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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 유승민 바른미래당 공동대표

이규연 기자
2017-02-09   /  09:2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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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승민 바른미래당 공동대표.
    ◆ 생애

    유승민은 바른미래당 공동대표다.

    경제학자 출신의 국회의원이며 바른정당의 대선후보를 지냈다.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고 주장하는 등 보수진영에서 상대적으로 개혁적 성향이 강하다.

    '자존심 있는 정통 보수'를 주장하며 보수표를 결집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1958년 1월7일 경상북도 영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위스콘신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나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발을 디딘 뒤 대구 동을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두 번 당선된 3선의원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맡았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였지만 박 대통령과 갈등으로 새누리당을 탈당했다. 그해 총선에서 대구 동구을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새누리당으로 복귀했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벌어진 뒤 다시 탈당했다.

    바른정당 창당에 참여하고 대선출마를 선언했다. 남경필 경기도지사와 경쟁해 바른정당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2018년 2월 바른미래당 창당에 따라 박주선 의원과 공동대표를 맡았다.

    ◆ 가족관계

    아버지 유수호 전 의원과 어머니 강옥성씨의 2남1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은 유승정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다.

    유 전 의원은 판사 출신으로 대구 중구에서 제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2016년 11월에 타계했다.

    유승민은 2017년 1월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노태우 전 대통령과 경북고등학교 동기인 인연으로 국회의원이 됐지만 정치가 체질에 별로 안 맞는다고 했다”며 “나도 아버지의 성질을 많이 닮아 정치가 체질에 별로 안 맞지만 아버지보다는 맞는 셈이다”고 말했다.

    유승민은 아버지에게 ‘절대 비굴하지 말고 의협심이 늘 있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던 점에 정치인으로서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고 밝혔다.

    누나로 유진희씨가 있다. 김진기 전 대구고등법원장이 유승민의 매부다.

    배우자 오선혜씨 사이에서 1남1녀를 뒀다. 딸 유담씨가 2016년 4월 총선 당시 유승민의 유세를 지원했는데 미모로 화제를 모았다. 유승민은 2017년 2월 JTBC의 프로그램 ‘썰전’에서 딸이 대선 유세에는 참여하지 않을 것이며 여론에 오르내리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밝혔다.

    ◆ 학력

    1970년 삼덕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73년 대륜중학교를 졸업했다.

    1976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82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3년 미국 위스콘신주립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갔다.

    1987년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 경력

    1982년 1월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원으로 들어와 1983년 7월까지 일했다. 그 뒤 미국 위스콘신주립대학교로 유학하면서 1984년 9월~1987년 5월 동안 조교를 맡았다.

    1987년 12월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으로 돌아와 2000년 2월까지 일하면서 선임연구위원에 올랐다.

    1994년 5월~1995년 5월 한국산업조직학회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1996년 3월~1997년 3월 미국 UC샌디에이고 IR/PS대학원에서 초빙교수를 맡았다.

    1998년 4월~1998년 9월 공정거래위원장 자문관을 역임했다.

    1998년 5월~1999년 9월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이 됐다.

    2000년 2월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총재의 제안을 받아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으로 온 뒤 2003년 6월까지 일했다.

    2003년 3월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연구교수를 맡아 2011년 5월까지 일했다.

    2004년 4월에 열린 총선에 한나라당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해 제1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2005년 10월 비례대표 의원에서 사퇴하고 재선거에 참여해 대구 동구을에서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뒤 2008년 5월29일까지 일했다.

    17대 국회 당시 국회에서 2004년 7월~2005년 4월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2004년 5월~2006년 6월 정무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한나라당 안에서는 2004년 6월~2005년 1월 제3정조위원장, 2005년 1월~2005년 10월 대표최고위원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2005년에 한나라당 대표비서실장으로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를 보좌하게 됐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당내경선 당시 박근혜 캠프에서 정책메시지 총괄단장으로 일했다.

    2008년 4월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 동구을에 출마해 제 18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18대 국회에서 2008년 4월 혁신도시건설촉진 국회의원 모임 간사, 2008년 9월 국방위원회 한나라당 간사, 2008년 9월~2009년 4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2009년 6월 군용비행장 문제해결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 2010년 6월 국방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당시 한나라당 안에서는 2010년 7월~2011년 6월 대구시당 위원장, 2011년 7월~2011년 12월 최고위원을 역임했다. 한나라당이 2012년 2월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면서 새누리당 의원이 됐다.

    2012년 4월 제19대 총선에서 대구 동구을에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하면서 3선 의원이 됐다. 

    19대 국회에서 2012년 7월~2014년 5월 국방위원회 위원장, 2014년 6월~2015년 3월 외교통일위원회 위원, 2015년 2월~2015년 7월 국방위원회 정보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그때 새누리당 안에서는 2015년 2월~2015년 7월 원내대표를 맡았다. 2016년 3월 박근혜 대통령 측과 갈등을 빚어 탈당하면서 무소속 국회의원이 됐다.

    2016년 4월 제20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대구 동구을에 출마해 당선하면서 4선 의원이 됐다. 20대 국회에서 기획재정위원회 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2016년 6월에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의 결정으로 여당에 복귀해 12월까지 남아 있었다가 박근혜 게이트 이후 탈당해 다른 탈당세력과 함께 2017년 1월 바른정당을 창립했다. 그 뒤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남경필 경기도지사와 경쟁하게 됐다.

    2018년 2월 바른미래당 창당에 따라 박주선 의원과 함께 공동대표를 맡았다.

    ◆ 사건/사고

    △ 박근혜 게이트와 대선후보 유승민
    2016년 10월 박근혜 게이트가 불거지자 유승민은 한때 ‘친박’이었던 만큼 박 대통령의 2선후퇴 등 정치적인 해법을 주장했다.

    그러나 최순실씨의 국정개입이 다방면에서 이뤄진 사실이 확인되고 11월12일 박 대통령의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시위에 100만 명 이상이 모이자 “대통령도 당도 모든 것을 던져버려야 할 때”라며 박 대통령의 탄핵 추진으로 선회했다.

    2016년 11월21일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 남경필 경기도지사 등 새누리당의 비주류인사 80여 명과 비상시국회의를 연 뒤 “박 대통령의 탄핵절차에 곧바로 착수해야 한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자 친박계 의원들이 유승민에게 결별선언을 하면서 친박-비박 갈등은 극대화됐다.

    유승민은 결국 12월27일 다른 비주류 의원들과 새누리당을 탈당해 개혁보수신당(이후 바른정당으로 이름 확정)을 창당했다.

    유승민은 바른정당의 유력한 대선후보로 떠올랐지만 야권 후보들과 비교해 지지율이 낮은 것이 약점이다. 1월26일 대선출마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경제대통령’을 천명하면서 경제위기와 안보위기 극복을 주요 공약으로 제시했다. 1월30일 “문재인 후보를 상대로 승리할 보수후보로 단일화 노력을 하는 일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밝히며 새누리당과 후보단일화를 추진할 뜻을 내비쳤다.

    △ 2016.4.13 총선
    2016년 2월 총선 공천과정에서 유승민 등이 ‘공천 살생부’에 포함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3월15~16일 새누리당 공천결과 친유승민계 의원들 상당수가 탈락했지만 유승민의 공천 여부는 결정되지 않았다.

    이한구 새누리당 공천관리위원장이 23일 유승민의 자진사퇴를 촉구하고 이날도 공천이 이뤄지지 않았다. 총선후보 등록일이 24일이라 23일이 지나면 선거법상 무소속 출마도 불가능한 상황이 됐다.

    결국 유승민은 23일 밤 11시에 “진박계가 부끄럽고 시대착오적인 정치보복을 했다”며 새누리당 탈당과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새누리당은 대구 동구을에 공천을 하지 않았다. 그 뒤 유승민은 무소속으로 출마한 친유승민계 의원들을 지원하면서도 선거 이후 복당을 신청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2016년 4월13일 총선에서 유승민이 대구 동구을 의원으로 당선했지만 그가 지원했던 친유승민계 의원들은 대부분 쓴잔을 마셨다. 4월19일 새누리당에 복당원서를 냈다. 새누리당 안에서는 유승민 등의 복당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어났지만 결국 6월16일 유승민의 복당을 허용했다.

    △ 박근혜 대통령이 규정한 ‘배신의 정치’
    2005년 초에 한나라당 대표비서실장을 맡으면서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친정체제 구축에 한몫을 한 것으로 평가됐다. 2005년 3월 열린우리당에서 추진했던 행정도시특별법의 찬성 여부를 놓고 박 대표와 반대파 의원들이 충돌해 한나라당 안에서 내분이 일어났을 때도 박 대표의 뜻을 사실상 대변하는 역할을 맡았다.

    2005년 10월 재선거 당시 비례대표 의원에서 사퇴하고 대구 동구을에 출마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사였던 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과 맞붙으면서 ‘노무현 대 박근혜’의 대리전 양상을 보이게 됐다. 유승민이 이 전 수석과 접전을 벌이자 박 대표와 이회창 전 총재 등이 대구를 찾아 지지행사에 참여한 끝에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됐다.

    박 전 대표가 2007년 대선에 나섰을 때 핵심적인 경제참모로 꼽혔다. 2007년 1월부터 자문그룹 8개를 이끌면서 그룹별 정책을 조율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 8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한나라당 경선에서 대선후보로 확정된 뒤에도 박 전 대표의 측근인사로 남았다.

    2008년 4월 제18대 총선을 앞두고 친박계 인사들이 한나라당 공천에서 대거 탈락했을 때도 대구 동구을에서 다시 공천을 받았다. 박 전 대표 등의 지원을 받은 끝에 18대 국회의원으로 재선했다. 그 뒤 여당 의원인데도 혁신도시와 세종시 문제 등에서 이명박 정부에 대립각을 세우는 일이 잦았다.

    2010년에는 박 전 대표에게 경제정책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꼽히기도 했다. 2011년 11월 한나라당에서 평생맞춤형 복지와 무상급식의 단계적인 확대를 뼈대로 한 ‘박근혜식 복지’를 당론으로 채택했는데 유승민의 의견이 상당부분 반영됐다.

    2011년 12월 한나라당 최고위원에서 사퇴하면서 박 전 대표가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쇄신을 이끌게 됐다. 한나라당은 2012년 2월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꿨는데 유승민이 당원들의 동의 없이 당명을 바꿨다고 비판하면서 당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과 사이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유승민은 당시 “박근혜 비상위원장과 대화할 때 한계를 느낀다”며 “쓴소리도 만나야 하는데 만나기는커녕 전화통화도 어렵다”고 밝혔다.

