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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마에스트로를 추억하다

김광현 777khkim@hanmail.net 2015-01-22  10:3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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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마에스트로를 추억하다  
▲ 1990년대는 쓰리 테너의 시대였다. 이들은 야외음악회와 클래식의 대중화를 동시에 성공시킨 주역이다. 왼쪽부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루치아노 파바로티

몇 주 전부터 가요계, 아니 문화 전반에서 필자도 즐겨 보는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진행한 프로젝트 ‘토토가’ 열풍이 한창이다. ‘토토가’란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를 줄인 것으로 1980-1990년대 최고의 주말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와 몇 년 전 열풍을 끌었던 ‘나는 가수다’를 합친 합성어이다.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당대를 주름잡았던 가수들이 대거 출연했으며, 추억의 무대에서 추억의 의상을 입고 추억의 노래를 불러 많은 이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특히 필자가 놀란 것은 그 시절의 노래들이었다. 그 당시에 아무 생각 없이 듣던 노래들이 짧게 10년에서 길게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세련미나 구조, 편곡 면에서 현재의 노래들에 전혀 뒤질 것이 없었다. 오히려 한류 열풍을 주도하고 있는 아이돌 음악 중심으로 획일화한 지금보다 최소한 장르 면에서 더욱 풍성했던 시대 아니었던가.

비슷한 이야기로 케이블 드라마 ‘응답하라’시리즈가 있었다. 1994년과 1997년 두 시즌이 나왔는데, 스마트폰이 생기리라고 꿈도 못 꾸던 삐삐와 PC통신 시절의 이야기를 생동감있게 다뤘던 드라마다. 30대부터 50대에 이르는 많은 사람들이 ‘토토가’와 ‘응답하라’를 시청하면서 그 시절에 저런 낭만과 여유가 있었는데 하면서 공감할 수 있었다. 또한 10대와 20대는 잠시나마 20여 년 전의 문화를 함께 향유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필자는 ‘토토가’를 시청하면서 1990년대의 클래식 음악계는 어땠는지 문득 뒤돌아보게 되었다. 일단 국내 시장은 88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클래식 문화의 융성기라고 할 수 있다. 해외 오케스트라 초청 횟수도 1997년 IMF 전까지 연당 수십 회에 달했다고 하니 국내 클래식 시장의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많은 음악가들이 클래식의 대중화에 눈을 돌려서 새로운 기획연주를 시도하기 시작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해외시장으로 눈을 돌려서 마에스트로들의 동향을 살펴보자. 유럽과 미국을 양분했던 카라얀과 번스타인의 사망 이후 새로운 마에스트로들이 그 왕위를 물려받기 시작했다. 일단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카라얀의 후임으로 베를린 필을 맡아 세계 지휘계의 황제로 거듭났다. 로린 마젤이나 다니엘 바렌보임 등이 거론됐지만 베를린 필하모니 단원들의 선택은 달랐다.

베를린 필은 이탈리아 지휘자인 아바도를 지휘자로 맞이하여 독일 레퍼토리를 주로 많이 연주했던 카라얀 시절과 또 다른 획기적이고 파격적인 음악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록그룹 스콜피언스와 협연은 그 정점에 있었다. 또한 아바도는 재임기간 동안 50여명의 젊은 단원들을 새로 영입했다. 권위적이고 독재적인 카라얀과 달리 민주적으로 오케스트라를 운영하여 단원들의 지지를 얻었다.

아바도와 함께 물망에 올랐던 다니엘 바렌보임은 베를린 필이 아닌 베를린 국립 가극장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어 그 아쉬움을 달랬다. 그리고 당시 10여년 뒤 자신이 아바도의 후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영국의 신성 사이먼 래틀은 버밍엄 심포니와 함께한 말러 전곡 녹음으로 세계 음악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다.

