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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

구조조정 뚝심 보여주는 오너 3세
김디모데 기자 Timothy@businesspost.co.kr 2015-12-24 14:5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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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Who Is ?]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
▲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


이웅열은 1956년 4월18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5명의 누이들 속에서 성장했다.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이원만 코오롱그룹 창업주의 손자로 아버지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의 대를 이어 코오롱그룹을 이끌고 있다.

코오롱에 입사한 뒤 해외지사에 근무하며 경영수업을 받았다. 코오롱 그룹기획조정실장을 거쳐 2년 만에 부회장에 올랐다.

1996년 코오롱그룹 회장에 취임해 재직하고 있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코오롱 가문은 재계에서 상대적으로 아들이 귀한 집안으로 알려졌다. 조부인 창업주 이원만 회장은 슬하에 2남4녀를 뒀지만 부친 이동만 명예회장은 1남5녀, 이웅열 본인도 1남2녀다. 여자 형제들 속에서 자랐으나 남자다운 성격으로 알려졌다. 골프를 비롯하여 축구, 야구, 테니스, 탁구, 당구, 골프 등 종목을 가리지 않는 스포츠 매니아다.

활달하고 사교적이며 호방한 성격이어서 2000년 전경련 e비즈니스 위원장을 맡아 재계 2∼3세의 리더 격으로 활동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류진 풍산 회장,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과 가깝게 지낸다.

이웅열의 별명은 ‘3박4일’이다. 무슨 일이든 물고 늘어지면 4일 안에 끝장을 봐야 하는 성격이다. 그만큼 열정과 의지가 강하다.

어렸을 때 박하지 않을 정도의 용돈만 이 명예회장으로부터 받아 친구들로부터 "재벌아들이 짜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1996년 그룹 회장으로 취임할 무렵 코오롱은 섬유사업 고부가가치화와 사업다각화를 모색 중이었다. 그러나 3세대 경영인으로서 시험대에 오르자마자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취임한 뒤 26개 계열사를 15개로 줄이고 부채비율을 대폭 낮추는 등 구조조정을 진행해야 했다.

한국화낙, 코오롱메트생명보험, 코오롱전자를 매각했고 코오롱은 스위스 보스턴투자은행으로부터 5천만 달러 외자를, 코오롱상사도 BMW로부터 2천만 달러 외자를 도입했다. 광고회사 한인기획을 그룹에서 분리했고 A&C코오롱, 코오롱씨드50, 코오롱호텔 등 3개사를 코오롱스포렉스에 합병했다.

코오롱A&C의 코오롱메라크섬유, 코오롱남바 흡수합병해 코오롱글로텍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또 그룹의 미래라 불렀던 신세기통신 지분 전량을 매각했다.

취임하면서부터 ‘원앤온니(One & Only)’를 경영방침으로 정하고 유망상품, 기술, 지역을 선점해 질적인 측면과 효율성을 추구했다.

외환위기 상황을 견뎌냄으로써 경영 능력을 인정받는 듯 했으나 2000년대 들어서도 순탄치 만은 않았다. 자금횡령, 부실경영, 정리해고, 신성장동력 부재 등 연이은 악재에 시달렸다.

2012년부터 6년 동안 듀폰에 대항해 소송을 펼친 것을 놓고 뚝심이 있다는 평가도 받는다.

코오롱인더스트리는 자체 개발한 아라미드 생산 기술을 놓고 미국의 화학·섬유기업인 듀폰과 6년 동안 소송을 벌였다. 듀폰이 코오롱인더스트리를 상대로 아라미드 생산기술이 자신들의 영업기밀을 빼내온 것이라며 사용중지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웅열은 2015년 4월 듀폰에 민사 합의금과 벌금 3850억 원을 지불하기로 하고 소송을 마무리했다.

이웅열은 듀폰이 시장을 장악한 상황에서 코오롱이 적자를 지속할 것이라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아라미드 사업에 대한 장기적 안목으로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회사와 직원들의 사기를 비롯해 다른 사업들의 간접피해까지 해소할 수 있다고도 본 것이다.

이웅열은 합의를 마무리지음으로써 세계시장에 아라미드 섬유를 생산하고 판매할 수 있게 돼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과 유착의혹 등은 이 회장이 해결해야 할 숙제로 꼽힌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77년에 코오롱에 입사해 뉴욕지사, 도쿄지사에 근무하면서 경영수업을 받았다. 1996년 40세의 나이로 그룹 총수가 되면서 3세 경영시대를 열었다.

