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Who Is ?]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손학규는 바른미래당 대표다.

바른미래당의 원내 ‘제3당’ 입지를 다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과거 대선 후보로 꼽혔던 위상을 회복해야 한다.

1947년 11월22일 경기도 시흥군에서 태어나 경기고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재학 당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다 정학을 당했고 대학 졸업 뒤에도 사회운동을 이어갔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인하대와 서강대에서 교수를 지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권유로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경기 광명 재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다음 총선에서 신한국당 의원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김영삼 정부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3선에 성공했고 경기도지사에 당선됐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을 탈당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지를 받으며 대통합민주신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대선 후보 경선에서 정동영 후보에게 패배했다.

통합민주당의 초대 당대표가 되었지만 국회의원 선거에서 종로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뒤 강원도 춘천에서 칩거했다.

2년 만에 정계에 복귀해 ‘신자유주의 노선에 대한 반성과 무상복지를 내용으로 하는 보편적 복지의 새로운 노선’을 제시하며 민주당 대표로 선출됐다. 재보궐선거에 경기도 성남시 분당을 지역구에 출마해 4선 의원이 됐다.

대통령 선거에서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구호를 앞세워 민주통합당의 대선 후보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문재인 후보에게 패하고 낙선했다.

2년 뒤 수원병 재보궐선거에 출마했으나 새누리당 김용남 후보에 패하자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전남 강진군 만덕산 자락에 있는 토담집에서 칩거생활을 했다.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국민주권개혁회의를 만들어 국민의당과 통합하는 형식으로 국민의당에 합류했다. 대선에도 출마 의사를 보였으나 경선에서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에게 패배했다.

취미는 등산이다. 좌우명은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라’라는 뜻의 수처작주(隨處作主)다.

경영활동의 공과


△선거제도 개편 요구
손학규는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을 향해 선거제 개편을 요구하고 있다.

2018년 12월6일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 선거제 개편 요구를 외면하고 예산안 처리에 잠정합의하자 이에 항의하는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손학규는 “양당이 예산안 처리를 한다고 했지만 이건 예산안 처리가 아니라 선거제 개혁 거부를 한 것”이라며 “선거제 개혁과 예산안 처리가 함께 갈 때까지 제가 단식하고 안 되면 저는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12월5일 국회 로텐더홀에서 야3당 대표가 함께 농성하며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선거에서 득표율에 따라 각 정당에 의석을 배분하고, 배분받은 의석에서 지역구 의석을 뺀 만큼을 비례대표로 할당하는 방식이다.

손학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약속했는데 왜 지금 와서 다른 이야기를 하느냐"며 "문재인 대통령도 국민의 뜻을 제대로 받들어 움직이지 않고 있는 민주당이 움직이도록 결단을 내려 달라"고 촉구했다.

그는 12월4일에도 “선거제 개편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자리 잡게 하는 절차와 제도의 완성”이라며 ”야당의 이익만 추구하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 선거제 개편과 예산안 처리를 연계하는 것을 비판하는 야당의 당연한 전략이라고 맞받아쳤다.

손학규는 9월 바른미래당 대표에 선출된 뒤에 선거제도를 개혁해 양당 체제를 무너뜨리는데 집중하겠다면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소득주도성장과 최저임금인상 비판
손학규는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과 최저임금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손학규는 2018년 9월27일 국회에서 열린 ‘최저임금법 시행령 개정 관련 경제단체 간담회’에서 “소득주도성장을 전면 폐기하고 최저임금 인상을 멈춰야 한다”며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으로 곳곳에서 아우성인데도 문재인 정부는 민심을 듣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장하성 실장은 경제정책을 잘못 잡고도 억지를 쓰며 실상을 왜곡하고 있으며 김동연 부총리도 나라 경제 운용의 최고책임자로서 잘못된 경제정책에 항의 한마디도 못 하고 피해 가는 무책임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하며 장하성 정책실장과 김동연 부총리의 경질을 주장했다.

11월9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는 “‘경제 투 톱’이 경쟁하면 싸움만 난다”며 “청와대 정책실장을 임명하지 말고 빈자리로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부총리의 후임에는 실용적 시장주의자를 임명할 것을 요구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11월9일 김 부총리와 장 실장을 동시에 교체하기로 했다. 김 부총리의 후임은 홍남기 국무조정실장이 지명됐고 장 실장의 후임은 김수현 청와대 사회수석이 임명됐다.

△바른미래당 대표
손학규는 바른미래당 대표에 올랐다. 임기는 2020년 9월1일까지이다.

그는 2018년 8월8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무기력증과 패배주의의 구렁에서 탈출하기 위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온갖 수모와 치욕을 각오하고 감히 나섰다”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바른미래당의 변화와 혁신을 위한 마중물이 되겠다”고 출마의 뜻을 밝혔다.

8월21일 안철수 전 바른미래당 공동대표를 만난 박주원 전 국민의당 최고위원은 8월27일 “안심(안 전 대표의 마음)이 이미 손학규 후보로 정해져 있다”며 손학규에 힘을 실었다.

손학규는 9월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바른미래당 대표 및 최고위원, 전국청년위원장 선출대회에서 최고 득표율인 27.02%로 당선돼 바른미래당의 신임 대표에 올랐다.

그는 정치개혁 의지를 보였다. 손학규는 “무능과 독선의 제왕적 대통령제와 갑질 양당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저를 바치겠다”며 “국민의 요구를 직접 전달할 수 있는 선거제도를 만드는 데 당력을 집중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손학규가 바른미래당 대표에 오르면서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등 원내 정당 세 곳의 대표가 민주당계 출신으로 채워졌다. 손학규는 “정치를 새롭게 할 의지가 있는지가 올드보이와 골드보이의 차이”라고 말했다.
[Who Is ?]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 2018년 9월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바른미래당 대표 및 최고위원 및 전국청년위원장 선출대회에서 당선자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수민 바른미래당 전국청년위원장, 권은희 바른미래당 최고위원, 하태경 바른미래당 최고위원, 손학규 바른미래당 신임대표, 이준석 바른미래당 최고위원. <연합뉴스>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및 재보궐선거
2018년 6월13일 치러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및 재보궐선거에서 바른미래장 선대위원장을 맡았다.

