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Who Is ?] 김익래 다우키움그룹 회장

김익래 다우키움그룹 회장.

김익래는 다우키움그룹 회장이다.

정보통신업에서 금융업까지 사업범위를 확대해 온 다우키움그룹의 새 성장동력을 찾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다우키움그룹이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됨에 따라 기업 투명성을 강화해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1950년 12월16일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경복고등학교와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했다.

문과 출신이지만 한국IBM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해 소프트웨어회사인 다우기술을 설립했다.

키움증권을 통해 증권업계로 진출하며 정보통신업과 금융업을 아우르는 다우키움그룹의 토대를 마련했다.

국내 벤처업계를 개척한 ‘원조 벤처기업인’으로 꼽힌다. 전문경영인에게 계열사 대부분의 경영을 맡겨 ‘은둔의 경영인’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솔직하고 대범한 성격으로 알려졌다.

소신이 강하고 사업기회를 포착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을 듣고 있다.

경영활동의 공과


△키움뱅크 제3인터넷전문은행 예비인가 심사 탈락
키움증권 중심의 키움뱅크가 제3인터넷전문은행 예비인가 심사에서 탈락했다

금융위원회는 2019년 5월26일 키움뱅크 컨소시엄과 토스뱅크 컨소시엄이 모두 인터넷전문은행 예비인가 심사에서 탈락했다고 밝혔다.

키움뱅크 컨소시엄은 키움증권을 주축으로 KEB하나은행, SK텔레콤 등 모두 28곳의 주주가 참여하는 인터넷전문은행 컨소시엄이다.

키움증권은 키움뱅크 컨소시엄의 지분 25.63%를 들고 있는 최대주주다.

금융위는 키움뱅크 사업계획이 혁신성과 실현 가능성이 떨어진다고 봤다. 2019년 하반기 재인가를 추진하겠다고 하지만 키움뱅크의 재도전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다.

김익래는 인터넷전문은행을 다우키움그룹의 새 성장동력으로 정하고 사업 추진에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키움증권은 2018년 11월6일에 프로야구단 서울히어로즈와 메인스폰서십 계약도 체결했는데 인터넷전문은행 출범에 대비해 인지도를 높여두려는 김익래의 포석이라고 업계는 바라봤다.

키움증권은 2015년에도 인터넷전문은행 설립을 검토했지만 은산분리정책에 막혀 사업을 진행하지 못했다.
[Who Is ?] 김익래 다우키움그룹 회장

▲ 키움증권 실적.

△다우키움그룹 대기업 지정
김익래가 다우기술을 설립한 지 33년 만에 다우키움그룹이 대기업에 지정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19년 5월15일 자산총액 5조 원 이상인 59개 기업집단을 2019년 공시대상 기업집단으로 지정했다고 발표했다.

다우키움그룹은 2019년에 공시대상 기업집단으로 처음 이름을 올렸다. 계열사는 57개로 나타났다. 사모투자전문회사(PEF)와 투자목적회사(SPC)가 늘어나 자산총액이 5조 원으로 집계됐다.

자산총액 순위는 대기업집단 59곳 가운데 59위다. 김익래는 다우키움그룹 총수(동일인)로 지정됐다.

다우키움그룹은 2018년에 매출 2조8346억 원, 영업이익 3841억 원, 순이익 3235억 원을 냈다.

△ 프로야구단 '키움 히어로즈'로 키움증권 마케팅 강화
키움증권은 프로야구단 서울히어로즈의 메인 스폰서가 됐다.

키움증권은 2018년 11월6일 서울 여의도 키움증권 본사에서 프로야구단 서울 히어로즈와 메인 스폰서십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기간은 2019년부터 2023년까지 5년으로 연간 스폰서 금액은 100억 원이다.

서울히어로즈의 구단명은 이 계약에 따라 2019년부터 5년 동안 키움 히어로즈가 된다.

