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Who Is ?]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이길여는 가천길재단 회장이다. 국내 주요 공익법인인 가천길재단을 통해 의료, 교육, 사회문화, 언론, 봉사 등에서 활발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가천길재단은 가천대학교, 가천대 길병원, 경인일보, 가천문화재단, 새생명찾아주기운동본부, 신명여고 등을 거느린 공익재단이다.

이길여는 가천대학교 총장과 가천대 길병원 이사장, 경인일보 회장을 함께 맡고 있다.

1932년 4월4일 전북 옥구군 대야면 죽산리(현 군산시)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일본 니혼대학교에서 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천에 개원한 24평짜리 작은 ‘이길여산부인과’를 모태로 의료법인 길의료재단을 설립하고 대학종합병원인 가천대 길병원을 일궈냈다.

가천문화재단과 가천학원을 설립한 데 이어 가천의과대학을 세웠고 가천길대학, 경원대, 경원전문대를 통합해 가천대학교로 키웠다. 가천은 이길여의 호다.

평생 독신으로 일과 봉사에 매진해 ‘건국 이래 가장 크게 자수성가한 여성 CEO’라는 평가를 받는다.

경영활동의 공과


△'가천프로젝트 2025'
2017년 이길여는 가천대의 중장기 발전전략을 준비하고 있다.

대학발전위원회를 중심으로 ‘가천 프로젝트2025’를 수립했다. 2025년까지 의료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우수학생을 키워내 4차산업혁명을 주도할 수 있는 대학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목표를 담았다.

지식과 정보 중심의 4차산업혁명에 대처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초일류 공익재단으로 나아가겠다는 비전을 선포했다.

△연구소를 통해 의료발전 견인
2000년대 초반부터 가천대 뇌과학연구원, 이길여암·당뇨연구원, 가천바이오나노연구원 등의 설립을 구상했다. 2006년 뇌과학 연구소가, 2007년 바이오나노연구원, 2008년 이길여암·당뇨연구원이 문을 열었다.

이곳에 이길여는 1800억 원 이상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3대 연구기관은 각각의 분야에서 약진하고 있으며 특히 뇌영상과 진단분야 등은 세계 유일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이길여는 “뇌를 손금 보듯 들여다보는 시대가 곧 열린다”며 인공지능(AI)분야와 의료분야의 시너지를 기대하고 있다.

뇌과학연구소에 세계적 물리학자인 조장희 박사를 초빙하고 가천 바이오 나노연구원에 노벨물리학수상자인 스티븐 추 박사를 영입했다.

△ 문화예술사업에 박차
이길여는 가천문화재단을 통해 인천지역의 학술연구와 전통문화사업을 지원한다.

가천문화재단 설립 20주년을 맞아 본격적으로 기부와 지원을 시작해 2017년 현재 20개 넘는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이 가운데 널리 알려진 것이 심청효행대상이다. 이 상은 효녀를 선정해 장학금 1천만 원을 지급한다. 다문화가정효부상은 한국남자와 결혼한 다문화가정 여성을 대상으로 한다.

△ 교육자 이길여
인재를 키우는 일에도 힘쓰고 있다.

총장 이길여는 학생들과 친밀하게 지낸다. 2016년 인천시 연수구 옥련동에 있는 자택의 앞마당을 개방했다. 학생 110여 명과 ‘제2차 총장과 함께 하는 바람개비 열린 독서 토론회’를 열어 학생들과 직접 대화하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 종합대학 가천대학교
1994년 경기간호전문대학교를 인수해 가천길전문대로 이름을 바꿔 대학설립의 발걸음을 시작했다.

1998년 후진 양성을 위해 가천의과대학을 세운 뒤 2005년 가천의대와 가천길대학을, 2006년 경원대와 경원전문대를 통합했으며 2011년 두 대학을 합쳐 사실상 4개 대학을 통합했다.

가천대는 입학 정원 4500명이 넘는 사립 종합대학이다. 보기드물게 의대, 한의대, 약대, 간호대를 모두 갖췄다.

이길여는 가천의과대학 설립 당시 입학생 전원에게 등록금 면제, 기숙사 제공 등의 혜택을 제공했다. 그는 2016년 11월 신동아와 인터뷰에서 "2015년 의학전문대학원에서 의과대학으로 전환한 뒤에도 의과대학 신입생에게 똑같은 혜택을 주고 있다"고 밝혔다.

