼성전자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했다.

    2008년 4월 삼성 비자금 사건과 조세포탈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면서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뒤 2010년 3월 삼성전자 회장으로 복귀했다. 회장직을 2017년 말 현재 아직 유지하고 있다.

    1981년 한일경제협회 부회장을, 198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을 맡았다.

    다양한 스포츠단체에서도 직책을 맡아왔다. 1982년부터 1997년까지 대한아마추어레슬링협회 회장을, 1982년부터 1993년까지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냈다. 1996년부터 2008년까지 국제올림픽위원을 맡았고 2011년부터 2017년까지 평창동계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고문을 맡았다.

    삼성생명공익재단과 삼성문화재단 이사장을 겸임하다 2015년 이재용 부회장이 넘겨받았다.

    ◆ 학력

    1947년 서울 혜화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대구를 거쳐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를 다녔다.

    1953년 일본 도쿄의 초등학교로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에서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서울 사대부속중학교에 편입했다.

    서울 사대부속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자퇴한 뒤 1961년 아버지의 모교인 일본 와세다대학교로 옮겼다.

    1966년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영대학원(MBA) 석사과정을 마쳤다.

    ◆ 가족관계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아버지다. 법무부장관과 내무부장관을 역임한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의 장녀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리움 관장과 1967년 결혼했다.

    이건희는 25세의 나이로 미국 대학원을 마치고 일본으로 들어오자마자 홍진기 전 회장의 장녀인 홍 전 관장과 일본 호텔에서 맞선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홍 전 관장은 서울대 응용미술학과를 다니던 학생으로 이미 이병철 창업주와 홍진기 전 회장은 사돈이 되기로 합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건희와 홍 전 관장은 슬하에 장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대표이사 사장, 이서현 삼성물산 패션부문 사장을 두고 있으며 삼녀인 이윤형씨는 미국 유학 중 사망했다. 

    누나인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은 두을장학재단 이사장을 겸임하고 있다. 여동생은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이다.

    처남은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이다.

    큰형인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은 2015년, 둘째형인 이창희 전 새한미디어 회장은 1991년 사망했다.

    ▲ 이건희 회장이 부인 홍라희 전 리움 관장, 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손을 잡고 2014년 1월9일 오후 서울 중구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린 사장단 부부 초청 신년만찬회를 마친 후 호텔을 나서고 있다.

    ◆ 상훈

    1984년 대한민국 체육훈장 맹호장, 1986년 대한민국 체육훈장 청룡장, 1991년 IOC 올림픽훈장, 1993년 문화부장관 감사패, 1994년 한국무역학회 무역인대상, 1996년 한국능률협회 선정 ‘최고의 경영자상’, 200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2004년 홍콩 디자인경영자상 초대 수상, 2004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코망되르(3등급) 훈장 등을 수상했다.

    2005년 시사주간지 타임이 꼽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됐다. 

    2011년 ‘Around the Rings’ 에서 세계스포츠지도자 Golden 25 중 한 명으로 뽑혔다. 

    2013년 블룸버그가 선정한 기업경영부문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10인’ 가운데 한 명으로 꼽혔다.

    ◆ 기타

    정신질환을 사유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2017년 11월 블룸버그가 집계한 전 세계 부호 순위 37위에 올랐다.

    저서로 1997년 동아일보사가 출간한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가 있다.

    ◆ 어록

    “앞으로 우리는 자만하지 말고 위기의식으로 재무장해야 한다.” (2013/10/28, 신경영 20주년 만찬에서)

    “취임 초 삼성이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절감해 신경영을 선언하며 낡은 관행과 제도를 과감하게 청산했다. 동참해준 임직원들에 깊이 감사드린다. 우리가 꿈꾸는 초일류기업의 모습은 어떠한 난관도 극복하고 부단히 성장하는 기업, 늘 활력이 샘솟는 창의적 기업, 고객과 주주는 물론 국민과 사회로부터 사랑받는 기업이다. 보다 멀리 보고 앞서 기회를 잡아 자랑스러운 초일류기업 삼성의 역사를 건설하는 주역이 되자.” (2011/11/30, 취임 25주년 기념식에서)

