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제도 개편 요구
손학규는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을 향해 선거제 개편을 요구하고 있다.
2018년 12월6일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 선거제 개편 요구를 외면하고 예산안 처리에 잠정합의하자 이에 항의하는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손학규는 “양당이 예산안 처리를 한다고 했지만 이건 예산안 처리가 아니라 선거제 개혁 거부를 한 것”이라며 “선거제 개혁과 예산안 처리가 함께 갈 때까지 제가 단식하고 안 되면 저는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12월5일 국회 로텐더홀에서 야3당 대표가 함께 농성하며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선거에서 득표율에 따라 각 정당에 의석을 배분하고, 배분받은 의석에서 지역구 의석을 뺀 만큼을 비례대표로 할당하는 방식이다.
손학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약속했는데 왜 지금 와서 다른 이야기를 하느냐"며 "문재인 대통령도 국민의 뜻을 제대로 받들어 움직이지 않고 있는 민주당이 움직이도록 결단을 내려 달라"고 촉구했다.
그는 12월4일에도 “선거제 개편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자리 잡게 하는 절차와 제도의 완성”이라며 ”야당의 이익만 추구하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 선거제 개편과 예산안 처리를 연계하는 것을 비판하는 야당의 당연한 전략이라고 맞받아쳤다.
손학규는 9월 바른미래당 대표에 선출된 뒤에 선거제도를 개혁해 양당 체제를 무너뜨리는데 집중하겠다면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소득주도성장과 최저임금인상 비판
손학규는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과 최저임금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손학규는 2018년 9월27일 국회에서 열린 ‘최저임금법 시행령 개정 관련 경제단체 간담회’에서 “소득주도성장을 전면 폐기하고 최저임금 인상을 멈춰야 한다”며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으로 곳곳에서 아우성인데도 문재인 정부는 민심을 듣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장하성 실장은 경제정책을 잘못 잡고도 억지를 쓰며 실상을 왜곡하고 있으며 김동연 부총리도 나라 경제 운용의 최고책임자로서 잘못된 경제정책에 항의 한마디도 못 하고 피해 가는 무책임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하며 장하성 정책실장과 김동연 부총리의 경질을 주장했다.
11월9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는 “‘경제 투 톱’이 경쟁하면 싸움만 난다”며 “청와대 정책실장을 임명하지 말고 빈자리로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부총리의 후임에는 실용적 시장주의자를 임명할 것을 요구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11월9일 김 부총리와 장 실장을 동시에 교체하기로 했다. 김 부총리의 후임은 홍남기 국무조정실장이 지명됐고 장 실장의 후임은 김수현 청와대 사회수석이 임명됐다.
△바른미래당 대표
손학규는 바른미래당 대표에 올랐다. 임기는 2020년 9월1일까지이다.
그는 2018년 8월8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무기력증과 패배주의의 구렁에서 탈출하기 위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온갖 수모와 치욕을 각오하고 감히 나섰다”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바른미래당의 변화와 혁신을 위한 마중물이 되겠다”고 출마의 뜻을 밝혔다.
8월21일 안철수 전 바른미래당 공동대표를 만난 박주원 전 국민의당 최고위원은 8월27일 “안심(안 전 대표의 마음)이 이미 손학규 후보로 정해져 있다”며 손학규에 힘을 실었다.
손학규는 9월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바른미래당 대표 및 최고위원, 전국청년위원장 선출대회에서 최고 득표율인 27.02%로 당선돼 바른미래당의 신임 대표에 올랐다.
그는 정치개혁 의지를 보였다. 손학규는 “무능과 독선의 제왕적 대통령제와 갑질 양당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저를 바치겠다”며 “국민의 요구를 직접 전달할 수 있는 선거제도를 만드는 데 당력을 집중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손학규가 바른미래당 대표에 오르면서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등 원내 정당 세 곳의 대표가 민주당계 출신으로 채워졌다. 손학규는 “정치를 새롭게 할 의지가 있는지가 올드보이와 골드보이의 차이”라고 말했다.
| ▲ 2018년 9월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바른미래당 대표 및 최고위원 및 전국청년위원장 선출대회에서 당선자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수민 바른미래당 전국청년위원장, 권은희 바른미래당 최고위원, 하태경 바른미래당 최고위원, 손학규 바른미래당 신임대표, 이준석 바른미래당 최고위원. <연합뉴스> |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및 재보궐선거
2018년 6월13일 치러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및 재보궐선거에서 바른미래장 선대위원장을 맡았다.
