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Is ?] 박지원 전 국민의당 대표

이승용 기자
2017-01-16 03: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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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지원 국민의당 대표.

    ◆ 생애

    박지원은 전 국민의당 대표다. 4선 의원이며 김대중 정부의 적통을 자임하는 정치인이다.

    1942년 6월5일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에서 태어나 목포 문태고등학교와 단국대 상학과를 마치고 럭키금성상사에 들어갔다. 동서양행 뉴욕지사 지사장으로 일하며 미국생활을 시작해 가발사업으로 성공을 거두었고 미국에서 뉴욕한인회 회장과 미주지역 한인회 총연합회장을 맡았다.

    미국 망명 중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만남을 계기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면복권되자 귀국해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다. 평민당 전남 진도군 대통령선거대책위원장을 시작으로 민주당 수석부대변인, 김대중 대표 특별보좌관 등을 역임했다.

    민주당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했고 4년 동안 야당 대변인을 맡았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에 따라 청와대 대변인으로 입성한 이후 청와대 공보수석, 문화관광부 장관, 정책기획수석, 정책특보, 비서실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김대중 대통령의 ‘분신’으로 활약했다.

    남북정상회담 합의를 이끌어내는데 중추적 역할을 했으며 이후 대북관계를 막전막후에서 책임졌다.

    대북송금사건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지만 특별사면됐다.

    그 뒤 정계에 복귀했으나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하고 전남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됐다. 선거 뒤 민주당에 복당해 정책위의장과 원내대표를 지냈다.

    3선 의원이 된 이후 민주통합당에서 원내대표 재선에 성공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해 국민의당에 합류한 뒤 총선에서 당선돼 4선 반열에 올랐다.

    ‘20대 총선 홍보비 리베이트’ 의혹으로 안철수 천정배 두 상임공동대표가 동시사퇴하자 비상대책위원장직을 겸임하며 당을 이끌었다.

    사드배치 반대 당론,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당론, 즉각 개헌 추진 당론 등을 이끌었고 박 대통령 탄핵안 국회 본회의 가결을 추진해 성사했다.

    국민의당 전당대회에서 61.58%(1인2표제)라는 득표율로 당대표로 선출됐다.

    노련한 정치력과 친화력, 빼어난 정보력과 빠른 판단력 등을 두루 갖춰 정치9단으로 불린다. 

    ◆ 가족관계

    아버지 박종식(1910년 ~ 1948년)은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당시 활약했던 독립운동가로 1993년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배우자 이선자씨와 사이에 2녀를 두고 있다.

    ◆ 학력

    전남 진도 고성초등학교와 진도중학교를 나와 1960년 문태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65년 광주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단국대학교 상대에 편입학해 학사학위를 받았다.

    ◆ 경력

    1970년 럭키금성상사에 입사했다.

    1972년 동서양행 뉴욕지사 지사장으로 옮겼다.

    1975년 데일리팻숀스 대표이사에 올랐다.

    1980년 미국 뉴욕한인회 회장에 선출됐다.

    1987년 평민당 진도군 대통령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1989년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이사장, 1991년 신민당 민주당 통일국제위원회 부위원장에 올랐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됐고 민주당 대변인을 맡았다.

    199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계복귀하자 국민회의 대변인을 맡았으며 1998년 김대중 대통령당선자 대변인을 맡았다.

    1998년 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을 거쳐 문화관광부 장관을 맡았다.

    2001년 대통령비서실 정책기획수석비서관, 정책특보를 맡았다.

    2002년 대통령비서실장에 올랐다.

    2008년 대통합민주신당에 입당했으나 그해 열린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전남 목포시 선거구에서 당선됐다. 이후 복당했다.

    2010년 민주당 원내대표, 2011년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에 올랐다. 

    2012년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돼 3선의원이 됐다. 올라 민주통합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과 원내대표를 맡았다.

    2016년 국민의당으로 당적을 옮겨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당선됐고 이후 원내대표로 추대됐다.

    2016년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 추대됐다.

    2017년 1월16일 열린 국민의당 전당대회에서 61.58%(1인2표제)라는 득표율로 당대표로 선출됐다.

    ◆ 사건/사고

    △ 중앙일보 언론탄압 논란
    중앙일보가 1999년 10월2일자 기사에서 1998년 3월9일 일어났던 이른바 ‘물컵사건’을 보도하면서 언론탄압 논란이 일어났다. 1999년 10월2일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은 조세포탈과 배임 혐의 등으로 구속됐다. 중앙일보는 이 사건을 언론탄압으로 규정하고 김대중 정부와 각을 세웠다.

    박지원은 1998년 3월9일 당시 청와대 공보수석을 맡았는데 중앙일보에 따르면 박지원은 김대중 정부시작부터 잦은 압력을 가해왔으며 1998년 3월9일 중앙일보를 한밤에 찾아가 정부를 비판하는 태도를 문제삼기도 했다.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박지원은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과 금창태 부사장, 한남규 편집국장을 향해 “정권에 비판적인 중앙일보 보도태도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며 “우리가 이제 야당이 아닌 집권당인데 계속 이렇게 섭섭하게 할 수 있느냐, 내가 하지도 않은 얘기를 엉터리로 쓴다”고 말하며 탁자 위 크리스탈 물잔을 집어들어 바닥에 던졌다. 한바탕 소란이 끝나고 중앙일보 정문을 나서며 박지원은 맨 땅에 엎드려 큰 절을 한 뒤 “잘해봅시다”라고 한 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박지원은 논란이 불거지자 문화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공보담당자로서 언론보도가 비판적이거나 사실과 다를 경우 해명을 하거나 항의를 한 적은 있으나 부당한 언론간섭은 하지는 않았다”며 “물컵을 놓쳐서 탁자에 떨어진 것이고 큰 절을 한 기억은 없다”고 반박했다. 중앙일보는 10월 5일자에 녹취록 내용을 공개하며 물컵을 집어던진 것은 사실이라고 재반박했다. 한나라당은 이를 문제삼아 10월22일 장관 해임건의안을 상정했지만 국회에서 부결됐다.

