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형석 애경그룹 총괄부회장이 그룹의 성장동력으로 점찍었던 항공업 확장이라는 승부수를 접었다.

코로나19 등으로 그룹 사업 전반에 걸쳐 부담이 커진 상황에서 이스타항공 인수로 그룹 자체가 동반부실에 빠질 위험을 피했다.
 
[오늘Who] 채형석 신뢰는 잃었다, 그러나 애경그룹 위기는 피했다

채형석 애경그룹 총괄부회장.


다만 정부와 시장에서 신뢰를 잃으면서 이후 항공업 재편 과정에서 제주항공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과정이 순탄치 않을 가능성도 커졌다.

23일 업계에 따르면 애경그룹은 항공업황이 악화된 상황에서 철저한 시장 분석 아래 이스타항공 인수를 통한 ‘규모의 경제’보다 ‘승자의 저주’를 피하기로 결정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스타항공의 미지급금 규모는 1700억 원 가량으로 추산된다.

미지급금 자체는 정부 지원 등으로 넘길 수 있었지만 올해 초부터 코로나19로 항공수요가 크게 줄어들면서 이스타항공은 물론 제주항공의 정상적 경영이 불가능해지자 판단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항공업황만 안 좋은 것이 아니라 코로나19 등으로 그룹 전반에 걸쳐 위기감이 높아진 점도 영향을 끼쳤다.

애경그룹은 화학과 항공운송, 화장품, 백화점, 부동산 등을 주요사업으로 다루고 있는데 올해 코로나19로 전방위적으로 사업 진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해 애경그룹의 사업부문별 매출을 살펴보면 화학 1조5488억 원, 항공운송 1조3840억 원, 생활용품 화장품 7013억 원, 백화점 4102억 원, 부동산 885억 원 등이다.

하지만 제주항공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 1분기에도 적자를 내고 있는 가운데 백화점부문도 온라인쇼핑 강세로 부진을 겪으면서 사업 포트폴리오를 조정하고 있다.

화장품부문은 면세점 판매가 중단되고 색조 화장품 수요 감소 등에 직격탄을 맞아 영업이익이 절반 이상 줄었다.

화장품사업에서 중국사업 확장을 꾀했지만 코로나19로 사실상 전면 중단되면서 언제 재개될지 불확실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채 총괄부회장이 2006년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제주항공을 설립해 항공업에 진출할 때에는 다른 사업부문이 건재했다.

당시 면세점을 정리해 항공업 투자금을 마련하는 등 과감한 그룹 차원의 지원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룹 차원의 전폭적 지원이 불가능한 수준이다.

당장 제주항공도 영업적자를 보면서 그룹 차원의 유동성 지원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스타항공을 품는 것 자체가 그룹 전반의 재무위험을 키울 수 있다.

불확실성이 어느 때보다 커진 상황에서 이스타항공 인수를 밀어붙이기엔 여건이 마뜩치 않았던 것이다.

채 총괄부회장은 그 누구보다 항공업 확장에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지만 아시아나항공과 코웨이를 각각 인수했다가 그룹 차원의 위기를 맞았던 금호아시아나그룹과 웅진그룹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도도 엿보인다.

다만 이스타항공 인수 포기로 소나기는 피했지만 이후 항공부문을 그룹의 성장동력으로 삼으려던 채 부회장의 계획은 어그러졌다.

채 총괄부회장이 지난해부터 아시아나항공과 이스타항공 인수에 연이어 뛰어들면서 항공업 재편 과정에서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지만 2차례의 인수전에서 모두 빈손으로 돌아가게 됐다.

이스타항공과 계약금 반환 소송 등 법정공방을 벌여야하는 것은 물론 이 과정에서 시장이 애경그룹을 바라보는 신뢰가 흔들리면서 이후 인수합병 시장에 다시 신뢰를 쌓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계약 파기의 책임을 두고 이스타홀딩스 등과 공방을 벌이겠지만 주식 매매계약까지 맺은 상태에서 인수작업이 지연되자 무산된 만큼 이후 항공업 매물을 내놓을 매각자측으로선 제주항공을 인수후보로 선택하기 껄끄러울 것으로 보인다.

국토교통부 등 정부의 인수작업 마무리 요청에 불응한 모양새가 된 점도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다.

항공업이 대표적 규제산업인 데다 앞으로 코로나19에 따른 경영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지원을 얻어내는 것에도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업계 관계자는 “채 총괄부회장이 항공업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한 것이 아닌 만큼 이후 항공업 재편 과정에서 다시 제주항공이 기회를 찾기 위해서는 정부와 관계 회복이 필요할 것”이라며 “이스타항공으로부터 계약금을 돌려받는 것뿐 아니라 정부와 관계 회복을 위해서라도 인수무산 책임 공방전을 치열하게 벌일 것”이라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최석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