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Is ?] 정태호 청와대 일자리수석비서관

이한재 기자
2018-07-20 0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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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정태호 청와대 일자리수석.


    ◆ 생애

    정태호는 문재인 정부 2기 청와대 일자리수석이다. 문재인정부가 가장 강조하는 일자리정책을 책임지고 있다.

    1963년 3월20일 경남 사천에서 태어났다.

    서울 인창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시절 학생운동을 했고 1980년대 두 차례 투옥돼 모두 3년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보좌관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민주당 정책위원회 기획예산전문위원으로 일하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에 기여했고 노무현정부 청와대에서 정무기획비서관, 정책조정비서관, 기획조정비서관, 대변인을 역임했다.

    두 차례 대선에서 문 대통령의 선거를 도왔고 문재인정부 출범 뒤 청와대 정책기획비서관으로 일했다.

    2018년 6월 문재인 정부 2기 청와대 일자리수석에 임명됐다.

    ◆ 활동의 공과

    △양대 노총 위원장과 만남
    정태호는 2018년 7월3일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 중구 옛 서울역사에서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과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을 비공개로 만난 자리에 배석했다.

    문 대통령은 2018년 5월 말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변경하는 최저임금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 이후 사회적 대화를 거부하는 노동계의 이야기를 듣고 설득하기 위해 비공개로 이들을 만났다.

    정태호는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 문성현 노사정위원장과 함께 이날 만남에 배석했는데 일자리수석에 오른 뒤 양대 노총 위원장을 만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일자리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노사정 대타협을 전제로 하는 만큼 사회적 대화는 일자리수석을 맡은 정태호에게도 중요한 과제인 셈이다. 

    정태호는 사회적 대화의 복원을 넘어 사회적 대화가 실질적 일자리 성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집중하고 있다.   

    △청와대 일자리수석 임명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6월26일 정태호를 2기 청와대 일자리수석으로 임명했다.

    문 대통령은 2기 청와대에서 일자리수석과 함께 경제수석, 시민사회수석 등 3명의 수석을 교체했다.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은 2018년 6월26일 2기 청와대 인사 개편을 발표하며 일자리수석과 경제수석의 교체 의미를 별도로 설명했다.

    임 실장은 “지난 1년은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라는 문재인 정부의 정책적 방향성을 정립하는 기간이었다”며 “청와대는 문재인 정부 출범 2기에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을 더욱 속도감 있게 실행해 성과를 도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태호 신임 일자리수석은 정당과 청와대에서 정책분야를 두루 경험해 능력이 검증된 정책 전문가”라며 “소득주도성장의 핵심 의제인 일자리 창출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재인 정부는 일자리 문제 해결을 제1의 국정과제로 내세웠으나 출범 1년이 지난 2018년 7월까지도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문재인 정부 2기 청와대에서 정태호가 일자리수석으로 새롭게 임명되자 반장식 전 일자리수석이 존재감을 보이지 못해 이뤄진 문책성 인사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정태호는 2018년 7월1일 문재인 정부 2기 청와대에서 새롭게 임명된 윤종원 경제수석, 이용선 시민사회수석과 함께 청와대 춘추관에서 기자단과 만나 포부를 밝혔다.

    그는 “일자리수석을 맡게 돼 정말로 어깨가 무겁다”며 “‘속도’ ‘성과’ ‘체감’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일자리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 정태호 청와대 일자리수석이 2018년 7월1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취임 인사를 마친 뒤 연단을 내려가고 있다. <연합뉴스>

    △청와대 정책기획비서관 시절
    정태호는 정책기획비서관으로 청와대에 들어가 문재인 정부의 정책을 전반적으로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다. 정책기획비서관은 청와대 내에서 일자리, 경제, 사회 정책을 조율하는 요직으로 꼽힌다. 

    정태호는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한 '광주형 일자리' 정책을 만드는 데 기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광주형 일자리는 친환경차 생산 공장을 광주에서 조성 중인 빛그린산업단지에 유치하는 것이 뼈대다. 이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현대·기아자동차 절반 수준 연 4000만 원 대로 낮추는 대신 광주시는 노동자들에게 급여 보상 차원의 각종 혜택을 지원한다.

    정태호는 문재인 정부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정책기획위원회의 사무처 간사를 맡았고 정책기획위원회가 출범할 때는 기획단장도 겸임했다.