손학규는 5월3일 “선대위원장을 맡은 것은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는 간절한 마음과 지방선거 뒤에 진행될 정계개편을 준비하기 위해서다”며 선대위원장직을 수락한 이유를 밝혔다.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서울 송파을 지역구를 둘러싼 파동에 휩쓸리기도 했다. 손학규는 안철수계의 지지를 받아 송파을 전략공천 대상으로 지목됐으나 계파갈등 양상으로 비화하자 불출마를 선택했다.
바른미래당은 지방선거에서 17석의 광역단체장과 226석의 기초단체장에서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배출하지 못했다. 824석의 광역의원과 2926석의 기초의원에서 각각 5석과 21석의 당선자만을 내는 참패를 겪었다.
손학규는 “합당 과정에서 호남과 영남에서 많은 세력이 떨어져 나가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하고 마이너스 통합이 됐다”고 패배를 분석했다.
△바른미래당으로 당적 변경
손학규는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통합에 기여했으나 일부 의원의 탈당을 막지 못했다.
제19대 대선 이후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합당 문제가 불거지며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를 중심으로 한 합당파와 박지원, 정동영, 천정배 등 호남에 지지기반을 둔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반대파의 대립이 격화됐다.
이에 손학규가 국민의당 상임고문으로서 국민의당의 분당을 막고 바른정당과 합당 과정에서 큰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역할론이 제기됐다.
손학규는 합당을 놓고 태도를 명확히 하지 않은 채 2017년 12월21일 박지원 전 국민의당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12월22일에는 이상돈 국민의당 의원과 아침식사를, 유성엽 국민의당 의원과 점심식사를,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바쁜 행보를 보였다.
2018년 1월7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호남 중진 일부가 이탈하더라도 중도통합에 속도를 내야 한다”며 “통합해서 제3세력의 중심을 잡으면 호남도 박수칠 것을 호남 중진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안 대표를 향해서도 “더 양보하고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호남 중진과 타협점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손학규는 통합에 찬성하는 태도를 보이는 한편 국민의당의 분당을 막기 위해 중재 역할을 맡았지만 결국 호남 중진들을 중심으로 민주평화당이 창당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2018년 2월13일 남은 국민의당 의원들과 바른정당의 통합정당인 바른미래당이 창당됐다.
△대선 출마 선언과 경선 패배
2017년 3월19일 국민의당 경선 참여로 제19대 대통령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서울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출마 선언식을 열고 “특권과 패권이 곧 모든 적폐의 근원”이라며 “제왕적 대통령제를 종식하고 국민주권의 시대를 열고 재벌위주의 경제 시스템을 해체해 중소기업 강국을 열어가겠다”고 말했다.
손학규는 이 자리에서 개헌 의지를 강조했다.
그는 “2018년 지방선거 때까지 헌법을 바꾸고 대통령 임기를 3년으로 단축해 다음 총선과 더불어 새로운 체제를 구축해 2020년에는 제7공화국이 출범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다른 당과 연대 필요성도 들었다.
손학규는 “대선 후에 연대나 연합을 하겠다는 건 거짓말”이라며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우리가 어떻게 이길 것인가를 생각할 때 연립정부를 구상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내가 대통령이 되면 이렇게 하겠다고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자강론을 내세우며 연대 연합에 선을 긋고 있는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를 겨냥한 것이라고 해석됐다.
손학규는 바른정당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개혁을 선언한다면 바른정당 등과의 연대 연합론이 호남에서도 수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민의당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 과정에서 현장투표를 반영하자고 주장했으며 이것이 받아들여져 한국 정당사상 처음으로 100% 완전 국민경선이 실시됐다.
그러나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가 2017년 4월4일 대전·충청 경선만을 남겨둔 상황에서 누적 득표율 72%로 사실상 승부를 결정하자 현장투표가 마감되기 전에 패배를 인정했다.
손학규는 “제가 대통령이 되고 싶었고 제일 잘할 것 같았지만 국민들이 안철수 후보를 지지했다”며 “이제 맘껏 안 후보를 지지하고 대통령으로 만들어 저 손학규의 한을 풀어달라”고 말했다.
