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Who Is ?] 김무성 바른정당 의원
김무성 바른정당 의원.



김무성은 1951년 9월20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중동고등학교를 거쳐 한양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동해제강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해 32세의 나이에 삼동산업의 전무가 됐다.

통일민주당의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정계에 입문해 상도동계로 분류됐다. 대통령 선거대책본부 재정국장으로 활동했으며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창당된 이후 민주자유당 의사국장과 의원국장을 지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행정실장과 대통령 민정수석 비서관을 역임했으며 내무부 차관으로 임명됐다.

신한국당 소속으로 부산 남구 을에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후 5선 의원이 됐다.

한나라당 출범에 참여했고 새누리당에 이르기까지 원내대표와 사무총장, 최고위원 등 주요 요직을 거쳤다.

제18대 총선에서 친박으로 분류돼 공천에 탈락하자 무소속으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한나라당에 복당했다.

2012년 총선에 불출마하고 박근혜 후보 선거캠프를 이끄는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다음해 보궐선거에서 부산 영도구 국회의원에 당선돼 5선 의원이 됐다.

새누리당 대표를 맡다가 2016년 4월 새누리당이 과반 의석 석권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부산광역시 중구영도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별명이 ‘무대’(무성대장)일 만큼 시원시원한 성격을 갖고 있지만 상당히 말실수가 잦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정치권에서 선 굵은 정치인으로 통한다. 특히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랑과 신뢰는 각별했다. 2008년 총선 당시 김 전 대통령이 김무성의 선거사무실을 방문해 “전국적 인물이 된 김 의원은 앞으로 대통령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며 김무성의 지지를 호소했다.

한때 대표적인 '친박'으로 분류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이던 시절 당 사무총장을 맡았고 2007년 대선 경선 때 '친박계 좌장'으로 불렸지만 2014년 전당대회를 앞두고 “청와대에 할 말은 하겠다”며 비박계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2010년 정부의 세종시 수정 추진을 놓고 박근혜 대통령과 입장 차를 보이면서 한때 ‘탈박’의 길을 걸었다. 이때 김무성은 원내대표까지 오르면서 비박계 인사들과 두터운 신분을 쌓고 '화합형 리더'의 이미지를 얻었다.

당 일각에서 '보수우파'를 자처하는 김무성의 강한 보수성향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김무성은 앞서 제주해군기지 반대 활동가들을 '종북세력' '김정일의 꼭두각시' 등으로 지칭해 구설수에 올랐다.

경제관 역시 정통보수에 가까워 경제민주화 추세와 거리가 있다는 분석이다.

회의나 강연에서 수치를 제시하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김무성은 비서실에 “주요 현안에 대한 발언 자료를 준비할 때 반드시 통계를 첨부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예를 들어 워싱턴의 한국전쟁 참전기념비를 찾아 “6.25전쟁 때 미군이 참전해 3만6940명이 전사하고 9만2134명이 부상하고 8157명이 실종 상태라며 메모지를 보지 않고 줄줄이 외워 말하는 식이다.

김무성의 별명은 ‘무대’(무성대장)다. 통 큰 보스라는 의미를 함축한 별명이다. 시원한 성격 때문에 말을 거침없이 내뱉어 말실수가 잦다. 이를 놓고 김무성의 하나의 스타일로 해석하는 시선이 있는 반면 반복되는 말실수는 그의 자질문제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76년 동해제강 전무이사를 지낸 뒤 1982년 삼동산업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1985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민주화추진협의회에 참여해 특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임됐다.

1987년 통일민주당 제13대 대통령 선거대책본부 재정국장으로 활동했으며 통일민주당 총무국장, 기획조정실 차장, 국회행정실장을 역임했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하자 김영삼 전 대통령을 따라 민자당에 합류해 의사국장, 의원국장을 지냈다.

1993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행정실장, 대통령 민정수석 비서관을 맡았고 1994년 제48대 내무부 차관이 됐다.

1996년 5월 신한국당 소속으로 부산 남구을에서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한나라당 출범에 참여했으며 당내에서 원내 수석부총무와 한나라당 총재 비서실장을 담당했다.

2004년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위원장이 됐으며 2005년 민주화추진협의회 회장이 됐다.