    △20대 총선 낙선
    2016년 4월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서울 관악을에 출마했으나 오신환 새누리당 후보에 밀려 고배를 마셨다.

    정태호는 2016년 3월10일 단수 공천을 받아 더불어민주당 서울 관악을 후보로 확정됐다.

    정태호는 당시 페이스북에 “감사하다. 관악주민의 힘으로 공천이 확정됐다. 우리 당에서는 새누리당을 이길 후보로 ’정태호‘를 선택했다”고 썼다.

    정태호는 2016년 3월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행자 관악구을 국민의당 후보께 단일화를 제안한다”며 공식적으로 야권후보 단일화를 추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이 적극적으로 지원 유세를 펼쳤으나 정태호는 분열된 야권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면서 2015년 4월 치러진 보궐선거에 이어 또 다시 오신환 후보에게 패배했다.

    정태호는 2016년 4월13일 치러진 선거에서 4만4593표(36.35%)를 얻어 2위를 차지했다. 오신환 후보는 4만5454표(37.05%)로 당선됐다. 표 차이는 1천 표도 나지 않았다.

    이행자 당시 국민의당 후보는 2만8801표(23.47%)를 받아 3위, 19대 총선에서 서울 관악을에서 당선된 이상규 민중연합당 후보는 2354표(1.91%)를 받아 4위에 올랐다.

    △험난한 국회의원 도전기
    정태호의 국회의원 첫 도전은 2008년 18대 총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8년 2월 이해찬 의원은 지역구 서울 관악을을 '정치적 제자'인 정태호에게 물려주고 18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서울 관악을은 1988년 13대 총선부터 2004년 17대 총선까지 이해찬 의원이 내리 5선을 한 지역으로 정태호가 야권 후보로 낙점되면 무난히 당선할 것이라고 예상됐다.

    하지만 '이해찬'이라는 유력 후보가 떠난 서울 관악을에는 출마를 원하는 야권 후보들이 몰렸고 정태호는 당내 경선에서 김희철 전 관악구청장에게 밀려 공천을 받지 못했다.

    김희철 전 관악구청장은 2008년 4월9일 열린 18대 총선에서 4만3235표(46.50%)를 얻어 국회에 입성했다.

    정태호는 2012년 19대 총선에서 관악을에 다시 한 번 도전장을 던졌지만 현역 프리미엄을 지닌 김희철 의원에게 또 다시 당내 경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19대 서울 관악을 총선에서는 '야권 단일화'라는 진통을 겪은 뒤 이상규 통합진보당 후보가 당선됐다.

    당시 야권 단일화 과정에서 당초 서울 관악을에 출마한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 측의 투표 조작 논란이 일었다. 김희철 의원은 단일화 무효를 주장하며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했고 이정희 대표는 후보직에서 사퇴해 결국 이상규 후보가 야권 단일후보로 최종 결정됐다.

    이상규 후보는 총선에서 4만3158표(38.25%)를 받아 금배지를 달았다. 오신환 당시 새누리당 후보가 33.28%를 얻어 2위, 무소속으로 출마한 김희철 의원이 28.47%를 얻어 3위를 차지했다.

    정태호는 2014년 11월 서울 관악을 지역위원장에 뽑히면서 20대 총선 공천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정태호는 관악을 지역위원장 자리를 놓고 김희철 전 의원과 맞붙어 이겼다.

    정태호는 2014년 12월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으로 이상규 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하면서 예상보다 빨리 국회의원 선거를 준비하게 됐다.

    정태호는 2015년 2월 서울 관악을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했고 3월 당내 경선에서 50.3%의 지지를 얻어 김희철 전 의원을 0.6%포인트 차이로 누르고 처음으로 총선 본선에 진출했다.

    서울 관악을이 야권 강세 지역인 만큼 이변이 없는 한 정태호의 당선이 예상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동영 전 의원의 무소속 출마라는 변수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물론 안철수 전 대표 등도 서울 관악을 선거에 총력전을 펼쳤으나 정태호는 야권표가 갈리면서 오신환 새누리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정태호는 2015년 4월29일 치러진 서울 관악을 재보궐 선거에서 2만6427표(34.20%)를 얻어 2위에 그쳤다.

    오신환 새누리당 후보가 3만3913표(43.89%)를 얻어 27년 만에 보수정당 후보로 서울 관악을에서 당선됐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정동영 후보는 1만5569표(20.15%)를 얻어 3위에 그쳤다.

