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길 국제경제 톺아보기] 세계화 체제의 종언, 위기와 기회의 공존

▲ 미국 연방준비제도 제롬 파월 의장이 11월2일(현지시각) 워싱턴 D.C.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이날 미국 연준은 기준금리를 0.75%포인트 올리는 네 번째 자이언트 스텝을 단행했다. 일각에서 경기침체를 걱정하고 있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탈세계화 흐름 속에서 국제정세의 불안정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연합뉴스>

[비즈니스포스트] 코로나19 팬더믹이 덮친 지난해 초 로런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과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물가오름세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서머스는 코로나19에 대처하기 위한 금리인하와 양적완화에 이은 조 바이든 행정부의 1조9천억달러 규모의 미국구호계획법 등 천문학적인 돈풀기로 지속적인 물가오름세와 불황을 야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크루그먼은 코로나19 충격에 따른 공급망 병목이 주원인이어서 물가오름세는 일시적이고 불황은 별개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최근 미국 등 선진국 물가가 10% 내외의 오름세를 보이는 데다, 미국 연준이 4연속 0.75%포인트 금리인상을 단행하고 있어, 물가오름세에 대한 논쟁은 서머스의 판정승인 것 같다.

하지만, 물가오름세 논쟁의 핵심인 경기침체 여부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경기침체가 기정사실화된 분위기이나, 미국을 기준으로 보자면 경기침체는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고, 향후에도 현실화될지는 여전히 예측의 영역이다.

미국 연준이 2일(현지시각) 11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 4번째 연속으로 0.75%포인트 금리 인상을 결정한 뒤 제롬 파월 의장은 “누구도 경기침체가 올지 안 올지 알지 못한다”며 “경기침체가 온다면 얼마나 심할지도 알 수 없다”고 답했다.

이날 파월의 메시지는 오히려 물가오름세를 야기하는 경기과열에 초점이 맞춰졌다고 봐야한다.

그는 이날 시장이 기대하는 금리 인상 속도 조절에 대해 금리인상 속도를 줄일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며 “이르면 다음 (FOMC) 회의가 될 수도, 아니면 그 다음 회의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사실 이런 발언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12월의 연준 회의에서는 0.5%포인트, 내년 초 두 차례 회의에서는 0.25%포인트 씩 금리를 인상해, 이른바 ‘종착 금리’(terminal rate)인 최종 금리가 5%까지 된다는 것에는 시장도 각오하고 있다.

문제는 이와 관련해 파월이 던진 메시지이다. 그는 물가상승률이 아직도 예상보다 높고 노동시장은 과열된 상태라며, 물가오름세를 억제하려면 “경제성장이 추세 이하로 내려가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경기둔화가 불가피하다고 강조했다. 지금은 경기침체를 걱정하기 보다는 우선 경기둔화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파월 의장은 “금리인상 속도에 관한 질문은 덜 중요해졌다”며 금리인상 속도가 아니라 최종 금리가 얼마나 될지, 그 금리를 얼마나 오래 유지할지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지난 9월 FOMC 이후 발표된 각종 경제지표 를 볼 때 “최종금리 수준은 지난번 예상한 것보다 높아질 것”이라고 밝혔다.

금리가 5% 이상이 될 수도 있고, 경기둔화가 나타나야지만 금리를 완화할 것이라는 의지이다.

4연속 0.75%포인트 금리 인상은 미국 역사상 107년 만에 가장 빠르고 공격적인 인상이다. 연준이 이처럼 공격적인 금리인상을 하는 것은 아직 미국 경제가 견딜 만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가오름세를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던 폴 크루그먼 교수는 10월31일자 '뉴욕타임스'에 게재한 ‘미국 경제 회복에 관한 진실’이라는 제목의 컬럼에서 “미국 경제가 정말로 나쁜가?”라고 묻고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고용이나 생산이 코로나19 팬더믹 이전 수준으로 견조하다며, 비관할 필요가 없다고 충고했다. 그는 특히 서민들에게 경기의 지표인 실업률과 임금 문제를 지적했다.

실업률이 3.5%로 호황이던 코로나19 이전 수준이고, 임금 상승률도 팬더믹 이전에 비해 14% 올랐는데, 이는 소비자 물가 상승률 15%를 거의 상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에너지와 식료 가격이 비싸지기는 했지만, 임금인상을 감안하면 서민들의 생활 수준에 큰 타격은 아니라고 분석했다. 크루그먼은 물가오름세를 낮추는 것이 심각한 경기침체를 동반할 수도 있겠으나, 1970년대 이후와는 달리 이번에는 물가오름세 잡기가 훨씬 쉬워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 경제가 실제로 아주 좋다고 말하자는 것이 아니나, 아주 좋은 일들도 일어나고 있고, 특히 일자리 회복은 모든 이들의 기대치를 상회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팬더믹 이후 고용시장의 최대 화두인 ‘대규모 사직’(Great Resignation), 즉 노동자들의 사직 사태가 여전해, 심각한 고용 부족을 겪고 있다. 이는 1970년대 이후 노동자가 고용시장에서 우위에 서서, 임금과 노동환경이 개선되는 노동시장의 변화가 일고 있다.

