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내부에서 '유럽산' 인정 범위를 놓고 이견이 나타나면서 자유무역협정(FTA) 상대국인 한국의 제품이 어떤 대우를 받을지도 쟁점으로 떠올랐다. 정부가 공공조달과 공적 지원에서 한국산 제품의 동등대우를 확보할 수 있을지가 대응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 ▲ 박정성 산업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이 15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EU IAA 대응 민관합동 TF 킥오프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산업통상부> |
15일 산업통상부와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 자료를 종합하면 EU 이사회와 유럽의회는 연말까지 IAA에 관한 각자의 입장을 확정하는 것을 목표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이후 EU 집행위원회를 포함한 3자 협상을 거쳐 최종 법안을 조율하게 된다.
산업부는 이날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박정성 통상교섭본부장 주재로 자동차·배터리·철강·원전 등 주요 업계와 협·단체, 관계부처가 참여하는 'EU IAA 대응 민관합동 TF' 첫 회의를 열었다.
정부와 한국무역협회, 코트라, 업종별 협·단체 및 기업들은 EU 입법 동향과 업종별 영향, 현지 접촉 활동 정보를 공유한다. EU의 기관별 입장이 구체화되는 연말까지 현지법인과 유럽 산업계 등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공동 설득 활동을 집중적으로 전개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IAA는 EU 제조업 경쟁력 강화와 탈탄소화를 함께 추진하기 위한 법안이다. 집행위는 지난 3월 발표한 초안에서 2035년까지 EU 국내총생산(GDP)에서 제조업 비중을 20%로 높이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를 위해 철강·자동차·배터리 등 전략산업의 공공조달과 공적 지원에 유럽산·저탄소 요건을 품목별로 달리 적용해 역내 제품 수요를 확대한다는 구상이다. 일부 전략산업의 외국인직접투자에 현지 고용·기술이전 등의 조건을 부과하고 제조업 인허가 절차를 간소화하는 내용도 담겼다.
한국 기업과 관련한 핵심 쟁점은 한국산 제품을 유럽산과 동등하게 인정하는 범위다.
집행위 초안은 공공조달에서 FTA·관세동맹 상대국이나 세계무역기구(WTO) 정부조달협정(GPA) 참여국 제품을 관련 협정상 의무가 있는 범위에서 EU산과 동등하게 인정하도록 했다. 공공조달 이외의 공적 지원에도 FTA·관세동맹 상대국 제품의 동등성 인정 조항을 뒀다.
한국은 EU와 FTA를 체결하고 GPA에도 참여해 동등대우를 받을 기반을 갖추고 있다. 다만 집행위 초안도 상대국의 EU 제품 차별이나 공급망 안보 등을 이유로 특정 국가를 인정 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도록 해 모든 분야에서 동등대우가 자동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유럽의회 공동보고관들이 9월 제시한 수정안 초안은 역내 생산을 더욱 우선하는 방향으로 설계됐다.
공공조달에서는 EU 27개 회원국 생산품을 기본으로 하고 내국민대우와 경제안보, 환경·노동 기준, 우회 위험 부재 등 7개 조건을 모두 충족한 제3국만 추가 인정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공적 지원에는 같은 추가 인정 방식을 적용하지 않고 EU 역내 생산품만 유럽산으로 인정하도록 했다.
이 방향이 최종 법안에 반영되면 공공조달에서 한국산 제품의 동등대우 인정에 추가 조건이 붙고 공적 지원에서는 FTA 상대국 제품에 대한 동등대우 조항이 삭제될 수 있다. 정부로서는 공공조달의 인정 조건이 한국산 제품에 불합리한 제약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하고 공적 지원에서도 동등대우 원칙을 유지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과제가 된다.
다만 공동보고관 초안은 유럽의회의 확정된 입장이 아니다. 중도우파 유럽국민당(EPP) 소속 의원 일부가 유럽산 인정 범위를 EU 27개 회원국 생산품으로 한정하는 데 반대하는 등 유럽의회 내부에서도 이견이 남아 있다.
EU 이사회에서도 프랑스는 엄격한 역내산 기준을 주장하는 반면 독일 등은 기존 공급망을 고려해 인정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입장이다. 스페인은 역내 생산의 최소 비중을 확보하면서 산업·품목별로 제3국의 인정 범위를 달리하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업종별로는 국내에서 생산해 EU에 수출하는 철강이 원산지 요건 강화에 따른 부담을 안을 수 있다. 집행위 초안에는 없던 철강의 유럽산 요건을 입법 논의 과정에서 추가하는 방안이 제시됐기 때문이다.