△의료경영인
1978년 인천길병원을 세웠다. 개인이 종합병원을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사재를 출연해 법인을 만들었다. 한국 최초로 의료법인을 만든 여성 의사라는 기록을 세웠다. 인천길병원은 현재 5개의 종합병원과 1개의 한방병원으로 커졌다.

이길여는 상당히 저돌적인 스타일로 병원을 경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병원을 확장할 때 5년을 ‘승부기간’으로 삼는다. 5년 동안 적자를 감수할 수 있다고 판단하면 투자한다.

△ 언론사 사주
1999년 8월 경인일보를 인수했다. 경인일보의 본래 대주주는 성백응 삼보종합건설 회장이었는데 경영난에 빠지자 이길여가 70억 원을 주고 사들였다. 언론사의 사주가 된 것이다.

경인일보 인수와 함께 언론인들을 재단에 중용하기 시작했다. 이길여는 2012년 한 인터뷰에서 “기자 출신 인사는 사안의 핵심을 짚는 데 탁월하고 판단이 정확하고 빠르다”며 “앞으로 가천대 출신의 언론인이 더욱 늘어나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 가난한 환자들에 배려
1960년대 의료혜택의 한계 때문에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보증금 없는 병원'을 실현했다. 당시 병원에서 치료비를 떼일 것을 염려해 선불을 받는 일들이 많았다.

무의촌 주민들을 위해 섬 지역을 상대로 무료 의료봉사 활동을 정기적으로 펼쳤고 의료 취약지인 양평(1982년)과 철원(1988년), 백령도(1995년)에 적자를 감수하면서 길병원을 운영했다.

가천대 길병원은 1996년부터 16개국 400여 명의 해외 심장병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 선물하기도 했다. 이길여는 1983년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부부가 우리나라 어린이 2명을 초청해 심장병 수술을 해주는 걸 보고 감명 받아 ‘새생명찾아주기운동’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Who Is ?]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 길의료재단 실적.

비전과 과제/평가

◆ 비전과 과제

가천대를 글로벌 명문학교로 도약하도록 이끌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서 글로벌 감각과 어학능력이 필수라고 생각해 글로벌 교육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다. 가천대는 하와이가천글로벌센터를 글로벌교육의 전진기지로 삼고 있다.

앞으로 10대 사학을 넘어 5대 사학으로 도약하겠다는 포부도 갖고 있다.

이에 따라 대학 특성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가천대는 두 가지 의료과학분야를 비롯해 전략학문들을 세계 1위로 만들겠다는 G2 GL특성화 전략을 지속해오고 있다.

G2(Global Top2)는 대학의 강점분야인 뇌과학과 암 당뇨 2개 연구분야다. GL(Global Leader)은 소프트웨어와 바이오나노 등 미래전략 분야, 고령화시대에 대비한 보건인력 양성 등 미래 성장동력분야의 인재로 이 분야의 인재다. 이길여는 이 분야의 인재를 키우는 학문을 집중육성하려고 한다.

◆ 평가

이길여는 여성리더로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박인숙 당시 새누리당 의원은 2013년 이길여를 인생의 스승으로 여긴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박 의원은 “이길여 총장은 우리나라 최고의 여걸이다. 통도 크고 용감해 원하는 일은 다 성취한다. 인재영입의 귀재이신데다 대학도 성공적으로 키우셨고 정말 놀라운 능력을 지녔다”고 말했다.

의료계에서 이길여는 의사와 경영자로서 모두 성공한 롤모델로 불린다.

영화배우 정준호씨는 하와이 호텔사업을 가천대에 매각할 당시 이길여를 만난 뒤 인재를 발굴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길여 스스로는 ‘멈추기를 거부하는 바람개비’라고 표현한다. 어릴 적 바람개비를 유난히 좋아했는데 바람이 잦아들 때면 쉼없이 달려 바람개비를 힘차게 돌렸다. 그는 ‘거센 바람이 불어와도 바람개비처럼 당당하게 맞선다’는 바람개비 정신을 늘 강조한다. 길병원 로비에 큰 바람개비를 설치했다.

모교 대야초등학교에 가면 ‘탁구할머니’로 불린다. 초등학교 탁구부 전용 실내체육관을 짓고 선수단 전용버스도 마련해줬다. 해마다 훈련비도 댄다.

'여자 정주영'이라는 별명도 지녔다. 열정과 도전의 일생을 그렇게 요약한 것이다.