손학규는 5월3일 “선대위원장을 맡은 것은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과 지방선거 뒤에 진행될 정계개편을 준비하기 위해서다”며 선대위원장직을 수락한 이유를 밝혔다.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서울 송파을 지역구를 둘러싼 파동에 휩쓸리기도 했다. 손학규는 안철수계의 지지를 받아 송파을 전략공천 대상으로 지목됐으나 계파갈등 양상으로 비화하자 불출마를 선택했다.

바른미래당은 지방선거에서 17석의 광역단체장과 226석의 기초단체장에서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배출하지 못했다. 824석의 광역의원과 2926석의 기초의원에서 각각 5석과 21석의 당선자만을 내는 참패를 겪었다.

손학규는 “합당 과정에서 호남과 영남에서 많은 세력이 떨어져 나가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하고 마이너스 통합이 됐다”고 패배를 분석했다.

△바른미래당으로 당적 변경
손학규는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통합에 기여했으나 일부 의원의 탈당을 막지 못했다.

제19대 대선 이후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합당 문제가 불거지며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를 중심으로 한 합당파와 박지원, 정동영, 천정배 등 호남에 지지기반을 둔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반대파의 대립이 격화됐다.

이에 손학규가 국민의당 상임고문으로서 국민의당의 분당을 막고 바른정당과 합당 과정에서 큰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역할론이 제기됐다.

손학규는 합당을 놓고 태도를 명확히 하지 않은 채 2017년 12월21일 박지원 전 국민의당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12월22일에는 이상돈 국민의당 의원과 아침식사를, 유성엽 국민의당 의원과 점심식사를,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바쁜 행보를 보였다.

2018년 1월7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호남 중진 일부가 이탈하더라도 중도통합에 속도를 내야 한다”며 “통합해서 제3세력의 중심을 잡으면 호남도 박수칠 것을 호남 중진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안 대표를 향해서도 “더 양보하고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호남 중진과 타협점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손학규는 통합에 찬성하는 태도를 보이는 한편 국민의당의 분당을 막기 위해 중재 역할을 맡았지만 결국 호남 중진들을 중심으로 민주평화당이 창당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2018년 2월13일 남은 국민의당 의원들과 바른정당의 통합정당인 바른미래당이 창당됐다.

△대선 출마 선언과 경선 패배
2017년 3월19일 국민의당 경선 참여로 제19대 대통령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출마 선언식을 열고 “특권과 패권이 곧 모든 적폐의 근원”이라며 “제왕적 대통령제를 종식하고 국민주권의 시대를 열고 재벌위주의 경제 시스템을 해체해 중소기업 강국을 열어가겠다”고 말했다.

손학규는 이 자리에서 개헌 의지를 강조했다.

그는 “2018년 지방선거 때까지 헌법을 바꾸고 대통령 임기를 3년으로 단축해 다음 총선과 더불어 새로운 체제를 구축해 2020년에는 제7공화국이 출범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다른 당과 연대 필요성도 들었다.

손학규는 “대선 후에 연대나 연합을 하겠다는 건 거짓말”이라며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우리가 어떻게 이길 것인가를 생각할 때 연립정부를 구상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내가 대통령이 되면 이렇게 하겠다고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자강론을 내세우며 연대 연합에 선을 긋고 있는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를 겨냥한 것이라고 해석됐다.

손학규는 바른정당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개혁을 선언한다면 바른정당 등과의 연대 연합론이 호남에서도 수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민의당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 과정에서 현장투표를 반영하자고 주장했으며 이것이 받아들여져 한국 정당사상 처음으로 100% 완전 국민경선이 실시됐다.

그러나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가 2017년 4월4일 대전·충청 경선만을 남겨둔 상황에서 누적 득표율 72%로 사실상 승부를 결정하자 현장투표가 마감되기 전에 패배를 인정했다.

손학규는 “제가 대통령이 되고 싶었고 제일 잘할 것 같았지만 국민들이 안철수 후보를 지지했다”며 “이제 맘껏 안 후보를 지지하고 대통령으로 만들어 저 손학규의 한을 풀어달라”고 말했다.

경선결과 75.0% 득표율을 보인 안 후보가 1위로 국민의당 대통령 후보 자격을 확보했다. 손학규는 18.1% 득표율로 2위에 머물렀다.

△ 제3지대와 빅텐트 추진
손학규는 조기대선을 앞두고 2017년 2월 제3지대와 빅텐트 논의에 불씨를 지폈다.

민주당 비문계 이탈세력과 국민의당, 바른정당, 정운찬 전 국무총리와 정의화 전 국회의장 등 개혁적 보수세력 등에 한국당 내 개헌 및 개혁 동조세력까지 규합해 ‘반패권 연정’을 이룸으로써 대선에서 승리하고 개혁과 개헌을 완수하겠다는 것이다.

비박(비박근혜)·비문(비문재인) 세력을 규합해 국회 의석 180~200석의 비패권 연립정부를 추진하겠다는 구체적 목표를 제시했다.

2017년 2월20일에는 바른정당과 연대를 시사했다.

