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INE 레시피] 희대의 여성 사기꾼들, '애나 만들기' '드롭아웃'
- 현실에서 사기는 매우 질이 나쁜 범죄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흥미로운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범죄 모의와 실행을 다루는 장르를 일컫는 하이스트 필름(Heist film), 케이퍼 필름(Caper film)이라는 용어가 따로 있을 정도이다.오늘 이야기 할 두 편의 드라마는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20대 여성 인물이 대담한 사기극의 주인공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분야는 다르지만 이들의 사기 행각은 상당히 비슷한 면이 있는데 주변 인물을 조종하고 그들을 심리적으로 옭아매는 조작에 능통하다는 점이 무엇보다 흡사하다.넷플릭스 시리스 '애나 만들기(Inventing Anna, 2022)는 러시아계 독일인인 애나 델비가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저지른 사기 사건을 다루고 있다. 애나 델비의 본명은 애나 소로킨으로 델비라는 성은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다.1991년생인 애나 델비는 자신이 어마어마한 신탁자산을 갖고 있는 독일의 명문가 상속녀라고 속이면서 주변인들을 이용하는 인물이다. 재력가 남자친구에게 갈취한 돈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뉴욕 사교계 명사들과 가까워지고 인맥을 활용해 더 큰 사기를 칠 계획을 짜게 된다. 거액의 대출을 받아 애나 델비 재단(ADF)을 설립하고 문화복합공간을 만든다는 것이다.디즈니플러스 시리즈 '드롭아웃(The Dropout, 2022)은 실리콘밸리의 유니콘 기업 테라노스의 CEO 엘리자베스 홈즈의 2004년부터 2016년까지 행적을 담고 있다.1984년생인 엘리자베스 홈즈는 2002년 스탠퍼드 대학 화학공학과에 입학한다. 엘리자베스는 여느 신입생들과는 달리 친구를 사귀고 파티에 참석하는 일에는 도통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대학원생들이 참여하는 실험에 강한 호기심을 보인다.연구실 지도 교수는 엘리자베스의 통찰과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여 실험에 합류시키지만 그녀는 진짜 목표는 창업을 해서 큰 돈을 버는 것이다. 2004년 대학을 중퇴한 엘리자베스는 혈액 한 방울로 250가지 질병을 진단한다는 아이디어 하나로 테라노스라는 첨단 메디컬 회사를 설립한다.20대 초반의 나이에 유력인사와 교류하며 그들을 매혹시키고 환심을 살 수 있었던 애나 델비와 엘리자베스 홈즈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또래와 어울리는 것에 서툴거나 무관심하다는 점이 유사한 둘은 어려서부터 부와 성공에 대한 집념이 강하고 이미지 메이킹에 능통하며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그러나 이런 면보다 중요한 점은 관심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과 과감하게 배팅하는 배짱이라고 할 수 있다.어려서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던 애나는 일찌감치 패션 잡지를 탐독하고 패션 관련 정보라면 샅샅이 찾아 자신만의 아카이브를 만든다. 하지만 정작 관련 업계 경력은 영국의 패션 스쿨을 다니다 중퇴하고 파리에서 패션 잡지 인턴으로 일한 정도에 불과하다.경력은 일천하나 패션이나 미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감각은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수단이 되었다. 한국에서 제작한 넷플릭스 드라마 '레이디 두아(2026)'의 주인공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엘리자베스 홈즈는 일반적 미국 중산층 이상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어려서부터 유독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매번 피를 뽑지 않아도 병을 진단할 수 있다는 '에디슨 키트'라는 아이디어는 굉장히 솔깃한 사업 아이템이었고 창업 붐이 일던 2000년대 초반 엘리자베스는 자신감으로 무장한 채 돈과 권력을 쥐고 있는 어른들을 설득했다. 스탠퍼드 교수로부터 시작된 인맥은 정재계로 무한증식 되었고 엘리자베스는 타임지 100인으로 선정되는 것을 비롯해 다수의 TV쇼와 잡지에 존재를 드러내며 유명인사가 되었다.실화 배경의 '애나 만들기'와 '드롭아웃'에서 20대에 엄청난 사기 행각을 벌인 주인공도 놀랍지만 주변 인물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무관심 혹은 지나친 기대를 갖고 있는 부모들, 젊은 여성에게 휘둘리는 점잖고 명망 있는 남성들, 부와 명성 때문에 곁에 있다가 배신하는 친구들 등등......애나는 12년 형을 선고 받았지만 3년 복역 후 현재 가석방되었으며, 엘리자베스는 2017년 기소 이후 결혼과 출산을 이유로 재판을 연기하다 2022년 11년 3개월 형을 선고받고 현재 복역 중이다. 엄청난 사기극을 벌인 장본인인데 이들의 이후 행적은 뭔가 씁쓸하다. 유명해지기만 하면 살길이 생기는 시대를 반영하는 아이콘 같기도 하다. 이현경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