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Who Is ?]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


이수빈은 1939년 1월16일 경상북도 성주에서 태어났다. 서울사대부고를 거쳐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삼성 공채로 제일제당에 입사했다.

제일모직 대표로 초고속 승진한 뒤 제일합섬, 삼성항공, CJ제일제당, 삼성생명, 삼성증권 등 주요계열사 대표를 지냈다.

삼성그룹 회장실 비서실장(부회장)을 거쳐 7년 동안 삼성생명 대표이사 겸 회장으로 재직했다.

대표이사에서 물러난 뒤 현재까지 삼성생명 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삼성그룹에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제외하고 유일한 ‘회장’이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 특검 사태’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을 때 3년 동안 회장 역할을 했다.

현재 경영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와병 중인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삼성그룹의 중요 행사에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를 기리기 위해 만든 호암상과 삼성사회공헌상, 자랑스러운 삼성인상 등의 시상식에 참석해 격려하고 있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삼성그룹 최고참 원로이자 이건희 회장의 측근인사다. 대부분의 행사에서 최지성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과 함께 이 회장의 옆에 앉는다.

이 회장의 의중을 헤아릴 줄 아는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그래서 2008년 이건희 회장이 퇴진한 뒤 그룹 경영을 맡아왔다. 그는 2010년 이건희 회장 복귀를 요청하는 계열사 최고경영자들의 의지를 이 회장에게 직접 전달하기도 했다.

이수빈은 이재용 체제가 갖춰지기 전까지 대외적으로 삼성을 대표할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이 부재한 상황에서 그룹 전체의 대표 자격을 수행할 사람은 이수빈 회장이 적격자이다”라며 “이재용 부회장의 실질적인 승계 작업이 가시화되기 전까지 이 회장의 역할이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이라고 전망한 적이 있다.

이학수 전 삼성물산 고문은 2008년 이수빈에 대해 “이건희 회장 퇴진 이후 대외적으로 삼성을 대표할 일이 있을 경우 이수빈이 그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건희 회장이 복귀한 이후에도 지난해 말 박근혜 대통령이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방문해 간담회를 했을 때 그를 대신해 참석하도록 등 대외적인 활동에서 이건희 회장을 대리해 나서는 일이 잦다. 다만 실제 경영일선에선 물러난 지 오래다.

삼성그룹에서만 근속 50년 일해 한국 대기업 가운데 입지전적인 기록을 남겼다. 그는 이런 기록 때문에 ‘샐러리맨 신화’라고도 불린다.

1993년 이건희 회장이 ‘양보다 질’이라는 신경영 방침을 밝힌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벌어진 ‘티스푼’ 해프닝의 주인공이다.

이윤우 삼성전자 고문은 2013년 6월 인터뷰에서 당시 비서실장이었던 이수빈 회장이 이건희 회장에게 양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가 화가 난 이건희 회장이 손에 들고 있던 티스푼을 테이블 위에 던졌다고 회고했다. 4개월 후 이수빈은 비서실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실질적인 2인자 자리는 이학수 전 삼성물산 고문에게 넘어갔다는 평가도 있다.

삼성그룹의 공식적인 ‘넘버2’로 온화하고 긍정적인 성품을 지녀 임직원들 간에 신망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1965년 입사 후 13년 만에 제일모직 대표이사로 초고속 승진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전문경영인으로 30년간 일하며 주요 계열사 CEO를 두루 역임해 인맥과 신임을 쌓았다.

그가 긴 세월 동안 한 직장에서 일할 수 있었던 비결은 뛰어난 역량, 선후배가 인정하는 인품, 위기 순간의 결단력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재무전문가로 합리적이고 꼼꼼한 스타일로 알려졌다. 숫자에 밝고 업무를 치밀하게 행하나 업무에 있어선 매우 혹독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 성격은 외유내강에 가깝다고 알려졌다. 요새도 자신과 같이 근무했던 퇴임 임원들을 불러 함께 식사하곤 해 자상하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또 아랫사람을 끌고가기보다 스스로 움직이게 만드는 리더십을 지니고 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언론에 스스로를 많이 노출하지 않는다. 흔한 언론 인터뷰도 제대로 한 적이 거의 없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65년 삼성그룹에 입사했다.

1974년 제일제당 이사가 된 뒤 1978년부터 5년 동안 제일모직 사장이 됐다.

1978년 제일합섬 사장이 됐다가 1980년부터 4년 동안 제일제당 사장으로 재임했다.