    2012년 4월에는 성추행 사건에 연루된 김형태 당선자를 처리하는 문제를 놓고 서울경제신문과 인터뷰에서 “박 위원장이 좋은 보좌를 받지 못해 판단에 문제가 있다”고 말해 논란이 커졌다. 박 위원장이 “사실이 아닌 왜곡된 말이 만들어져 당 안에 떠돌아다니고 확대재생산되고 있다”고 간접적으로 경고하기도 했다.

    2012년 7월 당시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대선캠프를 차렸는데 유승민이 빠지면서 사이가 이전보다 멀어졌다는 관측이 나왔다. 그러나 박근혜 후보가 ‘안철수 열풍’ 등으로 지지율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2012년 9월 선거대책위원회에 부위원장으로 합류했다. 당시 박 후보가 늦은 저녁에 유승민의 장모 상가에 직접 찾아가는 등 영입에 공을 들였다.

    2012년 10월에 유승민이 제기한 친박 2선 후퇴와 당 지도부의 사퇴 등을 놓고 박 후보가 “위기상황일 때는 당이 항상 시끄러웠다”고 대응하면서 시각차이가 나타났다. 박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에도 첫 고위 당정청 워크숍에서 당시 유민봉 국정기획수석의 ‘창조경제’와 국정철학 설명방식에 “지금 뭐하는 거냐”고 항의하는 등 갈등을 노출했다.

    2014년 12월 정윤회씨의 비선실세설이 나왔을 때 매일신문과 인터뷰에서 “2004년 초 당시 박근혜 의원실에 갔다가 정씨로 추정되는 사람이 있는 걸 본 적이 있지만 정식으로 만난 적은 없다”고 말했다.

    2015년 2월 ‘신박’으로 분류되던 이주영 의원을 꺾고 새누리당 원내대표로 선출됐을 때 ‘유승민의 승리가 아닌 박근혜의 패배’라는 평가가 일각에서 나왔다. 원내대표로 취임하자마자 박근혜 정부의 ‘증세 없는 복지’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며 법인세 인상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청와대의 인사쇄신을 요구했다.

    2015년 5월 유승민은 세월호특별법 시행령을 수정할 수 있도록 국회법 개정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공무원연금법안을 처리하기로 야당과 합의했다. 새누리당 의원총회의 이견에도 불구하고 유승민은 세월호특별법 시행령 수정원안의 통과를 추진했고 결국 통과됐다.

    김성우 청와대 홍보수석은 2015년 5월29일 “세월호특별법 시행령을 수정하기 위한 국회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은 헌법상 삼권분립에 위배된다”고 밝혔다. 당내에서도 친박계 의원들이 위헌이라고 반발하면서 유승민의 사퇴를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유승민은 야당과 협의해 국회법 개정안을 일부 고친 중재안을 내놓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2015년 6월25일 중재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배신의 정치’를 거론해 사실상 유승민을 불신임했다. 유승민은 2015년 7월 초까지 원내대표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고 버텼지만 7월8일 새누리당 긴급 의원총회에서 사퇴권고 결과가 나오자 이를 받아들여 물러났다.

    야당 측은 “유승민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밉보인 죄로 쫓겨났다”며 “대한민국 헌정사에 전무후무한 일이다”고 비판했다.

    2015년 11월에 유승민이 예정했던 영남대학교 특강이 학교 측의 요청으로 갑자기 취소되는 일이 발생했다. 비슷한 시기에 유승민의 아버지인 유수호 전 의원이 별세했는데 박 대통령은 조화를 보내지 않았다.

    △ 김무성 수첩 사건
    2015년 1월 당시 박관천 경정이 청와대의 비밀문건을 유출했다는 파동이 일어났을 때 당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수첩에 ‘청와대 문건 파동 배후는 K와 Y, 내가 꼭 밝힌다. 두고 봐라. 곧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메모가 있는 것으로 언론에 보도됐다. 그 뒤 K가 김 대표 자신, Y는 당시 차기 원내대표 후보였던 유승민으로 밝혀졌다.

    여권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준석 전 새누리당 비대위원과 음종환 청와대 홍보기획비서실 행정관 등이 2014년 12월18일에 술자리에 참석했는데 이때 음 행정관이 김 대표와 유승민을 청와대 문건유출 파동의 배후로 지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음 행정관은 즉각 부인했지만 파문이 커지자 사표를 냈다. 음 행정관은 ‘친박 보좌관’으로 꼽혔다.

    유승민은 즉각 “내가 청와대 문건유출 파동의 배후라는 보도는 근거 없는 소문을 기초로 한 것”이라며 “나는 문건유출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청와대 행정관이 유승민을 문건유출 파동의 배후로 지목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박근혜 대통령과 갈등도 더욱 커진 것으로 평가된다.

    △ 보좌관의 향응 문제
    2013년 2월 새누리당의 전현직 국회의원 보좌관들이 대구 테크노파크로부터 골프접대 등 향응을 제공받은 혐의로 경찰의 조사를 받았는데 유승민의 보좌관 박모씨도 포함됐다.

    2월14일 박 보좌관의 사표를 수리하고 사과문을 발표했다. 사과문에서 “정치에 입문한 이래 13년 동안 깨끗한 정치를 해왔다고 자부했으나 보좌관의 처신에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라며 “지역 주민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밝혔다.

    △ 논문 중복게재 의혹
    2012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이승천 민주통합당 대구 동구을 후보가 유승민이 한국개발연구원에서 일하던 시절 논문을 중복게재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똑같은 논문을 1989년 11월과 1992년 9월에 두차례 발표했다는 것이다.

    유승민은 즉각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을 이후에 출판하는 책에 포함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흔한 일”이라며 “서울대학교의 연구윤리지침에도 ‘논문에서 발표한 연구결과를 모아 저서로 출간하는 경우는 이중게재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고 반박했다.

    △ 호남비하 발언현장에 참석
    2006년 11월 강동순 방송위원회 상임위원, 신현덕 전 경인TV 대표 등과 서울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열린 술자리에 함께 참석했는데 이때 강 위원이 “호남이 다 썩은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야기에 휩쓸렸다”, “납치 사건 때 DJ를 죽이지 못한 것이 잘못이다” 등 호남 지역을 비하하고 정치적으로 편향된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의 녹취록이 2007년 4월에 공개되면서 그 자리에 참석했던 유승민도 논란의 대상이 됐다.  녹취록에 따르면 유승민도 당시 현장에서 KBS의 관리직 노조가 법원의 판단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을 듣자 판사의 이름을 물어본 것으로 알려졌다. 열린우리당에서는 강 위원의 사퇴를 요구하는 동시에 유승민을 국회 윤리위원회에 제소했다.

    △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중립성 논란
    한나라당 초선의원 시절인 2004년 10월에 경제인문사회연구회 및 소관연구기관 국정감사에서 본래 몸담고 있던 한국개발연구원의 연구원인 장하원 박사가 열린우리당 정책실장으로 갔는데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고 휴직 중이라는 이유로 한국개발연구원의 정치적 중립성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당시 김중수 한국개발연구원장은 국회의장의 요청에 따라 장 박사를 국회에 일시적으로 파견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유승민은 “장 박사가 열린우리당의 핵심 당직에 임명된 것은 여러 언론을 통해 알려진 사실”이라며 “정치활동을 하고 있는데 한국개발연구원에서 사표를 받지 않은 채 무급휴직으로 처리한 점은 정치적인 중립을 훼손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장하원 박사는 장하성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교수의 친동생이다.

    △ 장하성 교수와 정책논쟁
    2002년 10~11월에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으로서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의 대선캠프에서 일할 때 이 총재와 노무현 당시 민주당 후보의 경제정책을 놓고 장하성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교수와 논쟁했다.

    장 교수는 2002년 10월에 언론기고를 통해 이 총재가 출자총액제한, 증권집단소송, 계열분리명령 등을 폐지하거나 반대하는 내용의 경제정책을 추진하는 점이 지나치게 재벌 친화적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유승민은 장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재벌 출신인 정몽준 후보의 정책부터 검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장 교수가 2002년 11월에 다시 언론기고를 통해 유승민의 주장을 재반론하면서 논쟁이 지속됐다. 유승민은 조선일보를 통해 2차 반론을 내놓았는데 이때 "노무현 후보는 ‘재벌해체론자’"라고 주장했던 대목이 실제 지면에서 삭제돼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 상훈

    1982년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공로상을 받았다.

    1986년 미국 위스컨신 주립대학교 대학원 재학시절 Distinguished Teaching Assistant 상을, 1987년 Dissertation Travel Fellowship을 받았다.

    1991년에 국무총리 표창과 경제기획원장관 표창을 각각 받았다.

    2004년 바른사회시민회의에서 국정감사 정무위원회 우수의원으로 뽑혔다.

    2008년 국정감사 NGO모니터당에서 국정감사 우수의원으로 선택됐다.

    2009년 제11회 백봉 라용균선생 기념사업회에서 백봉 신사상을 수상했다.

    2010년 바른사회시민회의에서 선정한 ‘바른사회를 지키는 아름다운 사람’ 우수의정활동부문에 올랐다. 그해 국정감사 NGO모니터단에서도 국정감사 우수의원으로 선택됐다.

    2011년 국정감사 NGO모니터단에서 국정감사 우수의원으로 선정했다.

    2013년 제15회 백봉 라용균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백봉 신사상을 수상했다.

    2014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회에서 선정한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 우수의원이 됐다. 그해 국정감사 NGO모니터단에서 국정감사 우수의원으로 선택했으며 제16회 백봉 라용균 선생 기념사업회에서도 백봉 신사상을 탔다.

    2015년 머니투데이에서 주최한 제1회 대한민국 최우수법률상을 수상했다. 그해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에서 뽑은 국정감사 우수의원에 올랐다. 제17회 백봉 라용균 선생 기념사업회의 백봉 신사상 대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2016년 제18회 백봉 라용균 선생 기념사업회의 백봉 신사상 대상을 탔다.