경선결과 75.0% 득표율을 보인 안 후보가 1위로 국민의당 대통령 후보 자격을 확보했다. 손학규는 18.1% 득표율로 2위에 머물렀다.
△ 제3지대와 빅텐트 추진
손학규는 조기대선을 앞두고 2017년 2월 제3지대와 빅텐트 논의에 불씨를 지폈다.
민주당 비문계 이탈세력과 국민의당, 바른정당, 정운찬 전 국무총리와 정의화 전 국회의장 등 개혁적 보수세력 등에 한국당 내 개헌 및 개혁 동조세력까지 규합해 ‘반패권 연정’을 이룸으로써 대선에서 승리하고 개혁과 개헌을 완수하겠다는 것이다.
비박(비박근혜)·비문(비문재인) 세력을 규합해 국회 의석 180~200석의 비패권 연립정부를 추진하겠다는 구체적 목표를 제시했다.
2017년 2월20일에는 바른정당과 연대를 시사했다.
YTN라디오 인터뷰에서 “어차피 대선이 끝나고 나면 누가 대통령이 되든 여소야대가 불가피한 만큼 공동정부 내지는 연립정부가 불가피하다”며 “같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정당과 연대는 꼭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고 ‘바른정당과도 연립정부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묻자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나 빅텐트론은 정치권에서 이렇다 할 힘을 얻지 못했다. 손학규는 국민의당에 입당한 뒤에 바른정당과 연대를 통해 제3지대와 빅텐트 논의에 불씨를 살리려 했다.
△ 개헌론
손학규는 2016년 10월 정계에 복귀하면서 개헌론을 꺼내들었다.
손학규는 정계복귀와 동시에 발간한 저서 ‘나의 목민심서, 강진일기’에서 “개헌은 정치 문제가 아니라 국가 문제”라며 “이제 권력구조의 개편은 불가피해 보인다”고 밝혔다.
그는 “대선 후보가 책임총리를 공약으로 약속하고 당선 후에는 임기 중 개헌 때까지 이를 실천하면서 권력을 분산해야 한다”는 구체적 방법론도 제시했다.
2016년 11월 대표적 개헌론자인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전 비상대책위 대표와 만나 ‘박근혜 대통령 임기 안에 개헌을 이뤄야 한다‘고 의견을 모으기도 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정국이 급변하면서 개헌론은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손학규는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된 뒤 다시 개헌론을 꺼내 들었다.
2017년 3월7일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 대표와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만나 한 시간여 동안 배석자 없이 이야기를 나눴는데 개헌을 놓고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7년 3월10일에는 2020년 제7공화국 출범론을 공개했다. 대통령이 되어 대통령 임기를 3년으로 줄이고 그 동안 개헌을 완수하겠다는 것이다.
2017년 3월19일 대통령선거 출마를 공식적으로 선언할 때 다음 정부는 개혁 공동정부이자 개헌 공동정부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 2016년 10월20일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전남 강진군 토담집을 떠나기 직전 신발 끈을 동여매고 있다. <연합뉴스> |
△저녁이 있는 삶
2012년 대선에 내건 슬로건 ‘저녁이 있는 삶’은 지금까지도 역대 최고의 선거구호라는 평을 받는다.
저녁이 있는 삶은 인간적 삶을 위해 경제구조를 새롭게 만들자는 것을 요체로 한다. 일자리를 풍부하게 창출해 근로자들이 원치 않는 잔업을 없애고 정시에 퇴근해도 되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저녁이 있는 삶은 보편적 복지와 일자리 문제라는 민주통합당과 손학규의 핵심 아젠다가 절묘하게 함축돼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긴 노동시간에 시달리는 2030대의 젊은 세대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경쟁에서 문재인 후보에게 패했지만 문재인 후보도 “대선 후보가 되면 ‘저녁이 있는 삶’ 슬로건을 빌릴 것”이라며 손학규의 정책을 높이 평가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5월 주 52시간 근로시간 단축 시행을 앞두고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노동시간 단축은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마련하고 저녁이 있는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 한나라당 탈당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쟁에 뛰어들었는데 당시 한나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떠오르는 표어가 ‘경제 대통령’ 이명박, ‘민생 총리’ 손학규, ‘책임 당대표’ 박근혜였을 정도로 당내에서 높은 지명도를 누렸다.