김익래는 프로야구 마케팅을 향한 의지가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터넷전문은행 등 새 사업의 성공을 위해서는 마케팅을 강화할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김익래는 이번 계약 이전부터 프로야구 마케팅을 향한 관심을 꾸준히 보여왔다.

키움증권은 2006년부터 야구장 펜스 광고를 통해 프로야구 마케팅을 진행해 왔다. 프로야구단과 손잡고 각종 프로모션과 유소년 야구도 지원했다. 비록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2008년에는 야구 국가대표팀 공식 후원사를 맡는 방안도 타진했다.

△다우키움그룹 경영권 승계 준비
김익래는 다우키움그룹의 2세경영을 준비하고 있다.

김익래의 아들인 김동준 키움인베스트먼트 대표이사는 2019년 1월1일 키움인베스트먼트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김 대표는 다우기술, 다우데이타를 거쳐 키움인베스트먼트로 자리를 옮겼다.

업계에서는 김 대표가 다우키움그룹의 경영권 승계를 대비해 사업 전반에서 경험을 쌓고 있다는 시각이 많다.

김 대표는 실질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회사인 ‘이머니’를 통해 다우키움그룹의 지주격 회사인 다우데이타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김 대표의 이머니 지분은 2014년 기준으로 26.91%였지만 업계에서는 김 대표가 이머니 지분을 꾸준히 늘려 2019년 1분기 기준으로 지분을 50% 이상 확보했다고 추정한다.

이머니는 2019년 1분기 기준으로 다우데이타의 지분을 20.92% 보유하고 있다. 김익래(40.64%)에 이어 2대주주다.

이머니는 2011년 다우데이타 지분율이 10% 수준이었지만 8년 동안 2배 넘게 지분율을 높였다.

업계에서는 김익래가 이머니의 다우데이타 지분율을 높여 가는 방식으로 김 대표의 다우키움그룹 승계를 추진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다우데이타 각자대표로 경영현장 복귀
김익래는 다우데이타 각자대표이사로 경영일선에 돌아왔다.

다우데이타는 2015년 3월27일 정동철 대표이사체제에서 정동철, 김익래 각자대표이사체제로 변경한다고 공시했다.

김익래는 그동안 다우키움그룹 계열사의 경영을 전문경영인에 맡겨두고 그룹의 대외업무 등에만 관여했다.

다우데이타가 핀테크 등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한 것이 김익래의 경영복귀 이유로 꼽힌다.

다우데이타는 종합결제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밴코리아를 2013년 인수했고 주주총회를 통해 직불전자지급 수단 발행과 관리사업에도 진출할 것을 의결했다.

일부에서는 다우키움그룹의 지주사 역할을 하는 다우데이타에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김익래가 돌아왔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 대표가 2017년 9월 사임한 뒤에도 김익래는 이인복 각자대표이사와 함께 다우데이타 각자대표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다우키움그룹의 수직계열화
김익래는 다우키움그룹의 수직계열화를 이뤘다.

다우기술은 2006년 8월22일 보유하고 있던 다우데이타 주식 1100만 주(49.48%) 모두를 김익래에게 163억 원에 매각했다고 밝혔다.

김익래는 이 지분을 토대로 다우데이타 최대주주로 올라서며 다우데이타, 다우기술, 키움증권으로 이어지는 다우키움그룹의 수직계열화를 이뤘다.

다우키움그룹의 지주사 역할을 하는 다우데이타의 주요주주는 김익래(40.64%)와 김익래의 아들인 김동준 키움인베트스트먼트 대표이사가 실질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회사인 이머니(20.92%)다.

다우데이타는 다우기술의 지분을 38.08% 보유하고 있고 다우기술은 키움증권의 지분 47.7%를 들고 있다.

키움증권은 다시 키움인베스트먼트, 키움저축은행, 키움투자자산운용 등을 자회사로 두고 있다.

2019년 1분기 기준으로 다우키움그룹 소속 상장사는 다우데이타, 다우기술, 키다리스튜디오, 사람인HR, 한국정보인증, 미래테크놀로지, 키움증권 등 7개다.