    ◆ 어록

    “대통령이 된다면 기자회견을 아마 자주 하게 될 것이다. 지금도 언론에 나서면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밝힌다. 나는 그렇게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아니다. 있는 대로 내 생각을 이야기하고 질문을 중간에 자르지도 않고 끝까지 다 받는다. 그런 부분은 지금까지 충실하게 해 왔다.” (2017/02/08, SBS ‘주영진의 뉴스브리핑’에 출연해)

    “2005년에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일했을 때는 대통령이 되기에 부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당시 정책적 능력은 부족하지만 기본과 원칙은 잘 잡혀 있으며 깨끗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2007년 대선후보 경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여러 일들 때문에 국가의 지도자로서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그때는 호랑이 등에 올라타서 경선을 끝까지 도왔고, 그 이후부터 멀어지게 됐다.” (2016/02/02, JTBC ‘썰전’에 출연해 유시민 작가, 전원책 변호사와 대담하면서)

    “학생들의 꿈이 건물주가 되는 것인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 이제 우리는 한국을 ‘창업하고 싶은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서울 신림동 고시촌과 노량진 고시학원이 실리콘밸리와 같은 창업의 요람이 되는 시대를 열어야 한다.” (2017/02/05, 창업활성화에 중점을 둔 ‘혁신성장 1호 공약’을 발표하면서)

    “많은 대통령 후보들 가운데 경제전문가는 내가 유일하다. 경제위기를 막는 대수술을 하는 의사가 되겠다.” (2017/01/26, 대선출마를 공식적으로 선언하면서)

    “영국의 보수정치 이론가인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혁명이라는 게 올바른 관습이나 전통, 질서까지도 다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보면서 영국이 어떻게 프랑스 대혁명 같은 것을 피하면서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런 것이 보수의 정신이다.” (2017/01/02,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2007년 대선캠프에 정책메시지 총괄단장으로 참여했을 때 연설문을 미리 써서 줬는데 완전히 다른 연설을 한 경우가 있기는 했다. 2007년에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을 때 선언문이 그랬다.” (2016/10/31,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최순실씨가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문을 손봤다는 사실을 놓고)

    “대구는 눈이 귀한 곳인데, 그저께 눈이 왔다. 봄이 곧 올 것이다. 앞만 보고 뛰겠다. 결과는 대구 시민, 동구 주민들이 결정해 줄 것이다. 거리에서, 시장에서 주민들의 손을 잡으면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의 무거움을 절감하고 있다.” (2016/02/01,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4.13 총선 예비후보로 등록한 소감을 밝히며)

    “신부님과 신자 앞에서 거짓말 절대 안 한다. 나는 박 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이 되길 누구보다 바라는 사람이다. 내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많이 했다는데 다 세어보면 몇 번 안했다. 내가 좀 까칠하고 말할 때 덜 굽히고 매너가 부족하며 말이 거칠 수는 있지만 성공한 대통령이 되라고 말한 것으로 앞으로도 나는 그렇게 하겠다.” (2015/10/16, 대구 계산성당에서 열린 ‘대구, 개혁의 중심이 되자’ 특강에서)

    “거취 문제의 혼란으로 국민이 실망하게 만든 점은 내 책임이다. 새누리당 원내대표 자리를 끝내 던지지 않았던 것은 법과 원칙 그리고 정의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정치 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의 길로 가겠다는 약속을 아직 지키지 못했지만 더 절실한 마음으로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길로 계속 가겠다.” (2015/07/08, 새누리당 원내대표에서 사퇴하면서)

    “상을 받을 줄 알았는데 벌을 받고 있다.” (2015/06/24, 동아일보 기사에서 동료 의원들과 식사하던 도중 했다고 나온 말, 박근혜 정부의 최대 과제로 꼽혔던 공무원연금법안을 처리했지만 세월호특별법 시행령 수정을 위한 국회법 개정안도 함께 통과시켰다가 청와대와 갈등을 빚자)

    “현장에 다녀보면 대기업과 재벌의 논리대로 따를 수 없다. 폐지를 주워 팔아 겨우 먹고사는 어르신들을 지역구 현장에서 보면 ‘어떻게 정부가 이렇게 방치할 수 있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2015/02/07,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 2011년 한나라당 전당대회 때부터 노동과 복지 이슈에서 ‘좌클릭’을 하게 된 이유로)

    “"증세를 만약 한다면 당연히 가진 자한테 세금을 더 부과하는 증세가 돼야 한다.” (2015/02/03, CBS라디오 ‘박재홍의 뉴스쇼’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과거보다는 조금 멀어졌지만 대통령에 대해 정치적, 인간적으로 신의를 지키고 있다. 퇴임 이후 등 어떠한 경우에도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2015/01/04, 영남일보와 인터뷰에서)

    “국가안보실장, 외교장관, 통일장관, 비서실장이 다 모여서 기껏 짜낸 꾀가 이것밖에 안 되나, 그렇게 나이브(순진)하나. 우리가 북한 측에 대통령의 면담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 어떻게 대통령의 면담 카드를 그렇게 싸게 쓰느냐, 잘못된 것이 아니냐.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대통령의 예방 문제와 관련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순진하게 제안을 하고 무시를 당하느냐. 보좌하는 사람들이 잘못한 것 아니냐.” (2014/10/08, 국정감사에서 북한 측 ‘실세 3인방’이 남한에 왔지만 청와대 방문을 거부한 점을 놓고 당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 등 국가안전보장회의 구성원들을 비판하면서)

    “이거 누가 하는 건가. 청와대 ‘얼라’들이 하는 건가? 지금이라도 국방부나 외교부 등을 중심으로 박근혜 정부가 일관된 국가안보전략을 작성해야 한다. 그런 것이 없으니 대통령이 미국에 갔을 때 ‘중국 경도론’ 관련 자료가 나온 것이다. 미국과 중국에 관련된 한국의 포지션은 넣었다 뺐다 장난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우리의 생존이 걸린 문제다.” (2014/10/07, 국정감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뉴욕 유엔총회 방문기간에 발언자료로 사전에 배포됐다가 박 대통령이 언급하지 않아 취소된 ‘중국 경도론’과 관련된 내용을 비판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주변 사람들이 잘못된 정책으로 대통령을 잘못 이해시키고 있다. 그러나 청와대에서 다 하고 있어 뭐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이를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시점도 놓쳤다. 이제는 비판하면 총구를 거꾸로 하고 내 편을 쏘는 것처럼 되버려서 한 마디도 하기 힘들다.” (2013/12/29, 머니투데이 기사에서 당시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던 수서발 KTX 자회사 설립을 반대하며)

    “김대중, 노무현 진보정권 10년을 겪은 뒤 이명박 대통령이 쉽게 당선됐다. 이명박 정부 5년이 성공을 못하고 실패했다는 평가가 많은데, 그럼에도 보수에 5년간 더 기회를 준 것이다. 국민들이 ‘박근혜’라는 새 인물에 대한 기대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따라서 다시 이명박 정부 5년과 같은 실정을 되풀이할 경우 이번이 지나면 보수는 끝이다. 또 박근혜 당선인을 지지하지 않은 48%의 목소리를 포용하고 통합하라, 이런 것도 국민의 명령이다. 48% 중에 상당수의 마음을 잡을 수 있는 정치, 정책이 매우 중요하고, 그게 성공의 키가 될 것이다.” (2013/01/01, 영남신문과 인터뷰에서)

    “박근혜 후보의 텃밭인 대구에서조차 소위 친박계나 박 후보의 주변이 부패해 있고 낡은 이미지의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는 반발이 있다. 반전을 위한 모든 카드를 백지상태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박 후보 스스로도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2012/10/04, 매일신문과 인터뷰에서 당시 박근혜 대선후보를 제외한 당 지도부 등의 사퇴를 요구하며)

    “이번 출마 선언문은 박 전 위원장이 직접 쓴 흔적이 역력하다. 2007년에는 보수 성향이 짙었지만 이번에 제안한 경제민주화에는 진정성이 깃들었다고 할 수 있다.” (2012/07/23, 주간동아 기사에서 당시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7월10일 내놓은 대선출마 선언문을 평가하며)

    “종북, 친북, 좌경화 세력의 의견은 철저히 배제하되 너무 ‘수구꼴통’처럼 보이지 않도록 전향적인 의견과 대책을 제시해 새누리당을 믿도록 만들겠다.” (2012/07/06, 국회 국방위원장으로 당선된 뒤 소감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를 보면서 민주당이 얼마나 비민주적인 정당인지 절감하고 있다. 만약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처음 추진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살아 있었다면 저렇게 할 수 있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11/11/14, 국회 최고위원회의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안 처리를 반대하는 민주당을 비판하며)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내 관계는 내가 그동안 할 말을 다했고 쓴소리도 다 했던 관계다. 내가 무슨 박 전 대표의 대리인이나 하수인과 같은 관계가 아니다.” (2011/06/28, 한나라당 당대표선거를 앞두고 열린 내부 토론회에서 지나치게 ‘친박’이라고 지적되자)

    “옳은 길이라면 민주당을 따라하는 것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 민생 문제에 좌우가 있을 수 없다. 그동안 한나라당은 중산층 이상과 대기업만을 옹호하는 모습으로 국민들에게 인식됐기 때문에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더 강력한 친서민 정책이 추진돼야 한다.

    한나라당이 막대한 재원이 드는 4대강이나 감세 문제를 밀어붙이면서 무상급식, 무상보육, 기초생활자 지원 문제 등을 등한시하니 국민들이 실망을 느낀 것이다. 한나라당이 서민들의 편이라는 것을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 확실히 보여줘야 한다.” (2011/06/23, 한나라당 당대표선거에 출마했을 때 한국경제와 인터뷰에서)

    “4대강 사업에 22조원을 쓰면서 결식아동과 비정규직을 위한 예산이 없다는 것은 보수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내 공약에 관해 큰 틀에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도 공감할 것이다.” (2011/06/21, 한나라당 당대표선거에 출마했을 때 내일신문 기사에서)

    “천안함 침몰이 북한의 소행일 경우 외교적·국제법적 검토는 외교부나 통일부에서 하고 국방부는 군사적 제재·응징 수단을 검토하는 게 상식적인 나라 아닌가.” (2012/04/15, 국회 국방위원회에 있었을 때 천안함이 침몰한 뒤 북한의 소행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자 당시 김태영 국방부 장관에게 군사적인 조치를 요구하면서)

    “노무현 정권에서는 행복도시, 혁신도시가 지방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 아닐지라도 고육지책으로 그것이라도 했는데 이명박 정부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2008/11/01, 이명박 정부가 수도권 규제 완화를 추진하자 반발하며)

    “12월 대선까지는 내 이미지에 신경쓸 생각이 없다. 내 장사는 안 한다. 대선 승리가 중요하다. 정치판의 3D(더럽고 어렵고 위험한) 업종도 누군가는 해야 하지 않은가.” (2007/07/21, 중앙선데이와 인터뷰에서 당시 이명박 전 서울시장 측의 대선후보 검증에 앞장서면서 ‘정책통’ 이미지가 훼손됐다고 지적받자)