YTN라디오 인터뷰에서 “어차피 대선이 끝나고 나면 누가 대통령이 되든 여소야대가 불가피한 만큼 공동정부 내지는 연립정부가 불가피하다”며 “같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정당과 연대는 꼭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고 ‘바른정당과도 연립정부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묻자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나 빅텐트론은 정치권에서 이렇다 할 힘을 얻지 못했다. 손학규는 국민의당에 입당한 뒤에 바른정당과 연대를 통해 제3지대와 빅텐트 논의에 불씨를 살리려 했다.

△ 개헌론
손학규는 2016년 10월 정계에 복귀하면서 개헌론을 꺼내들었다.

손학규는 정계복귀와 동시에 발간한 저서 ‘나의 목민심서, 강진일기’에서 “개헌은 정치 문제가 아니라 국가 문제”라며 “이제 권력구조의 개편은 불가피해 보인다”고 밝혔다.

그는 “대선 후보가 책임총리를 공약으로 약속하고 당선 후에는 임기 중 개헌 때까지 이를 실천하면서 권력을 분산해야 한다”는 구체적 방법론도 제시했다.

2016년 11월 대표적 개헌론자인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전 비상대책위 대표와 만나 ‘박근혜 대통령 임기 안에 개헌을 이뤄야 한다‘고 의견을 모으기도 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정국이 급변하면서 개헌론은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손학규는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된 뒤 다시 개헌론을 꺼내 들었다.

2017년 3월7일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 대표와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만나 한 시간여 동안 배석자 없이 이야기를 나눴는데 개헌을 놓고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7년 3월10일에는 2020년 제7공화국 출범론을 공개했다. 대통령이 되어 대통령 임기를 3년으로 줄이고 그 동안 개헌을 완수하겠다는 것이다.

2017년 3월19일 대통령선거 출마를 공식적으로 선언할 때 다음 정부는 개혁 공동정부이자 개헌 공동정부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Who Is ?]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 2016년 10월20일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전남 강진군 토담집을 떠나기 직전 신발 끈을 동여매고 있다. <연합뉴스>

△저녁이 있는 삶
2012년 대선에 내건 슬로건 ‘저녁이 있는 삶’은 지금까지도 역대 최고의 선거구호라는 평을 받는다.

저녁이 있는 삶은 인간적 삶을 위해 경제구조를 새롭게 만들자는 것을 요체로 한다. 일자리를 풍부하게 창출해 근로자들이 원치 않는 잔업을 없애고 정시에 퇴근해도 되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저녁이 있는 삶은 보편적 복지와 일자리 문제라는 민주통합당과 손학규의 핵심 아젠다가 절묘하게 함축돼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긴 노동시간에 시달리는 2030대의 젊은 세대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경쟁에서 문재인 후보에게 패했지만 문재인 후보도 “대선 후보가 되면 ‘저녁이 있는 삶’ 슬로건을 빌릴 것”이라며 손학규의 정책을 높이 평가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5월 주 52시간 근로시간 단축 시행을 앞두고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노동시간 단축은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마련하고 저녁이 있는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 한나라당 탈당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쟁에 뛰어들었는데 당시 한나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떠오르는 표어가 ‘경제 대통령’ 이명박, ‘민생 총리’ 손학규, ‘책임 당대표’ 박근혜였을 정도로 당내에서 높은 지명도를 누렸다.

그러나 다른 후보들보다 진보적 색채가 강해 당내에 지지세력을 확장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경쟁자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영남권에 확고한 지역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영남권과 수도권에서 높은 지지율을 얻고 있었다.

손학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지지하는 행보를 보여 한나라당에 남아 개혁을 도모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김근태 전 민주당 상임고문 등 과거 민주화 운동의 동지들은 민주화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던 손학규에게 함께 분열로 자멸해가던 여권을 재편하자고 요청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손학규가 참여하는 여권 재편을 지지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손학규를 놓고 “당에 남더라도 시베리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결국 손학규는 과거 민주화운동의 동지들과 함께 여권 재편에 나서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고 2007년 한나라당을 탈당해 대통합민주신당에 입당했다.

손학규가 한나라당에 남았더라면 자연스럽게 여권의 대선후보가 됐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그러나 한나라당에서 버티는 선택을 했더라도 당내에 세력이 없고 지지기반이 뚜렷하지 않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 경기도지사
2002년부터 2006년까지 경기도지사로 있으면서 판교 테크노밸리, 파주 LCD단지, 평택 현곡단지 등 여러 산업단지를 조성했다.

판교 테크노밸리에서만 7만5천 개의 일자리를 만드는 등 도지사 시절에만 경기도에 74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었다. 17만 명이었던 파주시 인구는 LCD 단지 유치 이후 40여만 명으로 늘었다.

21차례에 걸쳐 투자유치단을 이끌고 미국, 유럽 등을 다니며 외국 자본 유치에도 나섰다. 159차례에 걸쳐 216명의 해외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을 만났는데 이 가운데 113개 해외업체로부터 140억 달러가량의 외자를 유치했다. 특히 LCD 관련 업체 30여 군데로부터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당시 손학규가 외자 유치를 위해 다닌 총 거리가 지구 10바퀴를 돌 수 있는 거리라고 한다.

손학규가 경기도지사로 재임했을 때 경기도의 연 평균 성장률은 7.4%에 정도에 이르렀다.

△최연소 복지부 장관
1996년 만 49세에 역대 최연소로 복지부 장관에 임명돼 1997년 3년간 끌어온 ‘한약분쟁’을 해결했다.

당시 약사들의 한약 조제·판매를 놓고 약사와 한의사들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었다.

한의사들은 물론 한의대생들까지 약사들의 한약 제조를 반대하며 데모에 나섰고 한의대생 집단 유급사태까지 벌어졌다. 약사들은 한약사제도가 기존 약사들의 한약 조제를 금지하기 위한 것이라며 헌법소원을 제출하고 폐업도 불사하겠다고 나섰다.