이밖에 사모투자회사와 외국법인 등을 포함해 95개의 비상장 계열사가 있다.

△키움증권 통해 증권업 진출
김익래는 키움증권을 통해 증권업까지 사업영역을 확대했다.

김익래는 2000년 1월 당시 금융감독위원회 구조개혁기획단의 김범석 팀장을 초대 사장으로 키움증권(구 키움닷컴)을 설립했다.

키움증권은 2000년 5월4일부터 온라인 주식위탁매매 서비스를 시작했다. 영업점이 없다는 장점을 활용해 저가의 수수료 전략을 펼쳤다.

처음 1년 동안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기존 증권사의 10분의 1 수준인 수수료로 주식 거래를 할 수 있다는 점이 개인투자자 사이에서 알려지며 주식위탁매매시장에서 점유율이 가파르게 상승했다.

키움증권은 2005년부터 13년 연속 주식위탁매매시장 점유율 1위를 지켜오고 있다.

개인투자자시장에서 특히 강점을 지니고 있으며 2005년부터 개인투자자의 약 25%가 키움증권의 홈 트레이딩 시스템(HTS) ‘영웅문’을 사용해오고 있는 것으로 업계는 추산한다.

키움증권은 주식위탁매매를 시작으로 투자자문, 선물, 기업공개(IPO), 직접투자(PI)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2016년에는 한국투자증권을 제치고 우리은행 지분 인수에 성공하기도 했다.

키움증권은 키움인베스트먼트, 키움저축은행, 키움투자자산운용 등을 자회사로 두고 있다.

△다우기술 설립과 상장
김익래는 소프트웨어 유통개발 회사 다우기술을 세웠다.

김익래는 1986년 1월 큐닉스에서 같이 일했던 직원들과 함께 자본금 5천만 원으로 다우기술을 설립했다.

다우기술은 대형 컴퓨터의 운영체계로 볼 수 있는 ‘유닉스(UNIX)’의 한글화 작업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외국 유명 소프트웨어의 한글화 작업을 주요 사업영역으로 삼고 사업 규모를 확대했다.

김익래는 사업 초반 불법 복제 소프트웨어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복제가 어려운 하드웨어에 내장되는 소프트웨어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사업방향을 바꿔 위기를 넘었다.

다우기술은 소프트웨어 개발까지 사업 영역을 넓혔고 1994년 정부의 소프트웨어 불법복제 단속에 힘입어 실적이 급성장했다.

1997년 기업공개를 추진해 코스피 상장에 성공했다. 공모가는 5만2천 원으로 결정됐다.

다우기술은 다양한 인터넷 솔루션을 개발해 인터넷 시대를 예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익래는 2000년 3월 전문경영인을 영입하면서 다우기술의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김익래는 2000년 5월 매일경제신문에 “다우기술이 개발했던 인터넷 솔루션이 키움증권 등 자회사를 설립하는 밑거름이 됐다”고 글을 남겼다.

△큐닉스 공동 설립
김익래는 컴퓨터 개발 회사 큐닉스를 설립했다.

김익래는 1981년 1월 이범천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와 함께 ‘국내 1호’ 벤처기업으로 꼽히는 큐닉스를 공동 설립했다.

큐닉스는 애플 컴퓨터의 한글화에 주력하면서 한글 프린터 모듈을 개발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한글 프린터 모듈의 복제품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마이크로스프트의 한국 독점 대리점권을 따내 사업이 안정세로 접어들었다.

김익래는 당시 마이크로소프트의 국내 소프트웨어 사용허가를 들고 있던 금성사(현 LG전자)의 상무를 직접 찾아가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본사에 큐닉스를 한국 대리점으로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김익래는 큐닉스에서 연구개발을 제외한 기획, 영업, 재무 등의 분야를 총괄했다.

