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Who Is ?] 주호영 바른정당 원내대표
주호영 바른정당 원내대표.


주호영은 바른정당 원내대표다. 판사출신이며 대구경북지역을 기반으로 한 4선의원이다. 법률에 의거한 보수적 입장에 입각해 정견을 논리적으로 펼친다는 평가를 받는다.

1960년 12월 10일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에서 태어났다. 영남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판사로 일하다 2003년 변호사 개업을 했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광역시 수성구 을 한나라당 후보로 당선돼 정계에 입문한 4선의원이다.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며 친이계 정치인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새누리당 당대표선거에 비박계 단일후보로 나섰으나 친박계 이정현 후보에 밀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박근혜 게이트로 새누리당이 분당사태를 겪자 김무성 의원 등과 함께 집단탈당해 바른정당을 만들었다. 바른정당에서 창당준비위원장과 원내대표에 추대됐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친이명박계로 대표적인 보수정치인으로 꼽힌다.

판사출신으로 원칙주의자로 알려졌다. “죄인 10명을 놓치더라도 억울한 사람 1명을 만들지 말자”를 소신으로 삼았다고 한다.

2002년 1년간 형사항소부장으로 재직하면서 1심 단독판사가 선고한 항소사건 1600여건 가운데 70여건에 대해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 대부분을 검찰이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3건이 뒤집혔을 뿐 모두 무죄처리됐다.

로스쿨제도를 놓고 “필리핀처럼 변호사 자격증을 지닌 사람이 택시운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소신으로 적절한 인원통제를 주장하며 거부하는 입장을 보였다.

일 욕심이 많은 의원으로 알려져 있다.

2014년 5월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으로 취임한 이후 세월호 진상조사를 비롯해 배상과 보상, 각종 정책과제 수립, 모든 당정협의 등을 관여해왔다.

2014년 11월에는 당내 방위산업비리태스크포스(TF) 팀장을 맡기도 했다. 워낙 언론에 많이 등장하자 당내에서는 ‘모든 일을 떠맡는거냐’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2004년 260여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국가 NGO 모니터단’의 국감평가결과 법사위 1위 의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차분한 언행과 논리정연한 태도로 주변의 호감을 얻는다고 알려졌다. 이 때문에 TV토론에 자주 출연했으며 이명박 전 대통령이 크게 신뢰했다고 한다.

특히 불교계에서 신뢰를 얻고 있다. 불교계에서 “주호영을 모르면 스님이 아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인맥이 탄탄하다고 알려졌다.

어릴 적 경북 울진 동림사에서 놀았고 불교 재단이 운영하는 대구능인고를 다니며 불심을 키웠다고 한다. 이후 1992년 김천지원에서 재직하던 시절부터 직지사를 드나들며 불경공부를 했다. ‘자우’라는 법명도 있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 당시 이명박 후보는 삼고초려 끝에 주호영을 영입했는데 이는 기독교인이었던 이명박 후보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고 알려졌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핵심측근이자 실세로 부각됐다. 이명박 정부 특임장관에 임명되며 이명박 대통령의 뜻을 당과 정치권에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82년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1985년 군법무관에 임용됐다.

1988년 판사로 임용돼 2003년까지 근무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광역시 수성구 을 선거구에 공천받고 출마해 당선됐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 한나라당 원내부대표를 역임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무소속 유시민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같은 해부터 2009년까지 한나라당 원내 수석부대표를 맡았다. 2009년부터 2010년까지 특임장관을 역임했다. 2010년부터 2011년까지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으로 일했다.

2010년부터 2011년까지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을 맡았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2014년까지 새누리당 대구시당위원장을 역임했다.

2014년부터 2015년까지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을 맡았고 2015년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정무특별보좌관을 잠시 맡았다가 국회 정보위원회 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 수성을에 공천을 받지 못하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2016년 8월 새누리당 당대표선거에 비박계 단일후보로 나섰으나 친박계인 이정현 후보에 패배했다.

2016년 말 박근혜 게이트로 새누리당이 분당사태를 겪자 김무성 의원 등과 함께 집단탈당했다. 보수신당을 만들고 원내대표로 추대됐다. 이후 보수신당의 이름은 '바른정당'으로 확정됐다.

