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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 박근혜 대통령

한국 최초 '여성' '부녀' '독신' '이공계 출신' 대통령
홍지용 기자 hjy1120@businesspost.co.kr 2014-05-15 12: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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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Who Is ?] 박근혜 대통령
▲ 대한민국 18대 대통령 박근혜


박근혜는 1952년 2월 2일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에서 태어났다. 1974년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해 '8•15 저격 사건'으로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사망하자 1979년까지 영부인 직무를 대행했다. 1982년 육영재단 이사장 및 영남대학교 이사장, 1994년 정수장학회 이사장 등을 맡았다.


1997년 한나라당에 입당해 1998년 4월 대구 달성군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제19대 국회의원까지 5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한나라당의 대표최고위원을 역임했다. 2011년 12월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변경했다. 2012년 12월 19일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74년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숨진 1979년까지 '퍼스트 레이디' 직무를 수행했다. 이 시기 국민정신 개조운동인 새마음운동에 참여했다.


1982년부터 1990년까지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했으며, 영남대학교 이사장을 겸했다. 1994년 정수장학회 이사장으로 취임해 11년간 재직했다.


1997년 한나라당에 입당해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후보의 지지를 선언했다. 1998년 4월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다. 이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달성군에서 4선했고, 제 19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당선되어 5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2002년 2월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의 당대표가 되었으나 그해 11월 제16대 대통령선거를 한 달 앞두고 한나라당과 합당하는 형식으로 복당했다.


2004년 3월 한나라당의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탄핵 역풍' 속에서 한나라당을 이끌어 17대 총선에서 선방했다. 2005년 사학법 재개정 장외투쟁을 이끄는 등 총선승리를 위한 한시적 대표가 될 것이라는 일부의 예측을 깨고 2006년까지 대표로서 활동했다.


2007년 한나라당의 제17대 대통령선거 후보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패배했다.


2011년 12월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가 디도스 파문으로 사퇴하자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출됐다. 2012년 2월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4월 제19대 총선에서 과반수의 의석을 확보하며 승리했다. 12월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에 이겨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13년 2월 25일부터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다.


◆ 학력


서울장충초등학교를 1964년 졸업한 후 성심여자중학교, 성심여자고등학교를 거쳤다. 1970년 서강대학교에 진학해 1974년에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사망으로 귀국했다.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초등학교 동창이다.


명예학위를 여러 차례 받았다. 1987년 중국문화대학 명예문학박사, 2008년 카이스트 명예이학박사 및 부경대학교 명예정치학박사, 2010년 서강대학교 명예정치학박사, 2014년엔 독일 드레스덴공과대학교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부친인 박정희는 일본군과 대한민국 육군을 거친 군인 출신이다. 5•16 군사정변으로 정계에 등장해 1963년부터 1979년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모친인 육영수는 옥천여자중학교 교사 출신으로 박정희의 두 번째 부인이다.


여성바둑연맹 총재인 박근령이 여동생, EG(구 삼양산업) 회장인 박지만이 남동생이다. 이외에도 박정희와 전처 사이 자식인 박재옥이 이복언니다.


첫째 삼촌 박동희의 자녀중 4선 국회의원을 지낸 박재홍 전 민자당 의원이 사촌 오빠이다. 셋째 삼촌인 박상희의 자녀 중 사촌 오빠인 박준홍은 대한축구협회 회장이었다. 박준홍의 누나 박영옥은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의 부인이다. 박근혜와 김종필은 사촌형부-처제 관계다.


셋째 삼촌 박상희의 딸 박설자는 벽산그룹 김인득 창업주의 둘째 아들 김희용 동양물산 회장과 결혼해 재계와 혼맥을 이었다. 김희용 회장의 형인 김희철 벽산그룹 회장은 허동수 GS칼텍스 회장의 누나 허영자씨와 결혼해 허 회장과 박근혜는 먼 사돈 관계다.


외가에서 육영수의 오빠인 육인수 전 의원이 박근혜의 외삼촌이다. 6~10대 국회에서 내리 5선을 지냈다. 육영수의 언니인 육인순 혜원학원 설립자는 남편 홍순일과 사이에 3남5녀를 두었는데, 육인순의 맏사위가 농수산부 장관을 지낸 장덕진 전 의원, 둘째 사위가 한승수 전 국무총리, 셋째 사위가 유연상 전 영남대 재단 이사장, 넷째 사위가 경수종합금융 회장을 지낸 정영삼 한국민속촌 회장, 막냇사위가 대한선주협회장을 지낸 윤석민 전 의원이다. 모두 박근혜의 이종사촌 형부들이다.