    “삼성의 깨끗하던 조직문화가 훼손됐다. 그룹에 퍼져 있는 부정을 뿌리뽑아라.” (2011년, 삼성테크윈의 경영진단 결과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2011년은 21세기 들어 새로운 10년이 또 시작되는 시기다. 더욱 정신을 차리고, 조금 더 긴장해서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앞으로 종종 (회사로) 나오겠다.” (2010/12/01, '자랑스러운 삼성인' 시상식에서)
     
    "10년 안에 삼성이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이 사라진다." (2011/01/04, 삼성그룹 신년 하례식에서) 

    “거짓말 없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정부는 투자하고 모두 열심히 일해야 하며 싸우면 절대 안 된다. 선친께서 우리 사회가 기억하는 큰 이정표를 남기신 것은 오로지 국민 여러분과 사회 각계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친의 유지를 변함없이 지켜 나갈 수 있도록 따뜻한 애정과 관심을 베풀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2010/02/06,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천재 한 사람이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 (2003/06/05, ‘인재경영’을 강조하며)

    “차세대 수익 사업이 무엇인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해결책은 알고 있다. 바로 5년, 10년 뒤 미래 사업을 발굴할 수 있는 능력의 핵심인재를 뽑으면 된다.” (2002/05, 연석회의에서)

    "마누라,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 2등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1993/06/17,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하며)

    “미래지향적이고 도전적 경영을 통해 1990년대까지는 삼성을 세계적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이다. 사회가 기대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봉사와 헌신을 적극 전개할 것이다.” (1987년, 호암아트홀에서 신임 회장 취임사를 하며)

    "위대하신 창업주를 여읜 슬픔을 딛고 일어나 삼성의 새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창업주의 유지를 받드는 길이다." (1987년, 호암아트홀에서 신임 회장 취임사를 하며)

    “1974년 마침 한국반도체라는 회사가 파산에 직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엇보다도 '반도체'라는 이름에 끌렸다. 시대 조류가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넘어가는 조짐을 보이고 있었고, 그 중 핵심인 반도체 사업이 우리 민족의 재주와 특성에 딱 들어맞는 업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젓가락문화권'이어서 손재주가 좋고, 주거 생활자체가 신발을 벗고 생활하는 등 청결을 중시한다. 이런 문화는 반도체 생산에 아주 적합하다. 반도체 생산은 미세한 작업이 요구되고 먼지 하나라도 있으면 안 되는, 고도의 청정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공정이기 때문이다.” (책 ‘황의 법칙’, 1974년 반도체사업을 시작하던 시기를 이건희가 회고하는 대목에서)
  • ◆ 경영활동의 공과

    △삼성전자의 ‘반도체 신화’ 결실
    삼성전자는 2017년 인텔을 제치고 사상 처음으로 전 세계 반도체매출 1위 기업으로 자리잡았다. 강력한 반도체 호황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삼성전자는 대부분의 수혜를 독점하며 기록적 성장을 이뤄냈다.

    반도체는 ‘규모의 경제’가 경쟁력에 영향을 가장 크게 미치는 산업인데 삼성전자가 지난 수십년 동안 이어왔던 기술과 생산투자가 마침내 결실로 나타났다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전자의 반도체사업은 이건희가 직접 진출을 결정하고 공을 들여 키워낸 대표적 사업으로 꼽힌다.

    이건희는 이병철 창업주가 1974년 한국반도체 인수를 결정하면서 반도체사업에 진출하도록 적극 설득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장기간 흑자전환에 고전하던 반도체를 성장동력으로 바꿔낸 일등공신으로 꼽힌다.

    인수 당시 이건희는 직접 사재를 들일 정도로 의욕을 보였으며 사업진출 초기부터 직접 도시바와 NEC 등 일본 반도체기업 관계자들을 만나고 공부에 매진해 관련지식을 쌓아왔다.

    이후 삼성그룹이 거금을 들여 반도체 연구개발단지를 구축하고 D램 개발에 성과를 내는 등 반도체사업을 본격화하는 기반을 갖추는 데 이건희가 대부분의 작업을 결정하고 지휘했다. 이건희가 처음 삼성그룹 회장에 오른 1988년 처음으로 반도체사업에서 흑자를 내며 ‘이건희 사업’으로 상징성을 더했다.