손학규는 약사들에게 약대를 6년제로 개편하는 방안 등을 제시하며 설득을 시작했다. 또한 한약학과는 한의대가 아닌 약대에 설치하되 한의대가 있는 종합대학에 설치하는 방안을 내놨다.

한의사들이 군의관, 공보의에 입대할 수 있게 했고 행정부 내 독립적 전담부서(한방정책관실)를 설치하도록 했다. 또한 한의학연구원 설치하고 부산대에 한의학 전문대학원이 세우는 방안을 내놨다.

손학규는 약사들과 한의사들의 합의를 이끌어내며 한약분쟁을 무난히 매듭짓고 한의사와 약사 양쪽의 협회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민주화운동가의 정계 진출
손학규는 고등학생 때부터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며 일찍부터 정치인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였다.

경기고등학교에 다니던 1964년 6.3 민주항쟁에 참여했다 구속돼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 동안 복역했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시절에도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나 조영래 전 변호사와 함께 ‘65학번 삼총사’로 불리며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다 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부 시절에는 항상 수배 중인 상태로 도망다녀야 했다. 1978년 어머니 장례식에 몰래 참석하려다가 붙잡혀 옥살이를 했고 1979년 부마민주항쟁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활동하다가 다시 체포돼 고문에 시달렸다.

1980년 한국의 개신교 연합기구 가운데 진보 성향을 보이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지원을 받아 영국 옥스퍼드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1988년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에 임명됐다. 1990년에는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됐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 민주자유당에 입당했다. 1993년 상반기 재보궐 선거에서 경기 광명 지역구에 출마해 44.9% 득표율로 당선됐다.

1996년 4월11일 치러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한국당 소속으로 경기 광명을 지역구에 출마해 42.65%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비전과 과제/평가

◆ 비전과 과제
[Who Is ?]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 2018년 10월17일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왼쪽)가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여야 원내대표 사이의 특별위원회 합의를 이끈 김관영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를 격려하고 있다. <연합뉴스>

손학규는 바른미래당 대표로 2020년 4월15일 치러지는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지휘해 제7회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바른미래당의 위신을 되살리고 제3당의 입지를 다져야 한다.

제3당은 국민의당 시절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38개 의석을 확보하며 돌풍을 일으켰지만 2017년 5월9일 제19대 대선에서 안철수 당시 국민의당 대통령 후보가 21.4% 득표율로 3위로 낙선한 뒤 분당과 합당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국민의당의 돌풍에 큰 역할을 한 호남 중진 의원들이 민주평화당을 창당해 국민의당과 갈라섰다. 호남 민심의 이탈이라는 결과가 7회 지방선거의 참패로 돌아온 만큼 손학규는 다음 총선에서 바른미래당의 위신을 회복해야 하는 임무가 막중하다.

손학규를 총선에서 바른미래당의 성과를 확대하기 위해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제시하며 선거제 개편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동의하는 야3당 중 바른미래당만이 유일한 교섭단체이기 때문에 사실상 최전선에서 목소리를 내는 형국이다.

손학규는 원외 당대표로 자신의 비전을 직접 정책으로 연결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하다. 원내에서 바른미래당을 이끄는 김관영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를 지원사격 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국회에 입성한다면 정치활동의 폭을 넓힐 수 있고 과거 대선 후보로까지 거론됐던 입지를 다시 다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다만 다음 대선은 2022년으로 손학규의 나이는 76살이 된다. 너무 많은 나이는 정치 보폭을 늘리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우선은 보수통합 국면에서 구심적 역할을 하는데 주력할 가능성이 있다. 손학규는 2018년 11월30일 자유한국당에서 통합 목소리를 높여가는 김무성 의원과 비공개로 접촉했고 유승민 의원에게도 만남을 제안했다.

◆ 평가
[Who Is ?]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 2016년 12월29일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5주기 추모제에 참석해 제를 올리고 있다. <손학규 공식블로그>

다양한 영역에서 풍부한 경험을 한 것이 장점으로 꼽힌다. 젊었을 때는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을 했다. 대학 재학 시절 조영래 변호사,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대표와 함께 '서울대 65학번 3인방'으로 불리며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학자로서 연구업적도 남겼고 교수로서 대학교에도 있었다. 관직으로는 복지부 장관과 경기도 도지사를 거쳤으며 정치인으로서는 4선 의원에 민주당 대표까지 역임했다.

정치 생활 25년 동안 루머나 스캔들이 거의 없어 도덕성 측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손학규와 절친한 교수에 따르면 2006년 대기업 총수 초청으로 골프를 했는데 손학규가 녹이 슨 낡은 골프채를 쓰는 것을 본 대기업 총수가 골프 클럽을 선물하려 했지만 완강히 거절했다고 한다.

직관적 성향에 학구적 말투를 쓴다. 주변에서는 손학규가 신학자나 정신의학자, 심리학자로도 어울린다는 말도 한다.

잦은 당적 변경과 정계은퇴 번복 등으로 비판을 받는다. 정치인으로서 신의가 없다는 공격의 표적이 된다. 이 논란은 2007년 한나라당을 탈퇴하면서 10년 넘게 계속 거론되며 손학규의 가장 큰 약점이 됐다.

늘 ‘잠재적 대선주자’였다. 엘리트 정치인이지만 정치력이나 친화력이 부족하고 대중성이 없다는 혹평도 있다. 손학규도 “나의 단점은 좀 더 대중성을 갖추지 못하는 것”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 대문에 정치 마케팅 능력이 떨어지고 성과 만큼 유권자에게 호소력을 지니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 결과 열광적 지지층이 부족하다. 손학규보다 '저녁이 있는 삶'이 더 유명하다는 말도 나온다.