    “대운하 공약은 누가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되더라도 공약이 될 수도 없고 돼서도 안 된다. 낙동강 바닥을 파고 시멘트를 발라서 운하를 만드는 방식으로 21세기 한국 경제를 살린다는 것은 국민을 속이는 거짓말이다.” (2007/04/25, 한 방송과 인터뷰에서 당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대운하 공약을 비판하며)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이제 대답을 해야 한다. ‘예스’든 ‘노’든 대답을 해야 국민의 의혹이 해소되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끌고 갈 것이며 언제까지 계속 웃기만 할 것인가.” (2007/02/21, 당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국회의원 시절 비서였던 김유찬씨에게 선거법 위반과 관련해 위증을 교사했다는 의혹을 받자 해명해야 한다고 촉구하며)

    “노무현 대통령이 제안하는 권력이양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다. 국민의 편 가르기에 ‘도사급’인 인사가 무슨 연정을 하겠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2005/07/28,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의하자 부정적으로 반응하며)

    “‘박심’은 없다. 그렇지 않아도 당이 난리인데 박근혜 대표가 움직이면 어떻게 되겠느냐.” (2005/03/07, 한나라당의 2005년 3월11일 원내대표 경선을 앞두고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의중이 작용할 가능성을 기자로부터 질문받자)

    “재정건전성을 고려하지 않은 정부지출 확대보다 감세가 필수적이다. 단기적으로 불가피한 세수감소는 예산편성과 연계해 풀어나가면 된다.” (2004/08/09,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경제 관련 3개특별위원회 합동 기자간담회에서 적극적인 예산편성을 요구한 것을 반박하며)

    “노무현 정권이 우리 경제에 해를 끼친 사례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노 대통령이야말로 악정(惡政)의 굿판을 거둬야 한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수도 이전은 가장 악랄한 형태의 지역주의이자 포퓰리즘이며 분열주의에 불과하다. 이제는 충청까지 지역주의의 포로로 만든 게 바로 수도 이전이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이런 얼빠진 초대형 토목공사에 국력을 탕진한 나라치고 잘된 나라가 없었다.” (2004/07/13,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대정부질문에서 노무현 정권을 비판하면서)

    “섭섭한 것은 순간이지만 실리는 오래간다는 생각에서 전국구를 받았다.” (2004/06/14, 매일신문과 인터뷰에서 아버지 유수호 전 의원의 지역구인 대구 중남구에 출마하는 대신 비례대표 후보로 나서 당선된 이유로 공천 과정의 아쉬움을 들며)

    “시장은 부실기업을 이미 판정했다. 연쇄도산과 실업 증가 등의 후유증이 있겠지만 정리할 것은 과감하게 정리해야 한다.” (2000/11/02, 김대중 정부에서 퇴출기업을 발표하기 직전)

    ◆ 평가

    한국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출신의 경제학자다. 학자로서 시장친화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정치인으로서는 국내 보수진영 일반과 비교하면 중도파로 불린다.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시절 “재벌은 환란의 종범이고 주범은 시스템의 위험을 방치한 정부”라며 지배구조 개편 등을 통한 강력한 재벌개혁을 주장했다. 그러나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은 반대해 보수주의 경제학자로 분류됐다.

    기획력이 좋고 ‘마당발’로 소문날 정도로 친화력도 뛰어나다. 특별한 조직이나 팀을 만드는 것보다는 사안별로 인맥을 통해 접근하는 쪽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논리력이 뛰어나고 정책과 관련된 아이디어를 풍부하게 내 책사 역할을 주로 맡았다. 다만 2014년 이후 ‘할 말은 한다’는 이미지가 덧붙여지면서 보스형 정치인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지나치게 학구적이고 상대를 자극하는 발언을 한다는 평가도 있다.

    한나라당 시절 원칙이 아닌 것과 쉽게 타협하지 않는 사람으로 평가돼 ‘미스터 쓴소리’라는 별명도 얻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였을 때부터 측근인사였지만 그때도 박 대통령에게 직언할 만큼 까칠하고 꼿꼿한 면이 있다고 평가됐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요청으로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을 맡으면서 측근인사로 평가됐다. 이 전 총재에게 ‘경제 과외’를 수시로 해줬으며 남덕우 전 총리 등 전직 경제관료들도 직접 섭외했다. 이 전 총재의 국회연설이나 기자간담회 등에서 경제와 관련된 연설원고 초안을 종종 집필했다.

    이 전 총재가 2002년 대선에 출마했을 때는 대선캠프에서 전략(정책공약담당)팀장으로 일했다. 당시 대부분의 정책공약을 직접 검토하면서 ‘이회창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으로 꼽혔다. 캠프 인사들 가운데 이 전 총재와 가장 자주 독대해 ‘이회창 회장의 유승민 비서실장’이라는 농담이 돌기도 했다.

    이 전 총재가 대선에서 떨어진 뒤 정계은퇴를 선언했을 때 기자회견문을 직접 쓰면서 전날 밤을 새웠다. 대선에서 떨어진 뒤에도 일주일에 2~3차례 서울 옥인동에 있던 이 전 총재의 집을 찾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총재는 2017년 1월26일 유승민의 대선 출정식에 참여해 지지를 선언했다.

    2004년 17대 국회의원으로 선출됐을 때부터 대구경북(TK) 출신 정치인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이때 감사원과 혁신위원회를 ‘무식한 기관’으로 표현하고 ‘한국판 뉴딜 정책’ 등 노무현 대통령과 당시 정부의 경제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 때문에 한나라당에서 비교적 중도성향인 의원들의 모임인 ‘국민생각’ 구성원이었는데도 보수파로 일각에서 분류하기도 했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측 진영에 섰을 때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후보자격 검증을 촉구하고 독설을 자주 해 ‘저격수’로 불리기도 했다.

    토론을 잘 한다. 유시민 작가가 열린우리당 의원이었던 2005년 3월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유승민 의원은 상대의 말을 잘 이해하고 논지를 잘 펼치며 알면서 거짓말하는 방식의 논쟁을 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2017년 2월2일 JTBC ‘썰전’에서 서로의 자녀 이야기를 하면서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유시민 작가와 국회의원 시절 종종 부딪치기도 했다. 유 작가가 열린우리당 의원이었던 2005년 10월 유승민은 대구 동구을 재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비례대표 의원직을 사퇴했다. 이때 유시민 작가는 국회에서 사퇴안을 의결하기에 앞서 “17대 국회의원이 17대 국회의원이 되려고 17대 국회의원직을 내놓는 게 말이 되느냐”며 부결을 주장했다. 

    같은 한국개발연구원 출신인 이혜훈 바른정당 의원과 2007년부터 비슷한 정책기조를 유지하면서 ‘환상의 혼합복식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도 절친한 대학교 선후배 사이로 알려졌다. 유 부총리가 유승민의 서울대 경제학과 1년 선배다. 유 부총리가 유치송 전 의원의 장남이라 ‘정치인 2세’라는 공통점도 있다.

    이준석 바른정당 당협위원장이 2004년 유승민 의원실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이준석 위원장의 아버지가 유승민과 경북고등학교 동기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경환 의원,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 강석훈 의원과 함께 ‘친박계 위스콘신 4인방’으로 불렸다. 네 명은 모두 미국 위스콘신주립대학교를 나왔다.

    김인규 한림대학교 교수와 매우 친하다. 한국개발연구원 동료였으며 김 교수와 친분으로 유승민이 한림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하기도 했다.

    국내 보수진영에서는 비교적 복지친화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00년대 초에 한국 사회의 주류세력을 ‘중도보수세력’으로 규정한 적도 있다. 현재의 캐치프레이즈도 ‘따뜻한 보수’다. 유승민은 2017년 1월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2011년까지 경제학자이자 현실 정치인으로서 지역구에서 많은 사람들과 직접 만났다”며 “그때 양극화 문제가 한국의 공동체를 완전히 박살낼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라고 우려하게 됐다”고 밝혔다.

    박근혜 대통령이 200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밀린 뒤 한동안 국회 상임위원회 활동에만 치중해 ‘은둔자’나 ‘자폐증’으로 불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2011년 7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 당대표후보로 출마해 투표율 2위로 최고위원이 되면서 중앙정치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2011년 7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 당대표후보로 출마했을 때부터 ‘좌클릭’을 했다고 평가된다. 당시 무상급식 찬성, 추가감세 철회, 청년의무고용제 도입 등을 공약으로 발표해 당시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로부터 공개적인 칭찬을 받았다.

    반면 최고위원이 된 뒤 한나라당 내부에서 유승민이 ‘포퓰리즘’ 정책을 주장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2011년 8월에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실시를 놓고 찬반 주민투표를 추진했을 때도 당시 남경필 최고위원과 함께 끝까지 반대했다. 2011년 11월에 한나라당의 당론으로 ‘부자증세’ 카드를 제시한 적도 있다.

    2011년까지만 해도 박근혜 대통령을 정치적인 동지로 부르는 등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다만 그때도 얼굴을 붉혀 가면서 할 말은 하는 사람으로 평가됐고 결국 2012년부터 사이가 다소 멀어지면서 ‘탈박’으로 불렸다.

    보수주의를 ‘지키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는 한국의 헌법 가치, 따뜻한 공동체를 세우고 붕괴를 막는 것, 안보 등 3가지를 보수주의자가 지켜야 할 가치로 제시했다.

    이명박 정부 당시 국회 국방위원회에 소속됐을 때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 사태 등에서 북한에 강경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도 안보만큼은 가장 보수적인 인사로 자칭하고 있다.

    2014년 9월 ‘거리의 인문학자’로 알려진 인터넷 정치논객 최준영씨가 여야의 차기 대권주자로 꼽히는 정치인들을 한줄로 평가했는데 유승민은 ‘여권의 히든카드’로 묘사됐다.

    2015년 들어 노동과 복지 분야에서 비교적 중도적인 성향을 나타내면서 야당 의원들에게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와 박근혜 대통령 등의 연설문을 종종 썼다. 최순실 게이트가 일어난 뒤 전여옥 전 한나라당 의원이 한 인터뷰에서 “유승민이 쓴 연설문이 ‘모처’에 다녀오면 걸레가 돼 돌아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유승민은 “전 전 의원의 말은 많이 과장됐다”고 해명했다.

    이재명 성남시장과 인명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등으로부터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에 유승민의 책임도 일부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 기타

    불교 신자다. 불교를 믿는 국회의원들의 모임인 ‘정각회’ 구성원이다.

    좌우명은 ‘초지일관(初志一貫), 불요불굴(不撓不屈)’이다.

