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Who Is ?] 최종건 SK그룹 창업주
최종건 SK그룹 창업주.


최종건은 1926년 1월30일 경기도 수원 평동에서 최학배씨와 이동대씨의 4남4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담연(湛然)이다.

수원신풍공립심상소학교와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권유로 일본인이 경영하던 선경직물공장에 견습기사로 취직했다.

입사한 지 6개월 만에 종업원 100명을 통솔하는 생산조장으로 발탁됐고 그뒤 생산부장까지 올랐지만 공장을 세우겠다는 각오로 회사를 그만뒀다.

SK그룹의 모태기업인 선경직물을 창립하고 사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뒤 사업영역을 무역, 정유화학 등으로 넓히며 활발한 경영활동을 펼쳤으나 48세의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최종건은 사업으로 나라를 위한다라는 뜻의 '사업보국'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애쓴 SK그룹의 창업주로 평가 받는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최종건은 선경직물공장에 취업한지 반 년 만에 생산조장으로 뽑힐 정도로 성실성을 인정받았다.

그의 아들인 최신원 SKC 회장은 “아버지는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 공장을 한 바퀴 돌고 집에 돌아온 뒤 식사를 하고 다시 사무실에 나가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한 특기를 살려 공장의 고장난 기계를 고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최종건은 6.25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선경직물공장을 사들여 직접 공장을 새로 지은 뒤 한국을 대표하는 섬유회사로 키워냈다.

사람이 석유보다 가치있는 자원이라며 인재를 양성하는데 힘썼고 직원복지를 최우선으로 여겼다. SK그룹이 1980년대 MBC장학퀴즈 상금 전액을 댄 것도 그의 ‘인재 제일주의’ 정신에 기반한 것이다.

한국의 5대 대기업 (삼성, LG, 현대, SK, 롯데)의 창업자 가운데 유일한 엔지니어 출신이다. 이 때문에 그는 실용성과 효율성을 우선한 경영자로 평가받는다.

최종건은 창업 이후 매일같이 자금조달에 쫓기면서도 품질혁신과 신제품개발을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아 ‘제품제일주의’ 정신을 실천한 경영자로 평가받는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44년 일본인이 경영하던 선경직물공장에 종업원으로 취직해 6개월 만에 생산조장으로 승진했다.

1945년 생산부장으로 승진했지만 1946년 회사를 그만뒀다.

1953년 선경직물공장을 사들여 선경직물을 설립했다.

1956년 수원시 지방의회 시의원으로 당선됐다. 같은 해 선경직물 공장을 신설해 본격적인 대량생산체제에 돌입했다.

1960년 수원상공회의소 부회장을 지냈다.

1962년 선경산업을 설립했다. 선경산업은 이 해 한국 직물 사상 최초로 레이온 태피터를 홍콩에 수출했다.

1964년 한국직물공업연합회 회장에 올랐다.

1967년 한국직물원사수출조합 이사장을 지냈다. 그해 수원상공회의소 6대 회장에 올라 8대 회장까지 연임했다.

1970년 선경산업과 선경직물을 합병해 ‘선경그룹’을 세운 뒤 회장에 취임했다.

1972년 서해개발(SK임업의 전신)을 설립해 산림개발사업을 시작했다.

1973년 워커힐을 인수한 뒤 ‘선경개발 워커힐’로 회사 이름을 변경하고 호텔사업을 시작했다.

1973년 선경유화와 선경석유를 세워 정유업계에 진출했으나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기 앞서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 학력

1940년 수원신풍공립심상소학교를 졸업했다.

1941년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했다.

1971년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 가족관계

아버지 최학배씨와 어머니 이동대씨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최종현 전 SK그룹 회장을 비롯해 최종관 전 SKC 고문, 최종욱 전 SKM(선경마그네틱) 회장이 남동생이다.

1949년 노순애씨와 결혼해, 최윤원 전 SK케미칼 회장과 최신원 SKC 회장, 최창원 SK케미칼 부회장을 아들로 뒀다. 부인 노순애씨는 2016년 1월 8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최재원 SK그룹 부회장, 최기원 SK행복나눔재단 이사장이 친조카다.

