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으로 상속세를 물납하는 제도를 도입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외국의 사례를 참조해 공신력 있는 가치평가체계를 마련한다면 미술품 물납제 도입이 급물살을 탈 가능성이 떠오른다.
 
상속세로 미술품 물납제도 입법 추진, '이건희 컬렉션'에 미술계 시선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


미술품 물납이 제도화되면 삼성 오너일가가 이 제도를 활용할지 미술계는 주목한다. '이건희 컬렉션'에 미술계의 관심이 높기 때문이다.

5일 미술계 등에 따르면 최근 떠오르는 미술품 물납제가 도입되기 위해서는 먼저 미술품의 가치 평가가 공정하게 이뤄질 수 있는 공적체계가 갖춰져야 한다.

현재 세법에서 허가하는 유가증권 물납도 가치 평가 문제로 조세 불복이 발생하는 사례가 많다. 이 때문에 유가증권보다 가치 측정이 어려운 미술품이 평가의 객관성을 갖추지 못하면 물납에 따른 논란이 불거질 수밖에 없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2020년 10월 작성한 ‘상속세 미술품 물납제도 도입을 위한 입법론적 검토’ 보고서에서 “물납대상이 되는 미술품을 선정하는 주체와 절차를 구체화하고 물납대상으로 가치가 있는 미술품인지 평가할 수 있는 공정하고 투명한 시스템이 담보돼야 한다”고 말했다.

입법조사처는 물납 미술품 평가 및 관리를 전담하는 기관을 설치하거나 이에 상응하는 기관에 권한을 위탁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이와 관련해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미술품물납심의위원회’ 설치, 국립현대미술관의 미술은행과 정부미술은행 통합, 미술품감정연구센터 지정 운용 등의 방안이 거론된다.

미술품 물납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프랑스, 영국, 일본 등은 모두 문화담당 정부 부처의 책임 아래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가 독립성을 안고 물납대상 미술품의 가치평가는 물론 물납 미술품 관리기관 배정을 결정하고 있다.

프랑스는 총리와 재정경제부, 문화부가 위원 임명 권한을 지닌 5인의 대물변제위원회, 영국은 전문성과 독립성을 갖춘 10명의 자문위원으로 구성된 대물변제심의위원회가 대납 미술품을 심의한다.

일본은 미술품을 공공자산화하는 등록미술품제도를 활용해 미술품 물납이 손쉽게 이뤄지도록 하고 있는데 문화청 장관이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등록을 결정한다.

물납제 도입을 위해서 우리나라도 이처럼 공신력 있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까닭이다.

이미 국회에서는 미술품·문화재 등으로 상속세를 물납할 수 있는 내용의 법안이 나와 입법이 추진되고 있다.

이광재 의원 등 더불어민주당 의원 20명은 2020년 11월 상속세를 미술품으로 물납할 수 있는 내용의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을 공동발의해 현재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계류 중이다.

현행법상 상속세 물납은 부동산과 유가증권으로만 가능하다. 개정안은 물납 가능 재산에 서화·골동품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미술품을 추가했다.

이 의원 등은 “상속세를 납부하기 위해 최근 문화재, 미술품 등이 경매로 출품되는 경우가 있다”며 “국가적으로는 미술품과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개인적으로는 상속세의 금전 납부 부담을 덜어주고자 한다”고 발의 이유를 설명했다.

이에 앞서 2020년 6월에는 김승수 의원 등 국민의힘 의원 13명이 지정·등록문화재로 상속 및 증여세를 물납할 수 있도록 하는 문화재보호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을 놓고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는 “개정안의 취지를 달성하기 위해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 의원의 개정안은 이광재 의원의 상속세법 개정안과 함께 후속 논의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여야가 모두 미술품 물납의 취지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데다 미술계의 입법 요구 목소리도 높아 입법이 탄력을 받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기획재정부도 미술품 물납제 관련 내부 검토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3일 한국화랑협회·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한국미술협회 등 미술계는 문화재·미술품 물납제 제도화를 촉구하는 대국민 건의문을 통해 입법에 힘을 실었다.

이들은 “프랑스 국립피카소미술관을 비롯해 서구 여러 박물관과 미술관들이 물납제를 통해 소장품을 확충해 왔다”며 “물납이 가능할 수 있도록 국회에서 관련 세법을 조속히 개정하고 정부에서 후속조치에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말했다.

다만 미술품 물납제 도입에는 공정하고 투명한 절차가 필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고액의 상속세를 피하기 위한 편법이라는 비판이나 현금 납부자와 형평성 논란 등을 막기 위해서다.

입법조사처는 “미술품 물납제도를 도입하려는 목적을 명확히 하고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한 다음 추진해 나가야 한다”며 “단순히 납세 편의 증진이라는 물납제도의 취지만 고려하면 물납제도의 문제점 및 한계에서 비롯된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고 바라봤다.

미술품 물납제가 도입되면 사상 최대 상속세를 내야하는 이건희 전 회장의 유족들이 이 제도를 활용할지 미술계는 주목한다.

이 전 회장의 상속세는 12조 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5년에 나눠 연부연납한다 해도 1년에 2조 원 가까운 상속세를 내야해 계열사 배당 만으로 충당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이건희 전 회장이 보유한 미술품,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의 가치는 수 조 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가운데는 국보 30점, 보물 82점 등 지정문화재도 다수 포함돼 있다. 

막대한 상속세를 내기 위해 이 중 일부를 처분하거나 경매에 붙일 수 있다는 시선도 있다. 2020년 5월 전형필 전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의 유족들이 상속세를 내기 위해 보물급 불상을 경매에 내놓은 사례가 있다.

황달성 한국화랑협회 회장은 2월 기자회견에서 “이건희 회장 컬렉션이 국외로 유출되지 않도록 상속세를 미술품으로 납부하는 물납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전 회장의 유족들은 법무법인 김앤장을 통해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 한국화랑협회 미술품감정위원회,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등에 미술품의 감정을 맡겼다. 감정을 완료한 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리움미술관, 호암미술관 등에 일부 기증하는 방안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비즈니스포스트 김디모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