이길여는 동안으로도 유명하다. 노인이라고 보기 어려운 고운 피부에 목소리도 카랑카랑하고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자세가 꼿꼿하다. 하루도 빠짐없이 한 시간 이상 걸으면서 자기관리를 한다.

호는 가천이다. ‘嘉(가)’는 ‘길(吉)이 스무 번(十十)이나 더(加)해진다’는 의미로 정신문화연구원장을 지낸 류승국 박사가 지어줬다.

새참광주리에 밥은 없고 놋수저만 가득한 꿈이 태몽이었다.

어릴 적부터 아픈 동물을 치료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장티푸스에 감염된 친한 친구가 갑자기 죽는 모습을 보고 생명에 대한 경외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를 이후 의사의 길로 이끌었다.

이길여의 어머니는 셋째를 임신했으나 자궁외임신으로 수술을 해 아이를 더 낳을 수 없게 됐다. 이길여는 아들을 낳지 못해 멸시를 당하면서 살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1948년 35세의 아버지가 급성폐렴으로 치료 한번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면서 의사로 꿈을 굳혔다.

이길여는 의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1951년 전쟁의 와중에 서울대 의대에 합격했다. 대학을 마치고 전북 군산으로 내려가 세계평화봉사단에서 의료봉사로 의사 생활을 시작했다. 거기서 영국인 의사 골든을 만났는데 환자를 배려하고 치료에 헌신하는 모습에 감명받았다.

이길여는 졸업식 때마다 새내기 의사가 된 제자들 목에 청진기를 걸어준다. 체온으로 데운 청진기로 진찰하면 환자들이 놀라지 않았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환자 처지에서 생각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Who Is ?]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 2009년 이명박 대통령이 과천시 국립 과천과학관에서 열린 제42회 과학의 날 기념식에 참석해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뉴시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64년 미국 메리이머큘리트병원에서 인턴을 거쳐 1965년 레지던트로 1968년까지 근무했다.

1978년 길의료재단을 설립했다.

1982년 6월부터 198년 5월까지 한국여자의사회 회장을 역임했다.

1991년 11월 가천문화재단을 설립해 이사장이 됐다.

1992년 5월 새생명찾아주기운동본부를 설립하고 이사장이 됐다.

1995년 3월부터 2005년 4월까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동창회 회장을 맡았다.

1994년 12월 가천학원 이사장을 맡았다.

1995년 10월 가천박물관, 1998년 3월 가천의과대학교를 설립했다.

1998년 12월부터 2000년 8월까지 경원학원 이사장을 맡았다.

1998년 8월 경인일보 회장으로 취임했다.

2000년 8월부터 2012년 2월까지 경원대학교 총장으로 일했다.

2001년 8월부터 2003년 7월까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여성부의장을 맡았다.

2002년 3월부터 가천길재단 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2003년 10월부터 2007년 12월까지 대한의사협회 한국의학 100주년 기념사업 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다. 2003년 12월부터 2004년 7월까지 중앙인사위원회 인사정책자문회의 의장을 맡았다.

2007년 10월부터 2008년 8월까지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2008년 10월부터 길의료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2010년부터 가천미추홀청소년봉사단 총재로 일하고 있다.

2011년 8월부터 대한민국 의학한림원 명예회원이다. 2011년 11월부터 2012년 12월까지 서울대학교 이사를 지냈다.

2012년 3월 가천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했다.

2014년 5월 경인지역 대학총장협의회 회장이 됐다.

◆ 학력

1951년 서울대학교 의대에 입학해 1957년 졸업했다.

1975년부터 니혼대학교 대학원에서 의학 박사과정을 밟았고 1977년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단국대학교에서 교육학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카이스트에서 이학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이귀례 한국차문화협회 이사장이 언니다. 이귀례씨는 슬하에 아들 최승헌 가천대 교수와 최소연 한국차문화협회 이사장, 최미리 가천대 기획부총장, 사위 이승복 제넥스팜 회장, 이창규 철원 길병원장, 이태훈 의료원장을 뒀다.

아버지는 방앗간을 운영했다.

이길여는 평생 독신이다.

◆ 상훈

1985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1993년 제29회 용신봉사상, 1997년 제2회 자랑스런 전북인대상을 받았다.

2003년 3월 홍라희 호암미술관장과 함께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으로 선정됐다. 서울대학교 총동창회에선 제5회 관악대상도 받았다.

2003년 4월 제31회 보건의 날 기념식에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2006년 서울대총동창회에서 유공동문상을 받았다. 한국경영인협회 대한민국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상도 받았다.