그러나 다른 후보들보다 진보적 색채가 강해 당내에 지지세력을 확장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경쟁자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영남권에 확고한 지역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영남권과 수도권에서 높은 지지율을 얻고 있었다.
손학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지지하는 행보를 보여 한나라당에 남아 개혁을 도모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김근태 전 민주당 상임고문 등 과거 민주화 운동의 동지들은 민주화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던 손학규에게 함께 분열로 자멸해가던 여권을 재편하자고 요청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손학규가 참여하는 여권 재편을 지지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손학규를 놓고 “당에 남더라도 시베리아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결국 손학규는 과거 민주화운동의 동지들과 함께 여권 재편에 나서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고 2007년 한나라당을 탈당해 대통합민주신당에 입당했다.
손학규가 한나라당에 남았더라면 자연스럽게 여권의 대선후보가 됐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그러나 한나라당에서 버티는 선택을 했더라도 당내에 세력이 없고 지지기반이 뚜렷하지 않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가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 경기도지사
2002년부터 2006년까지 경기도지사로 있으면서 판교 테크노밸리, 파주 LCD단지, 평택 현곡단지 등 여러 산업단지를 조성했다.
판교 테크노밸리에서만 7만5천 개의 일자리를 만드는 등 도지사 시절에만 경기도에 74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었다. 17만 명이었던 파주시 인구는 LCD 단지 유치 이후 40여만 명으로 늘었다.
21차례에 걸쳐 투자유치단을 이끌고 미국, 유럽 등을 다니며 외국 자본 유치에도 나섰다. 159차례에 걸쳐 216명의 해외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을 만났는데 이 가운데 113개 해외업체로부터 140억 달러가량의 외자를 유치했다. 특히 LCD 관련 업체 30여 군데로부터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당시 손학규가 외자 유치를 위해 다닌 총 거리가 지구 10바퀴를 돌 수 있는 거리라고 한다.
손학규가 경기도지사로 재임했을 때 경기도의 연 평균 성장률은 7.4%에 정도에 이르렀다.
△최연소 복지부 장관
1996년 만 49세에 역대 최연소로 복지부 장관에 임명돼 1997년 3년간 끌어온 ‘한약분쟁’을 해결했다.
당시 약사들의 한약 조제·판매를 놓고 약사와 한의사들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었다.
한의사들은 물론 한의대생들까지 약사들의 한약 제조를 반대하며 데모에 나섰고 한의대생 집단 유급사태까지 벌어졌다. 약사들은 한약사제도가 기존 약사들의 한약 조제를 금지하기 위한 것이라며 헌법소원을 제출하고 폐업도 불사하겠다고 나섰다.
손학규는 약사들에게 약대를 6년제로 개편하는 방안 등을 제시하며 설득을 시작했다. 또한 한약학과는 한의대가 아닌 약대에 설치하되 한의대가 있는 종합대학에 설치하는 방안을 내놨다.
한의사들이 군의관, 공보의에 입대할 수 있게 했고 행정부 내 독립적 전담부서(한방정책관실)를 설치하도록 했다. 또한 한의학연구원 설치하고 부산대에 한의학 전문대학원이 세우는 방안을 내놨다.
손학규는 약사들과 한의사들의 합의를 이끌어내며 한약분쟁을 무난히 매듭짓고 한의사와 약사 양쪽의 협회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민주화운동가의 정계 진출
손학규는 고등학생 때부터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며 일찍부터 정치인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였다.
경기고등학교에 다니던 1964년 6.3 민주항쟁에 참여했다 구속돼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 동안 복역했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시절에도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나 조영래 전 변호사와 함께 ‘65학번 삼총사’로 불리며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다 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부 시절에는 항상 수배 중인 상태로 도망다녀야 했다. 1978년 어머니 장례식에 몰래 참석하려다가 붙잡혀 옥살이를 했고 1979년 부마민주항쟁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활동하다가 다시 체포돼 고문에 시달렸다.
1980년 한국의 개신교 연합기구 가운데 진보 성향을 보이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지원을 받아 영국 옥스퍼드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1988년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에 임명됐다. 1990년에는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됐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 민주자유당에 입당했다. 1993년 상반기 재보궐 선거에서 경기 광명 지역구에 출마해 44.9% 득표율로 당선됐다.
1996년 4월11일 치러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한국당 소속으로 경기 광명을 지역구에 출마해 42.65%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