정치적 결단을 할 때마다 더 큰 일로 사람들의 시선이 쏠려 손학규가 조명되지 않는다는 ‘손학규 징크스’가 있어 운 없는 정치인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종교는 기독교(장로교)다. 주량은 막걸리 1명이고 비흡연자다. 취미는 등산이다.

좋아하는 정치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좋아하는 학자로 다산 정약용을 꼽는다.

스스로 ‘찍새’라는 별명을 붙였다. 경기도지사 시절 경기도 투자 유치팀을 이끌고 세계를 돌며 외국기업을 찍어서 데려왔다는 의미다.

사건사고


△음주운전 발언
음주운전 피해자 앞에서 음주운전 경험을 드러내 질타를 받았다.

2018년 11월5일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뇌사 상태에 빠진 윤창호씨의 친구들이 국회를 방문해 음주운전 사망사고의 처벌을 강화하는 '윤창호법'의 국회 처리를 요청했다.

손학규는 이들과 만난 자리에서 “무쟁점 법안인 만큼 12월 안에 국회 본회의에서 반드시 통과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하다가 갑자기 "요즘은 음주운전을 아주 조심하지만 사실 나도 아주 젊었을 때는 음주운전을 조금 했었다”고 발언했다.

음주운전을 한 것도 잘못이지만 이를 피해자 친구들을 만난 자리에서 공개한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손학규는 11월6일 당대표로서 경솔하고 사려 깊지 못했다고 사과했다. 윤창호씨 친구들에게도 전화를 해 사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송파을 지역구 공천 파동
2018년 6월13일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진 재보궐 선거에서 바른미래당은 서울 송파을 지역구에 누구를 출마시킬 것인지를 두고 안철수계와 유승민계가 갈등을 겪었다.

송파을 경선결과 바른정당 시절 송파을 당협위원장을 맡았던 박종진 예비후보가 1위에 올랐다. 그러나 안철수 전 대표와 박주선 의원은 송파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이기는 정치인을 내보내야 한다’고 손학규의 전략공천을 주장했다.

손학규는 출마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고수했지만 갑자기 출마로 돌아섰다.

그는 5월24일 “안철수 후보와 박주선 공동대표가 송파의 중요성을 들어 나를 설득했다”며 “나를 버리고 희생하자는 생각으로 출마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유승민 바른미래당 대표는 기자들에게 “전략공천은 원칙과 상식에 맞지 않다”며 “이번 일도 원칙과 상식이 중요한 만큼 전략공천 요구 의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박종진 예비후보는 “당의 결정을 기다리고 승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정치는 원칙과 명분이 있어야 한다”며 “이것은 비민주적 구태정치”라고 날을 세웠다.

바른미래당에서 안철수계와 유승민계의 갈등이 격화할 조짐을 보이자 손학규는 출마 의사를 밝힌 지 하루 만에 다시 불출마하겠다고 의견을 번복했다.

5월25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당이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분열의 위기로 치닫고 있어 송파을 재선거 출마 생각을 접는다”고 밝혀 송파을 지역구 논란이 일단락됐다.

△철새 정치인 비판
19대 대선을 앞두고 운신의 폭을 늘려나가자 안희정 충남도지사의 비판을 받았다.

2017년 1월 안희정 지사는 손학규를 ‘철새 정치인’으로 규정하고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에 “낡은 정치로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열 수 없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저희 후배들이 잘 만들어 가겠다”며 “진심으로 부탁드린다. 저희들을 믿고 은퇴해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손학규는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안희정은 친노·친문의 홍위병으로 시작했지 않느냐”며 “노무현·문재인 키즈의 대표적 사람이지, 그가 언제부터 중도였나”며 안 지사를 맹비난했다.

정치계를 은퇴하라는 발언을 놓고는 “젊은 사람이 튀려고 한 발언인데 뭐라고 하겠느냐”라며 직접적 대응을 하지 않았다.

손학규 징크스
손학규가 정치적 활동을 하면 항상 더 큰 이슈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손학규는 조명을 받지 못한다는 ‘손학규 징크스’가 있다.

2018년 9월2일 바른미래당 대표로 선출됐지만 사람들은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손흥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의 병역면제에 집중하고 있었다.

2017년 2월17일 국민의당 입당이 확정될 때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2016년 10월20일 20대 총선에서 야당의 승리로 입지가 불명확하게 되자 개헌론을 꺼내며 정계복귀를 선언했다. 하지만 정계복귀 선언을 하자마자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손학규의 정계복귀는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2006년 전국 100일 민심 대장정을 마치고 상경했지만 북한의 첫 번째 핵실험이 터져 손학규의 민심 대장정이 북핵 이슈에 묻혀버렸다. 민주당 대표 시절 정치인으로서는 최초로 시청 앞 광장에 텐트를 쳤지만 뒤이어 연평도 포격 사건이 터져 텐트를 접고 연평도로 향한 일도 있다.

손학규는 2017년 1월6일 tbs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손학규 징크스를 언급하면서 “단단히 준비하라고 하늘이 단련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거국중립내각 총리 후보론
2016년 11월 박근혜 게이트로 박근혜 대통령을 국정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고 박 대통령 대신 사실상 국정 전체를 지휘할 거국중립내각의 구성이 필요하다는 여론에 힘입어 총리 후보로 거명됐다.

손학규는 “소명이 있다면 총리직을 수락하겠다”고 말했으나 박 대통령이 2선 후퇴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탄핵’이 새로운 이슈로 부각되면서 거국중립내각 이야기는 없던 일이 됐다.

경력/학력/가족
◆ 경력
[Who Is ?]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 2004년 8월31일 손학규 경기도지사가 국회 귀빈식당에서 열린 한나라당 시.도지사회의에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1977년부터 1979년까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운동 간사로 활동했다.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지냈다.