    이건희는 1990년대 중후반 반도체가 전 세계적으로 큰 불황기를 맞았을 때도 기술개발과 시설투자를 줄이지 않고 공격적 육성전략에 계속 힘을 실었다. 이후 낸드플래시 사업진출 결정과 세계에서 가장 앞선 고용량 D램 등 메모리반도체 기술개발, 반도체 공장단지 준공 등을 모두 진두지휘하며 ‘공격경영’을 강화했다.

    오너일가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재벌기업의 특징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이고 성공적 사례가 이건희의 삼성그룹 반도체사업 투자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이건희는 반도체사업 진출 초기부터 전 세계에 반도체공장을 짓겠다는 목표를 강조해왔는데 삼성전자가 중국 시안과 미국 등에 모두 반도체공장을 확보하며 이런 목표도 이뤄졌다.

    삼성전자는 적어도 향후 수년동안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인공지능과 자율주행, 사물인터넷 등 4차 산업혁명의 핵심으로 꼽히는 분야도 모두 반도체를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어 삼성전자가 전 세계 전자업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반도체는 한국 전체 수출실적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성이 높다. 삼성전자 반도체 협력업체만 따져도 약 140곳으로 2,3차 협력사 등을 포함하면 삼성전자의 반도체사업이 한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 삼성전자 실적.

    △스마트폰과 가전 등의 ‘품질경영’ 자리잡아
    이건희는 삼성전자의 ‘품질경영’을 강조하면서 제품경쟁력에 힘을 실어 스마트폰과 가전, TV 등 완제품에서도 삼성전자를 글로벌 1위 기업으로 키워냈다.

    1995년 애니콜 휴대폰에서 불량률이 10%를 넘자 이건희 지시로 이 제품을 모두 임직원 앞에서 불태워버린 ‘애니콜 화형식’이 대표적 사례다. 이건희는 1993년 신경영을 선언하며 품질을 최우선으로 할 것을 강조하고 삼성전자의 제품경쟁력 확보를 강력히 요구했다.

    공교롭게 삼성전자가 제품에서 품질 논란을 겪은 최악의 두 사건은 모두 이건희가 경영에서 물러난 사이 벌어졌다. 삼성전자의 지펠 냉장고 폭발사고가 났던 2009년은 이건희가 삼성특검 사건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있을 때다.

    이건희는 당시 크게 화를 내며 냉장고 21만 대를 모두 리콜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삼성전자의 품질신뢰 회복을 당부했다. 이 사건은 이건희가 삼성그룹 경영에 복귀하는 계기가 됐다.

    2016년 갤럭시노트7 폭발사고로 대규모 리콜이 발생한 것도 이건희가 와병으로 경영일선을 떠난 사이 벌어졌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당시 책임경영을 강조하는 의미로 오너일가 사상 처음 삼성전자 등기이사에 올랐다. 결국 박근혜 게이트와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 등 악재가 겹쳤지만 삼성전자는 갤럭시노트7 사태를 딛고 이듬해 스마트폰사업을 완전히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신경영 선언으로 삼성그룹 대변신
    삼성그룹의 ‘신경영’ 선언은 이건희가 1993년 독일 프랑크프루트에서 위기의식을 강조하며 내놓은 것으로 지금의 삼성그룹을 만든 전환점으로 꼽힌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이건희의 말은 삼성그룹이 성장해온 역사와 성격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자리잡았다.

    삼성그룹은 1993년 3월부터 4개월에 걸쳐 미국 로스엔젤레스와 일본 도쿄, 독일과 영국 등에서 1800명 이상의 임직원을 대상으로 글로벌 회의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당시 회의는 평균 8시간, 최대 16시간 연속으로 이어졌다. 이건희는 이런 ‘마라톤 회의’를 통해 삼성그룹이 살아남고 성장하려면 완전히 변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을 강조했다.

    삼성전자의 일본법인 고문이 삼성그룹의 문제점을 파악해 제출한 보고서가 이건희의 신경영 선언에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보고서에는 삼성전자의 기술개발 수준과 임직원의 노력, 경영자의 자세 등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었다.
     
    신경영 선언은 삼성을 세계 1등으로 만들기 위한 품질경쟁력 강화와 선진국 기업문화 도입, 개혁과 변화의 중요성 등을 강조한 것으로 현실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위기의식을 뼈대로 한다.