1996년부터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1999년부터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취임 뒤 신세기통신 주식을 매각하는 등 구조조정에 주력하면서 26개 계열사를 15개로 줄이고 부채비율을 대폭 낮추는 등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2000년 대기업 중 처음으로 그룹 계열사에 '자율 복장제도'를 도입했고 2004년 과천사옥을 신축해 코오롱의 과천시대를 열었다.

이웅열은 30여 년에 걸친 연구 끝에 2005년부터 독자기술로 강철보다 5배 강한 ‘슈퍼섬유’인 아라미드를 독자기술로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이웅열은 기존 코오롱 문화에 디지털 경영을 접목한 ‘디지털 플러스 경영’을 내세워 그룹의 변신을 주도했다. 화학·첨단소재, 바이오건설·레저, 패션·유통 등의 3대 축을 바탕으로 재계 순위 10위권 진입을 목표로 그룹을 이끌어 왔다.

그러나 경기침체에 따른 섬유산업 위상 축소와 내외적 악재를 겪는 등 재계 순위가 하락해 2014년 현재 재계 순위 30위권에 머물고 있다.

2015년 4월 한국메세나협회 부회장으로 선임됐다. 한국메세나협회는 기업 회원을 기반으로 경제와 예술의 균형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비영리 사단법인이다.

◆ 학력

1975년 서울 신일고를 졸업하고 1977년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1983년 미국 아메리카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85년 미국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원(MBA)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할아버지인 이원만 코오롱그룹 창업주는 1933년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 배달부터 시작해 자수성가한 사업가다. 이원만 창업주는 1935년 '아사히공예주식회사'를 설립했고 1937년 사명을 '아사히피복주식회사'로 바꿨다. 동생인 이원천 전 한국나일론(현 코오롱) 사장과 아들인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을 불러 회사 일을 돕도록 시켰다.

이원만 창업주는 1953년 국내에 처음으로 나일론을 들여왔고 1957년 국내 최초 나일론 제조 회사인 한국나일론을 설립했다. 한국나일론은 1963년부터 나일론 섬유를 생산하며 화학섬유 산업의 선두에 섰다.

아버지인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은 이원만 창업주와 함께 40년 가까이 코오롱을 맡았기에 창업 1.5세대로 불린다. 이 명예회장은 1977년 아버지 이원만으로부터 코오롱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이 명예회장은 1983년 고려나일론을 인수했고 1985년부터는 필름과 비디오테이프, 메디컬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 이 명예회장은 1988년 코오롱전자를 세웠고 1990년 코오롱정보통신, 1994년 신세기통신을 잇달아 설립하며 코오롱의 규모를 키웠다.

작은 아버지는 이동보 전 코오롱 TNS 회장으로 김종필 전 총재의 장녀인 김예리 씨와 결혼했다.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가 중매를 맡았다. 네 명의 고모가 있는데 막내 고모인 미향 씨는 허영인 SPC그룹 회장과 결혼했다.

어머니는 평산 신씨 가문의 무남독녀인 신덕진씨로 이 명예회장과 1944년 혼인했다.

이 명예회장은 당시 군 입대를 앞둔 상태였는데 후손을 남겨야 한다는 아버지 뜻에 따라 맞선 1주일 만에 결혼했다. 이 명예회장 부부는 2004년 1월 결혼 60주년을 맞아 회혼례를 올리기도 했다. 신씨는 2010년 12월 9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이웅열은 1남5녀 가운데 외아들로 태어났다. 코오롱 가문은 3대째 내려오는 재벌가이면서 동시에 이원만 창업자의 정계진출 이력 덕분에 정재계와 학계에 걸쳐 화려한 혼맥을 이어오고 있다.

큰 누이 이경숙씨는 이효상 전 국회의장의 3남 이문조 영남대 교수와 결혼했다. 셋째 누이 이혜숙씨는 고 이학철 고려해운 창업주의 장남 이동혁 고려해운 회장과 결혼했다. 넷째 누이 이은주씨는 신병현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의 장남 신영철과 결혼했다.

이웅렬은 1983년 서병식 동남갈포공업 회장의 장녀 서창희씨와 결혼했다. 서씨는 이화여대 불문학과 출신이다. 동남갈포공업은 1960년대 고급벽지의 대명사인 갈포벽지를 만들었던 회사로 유명하다.

이웅렬은 서창희씨와 사이에 1남 2녀를 뒀다.

