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K텔레콤의 해킹 사고를 계기로 통신 결합상품이 통신 소비자의 서비스 선택권을 제약하고, 통신 시장의 경쟁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비즈니스포스트] SK텔레콤 해킹 사고를 계기로 통신 결합상품의 구조적 문제가 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통신비 절감을 앞세워 도입된 결합상품이 오히려 소비자의 ‘통신서비스 이동권’을 제한하고, 통신시장 경쟁을 저해하는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통신 결합상품 제도가 소비자 보호와 시장 공정 경쟁이라는 본래 취지를 되살릴 수 있도록 전면적 손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16일 통신 업계 취재를 종합하면 최근 SK텔레콤 해킹 사태 이후 일부 가입자들이 다른 통신사로 번호이동을 하는 과정에서 결합상품 해지와 관련한 불편을 겪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통신 결합상품은 2007년 정부가 통신시장 활성화 정책의 일환으로 도입을 허용했다. 당시 시장지배적 사업자였던 SK텔레콤과 KT는 전기통신사업법 시행령 및 고시 개정에 따라 기존에는 금지됐던 통신서비스 결합상품을 취급할 수 있게 됐다.
이후 규제 완화에 따라 이동전화, 초고속인터넷, IPTV를 묶은 이종 통신 결합상품이 등장했고, 최근에는 가족결합, 지인결합 등 형태가 다양해진 데 이어 OTT, 사물인터넷(IoT) 서비스까지 포함된 복합형 결합상품이 일반화되고 있다.
하지만 SK텔레콤 해킹 사태는 결합상품이 소비자의 선택권을 제한하고 이동을 어렵게 만드는 구조적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가족 단위로 결합된 서비스의 경우, 구성원 중 한 명이라도 번호이동을 시도하면 나머지 서비스에 위약금이 부과되거나 해지 절차가 복잡해져 사실상 이동이 어렵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실제 방송통신위원회는 최근 SK텔레콤의 해지 지연 여부에 대해 실태조사에 착수한 상태다.
방통위에 따르면 SK텔레콤 해킹 사태 이후 KT와 LG유플러스로의 이동 수요가 급증했지만, 결합상품에 가입한 이용자들은 초고속인터넷 등 유선 서비스 해지가 지연되면서 정상적 전환이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방통위 관계자는 비즈니스포스트와 통화에서 "결합상품 관련 고시가 있고, 사업자가 이에 따라 규정을 이행하지 않으면 규제를 받게 된다"며 "지속적으로 모니터링을 하고 있고, 초고속인터넷 해지 문제와 관련해서는 실태조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SK텔레콤이 해킹 피해에 대한 보상책으로 번호이동 위약금 면제 방안을 내놨지만, 결합상품 이용자에게는 사실상 실효성이 떨어지는 대책이었다는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임봉호 SK텔레콤 MNO사업부장은 지난 4일 간담회에서 “이동통신사 이동과 관련한 위약금은 환급 대상이지만, 유선상품은 해킹과 무관하기 때문에 환급 대상이 아니다”라고 밝히면서 결합상품을 통한 통신서비스 연계가 해킹 피해와 무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참여연대는 같은 날 발표한 성명에서 "결합상품 위약금 보상은 언급조차 없다"며 “전 국민의 절반이 개인정보를 유출당한 상황에서 SK텔레콤의 보상 대책은 소비자를 기만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부 역시 명확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류제명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2차관은 지난 4일 위약금 면제 필요성을 언급하면서도 “결합 할인 위약금을 정부가 일률적으로 판단해 정리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처럼 통신 결합상품이 이용자의 서비스 선택권을 제한하고, 위기 상황에서도 소비자 보호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커지면서 제도 전반에 대한 재검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김대종 세종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는 비즈니스포스트와 통화에서 “결합상품은 원래 소비자 통신비 부담을 줄이고 다양한 서비스를 하나로 묶어 편의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로 시작됐다”며 “하지만 현실에서는 해지 시 위약금, 약정 기간 연장, 복잡한 절차 등이 소비자 선택권을 제약하는 도구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 통신 결합상품의 소비자 보호 기능을 다시 강화하고, 통신 시장 경쟁을 촉진하기 위해 제도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사진은 5월20일 서울 시내 한 SK텔레콤 공식인증 대리점 앞에 유심 교체를 위해 서 있는 소비자들 모습. <연합뉴스> |
김 교수는 이번 SK텔레콤 해킹 사태에서 드러난 위약금 면제 논란을 “결합상품 구조의 단면”이라고 평가하며 “소비자가 예상치 못한 고액 위약금을 통보받고, 타사로 이동이 사실상 차단되는 구조는 자유로운 시장 경쟁을 저해하고 소비자를 묶어두는 폐쇄적 방식”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그는 △과도한 위약금 부과 △결합 때 정보 비대칭 △서비스 간 과도한 연동성 등 3가지를 현재 결합상품 제도의 구조적 문제로 꼽았다.
김 교수는 “할인을 대가로 위약금을 설정하는 것은 가능하나, 그 산정 기준이 불투명하거나 과도할 경우 소비자는 합리적 선택을 하기 어렵다”며 “결합 당시에는 할인 혜택만 강조되고, 해지 시 발생하는 불이익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부족한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또 일부 결합상품은 전체 서비스 약정이 영향을 받는 식으로 서비스 간 연동성이 과도하게 설정돼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 교수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결합상품 제도의 전면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결합상품 위약금 구조를 표준화하고, 투명하게 공개해야 하며, 결합 해지를 서비스 단위로 유연하게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약정 기간은 제한하고, 소비자 동의 없는 자동 갱신을 금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결합상품의 실질적 할인 효과와 위약금 조건을 쉽게 비교할 수 있는 표준 정보 플랫폼을 구축해 소비자 선택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결합상품은 본래 소비자 편익을 위한 제도였지만, 현재는 통신사들의 가입자 유지와 수익 방어 수단으로 변질됐다”며 “정부와 통신사 모두 소비자 중심의 서비스 설계를 위해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조승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