    특히 이건희는 신경영에서 경영자와 임원을 포함한 전 임직원의 변화가 중요하다며 사람 중심의 개혁을 강조했다. 이런 기조에서 1993년 임원 승진자 규모는 299명으로 역대 최대를 보이며 조직쇄신에 박차를 가했다. 또 모든 임직원이 7시에 출근해 4시에 최근하도록 하는 7-4제 도입도 시도하며 국내 다른 재벌기업보다 변화에 앞서나가려는 노력도 보였다.

    삼성그룹이 신경영 선언 이후 꾸준한 급성장기를 이어오고 있는 만큼 이건희의 경영능력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꼽히고 있다.

    △삼성자동차 실패
    이건희는 취임 초기인 1987년부터 비서실에 자동차사업 진출방안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기아자동차를 인수하려 했지만 실패한 뒤 일본 닛산자동차와 기술협력을 맺고 1995년 삼성자동차를 설립했다.

    하지만 치열한 경쟁환경과 비효율적 투자구조, 외환위기 등이 겹쳐 삼성자동차는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결국 실패한 사업으로 남게 됐다. 

    ▲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011년 7월29일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서 열린 선진제품 비교전시회에서 권오현 삼성전자 회장에게 반도체 사업 현황 및 신기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 ◆ 평가

    이건희는 특유의 승부사 기질로 지금의 삼성그룹을 만들었다.

    삼성전자의 주력사업으로 자리잡은 반도체와 휴대폰 등은 대규모 연구개발과 공장증설에 선제적 투자가 앞으로 10년 이상의 경쟁력을 결정할 수도 있는 분야로 꼽힌다. 이건희가 반도체와 휴대폰사업을 주력으로 키우기 위해 초반에 성과를 보기 어려운 상황에도 과감한 투자를 벌여 삼성전자가 현재 반도체와 스마트폰 세계 1위 기업으로 자리잡게 됐다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전기차 배터리와 바이오의약품 등 삼성그룹 계열사들이 뛰어든 신사업도 이건희가 진출 초기부터 대규모 적자를 감수하며 공격적 투자를 이어왔다. 이런 사업들은 이제 강력한 미래 성장동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건희는 “항상 일등이 되어야 한다”는 ‘제일주의’를 강조하는데 이런 집념과 승부욕이 삼성그룹을 국내 재계 부동의 1위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타고난 경영능력과 추진력, 사업감각도 경영에 뛰어든 초기부터 인정받았다.

    이건희는 이병철 창업주의 셋째아들로 형인 이맹희 전 CJ그룹 명예회장과 이창희 전 새한그룹 회장을 제치고 삼성그룹 경영 후계자에 올랐다. 이를 놓고 다양한 관측이 나오지만 이병철 창업주는 이건희의 경영능력이 뛰어나 그룹을 물려주기로 결정했다는 뜻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1987년 이건희가 삼성그룹 제2대 회장으로 오르자마자 소비에트연방의 붕괴 조짐과 중국의 경제개방 등 국제적으로 큰 변화가 이어졌다. 이건희는 취임 직후부터 이런 대격변기에 대응해 그동안 내수시장에 집중됐던 삼성그룹의 사업을 글로벌화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이건희는 이병철 창업주가 제시했던 제3대 경영이념인 ‘자율경영’과 ‘기술중시’, ‘인간존중’을 계승하면서 더 발전시킨 ‘삼성경영학’을 앞세웠다. 동양의 유교윤리에 기반했던 삼성경영학에 서구적 합리주의와 경쟁주의를 접목한 것이다. 또 기업이 언제나 위기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위기경영’을 앞세워 시장변화에 꾸준히 대응할 수 있는 체질을 갖춰내는 데 주력했다.

    이 결과로 이건희는 1997년 외환위기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모두 성공적으로 극복하며 삼성그룹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능력을 보였다.

    하지만 이건희는 한국사회에 장기간 부정적 영향을 끼친 재벌중심의 기업구조가 자리잡는 데도 일조했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한다.

    삼성그룹은 지주사체제를 갖추지 않은 가운데에서도 삼성 비서실과 전략기획실, 미래전략실로 계속 이름을 바꿔온 비공식 조직을 통해 오너일가가 모든 계열사에 절대적 영향력을 갖출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의 경우 이건희를 포함한 오너일가의 지분율이 높지 않은데도 미래전략실의 지배 아래 놓여 투자와 사업계획, 인사 등이 좌우됐다. 2017년 2월 박근혜 게이트에 휘말려 미래전략실이 해체될 때까지 이런 구조가 계속 자리잡았다.

