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Who Is ?]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



박두병은 1910년 10월6일 일제 강점하 조선 경성부에서 상인 박승직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6년 부친의 박승직상점에서 경영을 시작했고 1946년 박승직상점의 이름을 두산상회로 바꿨다.

1953년 두산상회를 두산산업으로 바꾸고 무역업에 뛰어들었으며 1960년 동산토건, 1966년 두산, 1967년 두산기계, 1970년 한국병유리 등을 설립했다. 1966년 합동통신사를 인수해 언론업에도 진출했다.

1952년부터 1973년 타계할 때까지 13개 회사를 설립 또는 인수해 두산그룹의 매출을 349배 성장시켰다.

1973년 8월4일 폐암으로 사망했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평소 기업경영에서 사람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박승직상점을 맡아 경영할 때부터 유능하고 성실한 직원을 우대하고 적성에 맞는 업무에 배치했다. 여직원 고용을 늘리고 복리후생에 관심을 갖는 등 당시로서 혁신적 조치를 했다.

박두병은 1950년대 독일과 미국으로 직원을 유학보낼 정도로 인재경영을 중시했다. 두산그룹의 모토인 “사람이 미래다” 역시 박두병의 경영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국내 최초로 전문경영인을 기업 수장으로 내세웠다.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은 뒤 1968년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며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었던 정수창을 내세웠다. 정수창은 박두병과 소화기린맥주 시절부터 손발을 맞췄던 인물이다.

박두병은 “회사 창설 때부터 생각했던 일”이라며 “자신이 사장이라고 아들이나 동생이 사장을 이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정수창은 박두병을 떠나 새한제지와 삼성물산 등을 거쳤다. 박두병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정 사장 복귀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이병철은 박두병을 “벌써 그만두고 나간 사람에 대해서도 양해를 구할 정도로 예의가 바른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대한상의 회장을 지내며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자문 역할을 했다. 박 전 대통령은 박두병의 근면함을 보고 “박두병씨가 쉬면 쓰러지니 계속 일하도록 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성실과 신용을 중요하게 여겨 단 한 차례도 부도를 낸 적이 없고 단 한 번도 세금을 체납한 적이 없었다.

평소 과묵하다는 평가가 많았다. 신중하고 겸손한 성품으로 주변의 신뢰를 받았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32년 조선은행에 취직해 약 4년간 근무했다.

1936년 박승직상점의 경영에 참여하면서 출근부 제도, 성과 보너스 등 근대적 경영기법을 도입했다. 1940년 일본의 전시통제로 박승직상점 경영이 어려워지자 1941년 소화기린맥주 대리점을 열었다.

1945년 해방 뒤 소화기린맥주 관리지배인에 임명됐고 1948년 동양맥주주식회사로 이름을 변경하고 OB라는 상표를 처음으로 붙였다. OB는 오리엔탈 브루어리(Oriental Brewery)의 약자다.

부친에게 물려받은 박승직상점은 1946년 두산상회로 상호를 바꾸고 무역회사로 업종을 변경했다. 두산상회는 맥주 유통업과 무역업, 운수업 등을 영위했다.

1952년 동양맥주를 정부로부터 불하받아 국내 최대 맥주회사의 소유주가 됐다. 1956년 연합뉴스의 전신인 합동통신 지분 49%를 확보해 언론사업에도 뛰어들었고 1960년 두산건설의 모태가 되는 동산토건을 설립하는 등 사업다각화에 나섰다.

1960년 합동통신의 나머지 지분을 완전히 인수했고 1961년 맥주의 원료인 맥아를 생산하는 풍국화학공업을 인수했다. 1966년 한양식품을 설립해 코카콜라를 제조판매하기 시작했다.

1967년 동양맥주 기계 제조와 수리를 담당하는 기계공업사인 윤한공업사를 설립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광고회사인 합동통신 광고기획실(현 오리콤)을 만들었다. 1969년 맥주병과 콜라병을 생산하는 한국병유리를 설립했다. 1970년 국내 최초 단기금융회사인 한양투자금융을 만들었다.

1967년 제6대 대한상의 회장으로 선임됐다. 1970년 재선, 1973년 3선에 성공했다. 1970년 아시아상공회의소 연합회 회장에 선출됐으며 1972년 아시아상공회의소 연합회 종신회장으로 추대됐다.

◆ 학력

동대문심상소학교와 경성중학교를 졸업했다. 1929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의 전신인 경성고등상업학교에 입학해 1932년 졸업했다.

◆ 가족관계

경기도 보부상 출신의 거상이었던 박승직이 부친이다.

명계춘 전 두산산업 감사와 사이에 6남1녀를 뒀다.

장남은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 차남은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 삼남은 박용성 전 두산중공업 회장, 사남은 박용현 연강재단 이사장, 오남은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육남은 박용욱 이생그룹 회장이다.

◆ 상훈

1971년 3월3일 최고액 납세자로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1973년 6월26일 주한 벨기에 명예총영사를 지내면서 양국간 우호증진과 문화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벨기에 최고훈장인 크라운 훈장을 받았다.

1973년 8월7일 타계한 뒤 우리나라 상공업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됐다.

◆ 상훈

1971년 3월3일 최고액 납세자로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1973년 6월26일 주한 벨기에 명예총영사를 지내면서 양국간 우호증진과 문화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벨기에 최고훈장인 크라운 훈장을 받았다.