한승수 전 총리와 결혼한 박근혜의 이종사촌 홍소자의 사위가 김세연 의원이다. 김세연의 삼촌이 김형수 전 한국맥도날드 대표이고, 김형수 대표의 장인이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다. 박태준 회장의 며느리 정지윤은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의 부인 정지선의 언니다.


이외에도 방송인 은지원이 박정희의 고모 박귀희의 손자로, 박근혜와 5촌 관계다.


◆ 상훈


2007년 한국언론인연합회는 발표하는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에서 정치발전부문 최고대상을 받았으며, 2009년 법률소비자연맹 주최로 열린 '대한민국 법률대상 시상식'에서 입법부문을 수상했다.


국회의원 시절 가장 모범적이고 신사다운 의정활동을 펼친 의원에게 주어지는 '백봉 신사상'을 4년 연속(2007•2008•2009•2010) 수상해, 최다 연속 수상 기록(4회) 보유자다.


2013년 영국 여왕이 국빈방문시 외국 국가원수에게 수여하는 '바스 대십자 훈장(Grand Cross of the Order of the Bath)'을 받았다.


◆ 상훈


2007년 한국언론인연합회는 발표하는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에서 정치발전부문 최고대상을 받았으며, 2009년 법률소비자연맹 주최로 열린 '대한민국 법률대상 시상식'에서 입법부문을 수상했다.


국회의원 시절 가장 모범적이고 신사다운 의정활동을 펼친 의원에게 주어지는 '백봉 신사상'을 4년 연속(2007•2008•2009•2010) 수상해, 최다 연속 수상 기록(4회) 보유자다.


2013년 영국 여왕이 국빈방문시 외국 국가원수에게 수여하는 '바스 대십자 훈장(Grand Cross of the Order of the Bath)'을 받았다.


어록


“내가 누구로부터 조종받는다는 말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다.” (1990/11/8 육영재단 이사장 직을 사퇴하는 기자회견에서 최태민 목사의 운영 관여를 묻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는 마지막 안전장치인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것은 저의 모든 것을 걸고 막아내겠습니다." (2004/9/9 기자회견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논란에 대해)


“당 대표를 하나의 얼굴마담으로 생각하느냐”, “정치에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욕먹는 게 낫다” (2004/9/23 기자들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자신의 리더십에 대한 당 내 비판에 정면 대응하며)


“대전은요?" (2006/5/22 지방선거 유세 중 피습사건으로 입원 상태에서, 한나라당에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전해받은 후)


"국민을 위한 일이라면 백 번이라도 수첩공주를 하겠다.” (2007/4/5 공주영상대에서 열린 특강에서)


"저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가족도 없어서 저에게는 대한민국이 가족이고 국민이 최우선입니다." (2007/5/23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가진 세종로포럼 초청 특강에서)


"'이산화가스', '산소가스'를 배출하는데, 그 이런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2007/7/21 한나라당 대선 후보 TV 토론회에서 이명박이 교토의정서와 관련 이산화탄소 배출 해결책에 대해 묻자)


"'줄푸세 정책'으로 우리 경제를 확실히 살려놓겠습니다. ‘줄푸세’는 줄이고, 풀고, 바로 세우자는 것입니다. 세금과 정부규모는 줄이겠습니다. 불합리한 규제는 과감히 풀겠습니다. 법질서와 원칙은 바로 세우겠습니다." (2007/5/29 한나라당 대선주자 정책비전대회 기조 연설에서)


"거짓으로 한나라당이 과연 집권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께서 애국심과 애당심으로 바로 잡아 주십시오." (2007/8/17 이명박 후보와의 경선 대결을 이틀 앞두고)


"아버지의 궁극적인 꿈은 '복지국가' 건설이셨습니다." (2009/10/26현충원에서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 30주기 추도식에서 추도문에서)


“복지에 (돈보다) 중요한 건 사회적 관심”, “한국말 못 알아들으세요?” (2011/1/23 자신의 싸이월드 미니홈피 회원들과 연 불우아동 후원모임에서, 기자가 사회적 관심이 무슨 의미인지 질문하자)


"병 걸리셨어요?" (2011/9/7인천고용센터 방문 도중 한 기자가 '안철수 신드롬'을 묻자)


"바쁜 '벌꿀'은 슬퍼할 겨를도 없다" (2012/1/2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해 고 육영수 여사 서거 당시 심정을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바쁜 꿀벌(busy bee)은 슬퍼할 겨를도 없다(The busy bee has no time for sorrow)'를 잘못 빗대며)