하지만 동업자인 이 교수와 사업방향을 두고 의견 차이가 있었고 이를 좁히지 못해 큐닉스를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비전과 과제/평가

◆ 비전과 과제
[Who Is ?] 김익래 다우키움그룹 회장

김익래 다우키움그룹 회장. <키움증권>

다우키움그룹의 새 성장동력으로 낙점한 인터넷전문은행의 설립에 성공해야 한다.

인터넷전문은행은 1기 인터넷전문은행인 카카오뱅크를 통해 안정된 자본조달이 가능하면 성장성이 높은 사업이라는 것이 증명됐다.

키움증권이 주축이 되는 키움뱅크는 KEB하나은행, SK텔레콤, 11번가 등 각자 업계를 이끄는 회사들이 주주로 참여하고 있어 카카오뱅크보다 자금조달 능력이 우수하다는 시선이 많다.

김익래는 키움증권, 키움투자자산운용, 키움저축은행 등 금융권사업을 차례로 성공한 경험이 있는 만큼 키움뱅크도 설립만 된다면 인터넷전문은행시장에 빠르게 안착할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금융위 지적 사항인 혁신성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사업계획을 다시 들여다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업계에서는 키움뱅크가 혁신성을 강화하기 위해 주주구성을 핀테크에 무게를 두는 방향으로 바꿀 가능성도 제기된다.

다우키움그룹이 대기업집단에 지정됨에 따라 투명성도 강화해야 한다.

공정위는 지난해 7월부터 일감 몰아주기 규제대상을 자산총액 10조 원에서 5조 원 이상인 그룹으로 확대했다.

다우키움그룹은 2019년 5월에 자산총액 5조 원 이상인 공시대상 기업집단에 포함됐다.

주요 계열사인 키움증권이 매년 다우기술에 전산과 관련된 일감을 맡기고 있어 이런 내부거래가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에 들어갈 가능성도 제기된다.

다우키움그룹의 경영권 승계를 합법적으로 이뤄야 할 과제도 안고 있다.

김익래는 1남2녀 가운데 아들인 김동준 키움인베스트먼트 대표이사에게 경영권 승계를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 있을 상속 과정에서 편법승계나 내부거래 등이 발생하면 다우키움그룹의 규모가 커진 만큼 사회적 파장도 클 것으로 예상된다.

◆ 평가
[Who Is ?] 김익래 다우키움그룹 회장

김익래 다우키움그룹 회장(가운데)이 2014년 12월1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우리자산운용과 키움자산운용 합병기념식에서 건배사를 하고 있다. <키우투자자산운용>

국내 벤처업계를 개척한 원조 벤처기업인으로 꼽힌다.

국내 1호 벤처기업인 큐닉스, 다우키움그룹의 모태가 된 다우기술 등을 1980년대에 설립했다.

문과 출신이지만 한국IBM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것이 벤처기업인으로 성장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파악된다.

한국IBM은 김익래의 기업가 기질을 알아보고 면접이 끝나자마자 합격을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익래는 삼성, 현대 등의 대기업 입사시험에 떨어지고 한국IBM 입사를 지원했다고 한다.

2000년부터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겨 ‘은둔의 경영인’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큐닉스, 다우기술 시절부터 대기업 오너 일가의 경영자들을 직접 만나 사업을 따낼 정도로 솔직하고 대범한 성격을 지녔다.

한국IBM에서 근무할 때는 출장에서 만난 극동지역본부 미국인 사장에게 “IBM이 건전하고 좋은 회사지만 번 돈을 전부 본사로 들고 가고 한국IBM이나 한국의 발전에 소홀한 것 같다”고 말해 한국IBM을 떠나게 된 것으로 전해졌다.

소신이 강하고 사업기회를 포착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0년에 15년을 키운 다우기술의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키움증권을 설립했는데 벤처기업도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돼야 한다는 평소 소신에 따른 행동으로 여겨진다.

인터넷과 온라인 주식거래의 시대가 올 것을 예견하고 과감하게 사업에 뛰어들어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전문경영인을 믿고 많은 권한을 주는 오너 경영인으로 통한다.