    박지원은 10월25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날 홍석현 사장이 만나자는 연락이 왔으나 `술자리 약속이 있어 못간다‘며 거절했었다. 그러나 홍 사장이 `늦게라도 만나자'고 해서 선약이 됐던 술자리가 끝나고 전화를 해 `갈 수 없다'고 했으나 홍 사장이 `부사장과 편집국장도 기다리고 있다'며 거듭 만나자고 해서 가게된 것이지 불쑥 찾아간 적이 없다. 사장실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고 술을 마신 상태라 일어서다 물컵을 깨뜨린 것이다. 중앙일보가 녹음을 했으면 내가 물컵을 던졌는지 넘어져서 깨진 것인지 자료가 있을 것이다. 밤 11시가 넘어 사장실로 오라고 해놓고 나의 동의도 없이 녹음을 하고 또 허락도 없이 전화도 녹음했다면 그것은 지나친 행동이 아니냐.”

    △ 한빛은행 불법대출 의혹
    2000년 9월20일 한빛은행 불법대출 및 신용보증기금 대출외압 사건에 연루됐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문화관광부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 대북불법송금사건
    2003년 6월18일 대북불법송금을 수사하는 송두환 특검은 현대그룹으로부터 150억 원을 받았다는 혐의로 박지원을 긴급체포했다. 특검은 구속영장에서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의 친구인 무기거래상 김영완씨를 통해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에게 150억 원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2003년 6월19일 박지원의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특검은 수사기간 연장이 안 되자 사건을 검찰로 넘겼고 대검 중수부는 2003년 9월 박지원을 특가법상 뇌물 혐의로 기소했다.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이 2000년 4월 박지원에게 1억 원짜리 양도성예금증서 150장을 전달했고 박 의원은 무기거래상 김영완씨에게 자금세탁과 보관을 맡겼다는 것이 공소의 주된 내용이었다. 또 박지원 개인비리 혐의도 추가됐다. 특검 수사 직전 미국으로 출국했던 김영완씨는 “150억 원 중 일부는 박지원에게 주고 나머지는 내가 보관해 왔다”며 대리인을 통해 121억 원을 검찰에 임의 제출했다.

    박지원은 개인비리는 인정했지만 현대그룹으로 돈을 받은 혐의를 놓고는 “전혀 사실무근”이라며 완강히 부인했다. 법원 1, 2심은 박지원에게 징역 12년에 추징금 128억 원을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현대그룹 관련 혐의는 증인들의 진술이 서로 엇갈려 신빙성이 의심된다며 무죄취지의 파기환송을 결정했다. 

    2006년 5월 서울고등법원은 파기환송심에서 현대비자금 150억 원을 받은 혐의를 놓고 무죄를 선고하고 남북교류협력법 위반과 SK로부터 3천만 원, 금호로부터 7천만 원 등 총 1억 원을 받은 혐의 등은 유죄로 인정해 징역 3년에 추징금 1억 원을 선고했다.

    이 재판 결과에 불복해 박지원과 검찰은 모두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상고기각을 판결해 형이 확정됐다. 박지원은 2007년 특별사면됐다. 주인없는 돈 121억 원은 2013년 국고로 귀속됐다.

    △ 광주비하 트윗 사건
    2013년 2월15일 트위터에 이른바 ‘광주비하 트윗’을 적었다. 그는 “광주 개XX들아! 술 주면 마시고, 실수하고, 그러면 죽고. 그러면서도”와 “광주에서 허벌나게 치욕적 비난받고 목포로 갑니다. 만주당을 살”이라는 트윗을 했다가 삭제했다.

    16일 오전 트위터에 “어젯밤 광주에서 절친(절친한 친구)들과 술 마시고 적절치 못한 용어를 사용해 트윗한 걸 사과드린다"며 “이곳에서는 절친들과 사석에서 사용할 수도 있는 말이지만 적절치 못했다”고 해명했다.

    ◆ 상훈

    1983년 국민훈장동백장을 받았다.

    2002년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 어록

    “국민의당이 빅텐트이고 플랫폼이다. 제3지대는 녹색지대 국민의당이다. 손학규 전 대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어떠한 경우에도 국민의당 정체성을 인정하고 반 전 총장이 혹독한 검증을 받고 우리 당에서 경선을 하고 싶다면 우리 문은 열려 있다. 어떤 조건을 붙여서 경선하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2017/01/15, 당대표 수락 연설에서)

    “문재인은 힐러리보다 비토 세력이 더 많다. 여론조사에서 9%를 기록한 트럼프가 91%의 힐러리를 이겼다. 우리도 이긴다” (2017/01/15, 국민의당 전당대회에서)

    “험난한 고개를 넘으려면 악마의 손이라도 잡고 넘어야 한다. 반공주의자 처칠 총리는 스탈린과 손을 잡고 히틀러와 싸워 이겼다.” (2016/11/25,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안종범 수석이 대단히 위험한 위치에 있다고 본다. 정권 끝나자마자 어떻게 되겠나. 정권이 끝나면 저처럼 불행한 사람이 안 나와야 한다. 순간은 막아도 영원은 막을 수 없다.” (2016/10/21,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미르·K스포츠재단 및 최순실씨 관련 의혹에 대해 방어하던 안종범 청와대 정책수석에게)

