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원 기자 gwlee@businesspost.co.kr2014-07-30 21: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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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종룡 금융위원회 위원장 내정자
임종룡은 1959년 8월3일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나 네 살 때 상경했다. 어릴적엔 축구와 야구를 좋아하고 공부는 뒷전이었던 평범한 동네 소년이었다.
회계사가 되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공직에 몸담는 것이 좋겠다는 부친의 처음이자 마지막 당부에 따랐다고 한다.
좌우명은 다름아닌 ‘진정성’이다. 부친으로부터 ‘진솔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활철학을 배웠다고 한다. 그럴 경우 누구나 다 설득할 수 있고 누구나 다 환경에 적응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980년 행정고시 24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재정경제부에서 은행제도과장, 증권제도과장, 금융정책국장을 거쳐 기획재정부 1차관 등 주요 보직을 두루 맡았다. 국무총리실장을 마지막으로 공직생활을 마무리하는듯 했으나 NH농협금융지주 회장을 거쳐 금융위원장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중재의 달인’이라는 별칭을 얻으며 실력파 관료로 인정받았다. 2013년 6월 농협금융지주 회장으로 취임 당시, 이른바 모피아 출신인데다 온화한 성격 탓에 농협중앙회의 입김이 쎈 곳에서 잘 버틸 수 있겠냐는 우려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투자증권 인수를 앞두고 2013년 8월 직접 농협중앙회 조합장들에게 인수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모습을 보였다. 2013년 12월 취임한 지 6개월만에 굵직한 우리투자증권 인수 작업에 성공했다. 그 결과 우리투자증권은 2014년 6월27일 농협금융지주 자회사로 편입됐다.
취임 당시만 해도 신동규 전 회장은 농협중앙회와 갈등을 빚고 “농협금융은 제갈량을 데려와도 안 될 것이다”라며 자진사퇴했다. 이런 거친 분위기 속에서 임 회장은 뛰어난 중재능력을 보이며 금융계의 ‘제갈량’이라는 호평을 받게 됐다.
2014년 신년사에서 ‘일명경인(一鳴驚人)’을 강조했다. ‘한번 일을 시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일을 해내자’는 뜻이다. 이런 기조로 합병법인인 ‘우리NH투자증권’을 시장에 잘 안착시키기 위해 구조조정 등에 사활을 걸고 있다.
2015년부터 신제윤의 뒤를 이어 금융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우리투자증권 인수에 성공하면서 농협금융의 비금융권 사업다각화에 성공했다. 농업과 연계된 글로벌 전략으로 ‘네덜란드의 농협’인 라보뱅크의 성공사례를 벤치마킹하고 있다. 전체인구 70%가 농촌지역에 거주하는 베트남에 사무소를 지점으로 전환하는 작업도 추진 중이다.
이처럼 이전에 없던 공격적인 행보를 거듭하자 업계는 농협금융에 변화가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 기대가 크다. ‘마찰 없는 소통리더십’으로 농협금융의 폐쇄적인 조직문화를 바로 잡고자 한다고 알려졌다.
일할 때만큼은 ‘워커홀릭’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철저한 직업의식을 비롯해 뚝심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청와대 비서관 시절 대통령 주재회의 도중 중간에 나오지 않아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사례는 유명하다. 당시 일이 많았던 탓에 잇몸이 흔들려 치아를 세 개나 뽑았고 나중에서야 제대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기획재정부 재직 당시 비공개 투표로 진행되는 ‘닮고 싶은 상사’에 세 번이나 선정될 정도로 직원들에게 신망을 얻었다. 임 회장은 ‘내가 떠나더라도 후배들이 이 조직을 위해 기여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후배들을 대했다.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과 절친한 선후배 사이다.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과 1987년 산업금융과에서 사무관으로 첫 인연을 맺은 뒤 상당기간 공직생활을 같이했다. 밤샘 근무 후 힘들 때면 두 사람이 과천에서 자주 볼링을 쳤다고 한다.
우리투자증권 인수전을 놓고 ‘임의 전쟁’ 끝에 선배를 이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최고경영자(CEO) 리스크’로 휘청대는 다른 금융회사와 달리 ‘CEO 프리미엄’을 톡톡히 누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81년 행시에 합격했다. 이후 1980년대 후반 산업합리화 당시 해운산업 합리화와 국제그룹 해체 업무 등을 주도했다. 1999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 은행제도과 과장 자리에 올랐다. 외환위기 당시 금융기업구조조정개혁반장을 맡으면서 은행합병 등을 도맡았다.
이어 증권제도과, 금융정책과, 종합정책과 과장을 역임하며 금융관료 생활을 했다. 2008년 금융위기 때는 청와대에 있으면서 글로벌 금융위기 탈출을 도왔다.
두 번의 외환위기를 경험하자 ‘건전성’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건전한 금융회사야말로 위기가 와도 성장한다는 것을 체감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는 주영국대사관 참사관을 지냈다. 이후 2007년 재정경제부 경제정책국 국장 자리에 올랐다. 2009년 대통령실 경제비서관, 2010년 기획재정부 제1차관, 2011년 국미총리실장을 역임했다.
33년 공직생활을 마치고 2013년 6월 NH농협금융지주 회장이 됐다.