◆ 상훈

1955년 해방10주년기념 산업박람회에서 <닭표안감>으로 상공부장관상을 받았다.

1962년 5.16기념 산업박람회에서 상공부장관상 수상했다.

1963년 제18회 광복절 기념식에서 민간기업 대표로 처음으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65년과 1969년, 1970년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1971년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 상훈

1955년 해방10주년기념 산업박람회에서 <닭표안감>으로 상공부장관상을 받았다.

1962년 5.16기념 산업박람회에서 상공부장관상 수상했다.

1963년 제18회 광복절 기념식에서 민간기업 대표로 처음으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65년과 1969년, 1970년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1971년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어록


“안 되면 되게 만들어야지.”

“나는 전후의 잿더미 위에서 선경을 일으켰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정신으로 쉬지 않고 달려왔다.”

“돈이 없으면 기업이 무너질지 모르지만 인재를 잃으면 기업은 물론이고 삶의 모든 것을 잃는다.”

“기업의 성패는 고정관념의 탈피와 인재에 달려 있다. 기업인의 가장 중요한 책무 중 하나는 인재육성이다.”

“기업을 굴러가게 하는 것은 자금이고 그 자금을 운용하는 것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기업의 진정한 자산은 사람이다.”

“내가 기업을 하고 있지만 공장과 재산은 내 개인의 것이 아니고 국민의 것이다. 종업원의 발전이 회사의 발전이요 회사의 발전은 국가의 발전이다.”

“시작하지 않으면서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다. 노력하지 않으면서 실패를 두려워한다면 비겁하다. 너무 늦은 성공은 스스로를 지치게 한다.”

“스피드는 군대나 기업을 막론하고 가장 기본이 되는 전략이다.”

“인간은 석유와 비교도 되지 않는 무한한 자원이다.”

◆ 평가

최종건은 선경직물공장에 취업한지 반 년 만에 생산조장으로 뽑힐 정도로 성실성을 인정받았다.

그의 아들인 최신원 SKC 회장은 “아버지는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 공장을 한 바퀴 돌고 집에 돌아온 뒤 식사를 하고 다시 사무실에 나가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한 특기를 살려 공장의 고장난 기계를 고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최종건은 6.25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선경직물공장을 사들여 직접 공장을 새로 지은 뒤 한국을 대표하는 섬유회사로 키워냈다.

사람이 석유보다 가치있는 자원이라며 인재를 양성하는데 힘썼고 직원복지를 최우선으로 여겼다. SK그룹이 1980년대 MBC장학퀴즈 상금 전액을 댄 것도 그의 ‘인재 제일주의’ 정신에 기반한 것이다.

한국의 5대 대기업 (삼성, LG, 현대, SK, 롯데)의 창업자 가운데 유일한 엔지니어 출신이다. 이 때문에 그는 실용성과 효율성을 우선한 경영자로 평가받는다.

최종건은 창업 이후 매일같이 자금조달에 쫓기면서도 품질혁신과 신제품개발을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아 ‘제품제일주의’ 정신을 실천한 경영자로 평가받는다.

◆ 기타

최종건의 아내인 노순애씨는 2016년 1월 최종건의 탄생 90주년을 이틀 앞두고 8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선경최종건장학재단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형제들과 우애가 깊기로 유명했다. 최종건이 선경직물공장을 인수할 당시 미국 유학을 앞두고 있던 동생인 최종현 전 SK그룹 회장은 유학을 포기하고 형에게 공장을 사라고 권유했다.

최종건은 동생의 양보를 잊지 않다가 선경직물이 어느 정도 자리 잡아 큰돈을 벌자 그 돈으로 동생의 유학을 지원했다.

방일영 조선일보 회장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등과 친하게 지냈다고 알려져 있다.

최종건은 폐암을 진단한 의사에게 “나는 이미 늦었지만 나와 같은 병에 걸려 고통 받는 다른 환자를 위해 써달다”는 서신과 함께 해외에서 구한 최신 의료장비를 기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