권용원 금융투자협회장, 이현 키움증권 대표이사 사장 등 업계에서 인정받는 전문경영인들이 김익래에게 발탁돼 능력을 증명할 기회를 얻었다.

파트너십을 중요하게 여긴다. 다우기술의 ‘다우’에는 ‘많은 사람이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곳이 되자’(Be helper)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검소함이 몸에 배어 해외출장에서도 이코노미석을 이용한다고 한다.

좌우명은 정직이고 취미는 등산이다.

사건사고
[Who Is ?] 김익래 다우키움그룹 회장

김익래 다우키음그룹 회장.

△키움증권 급여 수준 업계 최하위
키움증권의 직원 급여가 증권업계 최하위 수준으로 나타났다.

금융감독원의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키움증권의 2018년 3분기 직원 평균급여는 5914만 원이다.

전체 증권사 가운데 신영증권의 4200만 원에 이어 두 번째로 평균급여가 낮았다.

키움증권은 2018년 자기자본이익률(ROE)이 11.49%를 보여 한국투자증권 다음으로 수익성이 높은 증권사였다.

키움증권에서 2018년에 5억 원 이상의 연봉을 받은 사람은 회장인 김익래(11억 원)와 김기만 프로젝트금융팀 이사(9억 원), 김태현 인수금융팀 이사(5억 원) 등 3명이다.

△키움증권 정보이용료 두고 코스콤과 소송
키움증권은 코스콤(구 한국증권전산)과 시세정보 이용료를 두고 소송을 벌였다.

서울고법 민사 11부는 2015년 4월 코스콤이 키움증권을 상대로 시세정보 제공료 60억여 원을 지급하라며 낸 소송의 항소심에서 키움증권이 코스콤에게 7억 원을 지급하도록 하는 강제조정 결정을 내렸다.

키움증권이 강제조정 결과를 받아들여 판결은 확정됐다.

한국거래소의 증권전산업무 등을 맡고 있는 코스콤은 키움증권이 활동계좌 수를 적게 통보함으로써 정보이용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며 2010~2012년 동안 키움증권이 지급하지 않은 정보이용로와 지연손해금까지 합쳐 60억여 원을 지급하라고 주장했다.

코스콤은 증권사와 시세정보 제공 계약을 체결할 때 지점 수를 기준으로 정보료를 책정한다. 하지만 키움증권이 온라인으로만 사업을 운영하기 때문에 고객 5천 계좌를 1점포로 환산하기로 했다.

1심 재판부는 코스콤이 2004년부터 키움증권의 고정된 정보료 지급에 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2006년 3월부터 16개월 동안 계좌 수를 동일하게 통보했음에도 문제삼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이런 점들을 보면 코스콤이 키움증권의 계좌수에 따라 산정한 금액이 아닌 일정 수준의 정보 이용료를 받기로 약정했거나 추인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판단해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지만 항소심에서 결과가 뒤집혔다.

△’윈도우비스타’ 관련주 급등 틈타 다우데이타 주식 대량 매각
김익래가 다우데이타 주식을 대량 매각해 주가가 폭락했다는 논란에 휘말렸다.

김익래는 2007년 1월9일부터 1월11일 동안 다우데이타 주식 133만2천 주(4.2%)를 매도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5년 만에 내놓은 윈도우 운영체계인 ‘윈도우비스타’로 컴퓨터 판매가 늘어날 것이라는 업계의 전망에 따라 하드웨어 공급과 시스템 구축 등을 하는 다우데이타가 윈도우비스타 출시 최대 수혜주로 꼽혔다.

다우데이타 주가는 2천 원대에서 5천 원대까지 올랐고 김익래는 평균 4천 원 후반대에 다우데이타 주식을 팔았다.

김익래가 매각을 시작한 다음날인 2007년 1월10일부터 다우데이터 주가는 폭락해 2007년 1월17일 3630원대까지 빠졌다.