    “국방장관은 전국 땅 보러 다니는 부동산 업자가 아니다. 감 찌르듯 후보지 툭툭 건드려 성주도 김천도 들끓고 있다. 박 대통령이 후보지 돌려막기할 것이 아니라 사드 배치 정책결정과정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2016/08/22, 국회에서 열린 비대위 회의에서)

    “코끼리를 바늘로 찔러서 죽게 하는 세 가지 방법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계속 찌르는 것이다. 이 방법을 우리는 우병우 사건에 적용 하겠다” (2016/08/19,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오래 살다 보니 여당이 국회를 보이콧하는 세상이 왔다. 이상하다.”(2016/07/15, 새누리당 의원들이 집단 퇴장한 가운데 야당 의원들끼리 고용노동부의 2015년 예비비 지출 승인의 건을 단독처리한 데 대해)

    “개성 공단은 남북 공히 이익이 되는 평화와 경제협력의 상징이다. 6?15 남북정상회담 특사와 공식 수행원으로서 지금의 현실을 보고 안타깝기 그지 없다. 개성 공단은 정상화돼야 한다. 개성공단의 정상화를 위해 통 큰 결단을 내리길 간곡히 바란다. (2013/08/01,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김기남, 김양건 노동당 비서에게 드리는 공개 서한’에서)

    “바쁜 꿀벌은 슬퍼할 시간이 없다. 신속한 의사결정, 선택과 집중을 통해 개원 초기에 보여준 우리 당의 선도정당, 제3당의 효과를 극대화하도록 하겠다” (2016/06/30, 국민의당 비대위원장에 올라)

    “김대중 대통령께서 창당한 당을 김대중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떠난다. 분열된 야권을 통합하고 모두 승리하기 위해 잠시 당을 떠난다” (2016/01/23,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며)

    “국가 발전과 민주당 집권 위해서라면 민주당 수위라도 하겠다.” (2009/08/11,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꽃은 네 번 졌어도 녹음방초의 계절은 다시 왔다” (2006/05/24, 법원 판결을 앞두고)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2003/06/18, 서울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 들어가기 앞서)

    “현대는 개성공단 등 7개 사업을 북측으로부터 30년간 보장받는 계약을 했다. 언젠가 북핵문제가 해결되고 국제사회가 북한 경제개발에 참여할 때 개성공단 개발사업을 비롯 통신철도 관광등 여러 사업을 독점 계약한 것이 우리 기업들이 북한에 진출하는데 큰 기반이 될 것” (2003/02/04, 김대중 정부 청와대 비서실의 마지막 월례조회에서)

    “정치인은 입이 있어도, 비서는 입이 없다.” (2001/11/09, 민주당 소장개혁파 의원들로 부터 인적쇄신 대상으로 지목되자 정책기획수석에서 사퇴하며)

    “LG반도체를 현대전자로 합치도록 한 평가결과는 차질 없이 그대로 이행될 것이다. 반도체회사를 그대로 둘 경우 연간 3~5천억 원에 달하는 제품개발비가 각 업체별로 중복 투자되는 등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없기 때문에 반도체 빅딜은 반드시 성사되어야 한다. 만약 LG측이 반도체 빅딜에 불응할 경우 채권은행단을 통한 만기대출금 회수조치 등 금융제재를 회피할 수 없을 것” (1998/12/27, 청와대 대변인으로서 반도체 빅딜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야당 때 나라 걱정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여당이 되고 보니 질이 다르더라. 모든 사상에 대해 국가나 국민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하는 생각부터 하게 됐으며 따라서 책임 있는 행동과 말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8/12/26, 김대중 정부 출범 1년을 맞아)

    “한국에는 전두환 대통령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며, 12·12와 5·18은 영웅적 결단이었다.”(1982년 KBS와 인터뷰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당선을 55만 재미동포를 대표하여 진심으로 축하한다. 조국을 안정시키고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해외교포로서 긍지를 갖도록 해주었으면 한다. 모든 국민이 새로운 지도자 밑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승공통일의 기반을 닦을 수 있도록 정부를 신뢰하고 협조해야 할 것이다” (1980/08/20, 뉴욕한인회 회장으로서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 평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실장’으로 불린다.

    야당 시절부터 통산 8년동안 대변인을 해오면서 김 전 대통령의 뜻을 가장 충실히 받들었으며 언론계를 중심으로 한 생생한 여론을 전달하는 귀 역할과 정치참모 역할도 해왔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이면 김 대통령 자택에 출근해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했고 지침을 챙겼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에도 “민주당이 정권재창출을 하더라도 나는 김 대통령과 함께 물러난다는 생각으로 온몸을 던질 것”이라며 “김대중 대통령이 위대한 대통령으로 평가되도록 보필하면 되는 것이며 내가 청사에 남으려는 욕심이 없다”고 자주 말했다.

    김대중 정부 들어 초대 청와대 공보수석과 문화부장관, 정책기획수석, 비서실장 등을 맡아 전방위 역할을 수행했다.

    2000년 대북 특사로서 북한 측과 직접 접촉해 불가능해 보였던 남북정상회담을 성사한 것은 최고 업적으로 꼽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때는 이희호 여사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민주당 의원들을 직접 맞으며 상주를 자임했다. 북한 측이 조의화환과 함께 공개적으로 보내온 편지의 수신자도 임동원 전 국정원장과 박지원이었다.

    능력 면에서 타고난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자타가 공인하는 그의 별명은 ‘정치9단’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분신’이 아닌 정치인 박지원으로서의 능력은 이명박 정부 들어서 진가를 보였다.

