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정호 메리츠금융지주 회장이 과감한 기업 경영권 승계 포기를 통해 새로운 기업 성장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픽 씨저널> |
[씨저널]
조정호 메리츠금융지주 회장이 대한민국 기업에게 새로운 성장 모델을 제시했다. 기업 경영권 승계를 과감히 포기함으로써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조정호 회장은 지분율 감소가 예상됨에도 계열사들을 지주회사의 완전자회사로 편입한 데 더해 지분 가치 상승을 염두에 두지 않는 기업가치 제고(밸류업) 정책을 선보이고 있다.
일반적인 기업 오너들이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다. 대한민국 대기업 오너들은 자식으로의 승계가 이어진 뒤 상속세 부과를 걱정해 지배지분의 가치를 높이지 않고자 노력하는 모양새를 보이기 때문이다.
조 회장은 소유와 경영 분리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과연 전통적인 오너경영 체계의 관행과는 완전히 다른 조 회장의 실험은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까?
◆ 조정호의 ‘소유와 경영 분리’ 모델 실험은 현재까지 성공적
조정호 회장이 진행하는 소유와 경영 분리 실험은 현재까지 매우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메리츠금융그룹은 금융지주의 핵심 사업인 은행을 보유하지 않았음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하고 있다.
적극적인 주주환원과 공격적인 성장전략을 통해 주가를 끌어올리며 전체 금융지주 시총 3위에 안착했다. 올해 2월24일에는 신한금융지주를 제치고 잠시 2위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조정호 회장의 ‘원메리츠’ 전략이 메리츠금융그룹의 기업가치가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던 배경으로 꼽힌다.
메리츠금융지주는 2022년 11월 메리츠화재해상보험과 메리츠증권을 완전자회사로 편입했다. 메리츠화재와 메리츠증권은 비상장사로 전환되고 그룹 내 상장사는 메리츠금융지주만이 남았다.
메리츠금융지주는 화재와 증권 화재와 증권의 보통주 1주당 메리츠금융 보통주를 각각 1.2657378주와 0.1607327주로 교환하는 포괄적 주식 교환 방식으로 완전자회사 편입을 진행했다.
통합 지주사 출범은 조 회장의 그룹 지배력 약화로 이어졌다.
조 회장은 통합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메리츠금융지주 전체 주식의 약 76%를 보유하며 막강한 지배력을 보였다. 그러나 조 회장의 지분율은 주식 교환이 마무리되자 약 47%까지 하락했다.
조 회장이 ‘원메리츠’ 출범이라는 결단을 내린 배경으로는 기업 승계 포기가 거론된다.
조 회장은 2019년 말부터 전문경영인인
김용범 메리츠금융그룹 부회장과
최희문 메리츠금융그룹 부회장에게 지배구조의 효율화를 위해서라면 자식에게 기업을 물려주는 것을 포기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조 회장은 2023년 12월5일 열린 제2회 한국기업거버넌스 대상에서는 공식적으로 “승계는 없다”며 “대주주의 1주와 개인 투자자의 1주는 동등한 가치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조 회장이 ‘원메리츠’를 추진한 것은 지배구조 및 자금이동의 효율화를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기존에는 메리츠화재와 메리츠증권이 모두 상장된 상태였다. 이런 구조에서는 계열사 간 자금 이동이 불편하다. 배당 형식으로 금융지주에 돈을 지급한 뒤 이를 다른 계열사에 넘겨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통합 지주사 출범 이후로 메리츠금융그룹은 자유로운 자금 이동과 신속한 의사결정을 바탕으로 그룹사 공동투자를 진행하는 등 협력을 강화했다.
조 회장의 원메리츠 전략은 메리츠금융지주의 호실적으로도 이어졌다.
메리츠금융지주는 2024년 순이익 2조3334억 원을 거뒀다. 원메리츠 전략이 실행되기 이전인 2022년 순이익 1조6404억 원과 비교하면 42.2% 늘었다.
조 회장의 ‘원메리츠’ 전략은 업계에 큰 충격을 줬다. 경영 승계를 신경 쓰는 다른 기업들이 지배주주의 지배력을 보호하기 위한 전략을 취해왔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한민국 대기업들은 물적분할된 회사를 쪼개기 상장함으로써 지주회사의 주가 상승을 막으면서도 추가적인 투자금을 모집하는 방안을 택한다.
물적분할은 분할된 주식의 100%를 기존회사가 갖기에 지배주주의 지배력이 훼손되지 않는다.
▲ 조정호 메리츠금융지주 회장(오른쪽)과 조남호 한진중공업홀딩스 회장(왼쪽)이 2019년 6월26일 서울 양천구 서울남부지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가고 있다. <연합뉴스> |
◆ ‘가족 경영’ 한진그룹 막내에서 ‘전문경영인’ 메리츠금융지주 회장으로
조정호 회장이 가족 경영이 아닌 전문경영인 체제 도입을 통해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추구하는 것은 그의 성장 배경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조 회장의 아버지인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가 그룹을 키워가던 시절만 하더라도 한진그룹이 가족 경영의 모범 사례로 꼽혔기 때문이다.
조중훈 창업주는 동생인 조중건 전 부회장,
조양호 대한항공 선대회장 등을 경영에 참여시키며 가족 중심 경영을 이어갔다.
조정호 회장의 큰 형인
조양호 선대회장 또한 ‘가족끼리 화합해 경영하라’는 유훈을 남기며 가족 중심 경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조양호 선대회장은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오너경영인 체제의 강점을 언급하기도 했다. 2007년 진행한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선 “단기 실적에 매달릴 위험이 큰 ’고용 경영인’에 비해 오너 경영인은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경영하기 때문에 보는 차원이 다르다”고 말했다.
조정호 회장이 금융회사의 경영자로 올라선 것도 한진그룹의 가족 중심 경영 행보에 따른 것이다.
조중훈 창업주는 장남인
조양호 선대회장에게 대한항공, 차남인 조남호 한진중공업홀딩스 회장에게는 한진중공업(현 HJ중공업), 셋째인 조수호 전 한진해운 사장은 한진해운, 넷째인
조정호 회장에 한진투자증권(현 메리츠증권)과 동양화재생명보험(현 메리츠화재)를 물려줬다.
조정호 회장이 2005년 계열분리를 통해 독립경영을 시작했을 때만 하더라도 동양화재의 시가총액은 1700억 원에 그쳤다. 한진투자증권의 시총 역시 1500억 원 수준의 중소형 증권사였다.
조 회장은 가족 중심 경영에서 벗어나 인재 중심 경영과 철저한 성과주의를 통해 물려받은 회사들을 메리츠금융그룹으로 키웠다. 오너가 세세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방식이 아니라 전문경영인이 마음껏 뜻을 펼칠 수 있도록 하는 데 주력했다.
조 회장은 현재 범한진가 경영자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행보를 보인다.
한진중공업홀딩스는 HJ중공업을 잃었고 한진해운은 문을 닫았다.
조양호 선대회장에 뒤를 이은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은 2020년 취임 직후부터 누나인 조승연(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과의 경영권 분쟁에 시달렸다. 김홍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