    ▲ 정태호가 2015년 4월28일 서울 관악을 새정치민주연합 재보궐 선거 후보시절 선거를 앞두고 관악구 삼성시장 입구 앞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왼쪽부터) 안철수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전 대표, 정 후보,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우윤근 당시 새정지민주연합 원내대표. <연합뉴스>

    △노무현 정부 청와대 근무
    2003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한 뒤 청와대에 들어가 2007년까지 노무현 정부 청와대에서 정무기획비서관, 정책조정비서관, 기획조정비서관, 대변인, 정무비서관 등을 역임했다.

    2004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은 정태호를 정무기획비서관에 임명했다. 노 대통령은 2005년 6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연합정부를 제안했는데 정태호는 당시 외국사례 연구를 통해 노 대통령의 구상을 뒷받침했다. 

    2005년 7월에는 정책조정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노 대통령은 당시 정책실장 아래 정책조정비서관실을 새롭게 만들었는데 정태호를 정책조정비서관으로 임명했다.

    이에 따라 정태호는 그동안 정무기능과 정책기능을 모두 담당했던 것과 달리 정책기능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 노 대통령은 정태호가 맡고 있던 정무기능을 분리해 윤후덕 기획조정비서관에게 맡겼다.

    정태호는 이후 정책과 관련해 총리실과 청와대, 열린우리당을 연결하는 당··청의 연결고리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석달 뒤인 2005년 10월 윤후덕 기획조정비서관과 정태호의 자리를 맞바꿨다.

    김만수 당시 청와대 대변인은 “그동안 일을 하면서 윤 비서관은 정책조정비서관을, 정 비서관은 기획조정비서관을 맡는 게 적절하다고 판단해 전보 인사했다”고 말했다.

    2006년 4월 김만수 당시 대변인이 보궐선거 출마를 이유로 사임하자 참여정부의 5번째 대변인으로 임명됐다.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대변인을 맡았던 이들은 모두 언론인 출신이거나 홍보 일을 한 경험이 있었지만 정태호는 이런 경험이 전혀 없어 이례적 인사로 평가됐다. 참여정부 정책의 흐름을 잘 알고 있고 오랜 국회의원 보좌관 생활을 통해 갖춘 정무감각과 정치권내 폭넓은 인맥 등이 강점으로 꼽혔다.

    하지만 대변인 역할은 오래가지 못했다.

    노 대통령은 2006년 8월 열린우리당과 소통하기 위해 정무팀을 새롭게 만들고 정무팀장 겸 정무비서관에 정태호를 앉혔다. 정태호는 당시 “노 대통령은 국회 및 정당의 의견을 수렴하고 당·정 간 상호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무팀을 신설했다”고 말했다. 

    정태호는 정무비서관으로서 열린우리당과 국회를 오가며 정치적 현안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노력은 빛을 보지 못했고 정태호는 2007년 2월 열린우리당 당사를 찾아 송영길 당시 사무총장에게 노 대통령의 탈당계를 제출했다.

    정태호는 2004년 정무기획비서관으로 일하며 노 대통령을 대신해 열린우리당 당사를 찾아 입당원서와 매월 특별당비 200만 원을 내겠다는 약정서를 제출한 경험도 있다.

    정태호는 2007년 6월 대선을 준비하던 이해찬 전 총리의 캠프에 합류하기 위해 사의를 밝히고 노무현 정부 청와대를 떠났다.

    △청와대 입성 이전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82학번으로 1980년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두 차례에 걸쳐 모두 3년6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대학교 4학년 때인 1985년 미국 문화원 점거사건 당시 서울대 학생회 협상 대표로 ‘광주사태 토론회’ 개최를 놓고 미국 대사관과 협상을 했다.

    1985년 9월 ‘서울대학교 삼민투쟁위원회 사건’으로 구속돼 1988년 2월까지 복역했다.

    삼민투쟁위원회는 전국학생총연합 산하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의 약칭으로 미국 문화원 점거사건의 배후세력으로 지목됐다. 정태호는 삼민투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1988년 석방된 뒤 1989년에는 노동운동을 하다가 또다시 구속돼 10개월 동안 형을 살았다.

    1991년 이해찬 의원의 보좌관이 되기 전까지 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노동운동을 했다.

    1991년 평민당 관악을지구당에 입당하며 정치와 연을 맺었고 1999년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8년 동안 이해찬 의원 보좌관을 지냈다.