1984년 삼성항공(현재의 한화탈레스) 사장으로 선임됐고 1985년 동방생명보험 사장이 됐다.

동방생명보험이 삼성생명으로 회사이름이 변경된 뒤 1989년까지 삼성생명보험 사장을 맡았다. 1985년 서울상공회의소 감사로 활동했다.

1991년 삼성그룹 회장실 비서실장(부회장)을 역임했다.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삼성증권 회장으로 재직했다.

1995년부터 2001년까지 6년 동안 삼성생명 대표이사 회장으로 활동했고 2002년부터 2012년까지 삼성공익재단 이사장으로 있었다.

1999년에는 삼성그룹 구조조정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다.

2002년부터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겠다며 삼성생명 대표이사 자리를 내놓고 회장을 유지하며 현재까지 재직하고 있다. 같은 해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자리에 오른 뒤 지금까지 일하고 있다.

이수빈은 삼성그룹 주요 행사의 좌장역할을 하며 주로 경영자문을 하고 있다. 삼성복지재단 이사장과 삼성라이온즈 구단주로서 그룹의 대외 이미지 업무를 지원하고 있다. 그는 요즘 삼성생명 본사로 매일 출근해 주로 오전에 업무를 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 학력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를 나와 1957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5년 미국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을 수료했다.

◆ 가족관계

아버지는 이건석씨다. 형제로 전 삼성물산 고문 출신인 이수철 캠크로스인터내셔널 회장과 자영업자 이수식씨가 있다. 두 명의 여자형제가 있는데 각각 채지식 육군 예비역 소장과 김시영 디오폴리스 사장과 결혼했다.

부인 정영숙씨와 사이에서 1남1녀를 뒀다. 홍용완 전 베인컴퍼니 상무가 사위다. 홍 전 상무는 글로벌 컨설팅회사 베인앤컴퍼니의 사모펀드 컨설팅 분야에서 일했으며 현재 투자회사 앤비욘드를 세워 활동하고 있다.

◆ 상훈

1979년 은탑산업훈장을 수여받았다.

1987년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1996년 대한민국기업문화상 대상을 탔다.

1998년 한국능률협회 한국의 경영자상을 수상했다.

◆ 상훈

1979년 은탑산업훈장을 수여받았다.

1987년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1996년 대한민국기업문화상 대상을 탔다.

1998년 한국능률협회 한국의 경영자상을 수상했다.

어록


“올해 삼성 전체 임직원 중 90%가 봉사활동을 했다.” “앞으로도 나눔활동을 이어가자.” (2015/11/24 '2015 삼성사회공헌상' 시상식에서)

“우리 삼성이 오늘날 일류기업의 대열에 올라선 것은 위기 뒤의 기회를 살렸기 때문.” “남들이 지체하고 있을 때 기술과 사업 경쟁력을 더 강하게 만들고 미래를 위한 씨앗을 뿌려야 한다.” “10년 전 우리는 변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각오로 IMF 위기를 극복했다.” (2009/01/02 삼성그룹 사내방송을 통해 밝힌 신년사에서)

“지난해 우리는 온 세계가 불황에 빠지고 거대한 글로벌 기업들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경험했다.” “이러한 충격은 올해에 더욱 심해지면서 국내외 경기가 급격히 침체되고 기업들은 시장점유율 다툼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경쟁을 벌일 것이고, 앞으로 존망을 건 무한경쟁의 와중에 무수한 기업들이 사라질 것이며 삼성도 결코 안심할 수 없다.” (2009/01/02 삼성그룹 사내방송을 통해 밝힌 신년사에서)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모두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위기 극복을 위한 험난한 여정에 한마음 한뜻으로 동참해 주길 바란다.” (2009/01/02 삼성그룹 사내방송을 통해 밝힌 신년사에서)

“슬기롭고 지혜롭게 대처해 샌드위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자.” (2008/12/02, 2008년 삼성인 시상식에서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시상자로 나서면서)

“누구와 상의도 못하고 상의하더라도 결국 결정은 내가 내려야 했다. 그래서 책임자로서 대표이사는 매우 외로운 자리였다.” (2007/08/09, 삼성생명 창사 50주년을 기념해 발간한 특별사사에서 외환위기 당시를 회상하며)

"후배들의 길을 열어주겠다." (2002/02/01, 삼성생명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며)

“아직 양을 포기할 수 없다. 질과 양은 동전의 앞뒤다.” (1993/06/10,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호텔에서 이건희 회장과 만났을 때)

◆ 평가

삼성그룹 최고참 원로이자 이건희 회장의 측근인사다. 대부분의 행사에서 최지성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과 함께 이 회장의 옆에 앉는다.