    공천을 받지 못하자 무소속으로 국회에 입성했고 야당이 지리멸렬한 상황에서 민주당의 ‘군기반장’ 역할을 맡으며 야권 정치세력의 야성을 깨우고 정체성을 재건하는 역할을 맡았다. 민주당 의원들을 일일이 출석을 체크하며 원내활동을 독려하기도 했다.

    특히 인사청문회에서 활약이 돋보였다. 김태호 국무총리 내정자와 천성관 전 검찰총장 등 이명박 정부의 핵심 인사들이 줄줄이 청문회에서 낙마하는 데 일등공신 노릇을 했다. 원내대표를 맡았던 1년 동안 5명의 총리·국무위원 후보를 청문회 문턱에서 좌절하도록 했다.

    민간인 사찰을 이슈화했고 반대로 한나라당 김무성 원내대표와 협상정치의 가능성도 보여주는 등 정국에 능란하게 대처했다. 이명박 정부는 검찰을 통해 박지원 제압에 나서기도 했으나 매번 무죄판결을 받았다. 

    국민의당으로 당적을 옮겨서도 독무대에 가까웠다. 국민의당은 안철수 천정배 대표가 총선홍보비 리베이트의혹으로 물러났지만 박지원의 총괄지휘로 야당으로서 존재감을 보여줬다.

    기획력이 치밀하다는 시선도 존재한다. 최순실게이트가 불거지며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체제가 흔들리던 2016년11월11일 이정현 대표와 주고받은 문자메시지가 사진기자를 통해 찍혔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찍힌 박지원의 스마트폰에는 “장관님 정현입니다. 제가 존경하는것아시죠. 비서소리 이제 그만하시죠. 부족한 제가 자꾸 인내의 한계를 넘으려고 해요. 백번 이해하려고 해도 반복해서 비서 운운하시니까 정말 속이 상합니다. 아무리 아래지만 공당의 장수인데 견디기 힘들어집니다. 어르신이잖아요. 장관님 정현이가 죽을 때까지 존경하고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충성충성충성 장관님 사랑합니다”라는 이정현 대표의 메시지가 있었고 이정현 대표의 전화번호도 노출됐다.

    이 대표의 퇴진을 요구하는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들은 이 대표의 처신에 분노했고 이정현 대표의 위상도 실추됐다. 국민들은 이정현 대표에게 이른바 문자폭탄을 날렸다. 그러나 이 문자는 2016년 9월23일 주고받았던 문자였다.

    박지원은 이후 트위터에 “이 대표와 오간 문자를 오늘 본회의장에서 다른 문자를 확인하다 사진이 찍혔다”며 “찍힌 문자는 제가 이 대표를 비난하자 이 대표가 제게 보내왔고 제가 답신한 내용이다. 이 대표께도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이를 놓고 본회의장에서 국회의원들의 휴대전화 화면 노출을 가리려고 보안필름까지 붙이는 상황에서 일부러 노출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자연스럽게 제기됐다.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은 페이스북에 “이정현 대표 문자소동은 고도로 기획된 박지원의 작품이다”고 주장했다.

    이명박 정부시절에도 이동관 청와대 언론특보의 문자를 언론을 통해 공개하며 그를 궁지에 몰아넣기도 했다.

    근면성과 친화력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2008년 정계복귀 후 지역구 목포에 매주 금요일 귀향해 월요일 새벽 서울로 오는 ‘금귀월래’를 하고 있다.

    국회 출석률도 최상위권이다. “성적은 안좋아도 학교는 가야 한다”는 지론을 지니고 있다. 원내대표 선거 당시 매일 새벽 공항에 나가 입국하는 의원들을 영접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2014년 국정감사 우수의원 28인으로 뽑히기도 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직접 대중과 소통한다. 

    친화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소통이 되며 정당과 이념을 가리지 않고 협상이 가능한 몇 안되는 정치인으로 알려졌다. 

    세종시법 수정안과 집시법 개정안, 스폰서 특검법을 두고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 합의를 이뤄내며 ‘협상의 달인’ 이미지도 부각했다.

    그의 이런 능력을 “사업가 출신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보는 시선도 존재한다. 정치를 비즈니스처럼 한다는 것이다. 넓은 인맥을 바탕으로 정보, 인재, 민원 등등을 기브앤테이크 하며 막강한 영향력과 정보력을 과시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때문에 각종 제보들이 다 몰린다는 말도 나온다.

    정치인으로서 권력을 향한 강한 의지를 품고 있다. 초등학생 때부터 꿈이 국회의원이었다. 7년을 연애한 아내에게 “결혼하고 나면 아내를 팔아서라도 국회의원을 꼭 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과거 전두환 정권과의 인연도 권력의지에서 빚어졌다고 보기도 한다. 미주 한인회장과 평통 해외자문위원으로 1981년 전두환 뉴욕 방문 시 환영·환송위원장을 맡았고 전두환으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까지 받았다.

    “전두환 대통령의 당선을 55만 재미동포를 대표하여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언론 인터뷰를 하기도 했으며 전두환의 동생인 전경환과 친분을 쌓았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는다.

    KBS와 인터뷰에서 “한국에는 전두환 대통령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며 12·12와 5·18은 영웅적 결단이었다”고 말한 대목을 놓고 여러 차례 걸쳐 공식사과를 하기도 했다.

    2017년 대선을 앞두고 친노세력과 갈등이 정치인 박지원에게 어떤 결과를 안겨줄지 주목하는 시선도 많다. 박지원은 불법대북송금 특검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크게 서운했다고 한다.

