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S칼텍스, 에쓰오일, 현대오일뱅크 등 정유사들이 거대 화학설비 건설계획에 힘을 쏟고 있다.

애초 화학설비 건설계획은 정유업황의 불안정성을 상쇄하기 위한 사업 다각화 시도였으나 코로나19로 정유업황이 불안정을 넘어 장기적 불황에 접어들 가능성마저 점쳐지자 정유사들의 화학사업은 더욱 부각되고 있다.
 
GS칼텍스 에쓰오일 현대오일뱅크, 정유 불안정에 화학투자 더 절박해

▲ (왼쪽부터) 허세홍 GS칼텍스 대표이사 사장, 후세인 알 카타니 에쓰오일 CEO, 강달호 현대오일뱅크 대표이사 사장.


4일 정유업계에서는 에쓰오일의 대규모 석유화학 투자계획과 관련한 우려의 시선이 늘어나고 있다.

에쓰오일은 2018년 11월 잔사유 고도화설비와 올레핀 다운스트림설비(RUC/ODC) 등 1차 화학 투자를 마무리하며 2024년까지 7조 원을 들여 올레핀 다운스트림설비(ODC)와 스팀 분해설비 등 올레핀 계열 화학설비를 확충하는 2차 화학 투자계획을 내놨다.

그러나 1차 투자에 5조 원을 쏟아부으며 자기자본 대비 순차입금 비율이 2017년 38.8%에 불과했으나 지난해 말에는 94.5%까지 높아졌다.

급기야 상반기에만 영업손실 1조1716억 원을 내며 자기자본 대비 순차입금 비율은 105.9%까지 높아졌고 부채비율도 204.6%로 치솟아 처음으로 200%를 넘어섰다. 급격하게 나빠진 재무구조 탓에 2차 화학 투자가 취소되거나 미뤄질 수 있다고 에너지업계는 바라본다.

그러나 에쓰오일은 재무적 문제와 2차 투자계획은 별개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에쓰오일 관계자는 “현재 코로나19 때문에 2차 화학 투자계획과 관련한 해외 기술자들과 의논 등 실무 과정이 지연되고 있다”면서도 “에쓰오일이 목표로 했던 투자계획이 번복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에쓰오일의 화학 투자는 정유업계에 부는 화학 다각화 바람의 대표적 사례다. 

국내 정유4사 가운데 SK종합화학을 자회사로 보유한 SK이노베이션을 제외하고 나머지 3곳이 모두 거대 화학설비 투자를 준비하거나 진행하고 있다.

GS칼텍스는 2021년 가동을 목표로 여수국가산업단지에 2조7천억 원을 들여 올레핀 복합분해설비(MFC)를 짓고 있다. 이 설비가 가동을 시작하면 GS칼텍스는 기존 아로마틱스(방향족) 중심의 화학사업을 올레핀으로 다각화할 수 있다.

강동진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이 설비는 나프타뿐 아니라 잔사유나 스팀 등 다양한 원재료를 활용할 수 있다”며 “국내 다른 나프타 분해설비(NCC)보다 높은 원가 경쟁력으로 수익성 개선에 기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에 앞서 7월 허태수 GS그룹 회장이 취임 첫 현장경영을 위해 발길을 옮긴 곳이 GS칼텍스의 올레핀 복합분해설비 건설현장이었다는 점에서 이 설비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현대오일뱅크도 2021년 기계적 준공, 2022년 가동 목표로 롯데케미칼과 만든 합작사 현대케미칼을 통해 2조7천억 원을 들여 대산 공장에 중질잔사유 분해설비(HPC)를 짓고 있다. 이 설비도 에쓰오일이나 GS칼텍스의 설비처럼 올레핀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설비다.

현대오일뱅크는 이 설비가 가동을 시작하면 화학사업의 이익 비중이 정유사업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처럼 정유사들이 화학사업에 대규모 투자를 지속하는 이유는 원재료를 수급하기 위해 별도의 투자가 필요하지 않다는 점에 기반을 두고 있다. 화학사업의 원재료로 쓰이는 나프타나 LPG(액화석유가스)는 원유를 증류해 얻을 수 있다.

정유사들은 지금까지 공정 구축이 단순한 아로마틱스 계열의 설비를 구축해 화학사업을 진행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공정 구축이 쉽지 않은 올레핀 계열까지 넘보며 기존 화학회사들과 정면승부를 준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장의 주목을 받는다.

에너지업계 한 관계자는 “코로나19 이후 정유제품 수요가 이전만큼 회복될 수 있을지 에너지 전문가들도 쉽게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며 “그만큼 정유사들의 화학 투자가 위험을 분산하는(리스크 헤징) 차원에서 더욱 절실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국제유가는 서부텍사스산 원유(WTI)를 기준으로 배럴당 40달러선을 확실하게 지키지 못하고 있다.

국제유가 40달러는 원유와 셰일에너지의 가격 경쟁력이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심리적 한계선으로 여겨진다. 이 선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석유 수요가 줄어들었다는 점을 넘어 석유의 에너지 패권이 흔들리고 있다는 의미다. 

4월부터는 정유사들의 수익성 지표인 정제마진도 배럴당 0달러를 전후로 소폭 변동만을 지속하고 있다. 인건비나 공장 가동비용 등 고정비를 감안할 때 정유사들의 정제마진 수익성 기준이 배럴당 3~4달러 수준임을 고려하면 비관적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글로벌 주요 원유 수요국들은 코로나19로 침체한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친환경에너지와 관련한 계획을 내놓고 있다.

유럽연합의 그린뉴딜에 영향받아 국내에서도 비슷한 정책적 투자계획이 수립됐으며 중국에서도 9월 시진핑 주석이 UN 연설을 통해 2060년까지 탄소중립을 목표로 신재생에너지 계획을 수립하겠다고 밝혔다.

이처럼 정유사들은 코로나19가 완전히 종식한 뒤에도 기존과 같은 수준의 이익을 낼 수 있을지를 장담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석유화학 투자에 고삐를 늦출 수 없는 이유다. [비즈니스포스트 강용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