    ‘나누면서 커간다’(1996.03.01), ‘한국 기업의 운명을 바꿀 21세기 미래경영’(2000.04.25), ‘재벌 과연 위기의 주범인가’(2000.06.21) 등 책 3권을 저술했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영국의 보수정치 이론가인 에드먼드 버크와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를 들었다. 에드먼드 버크가 프랑스 대혁명 이후 영국 사회가 혁명의 혼란없이 안정적으로 발전할 방향을 고민한 점을 존경한다고 밝혔다. 대처 전 총리의 경우 정책보다는 지도자로서 보여준 강단과 의지를 존경한다고 했다.

    2004년 6월 이재오 나경원 홍준표 의원 등 22명과 함께 한나라당 의원들로 구성된 극단 ‘여의도’의 창단에 참여했다.

    2015년 11월 페이스북을 시작했다.

    윤동주 시인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시로 ‘서시’와 ‘별 헤는 밤’을 들었다.

    가수 가운데 김광석과 조용필을 좋아한다.
  • ◆ 평가

    한국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출신의 경제학자다. 학자로서 시장친화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정치인으로서는 국내 보수진영 일반과 비교하면 중도파로 불린다.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시절 “재벌은 환란의 종범이고 주범은 시스템의 위험을 방치한 정부”라며 지배구조 개편 등을 통한 강력한 재벌개혁을 주장했다. 그러나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은 반대해 보수주의 경제학자로 분류됐다.

    기획력이 좋고 ‘마당발’로 소문날 정도로 친화력도 뛰어나다. 특별한 조직이나 팀을 만드는 것보다는 사안별로 인맥을 통해 접근하는 쪽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논리력이 뛰어나고 정책과 관련된 아이디어를 풍부하게 내 책사 역할을 주로 맡았다. 다만 2014년 이후 ‘할 말은 한다’는 이미지가 덧붙여지면서 보스형 정치인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지나치게 학구적이고 상대를 자극하는 발언을 한다는 평가도 있다.

    한나라당 시절 원칙이 아닌 것과 쉽게 타협하지 않는 사람으로 평가돼 ‘미스터 쓴소리’라는 별명도 얻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였을 때부터 측근인사였지만 그때도 박 대통령에게 직언할 만큼 까칠하고 꼿꼿한 면이 있다고 평가됐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요청으로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을 맡으면서 측근인사로 평가됐다. 이 전 총재에게 ‘경제 과외’를 수시로 해줬으며 남덕우 전 총리 등 전직 경제관료들도 직접 섭외했다. 이 전 총재의 국회연설이나 기자간담회 등에서 경제와 관련된 연설원고 초안을 종종 집필했다.

    이 전 총재가 2002년 대선에 출마했을 때는 대선캠프에서 전략(정책공약담당)팀장으로 일했다. 당시 대부분의 정책공약을 직접 검토하면서 ‘이회창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으로 꼽혔다. 캠프 인사들 가운데 이 전 총재와 가장 자주 독대해 ‘이회창 회장의 유승민 비서실장’이라는 농담이 돌기도 했다.

    이 전 총재가 대선에서 떨어진 뒤 정계은퇴를 선언했을 때 기자회견문을 직접 쓰면서 전날 밤을 새웠다. 대선에서 떨어진 뒤에도 일주일에 2~3차례 서울 옥인동에 있던 이 전 총재의 집을 찾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총재는 2017년 1월26일 유승민의 대선 출정식에 참여해 지지를 선언했다.

    2004년 17대 국회의원으로 선출됐을 때부터 대구경북(TK) 출신 정치인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이때 감사원과 혁신위원회를 ‘무식한 기관’으로 표현하고 ‘한국판 뉴딜 정책’ 등 노무현 대통령과 당시 정부의 경제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 때문에 한나라당에서 비교적 중도성향인 의원들의 모임인 ‘국민생각’ 구성원이었는데도 보수파로 일각에서 분류하기도 했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측 진영에 섰을 때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후보자격 검증을 촉구하고 독설을 자주 해 ‘저격수’로 불리기도 했다.

    토론을 잘 한다. 유시민 작가가 열린우리당 의원이었던 2005년 3월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유승민 의원은 상대의 말을 잘 이해하고 논지를 잘 펼치며 알면서 거짓말하는 방식의 논쟁을 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2017년 2월2일 JTBC ‘썰전’에서 서로의 자녀 이야기를 하면서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유시민 작가와 국회의원 시절 종종 부딪치기도 했다. 유 작가가 열린우리당 의원이었던 2005년 10월 유승민은 대구 동구을 재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비례대표 의원직을 사퇴했다. 이때 유시민 작가는 국회에서 사퇴안을 의결하기에 앞서 “17대 국회의원이 17대 국회의원이 되려고 17대 국회의원직을 내놓는 게 말이 되느냐”며 부결을 주장했다. 

    같은 한국개발연구원 출신인 이혜훈 바른정당 의원과 2007년부터 비슷한 정책기조를 유지하면서 ‘환상의 혼합복식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도 절친한 대학교 선후배 사이로 알려졌다. 유 부총리가 유승민의 서울대 경제학과 1년 선배다. 유 부총리가 유치송 전 의원의 장남이라 ‘정치인 2세’라는 공통점도 있다.

    이준석 바른정당 당협위원장이 2004년 유승민 의원실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이준석 위원장의 아버지가 유승민과 경북고등학교 동기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경환 의원,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 강석훈 의원과 함께 ‘친박계 위스콘신 4인방’으로 불렸다. 네 명은 모두 미국 위스콘신주립대학교를 나왔다.

    김인규 한림대학교 교수와 매우 친하다. 한국개발연구원 동료였으며 김 교수와 친분으로 유승민이 한림대학교에서 교수로 일하기도 했다.

    국내 보수진영에서는 비교적 복지친화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00년대 초에 한국 사회의 주류세력을 ‘중도보수세력’으로 규정한 적도 있다. 현재의 캐치프레이즈도 ‘따뜻한 보수’다. 유승민은 2017년 1월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2011년까지 경제학자이자 현실 정치인으로서 지역구에서 많은 사람들과 직접 만났다”며 “그때 양극화 문제가 한국의 공동체를 완전히 박살낼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라고 우려하게 됐다”고 밝혔다.

    박근혜 대통령이 200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밀린 뒤 한동안 국회 상임위원회 활동에만 치중해 ‘은둔자’나 ‘자폐증’으로 불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2011년 7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 당대표후보로 출마해 투표율 2위로 최고위원이 되면서 중앙정치에 화려하게 복귀했다.

    2011년 7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 당대표후보로 출마했을 때부터 ‘좌클릭’을 했다고 평가된다. 당시 무상급식 찬성, 추가감세 철회, 청년의무고용제 도입 등을 공약으로 발표해 당시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로부터 공개적인 칭찬을 받았다.

    반면 최고위원이 된 뒤 한나라당 내부에서 유승민이 ‘포퓰리즘’ 정책을 주장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2011년 8월에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실시를 놓고 찬반 주민투표를 추진했을 때도 당시 남경필 최고위원과 함께 끝까지 반대했다. 2011년 11월에 한나라당의 당론으로 ‘부자증세’ 카드를 제시한 적도 있다.

    2011년까지만 해도 박근혜 대통령을 정치적인 동지로 부르는 등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다만 그때도 얼굴을 붉혀 가면서 할 말은 하는 사람으로 평가됐고 결국 2012년부터 사이가 다소 멀어지면서 ‘탈박’으로 불렸다.

    보수주의를 ‘지키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는 한국의 헌법 가치, 따뜻한 공동체를 세우고 붕괴를 막는 것, 안보 등 3가지를 보수주의자가 지켜야 할 가치로 제시했다.

    이명박 정부 당시 국회 국방위원회에 소속됐을 때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 사태 등에서 북한에 강경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도 안보만큼은 가장 보수적인 인사로 자칭하고 있다.

    2014년 9월 ‘거리의 인문학자’로 알려진 인터넷 정치논객 최준영씨가 여야의 차기 대권주자로 꼽히는 정치인들을 한줄로 평가했는데 유승민은 ‘여권의 히든카드’로 묘사됐다.

    2015년 들어 노동과 복지 분야에서 비교적 중도적인 성향을 나타내면서 야당 의원들에게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와 박근혜 대통령 등의 연설문을 종종 썼다. 최순실 게이트가 일어난 뒤 전여옥 전 한나라당 의원이 한 인터뷰에서 “유승민이 쓴 연설문이 ‘모처’에 다녀오면 걸레가 돼 돌아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유승민은 “전 전 의원의 말은 많이 과장됐다”고 해명했다.

    이재명 성남시장과 인명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등으로부터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에 유승민의 책임도 일부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 사건/사고

    △ 박근혜 게이트와 대선후보 유승민
    2016년 10월 박근혜 게이트가 불거지자 유승민은 한때 ‘친박’이었던 만큼 박 대통령의 2선후퇴 등 정치적인 해법을 주장했다.

    그러나 최순실씨의 국정개입이 다방면에서 이뤄진 사실이 확인되고 11월12일 박 대통령의 탄핵을 요구하는 촛불시위에 100만 명 이상이 모이자 “대통령도 당도 모든 것을 던져버려야 할 때”라며 박 대통령의 탄핵 추진으로 선회했다.

    2016년 11월21일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 남경필 경기도지사 등 새누리당의 비주류인사 80여 명과 비상시국회의를 연 뒤 “박 대통령의 탄핵절차에 곧바로 착수해야 한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자 친박계 의원들이 유승민에게 결별선언을 하면서 친박-비박 갈등은 극대화됐다.

    유승민은 결국 12월27일 다른 비주류 의원들과 새누리당을 탈당해 개혁보수신당(이후 바른정당으로 이름 확정)을 창당했다.

    유승민은 바른정당의 유력한 대선후보로 떠올랐지만 야권 후보들과 비교해 지지율이 낮은 것이 약점이다. 1월26일 대선출마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경제대통령’을 천명하면서 경제위기와 안보위기 극복을 주요 공약으로 제시했다. 1월30일 “문재인 후보를 상대로 승리할 보수후보로 단일화 노력을 하는 일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밝히며 새누리당과 후보단일화를 추진할 뜻을 내비쳤다.

    △ 2016.4.13 총선
    2016년 2월 총선 공천과정에서 유승민 등이 ‘공천 살생부’에 포함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3월15~16일 새누리당 공천결과 친유승민계 의원들 상당수가 탈락했지만 유승민의 공천 여부는 결정되지 않았다.