당시 증권업계에서는 김익래가 자세한 설명 없이 주식을 대거 팔아 투자자들의 불안감을 조성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경력/학력/가족
◆ 경력
[Who Is ?] 김익래 다우키움그룹 회장

김익래 다우키움그룹 회장.

1976년 한국IBM에 입사해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1981년 큐닉스를 공동 설립하고 이사 겸 사업본부장을 지냈다.

1986년 다움키움그룹의 모체인 다우기술을 설립하고 대표이사 사장에 올랐다.

1992년과 1997년 다우데이타시스템과 다반테크를 세우고 대표이사를 맡았다.

2000년 그동안 세웠던 회사들의 대표에서 물러나며 다우그룹 회장으로 취임했다.

2008년 키움증권 회장에 올랐다.

2015년 다우데이타 각자대표이사로 선임됐다.

2019년 5월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다우키움그룹 동일인(총수)에 지정됐다.

◆ 학력

1969년 2월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4년 2월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를 졸했다.

1978년 8월 연세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 가족관계

배우자 이경애씨와 사이에 김진현씨, 김진이씨, 김동준씨 등 1남2녀를 두고 있다.

장녀 김진현씨는 주부지만 배우자가 키움증권 투자운용본부 PI팀 부장으로 베트남 사업을 맡고 있다. 차녀 김진이씨는 키움투자자산운용 해외채권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김동준씨는 2018년 키움인베스트먼트 대표이사에 선임됐고 2019년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 상훈

1993년 재무부장관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1998년 정보통신부로부터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 기타

키움증권에서 2018년 급여 8억8천만 원, 상여 2억3037만 원, 복리후생비 213만 원 등 11억1250만 원의 보수를 받았다.

어록
[Who Is ?] 김익래 다우키움그룹 회장

김익래 다우키움그룹 회장(왼쪽 여섯 번째)이 2010년 4월29일 경기도 죽전 다우기술 본사 준공식에서 이희범 STX중공업 회장(왼쪽 일곱 번째), 김봉수 한국거래소 이사장(왼쪽 여덟 번째) 등과 함께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 자본시장의 발전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키움투자자산운용을 잘 키워보자.” (2014/12/01,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우리자산운용과 키움자산운용 합병기념식에서)

“실패는 나를 키워준 자양분이다. 실패는 여전히 나를 긴장하게 한다. 끊임없이 뭔가를 하게 만든다. 실패를 두려워하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없다. 그래서 실패는 소중하다.” (2012/11/30,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열린 동문특강에서)

“키움증권의 성공배경에는 IT업체만의 노하우가 깔려 있다. IT업체가 키움증권을 세우지 않았다면 이만한 성공은 없었을 것이다.” (2006/01/12, 전자신문과 인터뷰에서)

“실패 없이는 성공도 없다. 실패를 두려워해선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2000/05/21, 매일경제신문에 기고한 ‘나의 사업이야기’에서)

“90년대 일반인들은 소프트웨어는 공짜라는 인식이 너무 강했다. 아무리 좋은 제품을 개발해도 이런 인식 때문에 영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며 소프트웨어는 돈이 안 된다는 인식을 상당부분 바꿨다고 본다.” (2000/05/17, 매일경제신문에 기고한 ‘나의 사업이야기’에서)

“이범천 박사는 큐닉스가 컴퓨터를 제조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여기에 반대했다. 컴퓨터 제조업들이 우리 고객이었는데 그들과 경쟁을 한다는 것은 신의를 저버린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2000/05/16, 매일경제신문에 기고한 ‘나의 사업이야기’에서)

“1986년 경기도 화야산에서 고사를 지내면서 다우기술을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회사로 만들겠다고 했다. 10년 뒤에는 기업공개도 하겠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2000/05/15, 매일경제신문에 기고한 ‘나의 사업이야기’에서)

“그동안 축적해온 인터넷 솔루션 기술을 발판으로 본격적으로 인터넷서비스사업을 시작한다.” (2000/02/25, 다우기술의 사업계획을 발표하는 기자간담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