    이건희는 세금포탈과 금품수수, 불법 경영승계를 위한 편법 사용 등 다양한 의혹에 휘말리며 일부 혐의로는 검찰수사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재벌기업의 단점으로 꼽히는 불투명한 지배구조와 정경유착 등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사안들이 모두 이건희 시대에 일어났다.

    '영화광'과 '자동차광'으로 유명하다.
     
    이건희는 초등학교 때 부모와 떨어져 형과 일본 유학길에 올랐는데 민족차별과 문화차이 등으로 외로운 유년기를 보내며 영화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약 10년 동안 1200편 정도의 영화를 볼 정도로 틈만 나면 영화관으로 향했고 이를 통해 영어와 일본어 등을 공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유학 시절에는 자동차에 빠져 1년 반 동안 차를 여섯 번이나 바꾸고 직접 자동차를 분해하며 내부 구조를 공부할 정도로 깊은 탐구심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도 수많은 희귀 외제차를 개인 소장용으로 두고 있다.

    삼성그룹이 실패로 마감하고 말았던 자동차사업에 뛰어든 것도 이건희의 남다른 자동차 사랑 때문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스포츠에도 관심이 많다. 고등학생 때 레슬링부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전국대회에서 입상을 한 적도 있다.

    ▲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008년 4월11일 차명계좌 등에 대한 특검수사를 받은 뒤 나오고 있다.

    ◆ 사건사고

    △차명계좌 의혹 커져
    삼성그룹은 이건희의 세금포탈 혐의가 드러나면서 2008년 4월22일 대국민 사과문 및 경영쇄신안을 통해 세금을 모두 납부하겠다고 밝혔다. 또 삼성특검 당시 조세포탈 수단으로 지적한 차명계좌는 과거 경영권 보호를 위해 명의신탁한 것으로 모두 이건희의 실명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삼성그룹과 이건희가 약속한 차명계좌 실명전환과 누락된 세금 납부 약속은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한겨레의 2017년 10월16일 보도에서 나타났고 최대 수조 원이 국고에 환수되지 않고 이건희에게 넘어간 것으로 드러났다.

    금융감독원이 국회 정무위원회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2008년 조준웅 특검 시 확인된 은행별 차명계좌 및 실명전환 현황’ 자료에 따르면 64개 은행계좌 가운데 1개만 실명전환됐고 나머지 957개 증권계좌에서는 실명전환 기록이 나타나지 않았다. 금융당국은 이건희가 차명계좌를 통해 세금을 누락했는지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자택공사 비리의혹
    이건희는 자택공사를 회사 돈으로 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주택 인테리어를 공사하는 데 100억 원 이상이 들어갔는데 삼성그룹 계열사 직원이 매번 차명계좌로 발행한 수표 등을 대금으로 내줬다는 것이다. 자택의 공사대금으로 쓰인 수표가 삼성비자금 계좌와 연계돼 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경찰은 2008년 10월부터 2015년 3월까지 이건희 등 오너일가의 주택 인테리어를 공사할 때 삼성그룹 관계자들이 공사를 맡은 회사에 세금계산서를 발급하지 말 것을 요구한 정황을 포착했다. 이에 따라 2017년 서울 한남동에 있는 이건희 자택 관리사무소와 삼성물산 등을 압수수색했다.

    △경영권 불법승계와 삼성특검
    2000년 6월29일 법학 교수 43명이 이건희의 경영권 불법승계 혐의를 고발했다. 1996년 에버랜드 전환사채(CB•일정 기간이 지난 뒤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채권)를 헐값에 발행해 이들이 본인이나 제3자에게 재산상 이익을 주고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것이다.

    1996년 10월 비상장기업인 에버랜드는 주당 8만5천 원대인 에버랜드 CB를 주당 7700원에 발행했다. 곧 이건희 등 개인주주와 중앙일보, 삼성물산 등 법인주주들이 실권한 뒤 실권주 125만4천 주를 이재용 부회장에게 배정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에버랜드 CB를 싼값에 산 뒤 주식으로 교환해 에버랜드 최대주주에 올랐다. 당시 에버랜드 이사진은 자사 지분 62.5%에 해당하는 CB를 96억 원에 발행했는데 이는 경영권 프리미엄에도 미치지 못하는 돈을 받고 이건희 자녀들에게 회사를 넘긴 셈이다.