1990년부터 1993년까지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있었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제14대 민자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제15대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1996년부터 1997년까지 제33대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했다.

1999년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일했다.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제31대 경기도 도지사를 지냈다.

2008년 1월부터 2008년 2월까지 대통합민주신당 대표를 지냈다.

2008년 2월부터 7월까지 통합민주당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2010년 10월 민주당 대표에 올랐다.

2011년 4월 제18대 민주당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2011년 12월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맡았다.

2014년 4월 새정치민주연합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2017년 1월 국민주권개혁회의를 출범하고 의장에 취임했다.

2017년 2월 국민주권개혁회의와 국민의당을 통합하면서 국민의당에 입당했다.

2018년 5월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및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를 지휘하는 바른미래당 선대위원장을 맡았다.

2018년 9월 바른미래당 대표에 선출됐다.

◆ 학력

1959년 매동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62년 경기중학교를 나왔다.

1964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3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나왔다.

1988년 옥스퍼드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초등교사 부부였던 아버지 손병화씨와 어머니 양현자씨의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교장까지 올랐으나 손학규가 4살 되던 해에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약대를 나온 이윤영씨와 결혼해 슬하에 장녀 손원정씨와 차녀 손원평씨가 있다. 손원정씨와 손원평씨는 각각 연극연출가와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 상훈

1997년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뒤 청조근정훈장을 수훈했다.

2000년과 2001년 백봉 라용균 선생 기념사업회 백봉신사상을 수상했다.

2005년 한국을 빛낸 CEO 글로벌 경영 부문에 선정됐다.

◆ 기타

'Authoritarianism and opposition in South Korea'(1989), '한국사회 인식논쟁'(1990), '한국정치와 개혁'(1993), '경기2002 새로운 희망의 중심지'(1998), '진보적 자유주의의길'(2000), '손학규와 찍새 딱새들'(2006), '길 위에서 민심을 만나다'(2007), '대한민국 손학규를 발견하다'(2007), '저녁이 있는 삶'(2012), ‘강진일기-나의목민심서’(2016) 등 10권의 저서를 냈다.

육군병장으로 만기제대했다.

2012년 기준으로 2억8264만4천 원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 2016년 84만6600원을 납세했고 100만 원을 기부했다. 2014년에는 1억7802만 원의 재산을 신고했다.

어록
[Who Is ?]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 2018년 10월2일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선거제도 개혁 촉구 정당-시민사회단체 공동 기자회견에서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촛불혁명 후에 정권이 들어섰지만 대통령이 모든 것을 다 하는 청와대 정부는 계속되고 있다. 소위 제왕적 대통령제가 그대로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자유한국당은 이미 촛불시위로 그 수명을 다한 정당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국민이 찍은 표가 사표가 되지 않고 국회에 반영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데 지금에라도 참여하는 것이 촛불혁명에 사죄하고 반성하는 길이다.” (2018/12/05, 정치개혁공동행동 긴급기자회견 모두발언)

“‘경제 투톱’이 경쟁하면 싸움만 난다. 청와대 정책실장을 임명하지 말고 빈자리로 둬야 한다. 청와대 일자리수석도 빈자리로 남겨두고 소득주도성장위원회 위원장 자리도 필요 없다. 양쪽 모두 기업의 사기만 꺾고 시장을 왜곡하는 것 외에 할 일이 없다.” (2018/11/09, 최고위원회의에서 청와대의 경제 정책을 비판하며)

“무능과 독선의 제왕적 대통령제와 갑질 양당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저를 바치겠다. 국민의 요구를 직접 전달할 수 있는 선거제도를 만드는 데 당력을 집중하겠다.” (2018/09/02, 바른미래당 대표에 오르며)

“이제 본격적으로 전개될 개헌논의도 다당제에 의한 합의제 민주주의로 권력구조를 바꾸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선거구제 개편도 권력구조 개편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채택해서 다당제에 기초한 연합정치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 (2018/02/14, 바른미래당의 성공을 기원하는 말에서)

“저는 사실 대통령이 되고 싶었다. 제가 하면 가장 잘할 것 같았다. 그런데 국민이 안철수를 택했다. 이제 안철수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저 손학규의 한을 풀어줘야 한다. 국민의당이 승리해야 하는 것은 자유한국당과 더불어민주당이라는 양대 패권세력 집권을 반드시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적대적 공존 세력이 다시 돌아온다면 나라의 운명이 불안하게 된다. 반패권 범중도 통합으로 특권 세습 세력 집권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 (2017/04/04, 국민의당 대통령 후보자 경선에서 패배를 승복하며)

“헌법을 고치지 않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말하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것이다. 제가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개혁 대통령이자 개헌 대통령이 되고, 6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이 돼 7공화국을 여는 첫 대통령이 되겠다.” (2017/03/19, 19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하며)

“국민의당은 당세가 약하기 때문에 경선 통한 흥행과 붐업이 필요하다. 여섯 군데냐 여덟 군데냐, 강원과 제주까지 포함하느냐는 논란 등 경선 장소를 놓고 봐도 4월2일까지는 너무 짧다. 당력으로 봐서는 치르기 어렵다. 그래서 경선기간을 좀 더 두고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2017/03/13, 국민의당 경선 일정과 투표소 설치 여부를 놓고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와 대립각을 세우며)

“대국민 사과, 헌재판결에 승복하는 모습을 통해 화합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전직 대통령으로서 마지막 역할이 아니었을까 안타깝게 생각한다. 한국 정치사에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될 불행한 일이다.” (2017/03/12, 박근혜 전 대통령이 통합과 화합의 메시지를 내지 않은 것에 대해 안타깝다는 입장을 내놓으며)

“2018년 지방선거 때까지 차기 대통령의 임기를 3년으로 단축해 권력구조의 개혁을 완수하겠다. 국민주권과 기본권을 강화하고, 분권을 주요 내용으로 하되 국민의 뜻에 따르겠다. 주요 개혁을 완수한 후 2020년에 제7공화국이 출범하도록 하겠다."