집행위 초안은 2029년부터 공공조달 대상 건축물·인프라·자동차 등에 사용되는 철강 물량의 최소 25%를 저탄소 제품으로 사용하도록 했지만 별도의 유럽산 요건은 두지 않았다. 반면 유럽의회 공동보고관 초안은 유럽산 요건을 추가하고 EU 내 최초 용해·주조와 생산에 투입되는 1차 철 원료의 최소 75% 역내 생산을 인정 기준으로 제시했다.
유럽철강협회(Eurofer)도 공공조달·공적 지원에서 저탄소·EU산 철강의 최소 사용 비중을 50% 이상으로 높이고 EU 내 최초 용해·주조를 기준으로 유럽산 요건을 적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방향이 최종 법안에 반영되면 국내에서 탄소배출을 줄여 생산한 철강이라도 한국산의 동등성 인정 범위에 따라 유럽산 제품 사용 요건을 충족하는 물량에서 제외될 수 있다. 다만 실제 영향은 공공조달·공적 지원의 적용 범위와 기업별 공급 비중 등에 따라 달라진다. 정부가 한국산 철강의 동등대우를 확보하면서 저탄소·원산지 기준의 적용 방식을 명확히 하는 것이 중요해질 것으로 보인다.
자동차·배터리는 현지 생산거점을 확보했더라도 부품과 소재의 원산지 요건을 함께 살펴야 하는 분야다.
| ▲ 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한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본부 건물. <연합뉴스> |
집행위 초안은 공공조달·공적 지원 대상 전기차 등을 EU 내에서 최종 조립하고, 배터리를 제외한 부품 가치의 최소 70%를 유럽산으로 조달하도록 했다. 배터리 주요 구성품에도 유럽산 요건을 단계적으로 적용한다. 공동보고관 초안은 배터리를 제외한 차량 부품의 유럽산 비중을 75%로 높이는 등 요건을 강화했다.
한국산 부품·소재의 동등성이 제한되면 국내에서 생산해 유럽 공장에 공급하는 제품의 활용에도 제약이 생길 수 있다. 반면 중국 의존도를 낮추려는 정책은 현지 생산거점을 갖춘 한국 기업에 기회가 될 가능성도 있다.
산업연구원은 9월 발간한 '유럽연합 산업가속화법' 보고서에서 국내 배터리 기업이 선제적으로 확보한 유럽 생산거점과 중국 투자에 대한 조건 강화가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국내 배터리 3사는 EU 역내 셀 제조 용량의 약 80%를 담당하고 있다. 다만 보고서는 중국 기업의 현지 생산 확대와 배터리 기술 경쟁 등을 고려하면 생산거점 선점이 시장 경쟁력 우위로 자동 연결되지는 않는다고 짚었다.
정부는 3월 집행위 초안 발표 이후 네 차례 입장서를 제출하고 EU 고위급 인사와 회원국 정부, 유럽의회 의원들에게 한국의 입장을 전달해 왔다.
김정관 산업부 장관은 9월 EU 측과의 면담에서 한국의 요청은 특정국에 대한 예외적 우대가 아니라 한국과 같은 신뢰할 수 있는 FTA 파트너에 동등성 원칙을 예측 가능하고 일관되게 적용해 달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TF는 이 같은 요구를 업종별 영향과 현지 산업계의 의견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박정성 통상교섭본부장은 이날 회의에서 "한국은 EU의 핵심 FTA 파트너이자 유럽의 투자·고용·공급망 구축에 기여해 온 신뢰할 수 있는 협력국"이라며 "우리 기업이 차별받지 않도록 EU 입법 과정에 적극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EU 이사회와 유럽의회가 연말까지 각각 입장을 확정하더라도 3자 협상이 남아 있어 최종 법안 채택은 내년으로 넘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김도연 코트라 브뤼셀무역관 과장은 13일 코트라 해외시장뉴스에 게재한 글에서 "향후 협상의 최대 쟁점은 공공조달·공적 지원에서 유럽산으로 인정하는 범위를 어디까지 설정하느냐가 될 것"이라며 "철강, 자동차, 배터리 등 우리 주요 수출산업은 향후 3자 협상 결과에 따라 시장접근 및 공급망 운영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만큼, 관련 입법 동향을 보다 면밀히 주시해야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허원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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