    이한구 새누리당 공천관리위원장이 23일 유승민의 자진사퇴를 촉구하고 이날도 공천이 이뤄지지 않았다. 총선후보 등록일이 24일이라 23일이 지나면 선거법상 무소속 출마도 불가능한 상황이 됐다.

    결국 유승민은 23일 밤 11시에 “진박계가 부끄럽고 시대착오적인 정치보복을 했다”며 새누리당 탈당과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새누리당은 대구 동구을에 공천을 하지 않았다. 그 뒤 유승민은 무소속으로 출마한 친유승민계 의원들을 지원하면서도 선거 이후 복당을 신청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2016년 4월13일 총선에서 유승민이 대구 동구을 의원으로 당선했지만 그가 지원했던 친유승민계 의원들은 대부분 쓴잔을 마셨다. 4월19일 새누리당에 복당원서를 냈다. 새누리당 안에서는 유승민 등의 복당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어났지만 결국 6월16일 유승민의 복당을 허용했다.

    △ 박근혜 대통령이 규정한 ‘배신의 정치’
    2005년 초에 한나라당 대표비서실장을 맡으면서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친정체제 구축에 한몫을 한 것으로 평가됐다. 2005년 3월 열린우리당에서 추진했던 행정도시특별법의 찬성 여부를 놓고 박 대표와 반대파 의원들이 충돌해 한나라당 안에서 내분이 일어났을 때도 박 대표의 뜻을 사실상 대변하는 역할을 맡았다.

    2005년 10월 재선거 당시 비례대표 의원에서 사퇴하고 대구 동구을에 출마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사였던 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과 맞붙으면서 ‘노무현 대 박근혜’의 대리전 양상을 보이게 됐다. 유승민이 이 전 수석과 접전을 벌이자 박 대표와 이회창 전 총재 등이 대구를 찾아 지지행사에 참여한 끝에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됐다.

    박 전 대표가 2007년 대선에 나섰을 때 핵심적인 경제참모로 꼽혔다. 2007년 1월부터 자문그룹 8개를 이끌면서 그룹별 정책을 조율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 8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한나라당 경선에서 대선후보로 확정된 뒤에도 박 전 대표의 측근인사로 남았다.

    2008년 4월 제18대 총선을 앞두고 친박계 인사들이 한나라당 공천에서 대거 탈락했을 때도 대구 동구을에서 다시 공천을 받았다. 박 전 대표 등의 지원을 받은 끝에 18대 국회의원으로 재선했다. 그 뒤 여당 의원인데도 혁신도시와 세종시 문제 등에서 이명박 정부에 대립각을 세우는 일이 잦았다.

    2010년에는 박 전 대표에게 경제정책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꼽히기도 했다. 2011년 11월 한나라당에서 평생맞춤형 복지와 무상급식의 단계적인 확대를 뼈대로 한 ‘박근혜식 복지’를 당론으로 채택했는데 유승민의 의견이 상당부분 반영됐다.

    2011년 12월 한나라당 최고위원에서 사퇴하면서 박 전 대표가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쇄신을 이끌게 됐다. 한나라당은 2012년 2월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꿨는데 유승민이 당원들의 동의 없이 당명을 바꿨다고 비판하면서 당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과 사이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유승민은 당시 “박근혜 비상위원장과 대화할 때 한계를 느낀다”며 “쓴소리도 만나야 하는데 만나기는커녕 전화통화도 어렵다”고 밝혔다.

    2012년 4월에는 성추행 사건에 연루된 김형태 당선자를 처리하는 문제를 놓고 서울경제신문과 인터뷰에서 “박 위원장이 좋은 보좌를 받지 못해 판단에 문제가 있다”고 말해 논란이 커졌다. 박 위원장이 “사실이 아닌 왜곡된 말이 만들어져 당 안에 떠돌아다니고 확대재생산되고 있다”고 간접적으로 경고하기도 했다.

    2012년 7월 당시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대선캠프를 차렸는데 유승민이 빠지면서 사이가 이전보다 멀어졌다는 관측이 나왔다. 그러나 박근혜 후보가 ‘안철수 열풍’ 등으로 지지율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2012년 9월 선거대책위원회에 부위원장으로 합류했다. 당시 박 후보가 늦은 저녁에 유승민의 장모 상가에 직접 찾아가는 등 영입에 공을 들였다.

    2012년 10월에 유승민이 제기한 친박 2선 후퇴와 당 지도부의 사퇴 등을 놓고 박 후보가 “위기상황일 때는 당이 항상 시끄러웠다”고 대응하면서 시각차이가 나타났다. 박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에도 첫 고위 당정청 워크숍에서 당시 유민봉 국정기획수석의 ‘창조경제’와 국정철학 설명방식에 “지금 뭐하는 거냐”고 항의하는 등 갈등을 노출했다.

    2014년 12월 정윤회씨의 비선실세설이 나왔을 때 매일신문과 인터뷰에서 “2004년 초 당시 박근혜 의원실에 갔다가 정씨로 추정되는 사람이 있는 걸 본 적이 있지만 정식으로 만난 적은 없다”고 말했다.

    2015년 2월 ‘신박’으로 분류되던 이주영 의원을 꺾고 새누리당 원내대표로 선출됐을 때 ‘유승민의 승리가 아닌 박근혜의 패배’라는 평가가 일각에서 나왔다. 원내대표로 취임하자마자 박근혜 정부의 ‘증세 없는 복지’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며 법인세 인상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청와대의 인사쇄신을 요구했다.

    2015년 5월 유승민은 세월호특별법 시행령을 수정할 수 있도록 국회법 개정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공무원연금법안을 처리하기로 야당과 합의했다. 새누리당 의원총회의 이견에도 불구하고 유승민은 세월호특별법 시행령 수정원안의 통과를 추진했고 결국 통과됐다.

    김성우 청와대 홍보수석은 2015년 5월29일 “세월호특별법 시행령을 수정하기 위한 국회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은 헌법상 삼권분립에 위배된다”고 밝혔다. 당내에서도 친박계 의원들이 위헌이라고 반발하면서 유승민의 사퇴를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유승민은 야당과 협의해 국회법 개정안을 일부 고친 중재안을 내놓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2015년 6월25일 중재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배신의 정치’를 거론해 사실상 유승민을 불신임했다. 유승민은 2015년 7월 초까지 원내대표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고 버텼지만 7월8일 새누리당 긴급 의원총회에서 사퇴권고 결과가 나오자 이를 받아들여 물러났다.

    야당 측은 “유승민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밉보인 죄로 쫓겨났다”며 “대한민국 헌정사에 전무후무한 일이다”고 비판했다.

    2015년 11월에 유승민이 예정했던 영남대학교 특강이 학교 측의 요청으로 갑자기 취소되는 일이 발생했다. 비슷한 시기에 유승민의 아버지인 유수호 전 의원이 별세했는데 박 대통령은 조화를 보내지 않았다.

    △ 김무성 수첩 사건
    2015년 1월 당시 박관천 경정이 청와대의 비밀문건을 유출했다는 파동이 일어났을 때 당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수첩에 ‘청와대 문건 파동 배후는 K와 Y, 내가 꼭 밝힌다. 두고 봐라. 곧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메모가 있는 것으로 언론에 보도됐다. 그 뒤 K가 김 대표 자신, Y는 당시 차기 원내대표 후보였던 유승민으로 밝혀졌다.

    여권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준석 전 새누리당 비대위원과 음종환 청와대 홍보기획비서실 행정관 등이 2014년 12월18일에 술자리에 참석했는데 이때 음 행정관이 김 대표와 유승민을 청와대 문건유출 파동의 배후로 지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음 행정관은 즉각 부인했지만 파문이 커지자 사표를 냈다. 음 행정관은 ‘친박 보좌관’으로 꼽혔다.

    유승민은 즉각 “내가 청와대 문건유출 파동의 배후라는 보도는 근거 없는 소문을 기초로 한 것”이라며 “나는 문건유출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청와대 행정관이 유승민을 문건유출 파동의 배후로 지목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박근혜 대통령과 갈등도 더욱 커진 것으로 평가된다.

    △ 보좌관의 향응 문제
    2013년 2월 새누리당의 전현직 국회의원 보좌관들이 대구 테크노파크로부터 골프접대 등 향응을 제공받은 혐의로 경찰의 조사를 받았는데 유승민의 보좌관 박모씨도 포함됐다.

    2월14일 박 보좌관의 사표를 수리하고 사과문을 발표했다. 사과문에서 “정치에 입문한 이래 13년 동안 깨끗한 정치를 해왔다고 자부했으나 보좌관의 처신에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라며 “지역 주민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밝혔다.

    △ 논문 중복게재 의혹
    2012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이승천 민주통합당 대구 동구을 후보가 유승민이 한국개발연구원에서 일하던 시절 논문을 중복게재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똑같은 논문을 1989년 11월과 1992년 9월에 두차례 발표했다는 것이다.

    유승민은 즉각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을 이후에 출판하는 책에 포함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흔한 일”이라며 “서울대학교의 연구윤리지침에도 ‘논문에서 발표한 연구결과를 모아 저서로 출간하는 경우는 이중게재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고 반박했다.

    △ 호남비하 발언현장에 참석
    2006년 11월 강동순 방송위원회 상임위원, 신현덕 전 경인TV 대표 등과 서울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열린 술자리에 함께 참석했는데 이때 강 위원이 “호남이 다 썩은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야기에 휩쓸렸다”, “납치 사건 때 DJ를 죽이지 못한 것이 잘못이다” 등 호남 지역을 비하하고 정치적으로 편향된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의 녹취록이 2007년 4월에 공개되면서 그 자리에 참석했던 유승민도 논란의 대상이 됐다.  녹취록에 따르면 유승민도 당시 현장에서 KBS의 관리직 노조가 법원의 판단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을 듣자 판사의 이름을 물어본 것으로 알려졌다. 열린우리당에서는 강 위원의 사퇴를 요구하는 동시에 유승민을 국회 윤리위원회에 제소했다.

    △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중립성 논란
    한나라당 초선의원 시절인 2004년 10월에 경제인문사회연구회 및 소관연구기관 국정감사에서 본래 몸담고 있던 한국개발연구원의 연구원인 장하원 박사가 열린우리당 정책실장으로 갔는데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고 휴직 중이라는 이유로 한국개발연구원의 정치적 중립성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당시 김중수 한국개발연구원장은 국회의장의 요청에 따라 장 박사를 국회에 일시적으로 파견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유승민은 “장 박사가 열린우리당의 핵심 당직에 임명된 것은 여러 언론을 통해 알려진 사실”이라며 “정치활동을 하고 있는데 한국개발연구원에서 사표를 받지 않은 채 무급휴직으로 처리한 점은 정치적인 중립을 훼손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장하원 박사는 장하성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교수의 친동생이다.