세계 오페라 극장은 두 대가들이 양분하고 있었다. 바로 밀라노 라 스칼라의 리카르도 무티와 뉴욕 메트로폴리탄의 제임스 레바인이다. 리카르도 무티는 철저하게 오페라 원곡 악보에 충실한 연주로 많은 사람들의 호불호를 샀다. 성악가들이 오페라 아리아를 부를 때 보통 악보에 없는 고음을 내는 경우가 많은데 무티는 이를 철저하게 배격했기 때문이다.

제임스 레바인은 메트로폴리탄에서 승승장구를 이어갔다. 특히 당시 출시된 레바인의 수많은 오페라 녹음은 일단 어떤 오페라를 들어도 무조건 중간 이상은 간다. 오페라 음반을 구입하고자 하는데 뭐가 좋을까 고민하시는 분들은 일단 레바인의 음반을 먼저 들어 보시기를 권한다.

1990년대 중반까지 게오르그 솔티나 세르주 첼리비다케같은 노령의 마에스트로들도 활동했고, 심지어 귄터 반트는 이 시기에 80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또한 카를로스 클라이버도 뜸하게 연주활동을 하고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 외에도 소개하고 싶은 많은 마에스트로들이 있지만 오늘은 여기서 생략한다.

1990년대의 클래식계는 일명 ‘쓰리 테너’의 시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야외음악회와 클래식의 대중화를 동시에 성공시킨 주역이다. 쓰리 테너는 호세 카레라스의 백혈병을 계기로 의기투합했는데, 세 명 모두 라이벌 의식이 있었다. 플라시도 도밍고와 카레라스는 같은 스페인 출신이고, 그 이름만 들어도 그리운 이름인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도밍고는 세계 오페라 팬들을 양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세 사람은 공연기획자 티보 루다스의 탁월한 기획으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계기로 활동을 시작했다. 1994년 미국, 1998년 프랑스 월드컵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다. 공연실황 음반이나 영상물은 기록적 판매량을 보였으며, 이들을 벤치마킹한 공연들이 우후죽순으로 기획되기도 했다. 또 파바로티가 항상 마지막에 노래한 푸치니의 ‘공주는 잠 못 이루고’가 세계적으로 센세이셔널한 인기를 얻었다.

이들은 2001년 한국을 방문하여 잠실 주경기장에서 공연하기도 했는데, 아쉽게도 2002년 월드컵부터 이런저런 이유로 그들의 공연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지금 그들 중 한 사람인 파바로티는 우리의 추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의 교향악단이나 오페라 극장이 경영난에 못 견뎌 통합되거나 문을 닫는 요즈음에 비교할 때 1990년대는 세계 클래식시장이 음원이나 영상매체의 보급화와 더불어 클래식 대중화의 황금기에 있었다. 공연장에서가 아닌 집 안에서도 클래식을 누구나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그 장르의 특성 때문에 쉽게 잊혀질 가능성이 많은 대중가수들과 달리 클래식 연주자들은 전성기가 꽤 길다. 지휘자는 특히 더 길다. 나이가 들수록 해석적인 면이나 경험적인 면에서 더욱 발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20년 뒤 어떤 지휘자가 마에스트로 칭호를 받으며 전성기를 맞이할지, 클래식 음악계는 또 어떤 식으로 변모되어져 있을지 굉장히 궁금하다. 20년 뒤에도 ‘토토가’를 감상했을 때의 그 기분처럼 오늘을 추억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지휘자 김광현은 예원학교 피아노과와 서울예고 작곡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지휘를 전공하였다. 대학재학 중 세계적 지휘자 샤를르 뒤트와에게 한국대표 지휘자로 발탁되어 제9회 미야자키 페스티벌에서 규슈 심포니를 지휘하였고, 서울대60주년 기념 정기오페라 '돈 지오반니'를 재학생 최초로 지휘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음대 지휘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필하모니, 로이틀링겐 필하모니, 남서독일 콘스탄츠 관현악단, 루마니아 크라이오바 심포니, 경기필, 부천시향, 원주시향, 과천시향, 프라임필 등을 지휘하였다.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부지휘자를 역임하였으며, 현재 원주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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