2007년 제8회 함춘대상 사회공헌부문 대상과 한국언론인연합회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을 받았다.

2009년 교육과학기술부 과학기술훈장 창조장, 몽골 최고훈장인 ‘훙테트 템데그 의료훈장‘, 제3회 성산효행대상을 받았다. 제12회 효령상 사회봉사부문도 받았다.

2010년 제1회 인천사랑 대상을 받았다.

2011년 여성신문 올해의 인물상과 한국과학기자협회 우남 과학진흥상을 받았다.

2012년 미국 ‘뉴스위크’의 ‘2012 세계를 움직이는 여성 150’에 선정됐다. 재단법인 인촌기념회와 동아일보사가 수여하는 ‘인촌상’(공공봉사부문)도 받았다.

2013년 하와이한인회 하와이 이민 110주년 기념식 공로패를 받았다. 포브스(Forbes) 선정 아시아 기부 영웅 48인에 올랐다.

2015년 키르기스스탄 아틀리치니크 즈드리바 아흐라네니야 보건의료훈장을 받았다.

2016년 한국여자의사회 공로상, 특별기여상을 받았다. 대한민국 사회공헌 명예의전당 선정 노블레스 오블리주 명예의전당에 올랐다. 여성 권익과 지위 향상을 위해 헌신해온 공로로 YWCA 선정 제14회 한국여성지도자상 대상을 받았다.

2017년 1월16일 ‘대한민국을 생각하는 호남미래포럼’에서 ‘대한민국을 빛낸 호남인상’을 받았다.
[Who Is ?]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
▲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2011 여성신문 신년하례식이 열린 가운데 '올해의 인물'로 선정 된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뉴시스>

◆ 기타

이길여의 재산은 아직 제대로 공개된 적이 없다.

2008년 ‘간절히 꿈꾸고 뜨겁게 도전해라’는 자서전을 펴냈고 2012년 공익경영 십계명을 담은 ‘아름다운 바람개비’라는 책도 내는 등 집필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어록


“대학을 둘러싼 교육환경이 출산감소, 인구절벽 등으로 인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대학이 위기라는 말은 사치스러운 비관론이 아니다. 위기와 시련을 극복하고 도약해온 우리 대학의 역사를 바탕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해 글로벌 명문으로 날아오르자.” (2017/5/8, 개교기념식에서)

“연구력이 뛰어난 교수들이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제도를 신설했다. 교수들의 연구역량 촉진으로 경쟁력을 강화하고 대학의 사회적 책임을 다해 나갈 것이다.” (2017/5/3, 연구우수제도의 운영을 시작하며)

“어렸을 때 시골에서 할머니와 어머니가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보고 자랐다. 길병원이 설립한 가천누리가 장애인 이웃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줄 수 있어 무척 뿌듯하다. 직원들이 하나같이 다 밝고 그 부모님들의 만족감이 큰 것으로 알고 있다. 가천길재단의 가족인 가천누리가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 (2017/4/20, 장애인의 날에 가천누리 사무실을 방문해)

“지난해 인턴십에 참가한 학생들은 실리콘밸리에서 배운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스타트업 창업, 해외MBA 진학, 현지취업에 나서고 있다. 이번 파견생들도 많은 경험과 도전정신을 배워오길 바란다.” (2017/1/10, 실리콘밸리 인턴십 프로그램에 재학생 9명을 파견하며)

“현대의학은 하루 사이에 새로운 의료기술이 개발될 정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좋은 의료기술이 있다면 빨리 받아들여야 경쟁력도 생긴다. 왓슨은 1200만 쪽 이상의 전문자료와 290종의 의학저널 등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환자에게 적합한 해결책을 빠르게 도출해낸다.” (2016/12/21, 왓슨 도입 후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가천대의 강점은 can do(할 수 있다) 정신이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출발도 하기 전에 실패는 예견된 것이다.”

“인공지능(AI)을 의료에 접목하는 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흐름을 빨리 읽고 선봉에 선다면 처음 길을 가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노하우를 습득하게 된다.”

“1958년 개원 직후 환자가 구름떼처럼 몰렸다. 서울에서 온 젊은 처녀가 진료한다는 소문에 구경 삼아 온 이들도 있을 만큼 화제였다. 그만큼 병원과 의사를 접하기 힘든 시대였다. 국내 의료환경이 매우 열악해 특별한 사명감과 희생정신이 없고선 의사 가운을 입을 수 없는 시대였다.”