장남 이규호씨는 미국 코넬대에서 호텔경영학을 공부하다 2012년 코오롱에 입사해 코오롱글로벌을 거쳐 코오롱인더스트리 경영진단실에서 상무보로 일하고 있다. 두 딸인 이소윤씨와 이소민씨는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 상훈

2008년 3월 '제35회 상공의 날'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2005년 적자에 빠진 코오롱그룹을 맡아 자산 매각과 비상장 법인 합병 등의 자구노력을 펼쳐 1년여 만에 흑자로 전환시킨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2012년 매경이코노미 올해의 CEO에 선정됐다.

2012년 여성친화 기업문화 확산과 양성평등 향상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전문직여성 한국연맹(BPW 코리아)으로부터 ‘제18회 BPW 골드 어워드’를 수상했다.

◆ 상훈

2008년 3월 '제35회 상공의 날'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2005년 적자에 빠진 코오롱그룹을 맡아 자산 매각과 비상장 법인 합병 등의 자구노력을 펼쳐 1년여 만에 흑자로 전환시킨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2012년 매경이코노미 올해의 CEO에 선정됐다.

2012년 여성친화 기업문화 확산과 양성평등 향상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전문직여성 한국연맹(BPW 코리아)으로부터 ‘제18회 BPW 골드 어워드’를 수상했다.

어록


“하드웨어가 전부인 것 같은 제조업도 이제는 소프트웨어까지 고려해야 고객의 각기 다른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다.” (2015/02/24~25 7개 지방사업장 방문하면서)

“변화의 문이 열렸을 때 앞으로 나아가 반드시 통과하자.” (2015/01 신년사에서)

“각자 다른 개성을 가진 임직원들이 마음을 더하고 열정을 곱해 시너지를 내고 서로 힘든 것을 나누면서 성공경험과 신뢰를 함께 공유한다면 무한대의 성공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2014/01/02, 경기 과천 코오롱타워 대강당에서 열린 시무식에서)

“코오롱 변화의 지향점은 어떠한 외부환경에서도 성공할 수밖에 없는 체질개선과 사고의 전환이다.” (2013/04/05, 인천 송도 컨벤시아에서 열린 ‘2013 코오롱 혁신 페스티벌’에서)

“모든 임직원이 성공이라는 퍼즐의 한 조각임을 인식하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업무에 임해달라.” (2013/01/02, 경기도 과천 본사 그룹 통합 시무식에서)

“올해는 코오롱과 협력업체가 위기의 파고를 넘어 새로운 경영환경을 여는 공동체 시너지 창출의 원년이다. 갑과 을은 없고 상생 공동체의 핵심은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2009/11/05, 코오롱 구미 공장 협력업체 대표와의 면담에서)

"경영 프로세스의 새로운 확립과 지속적 사업구조 고도화, 인적역량 확충과 성과주의 문화 정착 등을 중점 추진 과제로 선정했다. 지난해까지 한계사업 철수를 통한 사업구조조정에 역점을 뒀지만 앞으로 새로운 성장기반 토대를 마련하는 노력을 병행해 나갈 것이다." (2006/01/02, 코오롱그룹 새해 시무식에서)

“아픈 이를 그대로 두면 전신이 고통을 받습니다. 다 같이 죽을 것이냐, 환부를 도려낼 것이냐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감도 접목을 시키지 않으면 땡감밖에 안 됩니다. 40여년을 오다 보니 고루하고 정체돼 있습니다. 잔뿌리를 솎아 주고 가지치기를 하고 새로운 양분을 공급해야 합니다.” (2004/12/09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송년회장에서)

“구조조정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내년 상반기면 구체적인 성과가 나오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 이야기 하자.” (2004/12/09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송년회장에서)

◆ 평가

코오롱 가문은 재계에서 상대적으로 아들이 귀한 집안으로 알려졌다. 조부인 창업주 이원만 회장은 슬하에 2남4녀를 뒀지만 부친 이동만 명예회장은 1남5녀, 이웅열 본인도 1남2녀다. 여자 형제들 속에서 자랐으나 남자다운 성격으로 알려졌다. 골프를 비롯하여 축구, 야구, 테니스, 탁구, 당구, 골프 등 종목을 가리지 않는 스포츠 매니아다.

활달하고 사교적이며 호방한 성격이어서 2000년 전경련 e비즈니스 위원장을 맡아 재계 2∼3세의 리더 격으로 활동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류진 풍산 회장,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과 가깝게 지낸다.

이웅열의 별명은 ‘3박4일’이다. 무슨 일이든 물고 늘어지면 4일 안에 끝장을 봐야 하는 성격이다. 그만큼 열정과 의지가 강하다.