    2007년 10월29일 삼성 법무팀장이었던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그룹 차명계좌에 들어있던 비자금 의혹을 제기했다. 이후 이건희 일가의 경영권 불법승계와 비자금 조성, 정관계 로비 의혹 등을 줄줄이 폭로했다. 이는 조준웅 특검의 ‘삼성특검’으로 이어졌고 삼성그룹과 이건희 등 오너일가는 강도높은 검찰수사를 받았다.

    2008년 4월 차명계좌가 적발되고 1천억 원대의 세금포탈 혐의가 드러나면서 이건희는 삼성 경영쇄신안을 발표했다. 삼성과 관련된 모든 직책을 내놓고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에게 경영권을 맡기면서 경영에서 퇴진했다. 증여세를 피하면서 삼성 그룹의 지분을 물려받으려 했다는 의심을 받은 이건희의 아들 이재용 부회장도 최고고객책임자(CCO)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건희는 배임과 조세포탈 등의 혐의로 불구속기소돼 2009년 8월 14일 파기환송심서 징역 3년, 집유 4년, 벌금 1100억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2009년 12월 대통령 특별 단독사면을 받아 2010년 삼성전자 회장으로 다시 경영일선에 복귀했다.

    경영권 불법승계 의혹과 관련해 대법원은 2009년 배임죄를 적용한 원심을 깨고 에버랜드 CB 저가 매각과 관련해 이건희에게 무죄를 선언했다. 

    △정경유착과 삼성X파일 사건
    이건희는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조성사건에 연루돼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았다. 이건희가 검찰에 출두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건희는 250억 원의 비자금을 제공한 혐의를 받았지만 검찰은 이건희를 불구속기소했다. “국내외 경제에 미치는 파장 등을 폭넓게 검토했다”는 게 이유였다.

    1996년 9월 이건희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항소를 포기했다. 하지만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지 1년 만인 1997년 개천절에 사면복권됐고 1998년 4월 경영에 복귀했다.

    2005년에는 이른바 ‘삼성X파일’ 사건이 터졌다. 삼성 임원진이 정치권과 검찰에 금품제공을 논의한 것이 녹음파일 형태로 폭로된 것이다. 이건희의 지시로 홍석현 전 중앙일보 사장이 대선자금을 나눠주는 심부름을 한 게 아니냐는 의혹도 일었다.

    당시 미국에 체류 중이던 이건희는 서면조사만 받고 무혐의처분을 받았다. 오히려 이 사건을 폭로한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검찰조사를 받고 사법처리됐다.

    △끊임없는 사망설
    이건희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직후부터 계속 언론 등을 통해 사망설이 흘러나왔다.

    2014년 한 매체는 ‘이건희 회장 5월16일 오전 사망’이라는 보도를 내놓았다. 2016년 6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건희의 사망설이 나와 한때 삼성전자 주가가 급등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2017년 8월 이재용 부회장이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 심리로 열린 삼성그룹 전직 임원들과 공판에서 “이건희 회장님이 살아계실 때부터”라고 말한 뒤 곧 “건재하실 때부터”라고 말을 정정한 뒤에도 사망설이 돌았다.

    삼성그룹 관계자들은 이건희의 건강상태에 이상이 없다며 사망설을 부인했다. TV조선의 ‘탐사보도 세븐’은 2017년 11월7일 이건희가 병실에서 TV를 보고 있는 모습을 포착했다며 관련 영상을 보도했다.

    △삼성 경영권과 유산상속 놓고 분쟁
    이병철 창업주의 셋째 아들인 이건희가 두 형을 제치고 삼성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은 배경을 놓고 다양한 관측이 나왔다. 첫째인 이맹희 전 CJ그룹 명예회장과 이창희 전 새한미디어 회장이 이병철 창업주를 고발한 사건이 원인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1966년 삼성그룹은 일본에서 사카린 원료 등을 밀수하다 적발됐다. 이병철 창업주는 이를 계기로 사임하며 비료공장을 국가에 헌납했고 이창희 전 회장이 법적 책임을 지며 구속됐다. 이맹희 전 명예회장이 이 때부터 삼성그룹 총수 대행을 맡아왔다.

