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총괄수석부회장이 광주형 일자리를 놓고 딜레마에 빠졌다.

광주형 일자리는 기업이 낮은 임금으로 노동자를 고용하는 대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주거와 복지, 보육시설 등 복리후생을 지원해 부족한 임금을 보전하는 일자리 창출사업이다.
 
정의선, 광주형 일자리에 갇힌 현대차의 틀을 깨야 한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총괄 수석부회장.


국내에서 처음으로 추진되는 사업인 만큼 현대차로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다.

당연히 정 수석부회장 고민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노동계와 기업, 사회단체, 정치권이 서로 양보하고 타협해 사업의 틀을 만들었지만 참여하기로 마음먹고 실제 뚜껑을 열어보니 현대차로서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만만치 않다.

일자리 창출이라는 사회적 책임과 더불어 이윤 추구를 위한 사업성 확보방안도 함께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차는 광주빛그린국가산업단지에 조성될 연간 10만 대 규모의 경형 SUV 생산공장에 투자해 직접고용 1천 명, 간접고용 1만1천 명 등 모두 1만2천 개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광주광역시의 고용률이 60%를 간신히 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는 점에서 광주형 일자리는 분명 고용 창출에 특효약이 된다. 일자리를 찾으러 외부 지역으로 떠나는 광주광역시 청년들을 지역 테두리 안에 머물게 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

정 수석부회장은 광주형 일자리를 통해 일자리 창출이라는 사회적 책무를 다했다는 평가와 더불어 정부가 기대하고 있는 ‘노동시장의 새 패러다임 제시’에도 적극적으로 부응하게 된다.

하지만 사업성이 불확실하다는 점이 정 수석부회장의 결단을 주저하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는 광주 위탁공장에서 생산하려는 경형 SUV의 특성상 인건비 비중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고 본다. 경형 SUV 가격이 1천만 원 중반대라는 점을 감안할 때 합리적 고민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차가 광주광역시와 계속 협상하면서 노동자들의 적정 연봉을 3500만 원으로 정해야 한다고 고집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협상 과정에서 현대차가 보여준 태도는 실망스럽다.

광주형 일자리사업이 수익성을 갖춰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은 노사민정 모두가 원하는 바다. 이를 위해 현대차는 다른 주체들과 치열하게 토론하고 분명한 근거를 들어 설득했어야 한다.

하지만 현대차는 줄곧 투자자일 뿐 이 사업의 주체는 광주광역시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원하는 안을 알아서 만들어 오라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급기야 적어도 5년 동안은 단체교섭을 유예해야만 광주 위탁공장에서 수익을 낼 수 있다며 광주광역시와 노동계가 합의한 최종협상(안)을 막판에 거절했다.

단체교섭권은 헌법 제33조에서 보장된 단결권, 단체행동권과 함께 노동3권 가운데 하나다.

단체교섭권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2년 마다 한 번씩 사용자와 단체협상을 할 수 있는데 노동자로서 처우 개선을 요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권리다.

현대차가 노동자에 보장된 헌법상의 기본권을 무시하는 협상안을 냈다는 것은 국내 재계순위 2위이자 글로벌 5위 자동차기업이 지녀야할 태도로 적절하지 못하다.

수익성 확보가 정말 중요하다고 해도 다른 방법을 찾았어야지 노동3권을 제약하는 발상은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에 자유로울 수 없다.

물론 현대차가 광주형 일자리와 같은 낯선 길을 가는데 시행착오가 없을 수는 없다. 실질적으로 사업을 이끌어 가야 하는 처지에서 수익성 확보를 위한 해법 마련이 중요한 것도 사실이다.

현대차는 광주형 일자리에 자본금 530억 원을 출자해 지분 19%를 확보하는데 향후 이 법인은 광주광역시 주도로 운영된다.

자칫 법인이 적자를 내는 등 운영에 차질이 생기면 현대차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다. 정부가 개입된 사업 특성상 정권이 교체되기라도 한다면 광주형 일자리의 모델 자체가 뼈대부터 흔들릴 수 있다는 의구심이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를 고려해 수익성 확보라는 제1원칙을 고수할 수는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헌법에 명시된 권리를 배제하자는 것은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조차 무시하겠다는 것으로 발상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다.
 
정의선, 광주형 일자리에 갇힌 현대차의 틀을 깨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


광주형 일자리에서 단체교섭권 유예를 들어 딴지를 걸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현대차를 둘러싼 분위기는 싸늘해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잇달아 현대차가 '기업시민'으로서 책임있게 행동할 것을 거듭 요구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10일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현대차가 한국에 새로운 생산라인을 설치한지 얼마나 됐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까마득하다”며 “이제 새로운 생산라인을 한국에 만들어야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2일 정의선 현대차그룹 총괄 수석부회장이 직접 참석한 신년회에서 그를 앞에 두고 광주형 일자리에 사회적 대타협을 이뤄줄 것을 당부했는데 신년 기자회견에서는 발언 수위를 한껏 높였다.

정 수석부회장으로서는 반 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광주형 일자리 협상을 어떻게든 마무리해야 하는 부담을 무겁게 짊어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렸다.

정부가 최근 현대차그룹을 지원하는 여러 정책을 쏟아냈다는 점도 정 수석부회장은 적극 고려할 필요가 있다.

현대차는 정부의 수소사회 구현정책에 힘입어 2018년 12월 대규모 수소차 투자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그룹 차원의 숙원사업으로 꼽히는 신사옥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설립을 허가받기도 했다.

재계에서 “정부가 삼성은 싫어하고 유독 현대차만 엄청 밀어주고 있는 것 같다”라는 반응이 나올 정도다.

삼성과 SK, LG를 비롯한 여러 재벌기업들이 ‘어렵다’는 목소리를 내면서도 그동안 꾸준히 국내에 투자했지만 현대차는 1996년 아산공장 투자 이후 20년 넘게 국내에 투자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정 수석부회장은 정부의 적극 지원과 국내 소비자들의 '국산차 애용'이라는 애국심이 현대차의 오늘을 있게 하는데 큰 힘이 됐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주고 받는 것은 비즈니스의 기본원칙이다. 글로벌기업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비즈니스포스트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