"파업이 너무 장기화되고 있는데 노사가 서로 슬기롭게 잘 풀었으면 좋겠다" (2012/6/22 봉사활동 중 기자들의 2012년 MBC 노조 총파업에 대한 질문에)


"5•16은 아버지로서는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을 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다른 생각, 반대 의견을 가진 분도 있기 때문에 옳으니 그르니 하기보다는 국민과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2012/7/16 신문방송편집인협회 토론회에서)


"네거티브에 시달려 멘붕 올 지경" (2012/8/6새누리당 제18대 대통령후보자 선거 서울 합동연설회에서)


“5•16이 정상적인 것은 아니지 않으냐. 아버지 자신도 다시는 나같이 불행한 군인이 없기를 바란다는 말씀을 하셨다." (2012/8/7새누리당 대통령 경선 후보 토론회에서)


"과거에 묻혀 사시네요." (2012/8/8 경선 토론회에서 임태희 후보가 5.16에 대한 견해를 묻자)


"역사적인 사건의 인물들과 화해를 해야 하지 않느냐. 계속 역사적으로 갈등이 됐던 문제를 해결하려 할 것." (2012/8/29 전태일 열사의 유가족과 친구를 만나려 했으나 거절당한 후)


"(인혁당 사건에 대해)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 (인혁당 사건 유족에 대한 사과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역사적)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느냐는 답을 한번 한 적이 있다." (2012/9/10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 에서 인혁당 사건과 관련해 역사적 판단에 맡기고 유족에 대한 추가적 사과나 입장 변화는 없다고 밝히며)

"몇 십년 전 역사라 지금도 논란이 있고 다양한 생각이 있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역사가 객관적인 판단을 해 나가지 않겠는가. 역사의 몫이고 국민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유신에 대해 당시 아버지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그렇게까지 하면서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했다. 그 말 속에 모든 것이 다 함축돼 있다고 생각한다." (2012/9/10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 에서 유신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같은 대법원에서 상반된 판결이 나온 것도 있지만, 한편으론 그 조직에 몸담았던 분들이 최근 여러 증언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감안해 역사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한 것." (2012/9/11박범진 전 한성디지털대 총장이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가 출간한 학술총서 `박정희 시대를 회고한다'에서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 아니다"라고 증언한 것에 빗대서)


"제가 이공계 출신이니 뭔가 DNA가 다르지 않겠느냐 ...... 제가 과학인들의 열정이 솟아나도록 모든 것을 걸고 한번 해보겠다." (2012/10/8카이스트 본관에서 대전 지역 과학기술연구원들과 간담회를 가지며)


“저는 오늘로 지난 15년 동안 국민의 애환과 기쁨을 같이 나눠왔던 대통령직을 사퇴합니다." (2012/11/25 제18대 대선 후보 공식 등록을 앞둔 기자회견에서 – 국회의원직을 대통령직으로 잘못 말해 구설수에 오름)


"정부가 자의적으로 쓸 수 있는 재량 지출을 줄이고 세입 확대는 비과세 감면제도를 정비한다거나, '지하경제를 활성화'해 매년 27조, 5년간 135조원을 마련할 것이다." (2012/12/10 대선후보 2차 TV 토론회에서 문재인 후보가 복지재원 확보방안을 묻자)


"한 마디로 '통일은 대박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2014/1/6 신년 기자회견에서 평화통일 구축 방안에 대해 묻자)


"쓸 데 없는 규제는 우리의 원수이자 암 덩어리다.” (2014/3/10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규제 개혁을 강조하며)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 (2014/4/16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해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찾아 상황을 점검하며)


"선장과 일부 승무원들의 행위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고, 용납될 수 없는 살인과도 같은 행태였습니다." "국민들이 못 믿는 공무원은 그 자리에 있을 존재 이유가 없습니다." (2014/4/21 세월호 침몰 사태로 열린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평가


‘보수의 구원투수’, ‘선거의 여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98년 4월 대구 달성군 재보궐선거에서 안기부 기조실장 출신의 거물 엄삼탁을 꺾으며 국민회의의 동진을 막았다. 2004년 3월 한나라당이 위기에 처했을 때, '천막 당사'를 치고 여러 차례 기자회견을 통해 사태를 수습했다. 비록 제17대 총선에서 원내 1당의 자리는 내주었지만 한나라당은 121석을 차지하며 선전했다.