    1969년 이병철 창업주와 삼성그룹의 비리를 고발하며 처벌을 요청하는 탄원서가 청와대에 제출됐다. 이병철 창업주는 이맹희 전 명예회장을 의심했고 이창희 전 회장도 용의선상에 올랐다. 이병철 창업주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이맹희 전 명예회장이 삼성그룹 직책을 대부분 포기하도록 하며 이창희 전 회장은 미국으로 떠나도록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통해 장남과 차남이 후계구도에서 멀어지며 이건희가 자연스럽게 경영권 승계자로 자리잡게 됐다는 관측이 가장 유력하다.

    이맹희 전 명예회장은 이건희와 재산상속 문제 등을 놓고 오랜 갈등을 빚은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이병철 창업주의 차녀 이숙희씨와 함께 이건희에 2012년 유산분할 청구소송까지 제기했다. 당시 이건희는 언론을 통해 “이맹희씨는 이미 우리 집에서 퇴출당한 양반인데 나와 아버지를 고발했다. 나를 쳐다보지도 못할 양반”이라며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였다.

    소송전은 결국 삼성그룹과 CJ그룹 차원의 문제로 번졌고 결국 이건희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이건희의 성매매 동영상 촬영을 주도한 인물이 CJ그룹 직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이 사건은 다시 주목받았다.

    ▲ 1970년대 중반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암수술을 받은 뒤 처음으로 야외에 모인 가족들. 왼쪽부터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이건희 회장, 이병철 창업주, 이명희 신세계 회장.

  • ◆ 경력

    1966년 중앙일보 산하 동양방송 이사로 입사했다.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을 맡았다가 1979년 삼성그룹 부회장으로 이동했다. 1987년 이병철 창업주가 사망한 뒤 삼성그룹 회장에 올랐다.

    1998년 삼성그룹 차원의 임원직을 폐지하며 삼성전자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했다.

    2008년 4월 삼성 비자금 사건과 조세포탈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면서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뒤 2010년 3월 삼성전자 회장으로 복귀했다. 회장직을 2017년 말 현재 아직 유지하고 있다.

    1981년 한일경제협회 부회장을, 198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을 맡았다.

    다양한 스포츠단체에서도 직책을 맡아왔다. 1982년부터 1997년까지 대한아마추어레슬링협회 회장을, 1982년부터 1993년까지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냈다. 1996년부터 2008년까지 국제올림픽위원을 맡았고 2011년부터 2017년까지 평창동계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고문을 맡았다.

    삼성생명공익재단과 삼성문화재단 이사장을 겸임하다 2015년 이재용 부회장이 넘겨받았다.

    ◆ 학력

    1947년 서울 혜화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대구를 거쳐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를 다녔다.

    1953년 일본 도쿄의 초등학교로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에서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서울 사대부속중학교에 편입했다.

    서울 사대부속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연세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자퇴한 뒤 1961년 아버지의 모교인 일본 와세다대학교로 옮겼다.

    1966년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영대학원(MBA) 석사과정을 마쳤다.

    ◆ 가족관계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아버지다. 법무부장관과 내무부장관을 역임한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의 장녀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리움 관장과 1967년 결혼했다.

    이건희는 25세의 나이로 미국 대학원을 마치고 일본으로 들어오자마자 홍진기 전 회장의 장녀인 홍 전 관장과 일본 호텔에서 맞선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홍 전 관장은 서울대 응용미술학과를 다니던 학생으로 이미 이병철 창업주와 홍진기 전 회장은 사돈이 되기로 합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건희와 홍 전 관장은 슬하에 장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대표이사 사장, 이서현 삼성물산 패션부문 사장을 두고 있으며 삼녀인 이윤형씨는 미국 유학 중 사망했다. 

    누나인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은 두을장학재단 이사장을 겸임하고 있다. 여동생은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이다.

    처남은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이다.

    큰형인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은 2015년, 둘째형인 이창희 전 새한미디어 회장은 1991년 사망했다.

    ▲ 이건희 회장이 부인 홍라희 전 리움 관장, 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손을 잡고 2014년 1월9일 오후 서울 중구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린 사장단 부부 초청 신년만찬회를 마친 후 호텔을 나서고 있다.