2005년 한나라당 사무총장에 선출됐고 2007년 11월 한나라당 최고위원회 위원이 됐다.

2008년 18대 총선 공천에서 친박계에 대한 ‘보복공천’이 이뤄지자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무소속으로 18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7월 복당했다.

2010년 5월부터 1년간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지냈다.

2012년 제19대 총선에 불출마하고 박근혜 후보 선거 캠프를 이끄는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같은해 한나라당의 당명이 새누리당으로 바뀌었다.

2013년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5선 의원이 됐다.

2014년 7월14일 제3차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선출됐다.

2016년 4월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20대 총선에서 부산광역시 중구영도구에서 의원으로 당선됐다.

◆ 학력

1964년 부산화랑국민학교를 졸업했다.

1967년 경남중학교를 졸업하고 1970년 중동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5년 한양대학교 경영학과를 학사로 졸업했다.

1999년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 최고위정책과정을 수료했다.

2003년 부경대학교에서 명예정치학 박사와 2006년 한양대학교 명예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5년 동국대학교와 한국해양대학교에서 각각 명예정치학과 명예행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김용주 전남방직주식회사 창업주가 부친이다. 김용주 창업주는 민주당 원내총무와 초대 주일공사를 지냈다.

4남1녀 가운데 3남으로 자랐다.

친누나 김문희 용문학원 재단 이사장은 현대증권과 현대상선의 주주다. 학교법인인 용문학원 재단은 서울 성북구 용문중학교와 용문고등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김창성 전 전남방직주식회사 회장 및 한국경영자총협회 명예회장이 형이다.

현영원 전 현대상선 회장이 매형이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외조카로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이 조카사위다.

부인 최양옥씨와 사이에 1남2녀를 뒀다. 장남 김종민씨는 고윤이라는 가명을 써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아이리스2>, <호텔 킹> 등에 출연했다.

최치환 전 경향신문 사장이 장인이다. 그는 박정희 정권에서 국회의원을 지냈고 그 뒤 삼성그룹 고문을 맡기도 했다.

◆ 상훈

1996년 황조근정훈장을 수여받았다.

2007년 코리아 베스트드레서 스완어워즈 정치부문에서 수상했다.

2011년 코리아정책상과 대한민국을 빛낸 21세기 한국인상을 받았다.

2014년 대한민국 의정대상과 대한민국 유권자 대상을 받았다.

◆ 상훈

1996년 황조근정훈장을 수여받았다.

2007년 코리아 베스트드레서 스완어워즈 정치부문에서 수상했다.

2011년 코리아정책상과 대한민국을 빛낸 21세기 한국인상을 받았다.

2014년 대한민국 의정대상과 대한민국 유권자 대상을 받았다.

어록


“독일은 출산율이 1.34명까지 내려가서 이민자들을 대거 받았다. 그랬더니 터키에서 몇 년 만에 400만 명이 몰려와 문을 닫았다. 우리는 조선족이 있어 문화쇼크를 줄일 수 있다. 조선족을 대거 받아들여야 한다.” (2016/01/30 저출산 대책특위 회의 겸 당정 협의회에서)

“권력 주변에 수준낮은 사람들은 완장을 차려 한다. 그들은 완장을 차고 권력자 이미지를 손상시킨다. 역대 정권마다 있었던 일인데 그게 대통령한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2016/01/26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시민의 소중한 세금을 시장들이 개인적인 인기를 얻기 위해 남용하는 포퓰리즘이야 말로 악마의 속삭임이자 달콤한 독약이다.” (2016/01/25 이재명 성남시장의 청년배당 정책과 박원순 서울시장의 청년지원금 정책에 대해)

“진박 논란은 그만큼 정치수준이 낮다는 것.” “너무 쉽게 국회의원에 당선된 분들이 충실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는 게 사실이다.” (2016/01/18 2016 신년회견에서 대구경북의 ‘진박’(진실한 사람+친박) 후보 논란에 대해)

“난 박근혜 대통령 선거 총책임자였다. 나를 ‘비박’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옳지 않다.” (2016/01/18 2016 신년회견에서)

