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제철이 무역위원회에 일본산 열연강판(사진)을 대상으로 반덤핑 조사를 신청한 가운데, 이를 두고 철강사와 제강사 간 입장이 첨예하게 엇갈리고 있다. <현대제철>
[비즈니스포스트] 일본산 열연강판 반덤핑 관세 부과를 둘러싸고 국내 철강사와 제강사 간 입장이 첨예하게 엇갈리고 있다.
포스코·현대제철 등 철강사들은 반덤핑 관세 부과로 국내 열연강판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동국제강·세아제강 등 제강사들은 일본산 수입제품에 대한 관세 부과가 국내 철강사들의 독과점을 강화하고 제강 업계의 경쟁력을 약화시킨다고 주장하고 있다.
20일 철강 업계 취재를 종합하면 일본산 열연강판의 수입 가격이 4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국내 열연강판 시장에 압박을 가하고 있다.
현대제철은 지난 19일 산업통상자원부 무역위원회에 중국산·일본산 열연강판을 대상으로 반덤핑 조사를 신청했다고 밝혔다.
열연강판은 쇳물을 얇게 펴 만든 철판 형태의 반제품으로 자동차구조용, 강관(파이프)용, 고압가스 용기용 등으로 제조돼 자동차·건설·조선·파이프·산업기계 등 산업 전반에 걸쳐 사용된다. 연간 철강재 수입량의 20~30%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커 업계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품목이다.
포스코와 현대제철은 올해 들어 중국 철강 업체들이 자국 건설 경기 침체로 소화하지 못한 철강재를 저렴한 가격에 한국으로 밀어내고, 가격을 낮춘 일본산 제품이 속속 수입되면서 피해가 늘어나고 있다고 호소하고 있다.
철강 업계 관계자는 비즈니스포스트와 전화 통화에서 "일본에서도 가격을 엄청나게 낮춘 열연강판을 국내로 밀어내고 있다"며 "현재 국내 철강사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양쪽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국내 제강사는 정반대 입장을 내놓고 있다. 동국제강·세아제강·KG스틸 등 제강사는 열연강판을 구매해 가공한 뒤 자동차용 가판, 건축용 철근, 컬러강판, 강관(파이프) 등을 만들기 때문이다.
▲ 국내 환경성적표지(EPD) 인증을 취득한 동국씨엠 컬러강판 제품. <동국씨엠>
현재 제강 업계도 철강 업계만큼 시황 악화로 어려운 상황이다. 동국제강의 컬러강판 전문 자회사 동국씨엠, 세아제강, KG스틸의 3분기 영업이익은 지난해 대비 각각 31%, 84%, 47% 감소했다.
제강 업계는 수입 열연강판에 반덤핑 관세가 부과돼 가격이 오르면, 결국 국내 열연강판 시장을 주도하는 포스코 등 대기업들이 독과점 체제를 더 강화할 것이란 우려를 내놓고 있다.
특히 제강사들은 이른바 '스테인리스 악몽'이 재현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2020년 수입산 스테인리스 제품에 관세가 부과되면서 스테인리스 열연강판을 독점 생산하는 포스코와 중소 스테인리스 기업들 간에 첨예한 갈등이 벌어졌다.
당시 포스코는 스테인리스 제품 가격을 올렸고, 포스코부터 제품을 구입해 사업을 전개하는 후공정 제강 업체들은 어려움이 가중됐다.
국내 고로를 가진 철강사는 포스코와 현대제철 두 곳뿐이다. 포스코의 국내 열연강판 시장 점유율은 70~80%대로 사실상 독점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제강 업계 관계자는 비즈니스포스트와 통화에서 "철강사들 입장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고, 저가 수입산에 문제의식에 공감한다"며 "다만 역사적으로 봤을 때 같은 일이 또 벌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철강협회에 따르면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열연강판 수입은 연간 200만 톤 중반대를 형성했으나, 올해 1~11월 열연강판 누적 수입량은 약 343만 톤으로 부쩍 늘었다. 이 가운데 중국산과 일본산이 각각 153만 톤, 177만 톤으로 전체 수입량의 96%를 차지했다.
▲ 포스코 포항제철소에서 생산한 스테인리스 냉연 코일 제품. <포스코>
또 지난 9~10월 일본 내수 열연강판 가격은 톤당 720~750달러였다. 반면 9~10월 계약돼 11월부터 국내 유입된 일본산 열연강판 평균 수입 가격은 약 492달러로 4년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일본 철강업계가 내수 가격 대비 최대 톤당 250달러 이상 낮은 가격으로 한국에 수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철강사 관계자는 비즈니스포스트와 통화에서 "세계적으로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고 있는데, 만약 우리나라만 보호무역 조치를 하지 않고 시장을 다 열어버리면 세계 물량이 우리나라로 쏠릴 것"이라며 "국내 산업이 이걸 견뎌낼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가 기간 산업인 철강산업 생태계가 무너지면 해외 철강 기업들이 국내 공급 가격을 대폭 올릴 것이 자명하다"며 "제강사와 가공사 입장은 이해하지만, 이 부분은 충분히 국가 보조금과 대화 등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성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