◆ 학력

1975년 경상중학교를 졸업했다.

1978년 능인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82년 영남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1985년 영남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7년 영남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배우자 김선희씨와 사이에 2남이 있다.

◆ 상훈

◆ 상훈

어록


“외교부가 반기문 전 총장 귀국의전준비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반 전 총장을 견제하려면 사무총장으로 있을 동안의 잘못을 따져야지 야당이 반 전 총장 의전을 시비거는 것은 과도하다.” (2016/01/09, 바른정당 전체회의 및 정책의총에서)

“옳은 길로 가는 우리들의 결정이 반드시 지지를 받고 역사적으로 평가를 받을 것으로 확신한다. 앞으로 제대로 된 떳떳한 보수가 되겠다.” (2016/01/05,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바른정당 창당발기인 대회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끝난 비극적 사건을 막지 못한 책임이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실장하던 문재인 전 의원에 있다는 게 중론이다.”(2017/01/05, 국회에서 열린 창당준비회의에 참석해)

“모든 것은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 생각한다. 만 번을 꺾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간다는 말로 중국의 장강은 느리게 가고 빨리도 가고 이리저리 꺾여도 동쪽으로 간다.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는 뜻으로 시간이 흐르면 신당이 보수를 대변하게 될 것이다.” (2017/01/04, 대구 수성구의 한 식당에서 지역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우리는 호박을 수박으로 바꿔달라는게 아니라 수박으로 종자를 바꿔 태어나는 것이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말한 문재인 전 대표는 걱정마라. 최순실 사태에서 자유로운 정치인이 어디있느냐, 야당도 마찬가지다.” (2016/12/27, 바른정당 의원총회에서 원내대표로 합의 추대된 후 기자들과 만나)

“드디어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정치를 할 수 있는 정당이 탄생했다고 감히 말씀드린다. 오늘 출범한 신당이 반드시 대세가 되고 국가를 책임지고 운영할 정당이 될 것” (2016/12/27, 바른정당 원내대표로 추대된 의원총회에서)

“교육감 선거가 후보들의 인지도 부족으로 로또 선거가 되고 있다. 지방선거에서 투표 용지에 후보이름 기재를 순환배열로 바꿨지만 여전히 인지도 부족으로 ‘깜깜이 선거’가 계속되고 있다. 교육 선진국이라는 미국도 대부분 주에서 임명제를 채택하고 일본 영국 독일 프랑스 핀란드 등 교육이 발달한 나라들도 모두 교육감에 한해서는 임명제를 채택하고 있다. 교육감 임명제 도입이 필요하다.” (2014/06/09, 6·4지방선거에서 진보 성향의 교육감들이 대거 당선된 직후 새누리당 비상대책회의에서)

“현지 주민을 중심으로는 원안대로 행정기관이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 여론이지만 그럴 경우 국가적 비효율을 초래하고 지역발전에도 도움이 안 된다는 의견도 있다. 당장 앞만 볼 것이 아니라 먼 장래의 후손들이 봤을 때도 나라와 지역에 도움이 되는 좋은 결정을 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2009/12/16, 충남 연기군청과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을 방문한 자리에서 세종시 수정안을 설명하며)

“세종시에 대한 지나친 인센티브는 ‘가치배분의 왜곡’이라는 의견을 정부에 전했다. 선례를 남길 수 있다는 점에서 신중해야한다.” (2009/11/20, 기자단과 오찬 간담회에서)

“노 대통령은 ‘연정 제안은 비정상적 정치구조 청산을 위한 결단’이라고 강변하면서 ‘여소야대=비정상’ ‘여대야소=정상’이라는 주장을 펼치지만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여소야대건 여대야소건 국민이 선택한 것인데 이는 국민의 뜻을 정상이 아니라고 하는 비정상 발상이다. 대통령 권한은 국민이 위임한 것이어서 권력이양에는 국민 동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정치적 합의만으로 가능하다는 초법적 발언을 하고 있는데 국민은 헌법적 틀을 뛰어넘는 권한을 준 적이 없다.” (2005/08/05,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을 비판하며)