"'안철수 신당'의 등장은 표면적으로는 야당(野黨) 분열이지만 여당(與黨)에 대한 경고의 의미도 담고 있다" "(다만) 신당이 지금의 야당처럼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하게 되면 결국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 (15/01/04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국민 앞에 석고대죄하는 마음 자세로 인사회를 시작한다.”며 “지난해 여러 개혁과제를 추진했지만 국민 눈높이의 성과를 내지 못했고 국민이 목마르게 기다리는 노동개혁 5개 법안과 경제활성화법안들을 처리하지 못했다.” “입법 미비로 오늘(1월 1일)부터 선거구 무효라는 초유의 비상상황에 직면하게 돼 죄인 된 심정으로 국민께 사과드린.다” (2016/01/01 새누리당 신년인사회에서)

“오픈프라이머리를 흔들려는 세력들이 자꾸 말을 만들어내고 있다.” “저는 정치생명을 걸고 오픈프라이머리를 관철시키겠다. 이것이 우리 정치개혁의 결정판이다.” (2015/08/20 오픈프라이머리와 관련해)

“나라를 위해서 표를 생각하지 않고 노동시장 개혁을 추진하겠다.” “공무원연금 개혁은 완성했고 이제 노동개혁 부문을 우리가 중점 개혁 목표로 잡아 추진해야 한다.” (2015/07/18 ‘이승만 전 대통령 50주기 추모식’에서)

“당청은 한몸일 수밖에 없고 이 정권은 박근혜정권이자 새누리당 정권” “당은 대통령이 하는 일을 뒷받침하고 베이스가 돼야 한다. 다만 과거처럼 대통령이 한마디한다고 해서 모든 걸 다 따라가는 상황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안 만나다가도 일이 생기면 만나 상의해 협조하는 것이 당정처이다. 의견이 좀 다르다고 회의를 안 한다고 하면 잘못된 일이다.” (2015/06/03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초청 학생 대상 특강에서)

“대통령께서 공무원연금 개혁을 생각하면 한숨이 나온다고 했는데 저는 이 문제만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터질 듯이 답답하다.” “어찌해서 하나마나한 맹탕 개혁, 졸속, 비열한 거래 등 이런 말로 매도당하면서 이렇게 온통 오물을 뒤집어써야 하는지 참 기가 막힌 심정이다.” (2015/05/14 노인복지 정책모임인 ‘퓨처라이프 포럼’에서)

“전 세계적으로 핵실험을 2~3번 하면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게 돼 있다. 문제 발언이긴 하지만 현재도 북한에서 우리 남쪽을 향해 핵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 “사드는 고고도 미사일이다. 그래서 북한에서 만약 쏘아 올렸을 때 약 150km 상공에서 쏴서 요격할 수 있는 방어체제를 갖춰야 한다는 것은 기본상식”(2015/03/24 부산 해양대학교에서 열린 ‘청춘무대 김무성 토크쇼’에서 사드 배치 문제에 관해)

“당시 소장이던 박 전 대통령이 5.16혁명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해 보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적화통일될 가능성이 있음을 알고 무능하고 부패한 우리 정치권을 뒤집어엎어 혁명을 했다." "물론 우리 국민이 좀 억압을 당한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우리 경제가 북한경제를 따라잡아서 오늘날 이러한 결과가 나왔다." (2014/02/04 서울에서 열린 전국포럼연합 주체 토론회 강연에서)

“자녀 하나 낳은 분들 반성하셔야 한다.” “우리 모두 이상화, 김연아 같은 딸을 낳아야 한다.” (2014/02/12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2013년 출산율이 1.18명으로 하락한 점을 언급하며)

“교육부의 엄격한 검정을 거쳐 통과된 역사교과서를 전교조의 테러에 의해 채택되지 않는 나라는 자유대한민국으로 볼 수 없다.” (2014/01/06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보수성향 시민사회단체 합동 신년회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저 자신도 과거 민주화 투쟁 시절 하루에도 몇 번씩 불렀던 민주화 투쟁 주제가였다." "5.18 기념 행사용 별도의 노래를 만들기 위한 예산을 책정했다는데 아까운 예산을 낭비하지 말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5.18 주제곡으로 선정해 유가족과 광주 시민들이 원하는 대로 해줘야 한다." (2013/05/08 새누리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국가보훈처의 ‘임을 위한 행진곡’ 5•18기념식 주제곡 선정 배제 논란에 대해)