이 회장의 의중을 헤아릴 줄 아는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그래서 2008년 이건희 회장이 퇴진한 뒤 그룹 경영을 맡아왔다. 그는 2010년 이건희 회장 복귀를 요청하는 계열사 최고경영자들의 의지를 이 회장에게 직접 전달하기도 했다.

이수빈은 이재용 체제가 갖춰지기 전까지 대외적으로 삼성을 대표할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이 부재한 상황에서 그룹 전체의 대표 자격을 수행할 사람은 이수빈 회장이 적격자이다”라며 “이재용 부회장의 실질적인 승계 작업이 가시화되기 전까지 이 회장의 역할이 앞으로 더욱 커질 것”이라고 전망한 적이 있다.

이학수 전 삼성물산 고문은 2008년 이수빈에 대해 “이건희 회장 퇴진 이후 대외적으로 삼성을 대표할 일이 있을 경우 이수빈이 그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건희 회장이 복귀한 이후에도 지난해 말 박근혜 대통령이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방문해 간담회를 했을 때 그를 대신해 참석하도록 등 대외적인 활동에서 이건희 회장을 대리해 나서는 일이 잦다. 다만 실제 경영일선에선 물러난 지 오래다.

삼성그룹에서만 근속 50년 일해 한국 대기업 가운데 입지전적인 기록을 남겼다. 그는 이런 기록 때문에 ‘샐러리맨 신화’라고도 불린다.

1993년 이건희 회장이 ‘양보다 질’이라는 신경영 방침을 밝힌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벌어진 ‘티스푼’ 해프닝의 주인공이다.

이윤우 삼성전자 고문은 2013년 6월 인터뷰에서 당시 비서실장이었던 이수빈 회장이 이건희 회장에게 양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가 화가 난 이건희 회장이 손에 들고 있던 티스푼을 테이블 위에 던졌다고 회고했다. 4개월 후 이수빈은 비서실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실질적인 2인자 자리는 이학수 전 삼성물산 고문에게 넘어갔다는 평가도 있다.

삼성그룹의 공식적인 ‘넘버2’로 온화하고 긍정적인 성품을 지녀 임직원들 간에 신망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1965년 입사 후 13년 만에 제일모직 대표이사로 초고속 승진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전문경영인으로 30년간 일하며 주요 계열사 CEO를 두루 역임해 인맥과 신임을 쌓았다.

그가 긴 세월 동안 한 직장에서 일할 수 있었던 비결은 뛰어난 역량, 선후배가 인정하는 인품, 위기 순간의 결단력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재무전문가로 합리적이고 꼼꼼한 스타일로 알려졌다. 숫자에 밝고 업무를 치밀하게 행하나 업무에 있어선 매우 혹독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 성격은 외유내강에 가깝다고 알려졌다. 요새도 자신과 같이 근무했던 퇴임 임원들을 불러 함께 식사하곤 해 자상하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또 아랫사람을 끌고가기보다 스스로 움직이게 만드는 리더십을 지니고 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언론에 스스로를 많이 노출하지 않는다. 흔한 언론 인터뷰도 제대로 한 적이 거의 없다.

◆ 기타

이수빈의 좌우명은 ‘이순위덕(以順爲德. 순리를 좇아 덕을 쌓는다)'이다. 그는 이런 신념 아래 무리한 의사결정을 하지 않는다.

이건희 회장의 고등학교 4년 선배다. 이수빈은 서울사대부고 9회 졸업생이며 이건희 회장은 13회 졸업생이다.

삼성그룹의 원로들과 모교인 서울사대부고,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들과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수휴 전 은행감독원장 및 이기준 전 서울대총장 등과 잘 알고 지낸 사이다. 한때 이상득 전 한나라당 의원과 인연이 각별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학수 전 고문과 제일모직에서 인연을 쌓았다. 이 전 고문이 제일모직 관리과장이었을 당시 이수빈이 제일모직 사장이었다. 이 전 고문이 간염에 걸렸을 때는 이수빈이 직접 문병을 와줬다고 한다.

2015년 3월 기준으로 국내 30대 그룹에 재직 중인 최고령 전문경영인으로 조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