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6월2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별관에서 열린 2025 BOK 국제콘퍼런스에서 참석해 영상을 보고 있다. <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자본규제 우회 가능성, 금융시장 안정성 등 측면을 고려할 때 비은행권의 스테이블코인 사업 허용에 관해 조심스럽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별관에서 열린 2025 BOK 국제콘퍼런스에서 크리스토퍼 월러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 이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한 말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스테이블코인에 대해 연일 신중론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스테이블코인을 향한 신중한 접근이 새로운 기술에 대한 보수적 태도가 아니라 국가 경제와 금융 시스템의 근본적 안정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최근 포르투갈 신트라에서 열린 유럽중앙은행(ECB) 포럼에서 이 총재는 "규제되지 않은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허용하면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의 환전이 촉진되고, 자본 유출입 규제가 약화될 수 있다"며 우려를 보이기도 했다.
핀테크 기업 등 비은행권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무분별하게 허용할 경우 중앙은행의 통화 관리 기능이 무력화될 가능성에 대한 경고를 보낸 셈이다.
◆ 제도 공백과 업계 기대의 공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국내 상황
현재 한국은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법적 지위와 규제 체계가 여전히 미비한 상태다.
민간 기업의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은 아직까지 금지돼 있으며, 한국은행이 주도한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실험인 '프로젝트 한강' 2차 테스트도 6월부터 중단됐다.
정책 조율 또한 지지부진하다. 정부와 중앙은행, 금융권, 핀테크 업계 사이 스테이블코인 도입과 규제 방향에 대한 공감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총재는 확실한 규제 없이 비은행권 기업들에게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허용하면 자본 유출이 가속화되고 달러화 의존도가 더욱 심화되어 통화 정책의 실효성이 크게 훼손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민간에게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허용한다면 금융 제도 자체를 개편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우리나라는 은행이 아닌 회사가 내로우뱅킹(대출 기능 없이 지급 기능만 수행하는 은행 형태) 사업을 영위하는 것을 제도적으로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 거래 탐지 기술의 불완전성 등 기술적·제도적 불확실성 역시 주요 문제로 꼽힌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핀테크 업체들은 스테이블상표권을 미리 등록하는 등 규제·진입장벽 완화를 기대하며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특히 다날, 네이버페이, 토스, 카카오페이 등 간편결제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는 업체들의 경쟁이 거세다.
◆ 비트코인과 스테이블코인의 차이, 화폐와 화폐적 가치의 경계
이 총재와 한국은행이 스테이블코인 도입에 신중론을 펼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스테이블코인이 사실상 ‘화폐’로서 기능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비트코인 등 ‘화폐적 가치’를 지니고 있을 뿐인 재화와 스테이블코인의 근본적 차이이기도 하다.
화폐는 단순한 가치 저장 수단이 아니다.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신뢰와 약속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신뢰는 중앙은행과 같은 강력한 금융기관의 보증을 통해 유지된다. 보증이 없는 화폐는 단순한 디지털 코드나 종이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계엄령 선포 등의 특정 상황 때문에 원화의 가치가 급락한다고 하더라도 가치 하락에는 한계가 있다. 한국 정부와 한국은행이 지급보증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이 충분한 정책적 고려 없이 확산된다면, 보증기관이 없는 '화폐'로 기능하게 되어 국민경제에 큰 충격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스테이블코인은 디지털 자산이기 때문에 해킹 등을 공격당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데, 이런 이유로 순간적으로 막대한 양의 스테이블코인이 시장에 풀린다면 그 피해는 예상하기 어려울 만큼 막대할 수 있다.
물론 법정화폐를 예치해놓는 형태로 스테이블코인의 가치를 보증하는 방법도 있다. 실제로 현재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고 있는 대부분의 글로벌 민간 회사들은 이 방법을 통해 스테이블코인의 가치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국가가 그 가치를 보증하는 화폐와 그 보증의 효력이 같을 수는 없다는 우려가 나온다.
스테이블코인이 단순히 전자상거래에서 화폐를 보조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면 큰 문제가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스테이블코인 자체가 하나의 화폐처럼 통용되기 시작하면, 국가 경제 전반에 심각한 리스크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총재가 우려하는 점이다.
▲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5월15일 세종시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열린 KDI-한국은행 공동 심포지엄 '초고령사회의 빈곤과 노동: 정책 방향을 묻다'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 스테이블코인 신중론자 이창용, '원화 대체' 시나리오도 내다보나
한쪽에서는 이 총재가 궁극적으로 스테이블코인이 원화를 대체하는 상황까지 우려의 범위에 넣고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매우 극단적으로 들릴 수 있는 이야기지만, 국민 경제가 현금 위주에서 신용카드 결제로, 또 더 나아가 간편결제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살피면 충분히 실현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즉, 사람들이 일상 거래나 금융 거래에서 실제 원화를 사용하지 않고 스테이블코인만 쓰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스테이블코인이 원화에 페깅(연동)되어있다 하더라도, 실제로 화폐로서 사용되는 매개체가 원화에서 코인으로 바뀐 상황에서 스테이블코인을 민간이 발행할 수 있다면 커다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중앙은행의 화폐 정책이 무력화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태가 현실화되면, 한국은행의 통화 정책 수행 능력은 크게 약화되고, 국가 금융 주권은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이 총재가 스테이블코인을 반드시 중앙은행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총재가 10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비은행까지 발행을 허용하면 다수의 민간 화폐가 만들어지는 것"이라며 "19세기 민간은행이 자유롭게 화폐를 발행해 혼선이 있었던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고 역사적 사례를 들어 지적한 것 역시 비슷한 맥락의 우려인 것으로 보인다.
최근 이 총재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크리스토퍼 윌러 이사와 만난 자리에서 "원화 기반의 스테이블코인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우선 은행권 등 감독이 가능한 영역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핀테크 업계의 한 관계자는 스테이블코인 규제와 관련해 “현재 가장 큰 문제는 불확실성이 너무 크다는 것”이라며 “어떤 방식으로 결론이 나던지 최대한 빨리 이 불확실성을 해소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윤휘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