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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모두 당대 최고의 마에스트로

김광현 777khkim@hanmail.net 2014-05-20  10: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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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와 아들 모두 당대 최고의 마에스트로  
▲ 카를로스 클라이버(좌)와 그의 아버지 에리히 클라이버(우)는 모두 위대한 지휘자로 이름을 남겼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꽤 많다. ‘대대로 물려받은 가업’이란 말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다. 또 굳이 대대로 내려오지 않더라도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직업을 가져서 성공한 케이스는 우리 주변에 흔하다. 연예계나 스포츠계는 말할 것도 없고. 음악도 예외는 아니다.

대표적 음악가족을 꼽으라면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 가족을 빼놓을 수 없다. 바흐의 가문 자체가 요한 세바스찬 바흐 이전에도 뛰어난 음악가문으로 유명했다. 바흐 자녀 중에서도 3명이 음악사에 이름을 남긴 뛰어난 음악가로 성장하였다. 그들은 바흐의 장남인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 차남인 칼 필립 엠마뉴엘 바흐(줄여서 C.P.E. 바흐)와 막내인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다. 이들은 살아있을 때 아버지 바흐보다 더욱 명성을 떨쳤다.

내가 오늘 언급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작곡이나 연주를 겸하지 않는 ‘전업 지휘자’가 등장한지 15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지금 아버지와 아들 모두 당대 최고의 지휘자로 평가받던 마에스트로들이 있다. 바로 클라이버 부자다. 아버지는 에리히 클라이버이고 아들은 카를로스 클라이버다.

에리히 클라이버는 1890년 빈에서 태어났다. 1923년부터 12년간 베를린 국립 오페라극장의 총감독으로 재직하면서 알반 베르크의 현대적 오페라 ‘보체크’와 ‘룰루’의 초연을 지휘하여 음악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는 나치를 피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해 콜론극장에서 14년간 지휘했다. 나치 독일을 제외한 전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돌며 최고의 지휘자로서 명성을 누렸다.

그리고 종전 후 동베를린의 국립오페라 극장 지휘자 직책을 수락했으나 냉전시대에 분단된 베를린에서 지휘봉을 잡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곧 사퇴했다. 그 뒤 특별한 직책 없이 유럽에서 계속 객원 지휘자 생활을 했다. 그는 생전 자신의 고향인 빈에서 직책을 얻기를 원했으나 기회는 오지 않았다. 65세 지휘자로서 전성기를 구가할 나이에 취리히의 호텔방에서 사망하였다.

특히 그는 모차르트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바그너 등 전통적 독일 오페라를 뛰어난 음악성으로 지휘했다. 녹음을 꽤 남긴 덕에 우리는 그의 음악적 유산을 확인할 기회가 많다. 그런데 그가 남긴 유산은 비단 음반뿐이 아니다. 그는 토스카니니 이후 가장 위대한 지휘자로 불리우는 인물을 탄생시켰다. 바로 전설의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다.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1930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1935년 아버지와 함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했다. 덕분에 자동적으로 오스트리아 국적은 소멸됐고 아르헨티나 국적을 취득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자연스럽게 음악과 가까워졌다. 아버지 에리히 클라이버는 그가 지휘자로 성장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전쟁 후 클라이버 일가가 다시 유럽에 돌아온 후 아버지의 바람대로 취리히에서 화학을 공부했다. 에리히 클라이버가 뮌헨의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극장에서 베버와 바그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지휘하여 대성공을 거두는 것을 옆에서 지켜본 이후 더 이상 음악에 대한 열정을 참을 수 없어 결국은 아버지의 억압을 이겨내고 자신의 꿈을 이뤘다. 그는 포츠담에서 아버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오페레타를 성공적으로 지휘했다. 아버지는 그의 지휘를 일부러 혹평했다는 소문도 있다.

그는 데뷔 초기 ‘카를 켈러’라는 예명으로 활동하였다. 아버지의 명성이 전 유럽에 자자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와 비교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뒤셀도르프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취리히와 슈투트가르트를 거쳐 드디어 아버지가 성공을 바라보며 꿈을 키웠던 바이에른극장에서 지휘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오케스트라와 성악진에게 지나칠 정도의 높은 연주력을 요구했고 때로 무척이나 고집스러웠으며, 어떤 곡을 연습하다가 이유 없이 갑자기 포기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한 극장에서 그리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그는 바이에른에서 5년 일한 이후 평생을 한 곳에서 지휘자로 재직하는 일 없이 전 세계를 돌며 객원지휘자로 활동했다.

그리고 그는 ‘가장 위대하지만 가장 까다로운 지휘자’로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갑자기 연주를 취소하거나 얼마간 연락을 끊고 숨어버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연습이 안 될 때 울면서 뛰쳐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최고였다.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베버와 바그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페라를 지휘하여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다. 베토벤과 브람스의 교향곡을 지휘했을 때도 오페라 지휘와 비견되는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그는 현대의 음악산업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기계적 매체를 피하고 몇 개의 음반만 세상에 내놓았다. 그가 내놓은 음반들은 모두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다.

베버의 마탄의 사수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베토벤의 교향곡 5번과 7번, 브람스 교향곡 4번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정식 녹음들 외에 그의 연주실황을 녹음한 라이브 음반들을 들어 보아도 그가 왜 그토록 생전에, 그리고 사후에도 극찬을 받는지 알 수 있다. 나는 감히 평하지 않을 테니 무조건 들어 보시길 권한다. 악보에 적혀 있는 것들은 물론이거니와 이전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판타지가 그의 손끝에서 펼쳐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손에 꼽을 수 있는 레퍼토리만 지휘했다. 이것은 그를 더욱 더 신비스러운 지휘자로 만들었다. 몇 개의 작품만 지휘했는데 그 연주들이 다 최고의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에리히 클라이버와 카를로스 클라이버. 아버지와 아들 모두 대체 불가능한 최고의 마에스트로. 이들이 같은 곡을 연주한 음반들을 비교해 보며 들어보는 것도 꽤 재미있다.

지휘자 김광현은 예원학교 피아노과와 서울예고 작곡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지휘를 전공하였다. 대학재학 중 세계적 지휘자 샤를르 뒤트와에게 한국대표 지휘자로 발탁되어 제9회 미야자키 페스티벌에서 규슈 심포니를 지휘하였고, 서울대60주년 기념 정기오페라 '돈 지오반니'를 재학생 최초로 지휘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음대 지휘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필하모니, 로이틀링겐 필하모니, 남서독일 콘스탄츠 관현악단, 루마니아 크라이오바 심포니, 경기필, 부천시향, 원주시향, 과천시향, 프라임필 등을 지휘하였다. 현재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부지휘자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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