“안상수 인천시장 여동생이 경찰에서 조사받는 동안 수사관들이 안 시장 여동생 집에 들이닥쳐 어린 딸을 직접 조사하는 바람에 충격을 받은 딸이 발작까지 일으켰다. 이러니 수도이전 반대 지자체장에 대한 편파수사라는 의심이 드는 것 아니냐” (2004/10/08, 안상수 인천시장의 ‘굴비상자 2억원’ 사건에 대한 검찰수사를 두고 안 시장을 엄호하며)

“헌법상 입법 불소급의 원칙에 위배된다. 친일파 재산 몰수에 국민들이 감정적으로는 동의할 수 있겠지만 민주주의 법질서는 감정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2004/09/17,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친일재산환수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에서)

“국가 보안법을 폐지하면 인터넷에 김정일 찬양 사이트가 만들어져 공개적으로 활동해도 처벌할 수 없다.” (2004/09/06, 노무현 대통령의 국가보안법 폐지 주장에 대해 반대하며)

“지나친 서열파괴는 조직의 갈등과 분열을 일으킴으로써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2004/08/11, 48세의 첫 여성 대법관 후보로 김영란 대법관 후보자가 뽑히자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 평가

친이명박계로 대표적인 보수정치인으로 꼽힌다.

판사출신으로 원칙주의자로 알려졌다. “죄인 10명을 놓치더라도 억울한 사람 1명을 만들지 말자”를 소신으로 삼았다고 한다.

2002년 1년간 형사항소부장으로 재직하면서 1심 단독판사가 선고한 항소사건 1600여건 가운데 70여건에 대해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 대부분을 검찰이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3건이 뒤집혔을 뿐 모두 무죄처리됐다.

로스쿨제도를 놓고 “필리핀처럼 변호사 자격증을 지닌 사람이 택시운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소신으로 적절한 인원통제를 주장하며 거부하는 입장을 보였다.

일 욕심이 많은 의원으로 알려져 있다.

2014년 5월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으로 취임한 이후 세월호 진상조사를 비롯해 배상과 보상, 각종 정책과제 수립, 모든 당정협의 등을 관여해왔다.

2014년 11월에는 당내 방위산업비리태스크포스(TF) 팀장을 맡기도 했다. 워낙 언론에 많이 등장하자 당내에서는 ‘모든 일을 떠맡는거냐’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2004년 260여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국가 NGO 모니터단’의 국감평가결과 법사위 1위 의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차분한 언행과 논리정연한 태도로 주변의 호감을 얻는다고 알려졌다. 이 때문에 TV토론에 자주 출연했으며 이명박 전 대통령이 크게 신뢰했다고 한다.

특히 불교계에서 신뢰를 얻고 있다. 불교계에서 “주호영을 모르면 스님이 아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인맥이 탄탄하다고 알려졌다.

어릴 적 경북 울진 동림사에서 놀았고 불교 재단이 운영하는 대구능인고를 다니며 불심을 키웠다고 한다. 이후 1992년 김천지원에서 재직하던 시절부터 직지사를 드나들며 불경공부를 했다. ‘자우’라는 법명도 있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 당시 이명박 후보는 삼고초려 끝에 주호영을 영입했는데 이는 기독교인이었던 이명박 후보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고 알려졌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핵심측근이자 실세로 부각됐다. 이명박 정부 특임장관에 임명되며 이명박 대통령의 뜻을 당과 정치권에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 기타

1998년 3월 11일 경북 영덕지원장으로 일할 당시 중앙선을 침범한 차와 추돌해 대형사고가 났다. 두개골 골절 등 중상을입은 뒤 헬기로 긴급 후송돼 13시간의 대수술 끝에 회생했다.

이후 주역에 나오는 ‘계영노겸(戒盈勞謙ㆍ넘치는 것을 경계하며 열심히 노력하고 겸손하라)’을 좌우명으로 삼고 산다고 한다.

주성영 의원과 자주 혼동된다고 알려졌다. 같은 법조인 출신에 같은 대구 출신인 데다 고향도 울진으로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