어렸을 때 박하지 않을 정도의 용돈만 이 명예회장으로부터 받아 친구들로부터 "재벌아들이 짜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1996년 그룹 회장으로 취임할 무렵 코오롱은 섬유사업 고부가가치화와 사업다각화를 모색 중이었다. 그러나 3세대 경영인으로서 시험대에 오르자마자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취임한 뒤 26개 계열사를 15개로 줄이고 부채비율을 대폭 낮추는 등 구조조정을 진행해야 했다.

한국화낙, 코오롱메트생명보험, 코오롱전자를 매각했고 코오롱은 스위스 보스턴투자은행으로부터 5천만 달러 외자를, 코오롱상사도 BMW로부터 2천만 달러 외자를 도입했다. 광고회사 한인기획을 그룹에서 분리했고 A&C코오롱, 코오롱씨드50, 코오롱호텔 등 3개사를 코오롱스포렉스에 합병했다.

코오롱A&C의 코오롱메라크섬유, 코오롱남바 흡수합병해 코오롱글로텍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또 그룹의 미래라 불렀던 신세기통신 지분 전량을 매각했다.

취임하면서부터 ‘원앤온니(One & Only)’를 경영방침으로 정하고 유망상품, 기술, 지역을 선점해 질적인 측면과 효율성을 추구했다.

외환위기 상황을 견뎌냄으로써 경영 능력을 인정받는 듯 했으나 2000년대 들어서도 순탄치 만은 않았다. 자금횡령, 부실경영, 정리해고, 신성장동력 부재 등 연이은 악재에 시달렸다.

2012년부터 6년 동안 듀폰에 대항해 소송을 펼친 것을 놓고 뚝심이 있다는 평가도 받는다.

코오롱인더스트리는 자체 개발한 아라미드 생산 기술을 놓고 미국의 화학·섬유기업인 듀폰과 6년 동안 소송을 벌였다. 듀폰이 코오롱인더스트리를 상대로 아라미드 생산기술이 자신들의 영업기밀을 빼내온 것이라며 사용중지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웅열은 2015년 4월 듀폰에 민사 합의금과 벌금 3850억 원을 지불하기로 하고 소송을 마무리했다.

이웅열은 듀폰이 시장을 장악한 상황에서 코오롱이 적자를 지속할 것이라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아라미드 사업에 대한 장기적 안목으로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회사와 직원들의 사기를 비롯해 다른 사업들의 간접피해까지 해소할 수 있다고도 본 것이다.

이웅열은 합의를 마무리지음으로써 세계시장에 아라미드 섬유를 생산하고 판매할 수 있게 돼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과 유착의혹 등은 이 회장이 해결해야 할 숙제로 꼽힌다.

◆ 기타

아버지를 닮아 사교성이 좋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 류진 풍산 회장,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과 친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 회장과 테니스를 즐겨 쳤던 것으로 전해진다.

외환위기로 회사가 어렵자 코오롱그룹 계열사를 팔고 신세기통신 지분을 매각해야 했다. 당시 이웅열은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 미래를 팔았다”면서 침통해 했다.

코오롱은 3대째 장자승계 원칙을 지켜왔다. 그룹 경영은 장남만 참여하고 딸들과 사돈가의 경영참여는 철저히 배제한다. 다른 재벌가가 사돈을 비롯한 친인척들이 경영일선에 나서는 것과 다른 모습이다.

코오롱가의 딸과 며느리들이 대외활동보다 가정주부로서 남편 뒷바라지와 자녀 교육에 애쓰는 것도 장자경영원칙에서 비롯된 결과다.

이웅열의 부인 서창희씨는 물론 누이들 모두 이화여대 동문들이다. 장녀 이경숙씨는 생활미술과, 이상희씨는 기악과, 이혜숙씨는 가정학과, 이은주씨는 도서관학과를 나왔다.

장남 이규호씨는 2012년 코오롱인더스트리로 입사했다. 이규호씨는 2015년 12월 정기 임원인사에서 상무보로 승진했다.

이웅열은 2015년 10월16일 기준으로 5606억 원에 이르는 상장 주식자산을 지녀 국내 주식자산 순위 47위에 올랐다. 2014년보다 순위가 60위나 급등했다.

2015년 11월 사재 10억 원을 출연해 청년희망펀드에 기부했다.

2015년 3분기까지 코오롱인더스트리로부터 9억7550만 원을, 코오롱생명과학으로부터 6억7500만 원의 보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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