    박지원은 “대북송금 특검은 대단히 잘못한 것이었다. 햇볕 정책을 이어 받는다고 하면서도 김대중 대통령과 차별화하기 위해서 실시한 정치적 음모라고 생각한다. 나는 정치 자금에는 관계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명박 정부 들어 검찰 수사를 받게 되자 지금의 이른바 친노세력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외면했던 것과 달리 박지원은 민주당에서 유일하게 노무현 대통령을 엄호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박지원은 본인 스스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악감정이 이제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재 친노세력과는 선긋기를 명확히 하고 있다. 그는 2014년 당 대표에 출마했으나 문재인에게 패했다. 이후 민주당 내 패권주의를 비판하며 국민의당으로 적을 옮겼다.

    2017년 국민의당 대표로 선출되면서 대선정국을 이끌게 됐다. 국민의당은 제3지대로서 여러 대선후보들과 연대를 할 것이라는 예상을 받고 있다.

    박지원은 ‘악마와도 거래를 할 수 있는’ 정치인이기에 자신이 그렇게 비토했던 친노세력과도 언제든지 협상이 가능하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 기타

    대북송금사건 당시 구속돼 수감 당시 희대의 살인마라고 불린 유영철과 감방을 같이 썼다고한다.

    천주교 세례명은 ‘요셉’이다.

    1996년 자서전 ‘넥타이를 잘 매는 남자’를 냈다.

  • ◆ 평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실장’으로 불린다.

    야당 시절부터 통산 8년동안 대변인을 해오면서 김 전 대통령의 뜻을 가장 충실히 받들었으며 언론계를 중심으로 한 생생한 여론을 전달하는 귀 역할과 정치참모 역할도 해왔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이면 김 대통령 자택에 출근해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했고 지침을 챙겼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에도 “민주당이 정권재창출을 하더라도 나는 김 대통령과 함께 물러난다는 생각으로 온몸을 던질 것”이라며 “김대중 대통령이 위대한 대통령으로 평가되도록 보필하면 되는 것이며 내가 청사에 남으려는 욕심이 없다”고 자주 말했다.

    김대중 정부 들어 초대 청와대 공보수석과 문화부장관, 정책기획수석, 비서실장 등을 맡아 전방위 역할을 수행했다.

    2000년 대북 특사로서 북한 측과 직접 접촉해 불가능해 보였던 남북정상회담을 성사한 것은 최고 업적으로 꼽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때는 이희호 여사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민주당 의원들을 직접 맞으며 상주를 자임했다. 북한 측이 조의화환과 함께 공개적으로 보내온 편지의 수신자도 임동원 전 국정원장과 박지원이었다.

    능력 면에서 타고난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자타가 공인하는 그의 별명은 ‘정치9단’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분신’이 아닌 정치인 박지원으로서의 능력은 이명박 정부 들어서 진가를 보였다.

    공천을 받지 못하자 무소속으로 국회에 입성했고 야당이 지리멸렬한 상황에서 민주당의 ‘군기반장’ 역할을 맡으며 야권 정치세력의 야성을 깨우고 정체성을 재건하는 역할을 맡았다. 민주당 의원들을 일일이 출석을 체크하며 원내활동을 독려하기도 했다.

    특히 인사청문회에서 활약이 돋보였다. 김태호 국무총리 내정자와 천성관 전 검찰총장 등 이명박 정부의 핵심 인사들이 줄줄이 청문회에서 낙마하는 데 일등공신 노릇을 했다. 원내대표를 맡았던 1년 동안 5명의 총리·국무위원 후보를 청문회 문턱에서 좌절하도록 했다.

    민간인 사찰을 이슈화했고 반대로 한나라당 김무성 원내대표와 협상정치의 가능성도 보여주는 등 정국에 능란하게 대처했다. 이명박 정부는 검찰을 통해 박지원 제압에 나서기도 했으나 매번 무죄판결을 받았다. 

    국민의당으로 당적을 옮겨서도 독무대에 가까웠다. 국민의당은 안철수 천정배 대표가 총선홍보비 리베이트의혹으로 물러났지만 박지원의 총괄지휘로 야당으로서 존재감을 보여줬다.

    기획력이 치밀하다는 시선도 존재한다. 최순실게이트가 불거지며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체제가 흔들리던 2016년11월11일 이정현 대표와 주고받은 문자메시지가 사진기자를 통해 찍혔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찍힌 박지원의 스마트폰에는 “장관님 정현입니다. 제가 존경하는것아시죠. 비서소리 이제 그만하시죠. 부족한 제가 자꾸 인내의 한계를 넘으려고 해요. 백번 이해하려고 해도 반복해서 비서 운운하시니까 정말 속이 상합니다. 아무리 아래지만 공당의 장수인데 견디기 힘들어집니다. 어르신이잖아요. 장관님 정현이가 죽을 때까지 존경하고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충성충성충성 장관님 사랑합니다”라는 이정현 대표의 메시지가 있었고 이정현 대표의 전화번호도 노출됐다.

    이 대표의 퇴진을 요구하는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들은 이 대표의 처신에 분노했고 이정현 대표의 위상도 실추됐다. 국민들은 이정현 대표에게 이른바 문자폭탄을 날렸다. 그러나 이 문자는 2016년 9월23일 주고받았던 문자였다.

    박지원은 이후 트위터에 “이 대표와 오간 문자를 오늘 본회의장에서 다른 문자를 확인하다 사진이 찍혔다”며 “찍힌 문자는 제가 이 대표를 비난하자 이 대표가 제게 보내왔고 제가 답신한 내용이다. 이 대표께도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이를 놓고 본회의장에서 국회의원들의 휴대전화 화면 노출을 가리려고 보안필름까지 붙이는 상황에서 일부러 노출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자연스럽게 제기됐다.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은 페이스북에 “이정현 대표 문자소동은 고도로 기획된 박지원의 작품이다”고 주장했다.