“제가 하는 일에 공감하는 분이 많아지면서 박애, 봉사, 애국이란 가천길재단의 정신도 점점 공감의 폭을 넓혀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요즘 많은 분이 나눔과 돌봄을 얘기하는데 이는 곧 희망의 증거가 아닐까. 나누는 봉사의 정신과 공존의 정신은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2016/11/24, YWCA 선정 한국여성지도자상 대상 수상 후 신동아와 인터뷰에서)

“환자들은 내게 애인이고 가족이었다. 밥을 안 먹어도 배불렀고, 잠을 안 자도 정신이 맑았다. 내 나이 스물예닐곱. 여기저기서 맞선을 보라고 성화였다. 하지만 그럴 시간이 있으면 환자 한 분이라도 더 돌보고 싶었다. 서른 넘어 뉴욕 유학시절, 재미교포사업가와 한동안 데이트를 즐겼다. 그와 함께 뉴욕센트럴파크에서 나란히 누워 밤하늘의 별을 헤고, 새벽이슬 맞을 때까지 춤도 췄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가 청혼을 했지만 난 거절했다. 난 한 남자의 아내로 머무를 수 없었다. 나에겐 수많은 환자들이 있었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그들에게 아내와 엄마 노릇을 해야 했다.”

“내 모토는 박애 봉사 애국이다. 나누고 베풀면 행복하다. 그건 나를 위한 것이다. 6·25전쟁 때 나보다 몇 배나 훌륭한 학우들이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난 그들 몫까지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부채의식이 있다. 그게 애국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자신만 생각한다. 난 돈에 대해선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이 살아왔다. 그저 내 몸을 던져 환자를 치료했을 뿐이다.

난 많은 돈이 필요 없다. 자식이나 남편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병원은 이길여의 것이 아니라 환자들의 것이다. 유서를 통해 모든 것을 재단에 귀속시킬 것이다. 내 꿈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아직 한참 멀었다.” (2014/7/5,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

“우리 대학은 통합 이후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교육전문가들도 발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대학으로 꼽고 있으며 학부모와 학생들의 신뢰도가 높아지고 있다. 학교 위상이 높아지면서 국내외 유명 대학이나 기관과의 교류도 크게 늘었다.” (2012/8/6, 내일신문과 인터뷰에서)

“할머니는 남존여비 사상에 젖은 고루한 분이셨다. 딸 낳았다고 어머니를 많이 구박했다. 그렇지만 한 편으로 개척정신이 강하고 집안을 일으키는데 열성이었다. 내 자식이 반경 10리 안에서 남의 땅 밟지 않고 다니게 하겠다고 했고 실제 땅을 사들여 그렇게 했다. 우리는 비교적 부유한 집에서 자랄 수 있었다. 나를 강하게 키운 건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그 당시에도 만주까지 친구들과 관광을 다녀올 정도로 배포 큰 여자였다.”

“나는 성공이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매 순간 행복했다고 생각한다. 내 인생의 어느 순간을 잘라놓고 보아도 행복하고 만족하고 후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행복하다. 이렇게 인터뷰 하는 순간도.”

“젊은이들에게 점을 찍고 가라, 아무렇게나 살지 마라, 성공하려면 4시간 이상 잠자지 마라, 그렇게 말하고 싶다. 시대가 아무리 달라졌다고 해도 그건 여전히 유효하다. 열정을 갖고 도전하는 인생은 언제나 멋지다는 것 말이다.” (2011/5/30,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처음엔 산부인과 환자만 봤다. 그러다보니 한계가 보이더라. 환자는 내 가족이라 생각하니 환자의 남편, 시아버지가 병에 걸리면 고쳐주고 싶고 이러다보니 자연히 종합병원을 생각하게 된 거다. 병원도 더 크게 짓고 의료기기도 더 첨단으로 갖추게 되고, 이렇게 자꾸 일이 커진 것 같다.”

“비록 지금은 새우잠을 자더라도 꿈은 고래의 꿈을 꾸십시오.” (2010/12/25, 여성신문과 인터뷰에서)

“경인일보가 경인지역 문화창달에 기여해 지역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큰 몫을 담당할 것을 기대한다.” (1999/11/2, 경인일보 취임식에서)

“다시 태어나도 여자로, 의사로 태어나고, 결혼하지 않겠다.” (‘간절히 꿈꾸고 뜨겁게 도전해라’ 자서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