    △ 장하성 교수와 정책논쟁
    2002년 10~11월에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으로서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의 대선캠프에서 일할 때 이 총재와 노무현 당시 민주당 후보의 경제정책을 놓고 장하성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교수와 논쟁했다.

    장 교수는 2002년 10월에 언론기고를 통해 이 총재가 출자총액제한, 증권집단소송, 계열분리명령 등을 폐지하거나 반대하는 내용의 경제정책을 추진하는 점이 지나치게 재벌 친화적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유승민은 장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재벌 출신인 정몽준 후보의 정책부터 검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장 교수가 2002년 11월에 다시 언론기고를 통해 유승민의 주장을 재반론하면서 논쟁이 지속됐다. 유승민은 조선일보를 통해 2차 반론을 내놓았는데 이때 "노무현 후보는 ‘재벌해체론자’"라고 주장했던 대목이 실제 지면에서 삭제돼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 ◆ 경력

    1982년 1월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원으로 들어와 1983년 7월까지 일했다. 그 뒤 미국 위스콘신주립대학교로 유학하면서 1984년 9월~1987년 5월 동안 조교를 맡았다.

    1987년 12월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으로 돌아와 2000년 2월까지 일하면서 선임연구위원에 올랐다.

    1994년 5월~1995년 5월 한국산업조직학회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1996년 3월~1997년 3월 미국 UC샌디에이고 IR/PS대학원에서 초빙교수를 맡았다.

    1998년 4월~1998년 9월 공정거래위원장 자문관을 역임했다.

    1998년 5월~1999년 9월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이 됐다.

    2000년 2월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총재의 제안을 받아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으로 온 뒤 2003년 6월까지 일했다.

    2003년 3월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연구교수를 맡아 2011년 5월까지 일했다.

    2004년 4월에 열린 총선에 한나라당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해 제1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2005년 10월 비례대표 의원에서 사퇴하고 재선거에 참여해 대구 동구을에서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뒤 2008년 5월29일까지 일했다.

    17대 국회 당시 국회에서 2004년 7월~2005년 4월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2004년 5월~2006년 6월 정무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한나라당 안에서는 2004년 6월~2005년 1월 제3정조위원장, 2005년 1월~2005년 10월 대표최고위원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2005년에 한나라당 대표비서실장으로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를 보좌하게 됐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당내경선 당시 박근혜 캠프에서 정책메시지 총괄단장으로 일했다.

    2008년 4월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 동구을에 출마해 제 18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18대 국회에서 2008년 4월 혁신도시건설촉진 국회의원 모임 간사, 2008년 9월 국방위원회 한나라당 간사, 2008년 9월~2009년 4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2009년 6월 군용비행장 문제해결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 2010년 6월 국방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당시 한나라당 안에서는 2010년 7월~2011년 6월 대구시당 위원장, 2011년 7월~2011년 12월 최고위원을 역임했다. 한나라당이 2012년 2월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면서 새누리당 의원이 됐다.

    2012년 4월 제19대 총선에서 대구 동구을에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하면서 3선 의원이 됐다. 

    19대 국회에서 2012년 7월~2014년 5월 국방위원회 위원장, 2014년 6월~2015년 3월 외교통일위원회 위원, 2015년 2월~2015년 7월 국방위원회 정보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그때 새누리당 안에서는 2015년 2월~2015년 7월 원내대표를 맡았다. 2016년 3월 박근혜 대통령 측과 갈등을 빚어 탈당하면서 무소속 국회의원이 됐다.

    2016년 4월 제20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대구 동구을에 출마해 당선하면서 4선 의원이 됐다. 20대 국회에서 기획재정위원회 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2016년 6월에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의 결정으로 여당에 복귀해 12월까지 남아 있었다가 박근혜 게이트 이후 탈당해 다른 탈당세력과 함께 2017년 1월 바른정당을 창립했다. 그 뒤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남경필 경기도지사와 경쟁하게 됐다.

    2018년 2월 바른미래당 창당에 따라 박주선 의원과 함께 공동대표를 맡았다.

    ◆ 학력

    1970년 삼덕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73년 대륜중학교를 졸업했다.

    1976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82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3년 미국 위스콘신주립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갔다.

    1987년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 가족관계

    아버지 유수호 전 의원과 어머니 강옥성씨의 2남1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은 유승정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다.

    유 전 의원은 판사 출신으로 대구 중구에서 제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2016년 11월에 타계했다.

    유승민은 2017년 1월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노태우 전 대통령과 경북고등학교 동기인 인연으로 국회의원이 됐지만 정치가 체질에 별로 안 맞는다고 했다”며 “나도 아버지의 성질을 많이 닮아 정치가 체질에 별로 안 맞지만 아버지보다는 맞는 셈이다”고 말했다.

    유승민은 아버지에게 ‘절대 비굴하지 말고 의협심이 늘 있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던 점에 정치인으로서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고 밝혔다.

    누나로 유진희씨가 있다. 김진기 전 대구고등법원장이 유승민의 매부다.

    배우자 오선혜씨 사이에서 1남1녀를 뒀다. 딸 유담씨가 2016년 4월 총선 당시 유승민의 유세를 지원했는데 미모로 화제를 모았다. 유승민은 2017년 2월 JTBC의 프로그램 ‘썰전’에서 딸이 대선 유세에는 참여하지 않을 것이며 여론에 오르내리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밝혔다.

    ◆ 상훈

    1982년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공로상을 받았다.

    1986년 미국 위스컨신 주립대학교 대학원 재학시절 Distinguished Teaching Assistant 상을, 1987년 Dissertation Travel Fellowship을 받았다.

    1991년에 국무총리 표창과 경제기획원장관 표창을 각각 받았다.

    2004년 바른사회시민회의에서 국정감사 정무위원회 우수의원으로 뽑혔다.

    2008년 국정감사 NGO모니터당에서 국정감사 우수의원으로 선택됐다.

    2009년 제11회 백봉 라용균선생 기념사업회에서 백봉 신사상을 수상했다.

    2010년 바른사회시민회의에서 선정한 ‘바른사회를 지키는 아름다운 사람’ 우수의정활동부문에 올랐다. 그해 국정감사 NGO모니터단에서도 국정감사 우수의원으로 선택됐다.

    2011년 국정감사 NGO모니터단에서 국정감사 우수의원으로 선정했다.

    2013년 제15회 백봉 라용균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백봉 신사상을 수상했다.

    2014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회에서 선정한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 우수의원이 됐다. 그해 국정감사 NGO모니터단에서 국정감사 우수의원으로 선택했으며 제16회 백봉 라용균 선생 기념사업회에서도 백봉 신사상을 탔다.

    2015년 머니투데이에서 주최한 제1회 대한민국 최우수법률상을 수상했다. 그해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에서 뽑은 국정감사 우수의원에 올랐다. 제17회 백봉 라용균 선생 기념사업회의 백봉 신사상 대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2016년 제18회 백봉 라용균 선생 기념사업회의 백봉 신사상 대상을 탔다.

  • ◆ 어록

    “대통령이 된다면 기자회견을 아마 자주 하게 될 것이다. 지금도 언론에 나서면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밝힌다. 나는 그렇게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아니다. 있는 대로 내 생각을 이야기하고 질문을 중간에 자르지도 않고 끝까지 다 받는다. 그런 부분은 지금까지 충실하게 해 왔다.” (2017/02/08, SBS ‘주영진의 뉴스브리핑’에 출연해)

    “2005년에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일했을 때는 대통령이 되기에 부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당시 정책적 능력은 부족하지만 기본과 원칙은 잘 잡혀 있으며 깨끗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2007년 대선후보 경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여러 일들 때문에 국가의 지도자로서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그때는 호랑이 등에 올라타서 경선을 끝까지 도왔고, 그 이후부터 멀어지게 됐다.” (2016/02/02, JTBC ‘썰전’에 출연해 유시민 작가, 전원책 변호사와 대담하면서)

    “학생들의 꿈이 건물주가 되는 것인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 이제 우리는 한국을 ‘창업하고 싶은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서울 신림동 고시촌과 노량진 고시학원이 실리콘밸리와 같은 창업의 요람이 되는 시대를 열어야 한다.” (2017/02/05, 창업활성화에 중점을 둔 ‘혁신성장 1호 공약’을 발표하면서)

    “많은 대통령 후보들 가운데 경제전문가는 내가 유일하다. 경제위기를 막는 대수술을 하는 의사가 되겠다.” (2017/01/26, 대선출마를 공식적으로 선언하면서)

    “영국의 보수정치 이론가인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혁명이라는 게 올바른 관습이나 전통, 질서까지도 다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보면서 영국이 어떻게 프랑스 대혁명 같은 것을 피하면서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런 것이 보수의 정신이다.” (2017/01/02,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2007년 대선캠프에 정책메시지 총괄단장으로 참여했을 때 연설문을 미리 써서 줬는데 완전히 다른 연설을 한 경우가 있기는 했다. 2007년에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을 때 선언문이 그랬다.” (2016/10/31,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최순실씨가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문을 손봤다는 사실을 놓고)

    “대구는 눈이 귀한 곳인데, 그저께 눈이 왔다. 봄이 곧 올 것이다. 앞만 보고 뛰겠다. 결과는 대구 시민, 동구 주민들이 결정해 줄 것이다. 거리에서, 시장에서 주민들의 손을 잡으면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의 무거움을 절감하고 있다.” (2016/02/01,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4.13 총선 예비후보로 등록한 소감을 밝히며)

    “신부님과 신자 앞에서 거짓말 절대 안 한다. 나는 박 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이 되길 누구보다 바라는 사람이다. 내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많이 했다는데 다 세어보면 몇 번 안했다. 내가 좀 까칠하고 말할 때 덜 굽히고 매너가 부족하며 말이 거칠 수는 있지만 성공한 대통령이 되라고 말한 것으로 앞으로도 나는 그렇게 하겠다.” (2015/10/16, 대구 계산성당에서 열린 ‘대구, 개혁의 중심이 되자’ 특강에서)

    “거취 문제의 혼란으로 국민이 실망하게 만든 점은 내 책임이다. 새누리당 원내대표 자리를 끝내 던지지 않았던 것은 법과 원칙 그리고 정의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정치 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의 길로 가겠다는 약속을 아직 지키지 못했지만 더 절실한 마음으로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길로 계속 가겠다.” (2015/07/08, 새누리당 원내대표에서 사퇴하면서)