농협금융지주 회장 재직중 2015년 3월 소규모 개각으로 금융위원장에 임명됐다.
◆ 학력
1982년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오리건주립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석사를 마쳤다.
◆ 가족관계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 두 명도 현재 공직에서 일하고 있다.
가족사랑이 지극한 것으로 전해진다. KBS에 근무하고 있는 PD 출신 부인 최순형 씨 사이에 1녀를 뒀다. 사람들이 딸을 두고 자신과 똑같이 생겨 ‘구공탄’이라고 한다며 전형적인 ‘딸바보’ 모습도 보인다. 27세인 딸은 아버지와 같은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나와 현재 IT관련 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 가족관계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 두 명도 현재 공직에서 일하고 있다.
가족사랑이 지극한 것으로 전해진다. KBS에 근무하고 있는 PD 출신 부인 최순형 씨 사이에 1녀를 뒀다. 사람들이 딸을 두고 자신과 똑같이 생겨 ‘구공탄’이라고 한다며 전형적인 ‘딸바보’ 모습도 보인다. 27세인 딸은 아버지와 같은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나와 현재 IT관련 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어록
“농협금융이 우리나라 근간이 되는 금융기관이라는 생각으로 회장직을 수락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에 따른 해석은 앞으로의 성과에 따라 보여주겠다.” (2013/06/11, 농협금융지주 취임사를 낭독하며)
“금융지주가 중장기 전략을 세우면 계열사들이 따라오도록 하되 경영에는 간섭하지 않겠다.” (2014/06/12, 취임 1주년을 맞아 연 기자간담회에서)
“농협금융은 은행•보험을 통한 유통은 어느 금융그룹보다 강하지만 증권•자산운용을 통한 제조와 운용이 부족하다” “증권업계 1등으로서 전통과 전력을 가지고 있고, 역동적인 DNA를 보유한 우투증권이 농협금융에 가장 필요하고 적합한 대상이라고 판단했다.” (2014/07/16,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우리투자증권에 방문해 부서장회의에 참석하며)
“성공한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를 갖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늘 긍정적이고 감사하는 태도를 가질 것” (2014/07/21, 농협금융 임직원 재능기부 프로그램에서 ‘꿈과 도전정신’ 주제로 강연하며)
“농협이라는 큰 우산 밑에서 다소 폐쇄적으로 길들여진 직원들에게 야성과 자신감을 가지라고 주문하고 있다” “이제 곧 명실상부한 4대 금융지주의 반열에 오르게 될 것” (2014/07/24, 언론사와 인터뷰에서)
◆ 평가
우리투자증권 인수에 성공하면서 농협금융의 비금융권 사업다각화에 성공했다. 농업과 연계된 글로벌 전략으로 ‘네덜란드의 농협’인 라보뱅크의 성공사례를 벤치마킹하고 있다. 전체인구 70%가 농촌지역에 거주하는 베트남에 사무소를 지점으로 전환하는 작업도 추진 중이다.
이처럼 이전에 없던 공격적인 행보를 거듭하자 업계는 농협금융에 변화가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 기대가 크다. ‘마찰 없는 소통리더십’으로 농협금융의 폐쇄적인 조직문화를 바로 잡고자 한다고 알려졌다.
일할 때만큼은 ‘워커홀릭’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철저한 직업의식을 비롯해 뚝심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청와대 비서관 시절 대통령 주재회의 도중 중간에 나오지 않아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사례는 유명하다. 당시 일이 많았던 탓에 잇몸이 흔들려 치아를 세 개나 뽑았고 나중에서야 제대로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기획재정부 재직 당시 비공개 투표로 진행되는 ‘닮고 싶은 상사’에 세 번이나 선정될 정도로 직원들에게 신망을 얻었다. 임 회장은 ‘내가 떠나더라도 후배들이 이 조직을 위해 기여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후배들을 대했다.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과 절친한 선후배 사이다.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과 1987년 산업금융과에서 사무관으로 첫 인연을 맺은 뒤 상당기간 공직생활을 같이했다. 밤샘 근무 후 힘들 때면 두 사람이 과천에서 자주 볼링을 쳤다고 한다.
우리투자증권 인수전을 놓고 ‘임의 전쟁’ 끝에 선배를 이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최고경영자(CEO) 리스크’로 휘청대는 다른 금융회사와 달리 ‘CEO 프리미엄’을 톡톡히 누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기타
시력이 좋지 않아 방위로 1983년 군복무를 마쳤다.
현재 개인 재산은 약 20억 원 가량인 것으로 알려졌다. 부인과 공동 명의인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광장아파트(148제곱미터)의 2015년 2월 기준 시세는 약 10억 원 가량이다. 상속받은 송파구 문정동 훼미리아파트의 면적 138제곱미터 중 58.79제곱미터를 소유하고 있다. 나머지는 동생이 보유했다. 훼미리아파트의 시세는 9억 원이다. 2013년 기준으로 본인과 배우자의 예금 5억 원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세대 상경대 동문으로 최경환 경제부총리,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서승한 국토교통부 장관,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이 있다.
축구를 통해 재무부 시절 동료애와 목표를 달성하는 문화를 배웠다. 당시 십자인대가 끊어지고 연골이 파손되어도 축구장에 있을 만큼 축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