    이명박 정부시절에도 이동관 청와대 언론특보의 문자를 언론을 통해 공개하며 그를 궁지에 몰아넣기도 했다.

    근면성과 친화력 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2008년 정계복귀 후 지역구 목포에 매주 금요일 귀향해 월요일 새벽 서울로 오는 ‘금귀월래’를 하고 있다.

    국회 출석률도 최상위권이다. “성적은 안좋아도 학교는 가야 한다”는 지론을 지니고 있다. 원내대표 선거 당시 매일 새벽 공항에 나가 입국하는 의원들을 영접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2014년 국정감사 우수의원 28인으로 뽑히기도 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직접 대중과 소통한다. 

    친화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소통이 되며 정당과 이념을 가리지 않고 협상이 가능한 몇 안되는 정치인으로 알려졌다. 

    세종시법 수정안과 집시법 개정안, 스폰서 특검법을 두고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 합의를 이뤄내며 ‘협상의 달인’ 이미지도 부각했다.

    그의 이런 능력을 “사업가 출신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보는 시선도 존재한다. 정치를 비즈니스처럼 한다는 것이다. 넓은 인맥을 바탕으로 정보, 인재, 민원 등등을 기브앤테이크 하며 막강한 영향력과 정보력을 과시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때문에 각종 제보들이 다 몰린다는 말도 나온다.

    정치인으로서 권력을 향한 강한 의지를 품고 있다. 초등학생 때부터 꿈이 국회의원이었다. 7년을 연애한 아내에게 “결혼하고 나면 아내를 팔아서라도 국회의원을 꼭 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과거 전두환 정권과의 인연도 권력의지에서 빚어졌다고 보기도 한다. 미주 한인회장과 평통 해외자문위원으로 1981년 전두환 뉴욕 방문 시 환영·환송위원장을 맡았고 전두환으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까지 받았다.

    “전두환 대통령의 당선을 55만 재미동포를 대표하여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언론 인터뷰를 하기도 했으며 전두환의 동생인 전경환과 친분을 쌓았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는다.

    KBS와 인터뷰에서 “한국에는 전두환 대통령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며 12·12와 5·18은 영웅적 결단이었다”고 말한 대목을 놓고 여러 차례 걸쳐 공식사과를 하기도 했다.

    2017년 대선을 앞두고 친노세력과 갈등이 정치인 박지원에게 어떤 결과를 안겨줄지 주목하는 시선도 많다. 박지원은 불법대북송금 특검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크게 서운했다고 한다.

    박지원은 “대북송금 특검은 대단히 잘못한 것이었다. 햇볕 정책을 이어 받는다고 하면서도 김대중 대통령과 차별화하기 위해서 실시한 정치적 음모라고 생각한다. 나는 정치 자금에는 관계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명박 정부 들어 검찰 수사를 받게 되자 지금의 이른바 친노세력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외면했던 것과 달리 박지원은 민주당에서 유일하게 노무현 대통령을 엄호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박지원은 본인 스스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악감정이 이제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재 친노세력과는 선긋기를 명확히 하고 있다. 그는 2014년 당 대표에 출마했으나 문재인에게 패했다. 이후 민주당 내 패권주의를 비판하며 국민의당으로 적을 옮겼다.

    2017년 국민의당 대표로 선출되면서 대선정국을 이끌게 됐다. 국민의당은 제3지대로서 여러 대선후보들과 연대를 할 것이라는 예상을 받고 있다.

    박지원은 ‘악마와도 거래를 할 수 있는’ 정치인이기에 자신이 그렇게 비토했던 친노세력과도 언제든지 협상이 가능하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 사건/사고

    △ 중앙일보 언론탄압 논란
    중앙일보가 1999년 10월2일자 기사에서 1998년 3월9일 일어났던 이른바 ‘물컵사건’을 보도하면서 언론탄압 논란이 일어났다. 1999년 10월2일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은 조세포탈과 배임 혐의 등으로 구속됐다. 중앙일보는 이 사건을 언론탄압으로 규정하고 김대중 정부와 각을 세웠다.

    박지원은 1998년 3월9일 당시 청와대 공보수석을 맡았는데 중앙일보에 따르면 박지원은 김대중 정부시작부터 잦은 압력을 가해왔으며 1998년 3월9일 중앙일보를 한밤에 찾아가 정부를 비판하는 태도를 문제삼기도 했다.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박지원은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과 금창태 부사장, 한남규 편집국장을 향해 “정권에 비판적인 중앙일보 보도태도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며 “우리가 이제 야당이 아닌 집권당인데 계속 이렇게 섭섭하게 할 수 있느냐, 내가 하지도 않은 얘기를 엉터리로 쓴다”고 말하며 탁자 위 크리스탈 물잔을 집어들어 바닥에 던졌다. 한바탕 소란이 끝나고 중앙일보 정문을 나서며 박지원은 맨 땅에 엎드려 큰 절을 한 뒤 “잘해봅시다”라고 한 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박지원은 논란이 불거지자 문화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공보담당자로서 언론보도가 비판적이거나 사실과 다를 경우 해명을 하거나 항의를 한 적은 있으나 부당한 언론간섭은 하지는 않았다”며 “물컵을 놓쳐서 탁자에 떨어진 것이고 큰 절을 한 기억은 없다”고 반박했다. 중앙일보는 10월 5일자에 녹취록 내용을 공개하며 물컵을 집어던진 것은 사실이라고 재반박했다. 한나라당은 이를 문제삼아 10월22일 장관 해임건의안을 상정했지만 국회에서 부결됐다.