크루그먼의 이런 주장은 기본적으로 통화주의자들과는 다른 철학을 가졌기 때문이다. 통화의 양, 즉 시중에 돈이 얼마나 풀렸느냐가 경기에 중요한 요소라고 보는 통화주의자와는 달리 크루그먼은 줄곧 경기와 경제에서 구조적 문제를 중시했다. 즉, 경제의 생산성이나 분배 문제 등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그가 줄곧 물가오름세보다는 일자리나 임금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크루그먼의 생각의 기저에는 코로나19 팬더믹을 전후로 몰아친 세계 경제의 구조적 변화와 상황적 변화가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대규모 사직’이 그런 상징 중의 하나이다.

세계화의 퇴조, 미-중 대결로 벌어지는 공급망 디커플링, 우크라이나 전쟁은 향후 세계 경제를 규정하는 더 근본적인 요인이다.

1990년대 초 사회주의권 해체 이후 세계 경제는 글로벌리제이션(세계화)에 바탕했다. 전 지구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해서, 최저의 비용으로 최고의 이익을 내려는 체제였다. 특히, 중국의 등장으로 값싼 공산품이 무제한으로 제공돼, 과거와 같은 물가오름세가 막아졌다.

이는 자본의 효율을 높이는 것이기는 했지만, 지역적으로는 심각한 불균형을 증폭시키는 체제이기도 했다. 2008년 금융위기로 주춤해진 세계화 추세는 코로나19 팬더믹, 미-중 디커플링으로 더 타격을 받았다.

미국을 시작으로 자체 완결적인 공급망을 강화하려는 추세가 강해지고 있다. 올해 2월부터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은 세계화 체제를 더욱 강타했다.

이제 원자재와 노동력을 값싸게 손쉽게 조달하는 세계는 종언을 고하고 있다. 현재 물가오름세는 2008년 금융위기를 수습을 계기로 천문학적으로 풀린 돈 때문이기도 하지만, 코로나19를 전후한 세계경제의 이런 구조적 변화가 근본원인일 수 있다.

즉, 값싼 원자재와 노동력이 과거처럼 존재하지 않고, 중국으로 상징되는 값싼 공산품 공급이 제한되면서 벌어지는 현상일 수 있다.

크루그먼이 물가오름세가 공급망 문제라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최근 사태가 낙관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위기와 기회가 공존한다고 봐야한다는 것이다.

세계화 과정에서 지난 30년 동안 물가오름세는 없었지만, 심각한 자산 버블이 일었다. 자산 버블과 천문학적으로 풀린 돈은 분명 거대한 금융위기로 비화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영국에서 리즈 트러스 전 총리가 어설픈 감세안을 던져서 파운드화가 폭락하고 채권 금리가 폭등한 것은 현재 시장이 내포한 리스크를 잘 보여준다.

미국이 주도하는 금리인상으로 달러 강세가 진행돼, 개도국들의 부채위기도 증폭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리인상은 불가피하고, 그에 따른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하지만, 더 큰 위기의 근원은 세계적인 공급망 디커플링을 야기하는 미-중 대결이나 우크라이나 전쟁 등 지정학적 위기이다. 이 위기가 파국으로 간다면, 세계는 경기침체 정도가 아니라 2차대전을 능가하는 미증유의 재앙이 벌어질 것이다.

미-중 대결이나 우크라이나 전쟁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헤게모니에 바탕한 세계화 추세의 퇴조에서 나오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연준의 금리인상으로 경기침체를 걱정하기보다는 우선 이런 지정학적 위기가 재앙으로 번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세계 경제에는 더 중요하다. 연준이 공격적인 금리인상을 하는 것은 아직까지는 그만큼 미국 경제에 대한 자신이 있기 때문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연준의 금리인상은 현재의 물가오름세를 분명 낮출 것이다. 크루그먼은 “물가오름세가 심각한 경기침체 없이 낮춰진다면(이는 현실적인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미래의 역사학자들은 팬더믹에 직면한 경제정책을 놀라운 성공 스토리로 간주할 것이다”고 말했다. 정의길/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