    “상을 받을 줄 알았는데 벌을 받고 있다.” (2015/06/24, 동아일보 기사에서 동료 의원들과 식사하던 도중 했다고 나온 말, 박근혜 정부의 최대 과제로 꼽혔던 공무원연금법안을 처리했지만 세월호특별법 시행령 수정을 위한 국회법 개정안도 함께 통과시켰다가 청와대와 갈등을 빚자)

    “현장에 다녀보면 대기업과 재벌의 논리대로 따를 수 없다. 폐지를 주워 팔아 겨우 먹고사는 어르신들을 지역구 현장에서 보면 ‘어떻게 정부가 이렇게 방치할 수 있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2015/02/07, 동아일보와 인터뷰에서 2011년 한나라당 전당대회 때부터 노동과 복지 이슈에서 ‘좌클릭’을 하게 된 이유로)

    “"증세를 만약 한다면 당연히 가진 자한테 세금을 더 부과하는 증세가 돼야 한다.” (2015/02/03, CBS라디오 ‘박재홍의 뉴스쇼’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과거보다는 조금 멀어졌지만 대통령에 대해 정치적, 인간적으로 신의를 지키고 있다. 퇴임 이후 등 어떠한 경우에도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2015/01/04, 영남일보와 인터뷰에서)

    “국가안보실장, 외교장관, 통일장관, 비서실장이 다 모여서 기껏 짜낸 꾀가 이것밖에 안 되나, 그렇게 나이브(순진)하나. 우리가 북한 측에 대통령의 면담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 어떻게 대통령의 면담 카드를 그렇게 싸게 쓰느냐, 잘못된 것이 아니냐.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대통령의 예방 문제와 관련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순진하게 제안을 하고 무시를 당하느냐. 보좌하는 사람들이 잘못한 것 아니냐.” (2014/10/08, 국정감사에서 북한 측 ‘실세 3인방’이 남한에 왔지만 청와대 방문을 거부한 점을 놓고 당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 등 국가안전보장회의 구성원들을 비판하면서)

    “이거 누가 하는 건가. 청와대 ‘얼라’들이 하는 건가? 지금이라도 국방부나 외교부 등을 중심으로 박근혜 정부가 일관된 국가안보전략을 작성해야 한다. 그런 것이 없으니 대통령이 미국에 갔을 때 ‘중국 경도론’ 관련 자료가 나온 것이다. 미국과 중국에 관련된 한국의 포지션은 넣었다 뺐다 장난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우리의 생존이 걸린 문제다.” (2014/10/07, 국정감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뉴욕 유엔총회 방문기간에 발언자료로 사전에 배포됐다가 박 대통령이 언급하지 않아 취소된 ‘중국 경도론’과 관련된 내용을 비판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주변 사람들이 잘못된 정책으로 대통령을 잘못 이해시키고 있다. 그러나 청와대에서 다 하고 있어 뭐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이를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시점도 놓쳤다. 이제는 비판하면 총구를 거꾸로 하고 내 편을 쏘는 것처럼 되버려서 한 마디도 하기 힘들다.” (2013/12/29, 머니투데이 기사에서 당시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던 수서발 KTX 자회사 설립을 반대하며)

    “김대중, 노무현 진보정권 10년을 겪은 뒤 이명박 대통령이 쉽게 당선됐다. 이명박 정부 5년이 성공을 못하고 실패했다는 평가가 많은데, 그럼에도 보수에 5년간 더 기회를 준 것이다. 국민들이 ‘박근혜’라는 새 인물에 대한 기대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따라서 다시 이명박 정부 5년과 같은 실정을 되풀이할 경우 이번이 지나면 보수는 끝이다. 또 박근혜 당선인을 지지하지 않은 48%의 목소리를 포용하고 통합하라, 이런 것도 국민의 명령이다. 48% 중에 상당수의 마음을 잡을 수 있는 정치, 정책이 매우 중요하고, 그게 성공의 키가 될 것이다.” (2013/01/01, 영남신문과 인터뷰에서)

    “박근혜 후보의 텃밭인 대구에서조차 소위 친박계나 박 후보의 주변이 부패해 있고 낡은 이미지의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는 반발이 있다. 반전을 위한 모든 카드를 백지상태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박 후보 스스로도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2012/10/04, 매일신문과 인터뷰에서 당시 박근혜 대선후보를 제외한 당 지도부 등의 사퇴를 요구하며)

    “이번 출마 선언문은 박 전 위원장이 직접 쓴 흔적이 역력하다. 2007년에는 보수 성향이 짙었지만 이번에 제안한 경제민주화에는 진정성이 깃들었다고 할 수 있다.” (2012/07/23, 주간동아 기사에서 당시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7월10일 내놓은 대선출마 선언문을 평가하며)

    “종북, 친북, 좌경화 세력의 의견은 철저히 배제하되 너무 ‘수구꼴통’처럼 보이지 않도록 전향적인 의견과 대책을 제시해 새누리당을 믿도록 만들겠다.” (2012/07/06, 국회 국방위원장으로 당선된 뒤 소감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를 보면서 민주당이 얼마나 비민주적인 정당인지 절감하고 있다. 만약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처음 추진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살아 있었다면 저렇게 할 수 있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11/11/14, 국회 최고위원회의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안 처리를 반대하는 민주당을 비판하며)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내 관계는 내가 그동안 할 말을 다했고 쓴소리도 다 했던 관계다. 내가 무슨 박 전 대표의 대리인이나 하수인과 같은 관계가 아니다.” (2011/06/28, 한나라당 당대표선거를 앞두고 열린 내부 토론회에서 지나치게 ‘친박’이라고 지적되자)

    “옳은 길이라면 민주당을 따라하는 것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 민생 문제에 좌우가 있을 수 없다. 그동안 한나라당은 중산층 이상과 대기업만을 옹호하는 모습으로 국민들에게 인식됐기 때문에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더 강력한 친서민 정책이 추진돼야 한다.

    한나라당이 막대한 재원이 드는 4대강이나 감세 문제를 밀어붙이면서 무상급식, 무상보육, 기초생활자 지원 문제 등을 등한시하니 국민들이 실망을 느낀 것이다. 한나라당이 서민들의 편이라는 것을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 확실히 보여줘야 한다.” (2011/06/23, 한나라당 당대표선거에 출마했을 때 한국경제와 인터뷰에서)

    “4대강 사업에 22조원을 쓰면서 결식아동과 비정규직을 위한 예산이 없다는 것은 보수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내 공약에 관해 큰 틀에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도 공감할 것이다.” (2011/06/21, 한나라당 당대표선거에 출마했을 때 내일신문 기사에서)

    “천안함 침몰이 북한의 소행일 경우 외교적·국제법적 검토는 외교부나 통일부에서 하고 국방부는 군사적 제재·응징 수단을 검토하는 게 상식적인 나라 아닌가.” (2012/04/15, 국회 국방위원회에 있었을 때 천안함이 침몰한 뒤 북한의 소행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자 당시 김태영 국방부 장관에게 군사적인 조치를 요구하면서)

    “노무현 정권에서는 행복도시, 혁신도시가 지방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 아닐지라도 고육지책으로 그것이라도 했는데 이명박 정부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2008/11/01, 이명박 정부가 수도권 규제 완화를 추진하자 반발하며)

    “12월 대선까지는 내 이미지에 신경쓸 생각이 없다. 내 장사는 안 한다. 대선 승리가 중요하다. 정치판의 3D(더럽고 어렵고 위험한) 업종도 누군가는 해야 하지 않은가.” (2007/07/21, 중앙선데이와 인터뷰에서 당시 이명박 전 서울시장 측의 대선후보 검증에 앞장서면서 ‘정책통’ 이미지가 훼손됐다고 지적받자)

    “대운하 공약은 누가 한나라당 대선 후보가 되더라도 공약이 될 수도 없고 돼서도 안 된다. 낙동강 바닥을 파고 시멘트를 발라서 운하를 만드는 방식으로 21세기 한국 경제를 살린다는 것은 국민을 속이는 거짓말이다.” (2007/04/25, 한 방송과 인터뷰에서 당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대운하 공약을 비판하며)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이제 대답을 해야 한다. ‘예스’든 ‘노’든 대답을 해야 국민의 의혹이 해소되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끌고 갈 것이며 언제까지 계속 웃기만 할 것인가.” (2007/02/21, 당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국회의원 시절 비서였던 김유찬씨에게 선거법 위반과 관련해 위증을 교사했다는 의혹을 받자 해명해야 한다고 촉구하며)

    “노무현 대통령이 제안하는 권력이양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다. 국민의 편 가르기에 ‘도사급’인 인사가 무슨 연정을 하겠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2005/07/28,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의하자 부정적으로 반응하며)

    “‘박심’은 없다. 그렇지 않아도 당이 난리인데 박근혜 대표가 움직이면 어떻게 되겠느냐.” (2005/03/07, 한나라당의 2005년 3월11일 원내대표 경선을 앞두고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의중이 작용할 가능성을 기자로부터 질문받자)

    “재정건전성을 고려하지 않은 정부지출 확대보다 감세가 필수적이다. 단기적으로 불가피한 세수감소는 예산편성과 연계해 풀어나가면 된다.” (2004/08/09,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경제 관련 3개특별위원회 합동 기자간담회에서 적극적인 예산편성을 요구한 것을 반박하며)

    “노무현 정권이 우리 경제에 해를 끼친 사례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노 대통령이야말로 악정(惡政)의 굿판을 거둬야 한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수도 이전은 가장 악랄한 형태의 지역주의이자 포퓰리즘이며 분열주의에 불과하다. 이제는 충청까지 지역주의의 포로로 만든 게 바로 수도 이전이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이런 얼빠진 초대형 토목공사에 국력을 탕진한 나라치고 잘된 나라가 없었다.” (2004/07/13,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대정부질문에서 노무현 정권을 비판하면서)

    “섭섭한 것은 순간이지만 실리는 오래간다는 생각에서 전국구를 받았다.” (2004/06/14, 매일신문과 인터뷰에서 아버지 유수호 전 의원의 지역구인 대구 중남구에 출마하는 대신 비례대표 후보로 나서 당선된 이유로 공천 과정의 아쉬움을 들며)

    “시장은 부실기업을 이미 판정했다. 연쇄도산과 실업 증가 등의 후유증이 있겠지만 정리할 것은 과감하게 정리해야 한다.” (2000/11/02, 김대중 정부에서 퇴출기업을 발표하기 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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