“이번 대선이 제왕적 권력인 박근혜 패권에서 또 다른 패권으로 이동하는 ‘패권교체’에 그친다면 이는 ‘이게 나라냐’를 외친 촛불민심을 배신하는 것이다. 차기 정부는 일체의 패권, 그리고 기득권과 단절한 개혁세력이 중심이 되는 개혁정부를 이뤄야 한다. 3월에 정치권에 빅뱅 있을 것이다.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2017/03/10,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결정 뒤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특검 수사기간 연장이 불승인됐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다. 첫째로 ‘검사장 직선제’를 실시해야 한다. 검찰의 인사권을 국민에게 돌려준다면 사법정의 실현을 위한 개혁의 물꼬가 된다. 둘째, 특검법을 개정해야 한다. 한정된 수사기간과 수사대상의 비협조로 특검 수사가 절반에 그쳤다. 수사대상과 범위, 사안의 경중을 고려해 충분한 수사기간을 보장해야 한다. 셋째, 특검이 기소한 피의자들에 대한 공소유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2017/03/06, 박영수 특검이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한 뒤)

“나 같은 저평가 우량주에 투자하면 ‘대박’이다.” (2017/03/02, JTBC 뉴스현장에 출연해 손석희 JTBC 사장이 손학규는 기자들과 대중에게 인기가 그다지 없다고 말하자)

“바른정당이 앞으로 우리나라를 어떻게 개혁할지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히면 연정의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2017/02/22,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과학기술 헌법조항 개정 정책토론회’에 참석한 뒤 기자들에게)

“2011년에 민주당 대표로 있을 때 통합을 이뤘다. 통합을 했지만 정체를 드러낸 친문 패권세력 때문에 문재인 후보에게 패했다. ‘내가 그때 문재인 후보를 이겼다면 확장성 높은 손학규가 대선을 승리했을 것이고 이런 외교적 파국은 면했을 텐데, 한반도 평화를 구축했을 텐데’라는 한탄을 했다.” (2017/03/04, 인천 강화에서 열린 ‘국민의당 경기도당 10만 전사만들기 고양시 출정식’에서)

“오늘 국민주권개혁회의는 국민의당과 통합을 선언한다. 개혁세력을 하나로 모아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새로운 나라, 위대한 대한민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에 책임 있는 수구세력은 정권 욕심을 아예 버려야 한다. 자기 패거리가 아니면 철저히 배제하는 민주당의 패권주의 집단이 정권을 잡는 것도 정권교체가 아니다.” (2017/02/07, 국민의당과 통합을 선언하고,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 등과 경선에 참여할 뜻을 밝히며)

“국민 여러분, 저는 정치와 경제의 새판짜기에 저의 모든 것을 바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겠습니다. 국회의원, 장관, 도지사, 당 대표를 하면서 얻은 모든 기득권을 버리겠습니다. 당적도 버리겠습니다. 제가 무엇이 되겠다는, 꼭 대통령이 되겠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국민 여러분, 모든 것을 내려놓아 텅 빈 제 등에 짐을 얹어 주십시오. 제7공화국을 열기 위해, 꺼져버린 경제성장의 엔진을 갈아 다시 시동을 걸기 위해, 대한민국의 미래만 보고, 소걸음으로 뚜벅뚜벅 나아가겠습니다.” (2016/10/20,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정계 복귀를 선언하며)

“2년 동안 이곳 만덕산 기슭에서 잘 지냈고, 이제는 만덕산이 내려가라 한다. 내려가야죠.” (2016/10/20, 정계 복귀를 위해 강진군 토담집을 나서며)

“나라 구하는데 죽을 각오로 나서겠다. 이순신의 백의종군 정신, 다산이 경세유표를 쓴 개혁의 정신으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 (2016/09/16, 광주에서 열린 ‘손학규와 함께 저녁이 있는 빛고을 문화한마당’에 참석해)

“더 이상 물러날 곳 없다는 것을 느낀다. 여러분께서 저에게 필요한 용기를 주셨다. 그 용기, 국민에게 꿈과 희망으로 되돌려드리겠다.”(2016/07/29, 전남 해남군 해남문화원에서)

“새 판을 짜서 국민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 이런 정치현실 속에서 과연 총선에 어느 당이 승리를 하고 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대해 국민이 어떻게 제대로 관심을 갖겠느냐.” (2016/01/31, 러시아 모스크바 극동문제연구소 방문한 뒤 귀국하며)

“언론이나 주위에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보고 정치를 다시 하라고 하는데, 나도 사람인지라 국민을 잘살게 하겠다는 마음이 간혹 곰팡이처럼 피어오를 때가 있다. 그러나 당이 어렵다고 내가 다시 정치를 한다면 국민에게 더 큰 정치불신을 초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2015/06/02, 대선주자 여론조사에 자신의 이름이 포함되자)

“1993년 정치에 입문한 이래 분에 넘치는 국민의 사랑과 기대를 받았다. 2007년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시베리아 땅으로 나선 이래 민주당과 함께 한 정치역정은 보람있었다. 정치인은 들고 날 때가 분명해야 한다. 모두 함께 일하고 일한 만큼 모두가 소외받지 않고 나누는 세상, 그런 대한민국을 만들려 했던 제 꿈을 이제 접고 오늘 이 시간부터 시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가 성실하게 살아가겠다.” (2014/07/31, 수원병에 출마해 낙선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하며)