“종북주의자 30여 명의 반대 데모 때문에 중요 국책사업이 중단되고 있고, 현재 강정마을에서 공사를 제지하는 세력은 사실상 북한 김정일 정권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는 종북세력이 대부분이다.” “이들이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것은 결국 북한에 불리한 것은 하지 말자는 종북적 행태다.” (2011/07/27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사에서 열린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에 대해)

"내가 사랑하고 헌신했던 한나라당이 여기까지 온 데 비통한 심정을 금치 못한다. 오늘 나는 마음은 한나라당에 두고 몸만 당을 떠난다.” “이런 무원칙한 공천을 일삼은 세력이 한나라당을 망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게 반드시 선거에서 이기고 돌아와 한나라당을 국민의 사랑을 받는 당으로 다시 만들겠다." (2008/03/14 기자회견에서 ‘한나라당 공천 청와대 개입’ 논란과 관련해)

◆ 평가

정치권에서 선 굵은 정치인으로 통한다. 특히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랑과 신뢰는 각별했다. 2008년 총선 당시 김 전 대통령이 김무성의 선거사무실을 방문해 “전국적 인물이 된 김 의원은 앞으로 대통령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며 김무성의 지지를 호소했다.

한때 대표적인 '친박'으로 분류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이던 시절 당 사무총장을 맡았고 2007년 대선 경선 때 '친박계 좌장'으로 불렸지만 2014년 전당대회를 앞두고 “청와대에 할 말은 하겠다”며 비박계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2010년 정부의 세종시 수정 추진을 놓고 박근혜 대통령과 입장 차를 보이면서 한때 ‘탈박’의 길을 걸었다. 이때 김무성은 원내대표까지 오르면서 비박계 인사들과 두터운 신분을 쌓고 '화합형 리더'의 이미지를 얻었다.

당 일각에서 '보수우파'를 자처하는 김무성의 강한 보수성향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김무성은 앞서 제주해군기지 반대 활동가들을 '종북세력' '김정일의 꼭두각시' 등으로 지칭해 구설수에 올랐다.

경제관 역시 정통보수에 가까워 경제민주화 추세와 거리가 있다는 분석이다.

회의나 강연에서 수치를 제시하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김무성은 비서실에 “주요 현안에 대한 발언 자료를 준비할 때 반드시 통계를 첨부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예를 들어 워싱턴의 한국전쟁 참전기념비를 찾아 “6.25전쟁 때 미군이 참전해 3만6940명이 전사하고 9만2134명이 부상하고 8157명이 실종 상태라며 메모지를 보지 않고 줄줄이 외워 말하는 식이다.

김무성의 별명은 ‘무대’(무성대장)다. 통 큰 보스라는 의미를 함축한 별명이다. 시원한 성격 때문에 말을 거침없이 내뱉어 말실수가 잦다. 이를 놓고 김무성의 하나의 스타일로 해석하는 시선이 있는 반면 반복되는 말실수는 그의 자질문제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 기타

1985년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이사로 재직했다. 그러나 이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문제를 연구한 임종국의 유지를 기리는 민족문제연구소와 다른 곳이다. 후자는 1991년 반민족문제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어 후에 같은 이름으로 개명했다.

2013년 9월부터 12월까지 좌편향 역사교과서를 바로잡자는 취지의 새누리당 내 국회의원모임 '근현대사 역사교실'을 개설해 직접 강연에 나섰다. 김무성은 강연에서 역사교육체제가 좌편향돼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과거 민주화 투쟁시절 하루에도 몇 번씩 불렀던 주제가였다"라며 자신의 민주화 투쟁경력을 자랑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회의‘ 화환 문화’를 지적했다. 그는 2015년 10월 한 행사에서 축사에 앞서 “의원회에 가면 하루에도 한 대여섯 개씩 세미나가 열리는데 국회의원이 하는 세미나에 화환이 왜 와야 되느냐. 저런 것들 다 필요없는 거다”며 문밖 화환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또다른 행사에서 화환 행렬을 보다 최경환 전 부총리와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이름으로 보내진 화환을 가리키며 “모두 국민 세금 아이가”라고 해 주목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