2011년 12월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가 선관위 홈페이지 디도스 공격 파문으로 사퇴하자,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전면에 나섰다.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2012년 4월 11일 제19대 총선에서 152석을 과반석을 지켰으며 제18대 대선에서도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개인보다 국가를 우선하는 태도가 배어있는 모습으로도 회자된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들은 후 첫 마디는 "휴전선은 이상 없습니까?", 2006년 지방선거 지원유세 도중 '커터칼 테러'를 당한 후 병원에서의 첫 마디도 "대전은요"였다고 한다. 20대 시절부터 영부인 역할을 대행했던 삶이 행동 전반에 녹아있는 것이다. 이를 놓고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자세냐, '개인 희생을 당연시하는 국가주의'로 보느냐로 관점이 엇갈린다.


일각에서 사람을 잘 믿지 못한다고 평가된다. 구체적 정황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버지가 측근의 총에 숨진 후, 측근들이 줄줄이 등을 돌린 것이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통 부재의 지적이 있었다. 한나라당 대표 시절 의원들에게 열린우리당과의 '4자회담'에서 "수첩에 할 말을 적어와 그 말만 반복해,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이었다는 열린우리당 인사들의 소감이 대표적이다. 당 의원들에게조차 ‘발신번호표시 제한’으로 연락하고, 심지어 참모들조차 그가 주요현안에 대해 누구와 상의하는지 모른다 말한 적도 있다. 철저한 '비밀주의' 소통 원칙을 고수해, '수첩공주', '불통'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권위주의적, 회피적 태도 문제로 거론된 바 있다. 2004년 MBC 라디오 프로그램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도 경제 문제에 대해 질문하자 "지금 저하고 싸움하시는 거예요?"라고 대답해 논란이 되었고, 2011년 9월 '안철수 열풍'에 대해 기자들이 여러 번 생각을 묻자, "병 걸리셨어요?"라고 답하는 등 질문조차 불편한 비판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다.


중요한 사안에 대해 원론적 수준에서 짧은 말을 던지면서, ‘복지 예산 삭감’이나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등 민감한 사안 앞에서는 침묵했다.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 시위가 있었던 2008년 6월이 대표적 예다. 박근혜는 "근본 대책이 나와야 한다"는 원론적인 얘기만 한 차례 한 뒤 줄곧 침묵을 지켰다. 대신 그는 당을 떠난 친박 측근들의 복당 문제를 논의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군사쿠데타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박근혜는 박정희 대통령의 5•16 군사정변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필요했다는 견해를 비쳤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 후보 청문회에서는 '남북 대치상황에서 국민을 구하기 위한 구국혁명'으로, 2012년 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는 '불가피하게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대선 직전 논란이 커지자 박근혜는 '5•16이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식으로 해명했다.


◆ 기타


전두환 전 대통령과는 인연이 오래되었다. 1976년 전두환이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발탁되어 처음 박근혜와 조우했다. 당시 오빠-동생으로 부르며 막역한 사이라는 소문이 있었으나, 박근혜 측은 이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이후 악연이 깊었다. 전두환은 정권을 잡은 뒤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하했다. 국립현충원에서 유족들의 추도행사를 금지하고, 박근혜가 이끌던 ‘새마음봉사단’도 해산시켰다. 다만 생계비 명목으로 비자금을 주었다.


정치인이 된 박근혜는 2001년 한나라당 부총재 자격으로, 2004년 한나라당 대표로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만났으나 그 후 따로 만난 적은 없다. 2012년 대선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선출된 뒤에도 전두환만 찾아가지 않았다. 2013년 전두환 일가의 압수수색에 대해서도 별다른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다.


완고한 이미지를 해소하기 위해 일찍부터 SNS를 활용했다. 2004년 2월 22일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만들었다. 이명박, 정동영 등 당시 정치적 경쟁자보다 ‘미니홈피 열풍’에 수개월 빨리 참여해 선점효과를 누렸다. 미니홈피에 인사말이나 메모를 일부 공개하는 것 외에도 난치병 환자를 돕는 바자회를 열거나 후원금을 모금하기도 했다. 홈페이지 개설 넉 달 만에 방문자가 1백만 명을 돌파했고, 백만 첫 번째 방문자 권순호 군과 일일데이트를 가져 이슈를 끌었다.


‘패션 정치’로 유명하다. 방미 때는 녹색과 푸른색 계열 의상을 입고, 방중 때는 붉은색 의상을 입어 시선을 모았다. 대통령 당선 이후 좀 더 밝고 과감한 의상을 시도하면서, 상황에 맞는 컬러 정치를 시도했다. 남대문시장에서 ‘박근혜 스타일’로 중년 여성들 사이에 큰 이슈가 되었다.


2014년 4월 미국과의 정상회담에서는 이러한 ‘컬러 정치’가 비판받기도 했다.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전국이 침통한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의 파스텔톤 파란색 재킷, 그 위에 달린 브로치가 오바마의 짙은 양복과 대비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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