“경기도지사로 땀 흘렸던 수원은 제 마음속의 영원한 자랑이다. 수원의 자존심으로 팔달에서 민생을 제대로 돌보는 정치를 열어나가겠다.” (2014/07/10, 경기도의회에서 수원병(팔달) 국회의원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하며)

“우리는 지금 어느 때보다도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민주주의의 근본은 국민의 생활, 국민의 삶, 민생이다. 그러나 국민의 피와 희생으로 이뤄진 민주주의가 훼손되는 것은 국민은 결코 인내하지 않을 것이다.” (2013/09/29, 박근혜정부 평가를 묻는 질문에)

“새로운 사람이 새로운 기운을 갖고 분당 같은 곳에서 민주당의 기반을 만드는 일을 지원하고 돕고 밀어주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총선에 출마해 당선이 된다 하더라도 국회의원직을 몇 달 수행하지 못한다. 이는 선거구민에 대한 기본적 도의나 예의가 아니다.” (2012/01/28, 총선에 불출마하고 대선에 직행하겠다는 뜻을 보이며)

“2011년은 민주당이 수권정당으로 거듭 새롭게 태어나는 해가 될 것이다. 내년 총선과 대선을 통해 정권교체를 이루고 우리가 이제 본격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열어가겠다.” (2011/01/01, 서울 영등포 민주당사에서 열린 단배식에서)

"국민을 섬기겠다던 이명박 대통령이 이제 아침마다 국민을 꾸짖는다. 그 오만함을 깨우치려 우리 국민은 ‘촛불’로 경고했지만 도무지 귀를 막고 듣지 않고 있다." (2010/05/16, 6·2지방선거에서 이명박 정권을 심판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요즘 산골에 살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면서 지낸다.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 또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 것이고 어떻게 나가야 할까를 생각한다. 실제로 이 역사와 이 사회에서 손학규는 필요한 사람인가 다시 한번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2009/02/22, 재보선 출마여부를 묻는 질문에)

“당 대표로서 내 머릿속에는 친노나 반노라는 것은 없다. 우리 당에 속해 있는 국회의원들이 특정 카테고리 안에 끼워져 있지만 개인의 정책 방향과 미래를 보는 자세가 중요하지, 이념적이고 색깔에 얽매여서 편을 가르고 배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2008/01/11, 대통합민주신당 대표에 취임하며)

“지난 대선에서 참패한 대통합민주신당은 환골탈태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거듭나야 다가오는 총선에서 국민들이 다시 찾아줄 것이다.” (2008/01/06, 광주를 방문해 지지자들과 함께 무등산에 오르며)

“5·16을 구국혁명이라며 유신체제를 찬양하는 과거 세력이 있다. 첨단 산업으로 경쟁해야 하는 이 시기에 아날로그 시대의 운하를 파겠다는 낡은 세력이 있다.” (2007/07/26, 한나라당 박근혜, 이명박 후보를 겨냥하며)

“미래, 평화, 통합의 시대를 경영할 창조적 주도세력을 만드는 데 저 자신을 바치겠다. 이를 위해 나 자신을 버리겠다. 어떤 돌팔매도 감수하겠다. 한때의 돌팔매를 피하려고 역사의 죄인이 되는 길을 택할 수 없다. 한나라당에 등을 돌리지 않기 위해 대한민국의 장래와 국민의 희망에 등을 돌릴 수는 없다. 한나라당을 위해 순교하기보다는 국민을 위한 순교를 선택하겠다.” (2007/03/19, 한나라당 탈당을 공식 선언하며)

100일 동안 많은 것 보고 듣고 느꼈다. 국민들은 너무나 착하고, 능력이 탁월하고 부지런하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불안과 고통과 어려움 속에 산다. 열심히 일하는 국민에게 웃음을 보여 줘야 한다. 일자리, 교육, 노후, 주거불안 4대 문제서 해방시켜야 한다. (2006/10/09, ‘100일 민심 대장정’을 마친 뒤)

“황우석 교수와 연구팀을 탄압하는 것은 이들에 대한 탄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구를 통해 희귀 난치병 질환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짓밟는 몰상식한 행위다. 결코 이런 일이 용납돼서는 안 되며 국민들이 궐기해서라도 황 교수와 연구팀을 해치는 사람들을 배격하고 격리해야 한다.” (2005/12/09, 황우석 바이오장기연구센터 착공식에서)

“금년 경기도정 최고 목표는 일자리 창출이다. 금년에 26만 개, 2008년까지 모두 100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어 국민소득 2만 달러 달성을 견인하겠다.” (2005/01/26, 연두기자회견에서)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 수도 이전 문제를 갖고 정치적으로 더 재미를 보려는 생각은 그만둬야 한다. 수도 이전문제를 어떻게 불신임문제, 정권 퇴진문제로 연결을 시키느냐. 이것은 아주 전형적으로 국민을 담보로 잡고 국가의 백년지대계를 정치화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2004/07/12, 수도이전 문제와 관련해 노무현 대통령을 비판하며)

“불행한 사태를 안타깝고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동안 추진해오던 도정목표를 흔들림 없이 수행하겠다.” (2004/03/12, 경기도지사일 때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 국회 가결과 관련 공식성명을 내며)

“시대사적 요구에 의한 정치적 세대교체를 위해 지역패권주의, 정당내 패권주의로부터 벗어나야 하나 현 정치구도는 아직 한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이회창 총재는 그 구도에 몰입돼 있다.” (2001/03/14, 한나라당의 이회창 체제를 비판하며)

“국민이 다 아는 것을 말 두어 마디로 속일 수 없다. 김대중 총재가 불공정한 심판에 의해 대선에 낙선했는지 아니면 지역대결구도의 덫에 걸려 낙선했는지 솔직히 반성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1995/10/14, 민자당 대변인 시절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에 세 번 나왔지만 한 번도 공정한 심판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한 것을 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