1973년 8월7일 타계한 뒤 우리나라 상공업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됐다.

어록


“장사란 돈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

“조사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사무국을 개편하고 상도의 앙양에 주력하겠다. 이제까지 상도의 앙양이 구호에만 그쳤는데 이에 대해 효율적 방안을 강구하겠다.” (1967/08/17,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선출된 뒤)

“원칙적으로 둘다 반대한다. 공정거래법은 이미 대폭적 자유화가 단행된 지금 오히려 자유화에 역행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보며 세제개혁안은 국민의 기본생활을 전혀 무시한 것으로 수정이 가해지지 않는한 국민부담만 가중시키는 정부의 일방적 처사다.” (1967/08/24, 공정거래법 제정과 세제개혁안에 반대하며)

“급진적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우리 경제에서 가장 긴급한 문제는 산업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힘쓰고 싶은 일은 민간경제외교를 폭넓게 전개하는 것이다.” (1969/01/11, 새해 계획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며)

“나는 회사 창설때부터 자본과 경영을 분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드시 아들이나 동생이 사장을 승계해야 한다는 사고는 잘못된 것이다. 물론 유능한 경우는 그래도 되겠지만 사장직이 유능하지 못한 아들 손자에게로 세습될 때 사원들은 무엇을 믿고 그 회사에서 일하겠습니까.” (1969, 전문경영인 정수창에게 회사를 맡기며)

“돈보다 사람을 아끼고 자본을 사업투자보다 인간투자에 우선하는 것이 나의 경영지표다. 기업경영의 원천은 자본증식보다 인화에 있다.” (1969/12/15, 동양맥주 사장에서 회장으로 물러나며)

“해방 뒤 고질화한 자기 돈 한 푼 안 들이고 남의 돈만으로 사업을 해보겠다는 기업인의 안이한 자세는 이번 기회에 뜯어고쳐야 한다.” (1970/04/21, 기업들의 자금난에 대해)

“아시아의 발전도상국은 오직 공동노력과 상호이해를 통해서만 우리들의 오랜 숙원인 인구과잉과 빈곤 그리고 고식적 민족주의를 탈피할 수 있을 것이다.” (1970/05/13, 아시아상공회의소연합회 회장 취임사)

“세금이 많은 달은 십억 이상 나갈 때도 있다. 이 돈을 안내면 그냥 남는 건데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아무리 곤경에 처해도 세금은 으레 내는 걸로 치고 있으니 내고 나면 오히려 시원하다.” (1971/03/06, 우량납세자로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한 뒤)

“최근 우리나라 경제정세는 환율 상승에 뒤이어 세계적 통화파동에 따른 무역의 혼란과 경기후퇴 등으로 큰시련에 직면해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관민이 힘을 합쳐서 물가문제를 비롯, 업계의 경기침체 등을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다.” (1971/09/06, 정부의 물가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 평가

평소 기업경영에서 사람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박승직상점을 맡아 경영할 때부터 유능하고 성실한 직원을 우대하고 적성에 맞는 업무에 배치했다. 여직원 고용을 늘리고 복리후생에 관심을 갖는 등 당시로서 혁신적 조치를 했다.

박두병은 1950년대 독일과 미국으로 직원을 유학보낼 정도로 인재경영을 중시했다. 두산그룹의 모토인 “사람이 미래다” 역시 박두병의 경영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국내 최초로 전문경영인을 기업 수장으로 내세웠다.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은 뒤 1968년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며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었던 정수창을 내세웠다. 정수창은 박두병과 소화기린맥주 시절부터 손발을 맞췄던 인물이다.

박두병은 “회사 창설 때부터 생각했던 일”이라며 “자신이 사장이라고 아들이나 동생이 사장을 이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정수창은 박두병을 떠나 새한제지와 삼성물산 등을 거쳤다. 박두병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정 사장 복귀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이병철은 박두병을 “벌써 그만두고 나간 사람에 대해서도 양해를 구할 정도로 예의가 바른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대한상의 회장을 지내며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자문 역할을 했다. 박 전 대통령은 박두병의 근면함을 보고 “박두병씨가 쉬면 쓰러지니 계속 일하도록 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성실과 신용을 중요하게 여겨 단 한 차례도 부도를 낸 적이 없고 단 한 번도 세금을 체납한 적이 없었다.

평소 과묵하다는 평가가 많았다. 신중하고 겸손한 성품으로 주변의 신뢰를 받았다.

◆ 기타

두산그룹의 이름은 박두병 회장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한 말 한 말 쌓아 큰 산을 이룬다”는 의미다.

생전 모교인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건립를 위해 1억 원을 내놓겠다는 뜻을 밝혀 사후 장남 박용곤이 서울대학교에 1억 원을 전달했다. 박두병은 서울대 총동창회장을 지냈다.

등산을 특히 좋아하고 골프도 즐겨 했다. 1966년 한국골프협회 회장을 지냈다. 그밖에 사진찍기에도 취미가 있어 집에 암실을 갖춰놓을 정도였다.

조선은행에서 금융계, 정관계 인사들과 인맥을 만들어 사업에 도움이 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 때 맺은 인연이 구용서 한국은행 총재,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 백두진 국회의장, 김영찬 상공부 장관이다. 구용서는 당시 상사였고 장기영, 백두진, 김영찬은 후배로 입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