    박지원은 10월25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날 홍석현 사장이 만나자는 연락이 왔으나 `술자리 약속이 있어 못간다‘며 거절했었다. 그러나 홍 사장이 `늦게라도 만나자'고 해서 선약이 됐던 술자리가 끝나고 전화를 해 `갈 수 없다'고 했으나 홍 사장이 `부사장과 편집국장도 기다리고 있다'며 거듭 만나자고 해서 가게된 것이지 불쑥 찾아간 적이 없다. 사장실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고 술을 마신 상태라 일어서다 물컵을 깨뜨린 것이다. 중앙일보가 녹음을 했으면 내가 물컵을 던졌는지 넘어져서 깨진 것인지 자료가 있을 것이다. 밤 11시가 넘어 사장실로 오라고 해놓고 나의 동의도 없이 녹음을 하고 또 허락도 없이 전화도 녹음했다면 그것은 지나친 행동이 아니냐.”

    △ 한빛은행 불법대출 의혹
    2000년 9월20일 한빛은행 불법대출 및 신용보증기금 대출외압 사건에 연루됐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문화관광부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 대북불법송금사건
    2003년 6월18일 대북불법송금을 수사하는 송두환 특검은 현대그룹으로부터 150억 원을 받았다는 혐의로 박지원을 긴급체포했다. 특검은 구속영장에서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의 친구인 무기거래상 김영완씨를 통해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에게 150억 원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2003년 6월19일 박지원의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특검은 수사기간 연장이 안 되자 사건을 검찰로 넘겼고 대검 중수부는 2003년 9월 박지원을 특가법상 뇌물 혐의로 기소했다.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이 2000년 4월 박지원에게 1억 원짜리 양도성예금증서 150장을 전달했고 박 의원은 무기거래상 김영완씨에게 자금세탁과 보관을 맡겼다는 것이 공소의 주된 내용이었다. 또 박지원 개인비리 혐의도 추가됐다. 특검 수사 직전 미국으로 출국했던 김영완씨는 “150억 원 중 일부는 박지원에게 주고 나머지는 내가 보관해 왔다”며 대리인을 통해 121억 원을 검찰에 임의 제출했다.

    박지원은 개인비리는 인정했지만 현대그룹으로 돈을 받은 혐의를 놓고는 “전혀 사실무근”이라며 완강히 부인했다. 법원 1, 2심은 박지원에게 징역 12년에 추징금 128억 원을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현대그룹 관련 혐의는 증인들의 진술이 서로 엇갈려 신빙성이 의심된다며 무죄취지의 파기환송을 결정했다. 

    2006년 5월 서울고등법원은 파기환송심에서 현대비자금 150억 원을 받은 혐의를 놓고 무죄를 선고하고 남북교류협력법 위반과 SK로부터 3천만 원, 금호로부터 7천만 원 등 총 1억 원을 받은 혐의 등은 유죄로 인정해 징역 3년에 추징금 1억 원을 선고했다.

    이 재판 결과에 불복해 박지원과 검찰은 모두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상고기각을 판결해 형이 확정됐다. 박지원은 2007년 특별사면됐다. 주인없는 돈 121억 원은 2013년 국고로 귀속됐다.

    △ 광주비하 트윗 사건
    2013년 2월15일 트위터에 이른바 ‘광주비하 트윗’을 적었다. 그는 “광주 개XX들아! 술 주면 마시고, 실수하고, 그러면 죽고. 그러면서도”와 “광주에서 허벌나게 치욕적 비난받고 목포로 갑니다. 만주당을 살”이라는 트윗을 했다가 삭제했다.

    16일 오전 트위터에 “어젯밤 광주에서 절친(절친한 친구)들과 술 마시고 적절치 못한 용어를 사용해 트윗한 걸 사과드린다"며 “이곳에서는 절친들과 사석에서 사용할 수도 있는 말이지만 적절치 못했다”고 해명했다.

  • ◆ 경력

    1970년 럭키금성상사에 입사했다.

    1972년 동서양행 뉴욕지사 지사장으로 옮겼다.

    1975년 데일리팻숀스 대표이사에 올랐다.

    1980년 미국 뉴욕한인회 회장에 선출됐다.

    1987년 평민당 진도군 대통령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1989년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이사장, 1991년 신민당 민주당 통일국제위원회 부위원장에 올랐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됐고 민주당 대변인을 맡았다.

    199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계복귀하자 국민회의 대변인을 맡았으며 1998년 김대중 대통령당선자 대변인을 맡았다.

    1998년 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을 거쳐 문화관광부 장관을 맡았다.

    2001년 대통령비서실 정책기획수석비서관, 정책특보를 맡았다.

    2002년 대통령비서실장에 올랐다.

    2008년 대통합민주신당에 입당했으나 그해 열린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전남 목포시 선거구에서 당선됐다. 이후 복당했다.

    2010년 민주당 원내대표, 2011년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에 올랐다. 

    2012년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돼 3선의원이 됐다. 올라 민주통합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과 원내대표를 맡았다.

    2016년 국민의당으로 당적을 옮겨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당선됐고 이후 원내대표로 추대됐다.

    2016년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 추대됐다.

    2017년 1월16일 열린 국민의당 전당대회에서 61.58%(1인2표제)라는 득표율로 당대표로 선출됐다.

    ◆ 학력

    전남 진도 고성초등학교와 진도중학교를 나와 1960년 문태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65년 광주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단국대학교 상대에 편입학해 학사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아버지 박종식(1910년 ~ 1948년)은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당시 활약했던 독립운동가로 1993년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배우자 이선자씨와 사이에 2녀를 두고 있다.

