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당국이 미국의 구형 반도체 제조사를 대상으로 반덤핑 조사를 실시한다. 이는 미중 무역 협상이 임박한 시점에 결정된 만큼 미국의 기술 규제를 무력화하려는 중국 정부의 의도를 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 SMIC 반도체 생산공장 내부. |
[비즈니스포스트] 중국이 미국 반도체 기업을 대상으로 반덤핑 조사를 진행한다. 자국 업체를 육성해 해외 기술에 의존을 낮추는 데 더욱 힘을 싣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더 나아가 중국이 미국과 무역 협상을 앞두고 구형 반도체 공급망을 무기로 앞세워 관세나 기술 규제와 관련한 논의에 우위를 차지하려는 목적을 두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15일 외신을 종합하면 미국 반도체 기업을 대상으로 한 중국 정부의 반덤핑 조사는 결국 자국 제조사들에 반사이익으로 돌아올 공산이 크다는 분석이 제시된다.
중국 상무부는 최근 성명을 내고 미국산 구형 반도체 수입 물량이 2022년부터 2024년까지 37%가량 늘어난 반면 평균 가격은 약 52% 떨어졌다고 전했다.
미국 반도체 제조사들이 저가에 상품을 공급하는 ‘덤핑’ 행위를 한 것으로 의심되는 만큼 자국 제조사에 피해를 막기 위해 조사를 진행하겠다는 것이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중국 당국의 조사는 최소한 1년 이상 지속될 것”이라며 “텍사스인스트루먼츠와 아날로그디바이스 등 미국 기업의 매출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도했다.
반면 중국의 구형 반도체 공급업체들은 그동안 미국에서 수입되던 물량을 대체하면서 자국 내 고객사 수요를 확보해 반사이익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전망이 이어졌다.
중국 관영매체 차이나데일리에 따르면 이번 조사는 중국 반도체 제조사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장쑤성 반도체산업협회의 요청에 따라 이뤄졌다.
해당 협회는 미국 기업들이 반도체를 중국에 정상 가격보다 75% 낮은 수준까지 저렴하게 판매하는 덤핑 행위로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구형 반도체는 인공지능 반도체나 모바일 프로세서 등에 사용되는 미세공정 반도체와 달리 90~300나노미터 사이의 구형 공정 기술을 활용한다.
주로 전력 관리용 반도체나 음향, 통신, 센서, 자동차 분야에 쓰이는데 지난해 기준으로 전 세계 반도체 시장 전체 매출의 약 15%를 차지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은 세계 최대 제조업 국가인 만큼 구형 반도체 수요도 가장 많다. 특히 최근에는 전기차와 사물인터넷 등 신산업 발전에 맞춰 수요가 더 가파르게 늘고 있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조사기관 모도인텔리전스 보고서를 인용해 올해 중국의 구형 반도체 시장 규모가 440억 달러(약 61조 원)에 이르며 앞으로 5년에 걸쳐 연평균 8%대 성장률을 기록할 것이라는 예측을 전했다.
▲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츠의 반도체 생산공장. |
이번에 중국 당국의 반덤핑 조사 대상에 놓인 미국 구형 반도체 제조사들이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될 공산이 크다.
중국 기업들은 이미 구형 반도체 설계와 제조, 판매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자체적으로 진행할 수 있어 강력한 공급망 경쟁력을 확보한 것으로 평가됐다.
특히 최근 미국 정부에서 중국을 겨냥한 반도체 기술 규제를 강화한 뒤에는 중국이 구형 반도체 생산 투자에 더 속도를 내는 정책을 앞세워 관련 산업을 육성해 왔다.
이러한 정책적 성과가 결국 미국산 반도체에 의존을 낮춰 반덤핑 조사로 미국을 압박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이도록 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블룸버그는 중국 당국의 이번 조사가 미국과 중요한 무역 회담을 앞두고 시작됐다는 데 주목했다.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은 14일(현지시각)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허리펑 중국 부총리와 4차 무역협상을 시작했다.
미국과 중국은 최근 상대 국가에 고율 관세 부과를 유예하고 협상 시한을 연장하는 데 합의했다. 이미 수 개월째 진행되고 있던 무역 논의가 장기화 국면에 접어든 셈이다.
반도체는 현재 미국과 중국의 입장이 가장 첨예하게 엇갈리는 의제로 꼽힌다. 미국 정부가 중국 인공지능 산업 발전을 막으려 관련 규제를 꾸준히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미국의 이러한 규제가 오히려 자급체제 구축 및 기술 발전을 앞당기고 있다는 ‘무용론’을 적극 펼치며 이를 무력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전략을 펴고 있다.
이번에 협상을 앞두고 미국산 구형 반도체 반덤핑 조사를 실시한 것도 결국은 중국의 자급체제 구축 능력을 무기로 앞세워 한층 더 강조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블룸버그는 “중국의 이번 움직임은 미국의 조치에 사실상 공개적으로 반발한 셈”이라며 “여러 날에 걸쳐 이어질 무역 회담의 출발점을 긴장 상태에서 시작하도록 했다”고 바라봤다.
중국이 반도체 분야에서 자체 공급망 구축 가능성을 미국에 성공적으로 설득한다면 규제 완화를 비롯한 성과를 얻어낼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이 중국을 향한 제재 강화 의지를 꺾을지는 미지수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중국 상무부는 회담을 앞두고 낸 성명에서 “미국의 여러 보호무역주의 조치는 중국의 반도체와 인공지능 기술 발전을 저해하기 위한 차별적 시도”라고 규탄했다. 김용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