    ◆ 상훈

    1984년 대한민국 체육훈장 맹호장, 1986년 대한민국 체육훈장 청룡장, 1991년 IOC 올림픽훈장, 1993년 문화부장관 감사패, 1994년 한국무역학회 무역인대상, 1996년 한국능률협회 선정 ‘최고의 경영자상’, 200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2004년 홍콩 디자인경영자상 초대 수상, 2004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코망되르(3등급) 훈장 등을 수상했다.

    2005년 시사주간지 타임이 꼽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됐다. 

    2011년 ‘Around the Rings’ 에서 세계스포츠지도자 Golden 25 중 한 명으로 뽑혔다. 

    2013년 블룸버그가 선정한 기업경영부문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10인’ 가운데 한 명으로 꼽혔다.

    ◆ 기타

    정신질환을 사유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2017년 11월 블룸버그가 집계한 전 세계 부호 순위 37위에 올랐다.

    저서로 1997년 동아일보사가 출간한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가 있다.

  • ◆ 어록

    “앞으로 우리는 자만하지 말고 위기의식으로 재무장해야 한다.” (2013/10/28, 신경영 20주년 만찬에서)

    “취임 초 삼성이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절감해 신경영을 선언하며 낡은 관행과 제도를 과감하게 청산했다. 동참해준 임직원들에 깊이 감사드린다. 우리가 꿈꾸는 초일류기업의 모습은 어떠한 난관도 극복하고 부단히 성장하는 기업, 늘 활력이 샘솟는 창의적 기업, 고객과 주주는 물론 국민과 사회로부터 사랑받는 기업이다. 보다 멀리 보고 앞서 기회를 잡아 자랑스러운 초일류기업 삼성의 역사를 건설하는 주역이 되자.” (2011/11/30, 취임 25주년 기념식에서)

    “삼성의 깨끗하던 조직문화가 훼손됐다. 그룹에 퍼져 있는 부정을 뿌리뽑아라.” (2011년, 삼성테크윈의 경영진단 결과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2011년은 21세기 들어 새로운 10년이 또 시작되는 시기다. 더욱 정신을 차리고, 조금 더 긴장해서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앞으로 종종 (회사로) 나오겠다.” (2010/12/01, '자랑스러운 삼성인' 시상식에서)
     
    "10년 안에 삼성이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이 사라진다." (2011/01/04, 삼성그룹 신년 하례식에서) 

    “거짓말 없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정부는 투자하고 모두 열심히 일해야 하며 싸우면 절대 안 된다. 선친께서 우리 사회가 기억하는 큰 이정표를 남기신 것은 오로지 국민 여러분과 사회 각계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친의 유지를 변함없이 지켜 나갈 수 있도록 따뜻한 애정과 관심을 베풀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2010/02/06,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천재 한 사람이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 (2003/06/05, ‘인재경영’을 강조하며)

    “차세대 수익 사업이 무엇인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해결책은 알고 있다. 바로 5년, 10년 뒤 미래 사업을 발굴할 수 있는 능력의 핵심인재를 뽑으면 된다.” (2002/05, 연석회의에서)

    "마누라,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 2등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1993/06/17,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하며)

    “미래지향적이고 도전적 경영을 통해 1990년대까지는 삼성을 세계적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이다. 사회가 기대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봉사와 헌신을 적극 전개할 것이다.” (1987년, 호암아트홀에서 신임 회장 취임사를 하며)

    "위대하신 창업주를 여읜 슬픔을 딛고 일어나 삼성의 새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창업주의 유지를 받드는 길이다." (1987년, 호암아트홀에서 신임 회장 취임사를 하며)

    “1974년 마침 한국반도체라는 회사가 파산에 직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엇보다도 '반도체'라는 이름에 끌렸다. 시대 조류가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넘어가는 조짐을 보이고 있었고, 그 중 핵심인 반도체 사업이 우리 민족의 재주와 특성에 딱 들어맞는 업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젓가락문화권'이어서 손재주가 좋고, 주거 생활자체가 신발을 벗고 생활하는 등 청결을 중시한다. 이런 문화는 반도체 생산에 아주 적합하다. 반도체 생산은 미세한 작업이 요구되고 먼지 하나라도 있으면 안 되는, 고도의 청정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공정이기 때문이다.” (책 ‘황의 법칙’, 1974년 반도체사업을 시작하던 시기를 이건희가 회고하는 대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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