    ◆ 상훈

    1983년 국민훈장동백장을 받았다.

    2002년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 ◆ 어록

    “국민의당이 빅텐트이고 플랫폼이다. 제3지대는 녹색지대 국민의당이다. 손학규 전 대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어떠한 경우에도 국민의당 정체성을 인정하고 반 전 총장이 혹독한 검증을 받고 우리 당에서 경선을 하고 싶다면 우리 문은 열려 있다. 어떤 조건을 붙여서 경선하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2017/01/15, 당대표 수락 연설에서)

    “문재인은 힐러리보다 비토 세력이 더 많다. 여론조사에서 9%를 기록한 트럼프가 91%의 힐러리를 이겼다. 우리도 이긴다” (2017/01/15, 국민의당 전당대회에서)

    “험난한 고개를 넘으려면 악마의 손이라도 잡고 넘어야 한다. 반공주의자 처칠 총리는 스탈린과 손을 잡고 히틀러와 싸워 이겼다.” (2016/11/25,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안종범 수석이 대단히 위험한 위치에 있다고 본다. 정권 끝나자마자 어떻게 되겠나. 정권이 끝나면 저처럼 불행한 사람이 안 나와야 한다. 순간은 막아도 영원은 막을 수 없다.” (2016/10/21,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미르·K스포츠재단 및 최순실씨 관련 의혹에 대해 방어하던 안종범 청와대 정책수석에게)

    “국방장관은 전국 땅 보러 다니는 부동산 업자가 아니다. 감 찌르듯 후보지 툭툭 건드려 성주도 김천도 들끓고 있다. 박 대통령이 후보지 돌려막기할 것이 아니라 사드 배치 정책결정과정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2016/08/22, 국회에서 열린 비대위 회의에서)

    “코끼리를 바늘로 찔러서 죽게 하는 세 가지 방법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계속 찌르는 것이다. 이 방법을 우리는 우병우 사건에 적용 하겠다” (2016/08/19,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오래 살다 보니 여당이 국회를 보이콧하는 세상이 왔다. 이상하다.”(2016/07/15, 새누리당 의원들이 집단 퇴장한 가운데 야당 의원들끼리 고용노동부의 2015년 예비비 지출 승인의 건을 단독처리한 데 대해)

    “개성 공단은 남북 공히 이익이 되는 평화와 경제협력의 상징이다. 6?15 남북정상회담 특사와 공식 수행원으로서 지금의 현실을 보고 안타깝기 그지 없다. 개성 공단은 정상화돼야 한다. 개성공단의 정상화를 위해 통 큰 결단을 내리길 간곡히 바란다. (2013/08/01,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김기남, 김양건 노동당 비서에게 드리는 공개 서한’에서)

    “바쁜 꿀벌은 슬퍼할 시간이 없다. 신속한 의사결정, 선택과 집중을 통해 개원 초기에 보여준 우리 당의 선도정당, 제3당의 효과를 극대화하도록 하겠다” (2016/06/30, 국민의당 비대위원장에 올라)

    “김대중 대통령께서 창당한 당을 김대중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떠난다. 분열된 야권을 통합하고 모두 승리하기 위해 잠시 당을 떠난다” (2016/01/23,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며)

    “국가 발전과 민주당 집권 위해서라면 민주당 수위라도 하겠다.” (2009/08/11,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꽃은 네 번 졌어도 녹음방초의 계절은 다시 왔다” (2006/05/24, 법원 판결을 앞두고)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2003/06/18, 서울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 들어가기 앞서)

    “현대는 개성공단 등 7개 사업을 북측으로부터 30년간 보장받는 계약을 했다. 언젠가 북핵문제가 해결되고 국제사회가 북한 경제개발에 참여할 때 개성공단 개발사업을 비롯 통신철도 관광등 여러 사업을 독점 계약한 것이 우리 기업들이 북한에 진출하는데 큰 기반이 될 것” (2003/02/04, 김대중 정부 청와대 비서실의 마지막 월례조회에서)

    “정치인은 입이 있어도, 비서는 입이 없다.” (2001/11/09, 민주당 소장개혁파 의원들로 부터 인적쇄신 대상으로 지목되자 정책기획수석에서 사퇴하며)

    “LG반도체를 현대전자로 합치도록 한 평가결과는 차질 없이 그대로 이행될 것이다. 반도체회사를 그대로 둘 경우 연간 3~5천억 원에 달하는 제품개발비가 각 업체별로 중복 투자되는 등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없기 때문에 반도체 빅딜은 반드시 성사되어야 한다. 만약 LG측이 반도체 빅딜에 불응할 경우 채권은행단을 통한 만기대출금 회수조치 등 금융제재를 회피할 수 없을 것” (1998/12/27, 청와대 대변인으로서 반도체 빅딜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야당 때 나라 걱정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여당이 되고 보니 질이 다르더라. 모든 사상에 대해 국가나 국민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하는 생각부터 하게 됐으며 따라서 책임 있는 행동과 말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8/12/26, 김대중 정부 출범 1년을 맞아)

    “한국에는 전두환 대통령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며, 12·12와 5·18은 영웅적 결단이었다.”(1982년 KBS와 인터뷰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당선을 55만 재미동포를 대표하여 진심으로 축하한다. 조국을 안정시키고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해외교포로서 긍지를 갖도록 해주었으면 한다. 모든 국민이 새로운 지도자 밑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승공통일의 기반을 닦을 수 있도록 정부를 신뢰하고 협조해야 할 것이다” (1980/08/20, 뉴욕한인회 회장으로서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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