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1세기 CIA의 활동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로는 드라마 ‘홈랜드’와 영화 ‘제로 다크 서티’를 꼽을 수 있다. 사진은 ‘제로 다크 서티’ 예고편의 모습. <네이버 영화 예고편 저장소> |
[비즈니스포스트] 스파이 스릴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 ‘007 시리즈’일 것이다. 이언 플레밍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007 살인면허’(1962)를 시작으로 2021년 ‘노 타임 투 다이’까지 20편 이상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1대 제임스 본드였던 숀 코네리 이후 로저 무어, 피어스 브로스넌 등의 배우를 거쳐 대니엘 크레이크가 2000년대 제임스 본드로 활약했다. 냉전시대의 대표적 스파이 스릴러였던 만큼 소련 붕괴 이후 한동안 침체기를 겪었던 ‘007 시리즈’는 세계 각국에서 활동하는 테러리스트로 악당의 범주를 재설정하고 화려한 액션으로 활력을 불어넣어 기사회생했다.
‘007 시리즈’는 영국 첩보기관인 MI6를 소재로 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MI6와 쌍벽을 이루는 미국의 첩보기관 CIA의 작전이나 요원들을 다룬 소설이나 영화도 무수히 많다. 2000년대를 대표하는 미국 스파이 스릴러 영화는 ‘본 시리즈’라고 할 수 있다.
로버트 러들럼의 1980년대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본 아이덴티티’(2002), ‘본 슈프리머시’(2004), ‘본 얼티메이텀’(2007)이 있다. 이후 제작된 본 시리즈는 로버트 러들럼 소설 원작이 아니고 맷 데이먼이 출연하지도 않아서 사실 ‘본 시리즈’의 정수는 이 삼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 이름인 ‘제이슨 본’만 보아도 제임스 본드를 염두에 두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깔끔한 정장에 최신식 무기, 멋진 자동차, 미녀 본드 걸까지 갖추고 있는 제임스 본드와 정반대로 제이슨 본은 CIA 정예 암살 요원이었지만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고 허름한 바지와 티셔츠 한 벌로 영화 내내 버티고 무기는 그때그때 손에 잡히는 물건이나 지형지물을 이용한다.
스파이 임무를 멋지게 수행하는 제임스 본드와 달리 제이슨 본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세계를 누비고 다닌다. 차림새는 누추하지만 007과 정반대 스타일인 맨몸 액션 만큼은 화끈하다.
21세기 CIA의 활동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로는 드라마 ‘홈랜드’와 영화 ‘제로 다크 서티’(캐서린 비글로우, 2013)를 꼽을 수 있다. 현재 넷플릭스에서 스트리밍 중인 ‘홈랜드’는 다수의 에이미상(Emmy Award)을 수상한 유료채널 쇼타임의 가장 성공한 작품 중 하나이다.
스파이 스릴러 드라마로는 드물게 2011년 시즌1 방영을 시작으로 2020년 시즌8까지 무려 10년간 롱런했으며 전체적인 평가도 좋은 편이다. 주인공인 CIA 요원인 캐리 매시선 역을 맡은 클레어 데인즈는 제작에도 참여하였다. 바즈 루어만 감독이 리메이크 한 ‘로미오와 줄리엣’(2014)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쌍을 이루었던 클레어 데인즈는 ‘홈랜드’에서는 전혀 다른 강인한 이미지로 변신하였다.
‘홈랜드’는 이스라엘 드라마 를 원작으로 제작되었지만 포로로 잡혀 있던 군인이 고국으로 돌아온다는 기본 설정만 가져왔다고 한다. ‘홈랜드’ 시즌1은 이라크 작전 수행 중 실종되었던 니콜라스 브로디 하사가 8년 만에 알카에다 은신처에서 구출되어 미국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바그다드에서 활동하고 있던 CIA 요원 캐리는 알카에다에 포섭된 미군 포로가 있다는 첩보를 듣게 되고 브로디를 의심한다. 전쟁 영웅으로 매스컴에 도배되고 백안관에서 훈장까지 받는 브로디가 과연 스파이인지 아닌지 시청자를 계속 혼란스럽게 만들면서 시즌2까지 이어진다.
‘홈랜드’는 시즌3 후반부터 성격이 달라지면서 시즌4는 완전히 새롭게 변신한다. 캐리는 아프카니스탄 CIA 지부장으로 발령을 받고 알카에다 지도자인 하삼 하카니 체포 작전에 공을 들인다.
시즌5에서는 독일, 시즌6.7는 뉴욕과 워싱턴, 시즌8은 다시 아프카니스탄으로 주 활동 무대가 바뀐다. 이라크, 이란, 아프카니스탄, 시리아, 베네수엘라, 요르단, 파키스탄, 독일, 미국, 러시아 등 다양한 국가와 도시에서 펼쳐지는 CIA 작전을 보고 있으면 9.11 테러 이후 미국의 대 테러정책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엿볼 수 있다. 물론 드라마이므로 픽션이 많지만 특히 중동 지역을 둘러싼 미국의 태도가 변해가는 걸 느낄 수 있다.
캐리 매시선은 매우 복잡한 캐릭터이다.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고 어린 시절 엄마에게 버림받은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작전을 위해 위장 연애도 서슴지 않는 등 어떤 면에서는 시청자가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홈랜드’는 전적으로 캐리라는 캐릭터에 의해 진행되는 드라마다.
‘제로 다크 서티’는 캐리만큼 복잡하지는 않지만 엄청난 집념으로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작전을 완수하는 CIA 요원 마야(제시카 채스테인)의 활동에 초점을 맞춘 영화다. 실제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작전인 ‘넵튠 스피어 작전’을 모티프로 했으며 극적인 전개보다는 다큐멘터리처럼 리얼리티 구현에 중점을 두었다.
극적 장치가 별로 없이 진행되다 보니 초반에는 몰입도가 다소 떨어지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긴장이 고조되고 파키스탄 시골에 위치한 오사마 빈 라덴의 은신처를 급습하는 장면은 마치 현장에 있는 듯 긴박하게 연출되었다.
‘블루 스틸’(1990), ‘폭풍 속으로’(1991), ‘허트 로커’(2010),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2025) 등을 연출한 캐서린 비글로우의 필모를 전체적으로 볼 때 액션에 강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제8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전 남편인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를 따돌리고 이라크 폭발물 제거팀 이야기를 그린 ‘허트 로커’로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을 수상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홈랜드’, ‘제로 다크 서티’를 보다 보면 미국 CIA가 중동 국가에서 정권 교체를 시도하고 알카에다, ISIS 지도자를 암사하는 등의 첩보 활동이 앞으로도 유효할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제로 다크 서티’의 주인공 마야는 10년 동안 끈질기게 추적한 오사마 빈 라덴 사살 작전에 성공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성취의 기쁨이나 자랑스러움보다는 착잡하고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시시각각 변하는 국제 정세를 다 따라잡을 수는 없지만 이런 작품들을 통해 우리와는 다소 멀게 느껴졌던 중동 지역의 복잡한 사정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현경 영화평론가
| 영화평론가이자 영화감독.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으로 평론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영화와 인문학 강의를 해오고 있다. 평론집 '영화, 내 맘대로 봐도 괜찮을까?'와 '봉준호 코드', '한국영화감독1',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등의 공저가 있다. 단편영화 '행복엄마의 오디세이'(2013), '어른들은 묵묵부답'(2017), '꿈 그리고 뉘앙스'(2021)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영화에 대해 쓰는 일과 영화를 만드는 일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