    1992년 14대 대선과 1997년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당시 후보의 관악을 지구당 선대위 사무장을 지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에게 발탁돼 대통령직 인수위 정책분과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999년 전세보증금을 빼 미국 유학을 떠났다. 

    2001년 미국 뉴욕주립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민주당 정책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일했다.

    민주당 정책위원회 기획예산 전문위원을 지내면서 노무현 대선 후보 선대본부에 자연스럽게 참여했고 당시 정책본부 전문위원으로 노무현 후보의 ‘150대 핵심공약’을 기획했다. 

    노 대통령이 당선되자 대통령 인수위 기획조정분과 전문위원을 거쳐 참여정부 청와대에 합류했다.

    ◆ 비전과 과제

    ▲ 정태호 청와대 일자리수석이 2006년 4월24일 노무현 정부 청와대 대변인에 임명된 뒤 청와대 춘추관에서 마지막 브리핑을 마친 김만수 전 대변인의 소개로 연단에 오르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정부 청와대 2기 일자리수석으로 일자리 정책의 실질적 성과를 내야 하는 막중한 과제를 안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뒤 1호 업무지시로 일자리위원회를 설치한 뒤 직접 위원장을 맡았고 첫 외부 일정으로 인천국제공항을 찾아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약속하는 등 일자리문제 해결을 제1순위 국정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2018년 7월 현재 시점에서 문재인 정부가 지난 1년 동안 내놓은 일자리 성적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2018년 1분기와 2분기 발표된 실업률, 청년실업률, 취업자수, 기업의 채용인원 등 고용 관련 지표들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전보다 악화하며 일자리 정책이 오히려 후퇴했다는 비판까지 받고 있다.

    정태호의 선임을 놓고 반장식 전 일자리수석이 일자리문제 해결에서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하자 이뤄진 문책성 인사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정태호는 문 대통령이 가장 중시하는 일자리 정책이 거센 비판을 받고 있는 만큼 일자리수석으로서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다.

    정태호는 일자리 정책을 추진하는 데 정책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정책 전문가’라는 장점을 십분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정태호는 민주당 정책위원회와 노무현 정부 청와대 비서관,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정책특보를 거쳐 문재인 정부 정책기획비서관을 역임하는 등 문재인 정부 안에서도 정책 전문가로 손꼽힌다.

    노사 문제는 정책적 능력만큼이나 상대와 협상을 통해 합의점을 도출하는 정치적 능력이 중요한 영역으로 평가된다.

    일자리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노사 합의가 중요한 만큼 노사 현안을 다루기 위한 사회적 대화기구 복원과 원활한 운영은 주요 과제 가운데 하나다. 

    정태호는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기획비서관 등으로 일한 경험을 살려 노사 관계를 개선하는 역할에 힘쓸 것으로 보인다. 

    2020년 열릴 21대 총선에서 서울 관악을에 출마할 가능성이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2018년 7월 정태호가 맡았던 서울 관악을 지역위원장 자리를 직무대행 체제로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새로운 지역위원장이 선임되지 않은 만큼 정태호는 21대 총선 공천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정태호는 2008년 18대 총선부터 서울 관악을 선거에 도전했으나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 평가

    정책전문가로 손꼽힌다. 

    대표적 정책 전문가로 평가되는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의원 밑에서 정치를 배웠고 오랜 기간 정책기획, 정책조정 등 정책 관련 분야에서 일했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시절부터 문재인 대통령과 오랜 기간 손발을 맞췄고 18대와 19대 대선에서 열심히 선거를 도와 친노이자 친문 인사로 분류된다.

    문 대통령 역시 2015년 서울 관악을 보궐선거와 2016년 20대 총선에서 정태호를 적극 지원했다.

    임종석 비서실장, 한병도 정무수석 등과 함께 청와대의 대표적 운동권 출신 인사로 분류된다.

    존경하는 인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꼽는다.

    정태호는 블로그에 올린 ‘20살 청년 정태호, 정치적 뿌리는 김대중 대통령에서 시작된다’ ‘28살 청년 정태호, 평민당에 입당해 김대중 대통령 당선에 기여하다’라는 제목의 글 등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과의 만남이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라고 밝힌다.

    ◆ 사건/사고

    ▲ 정태호 청와대 일자리수석이 2011년 10월30일 노무현 정부 청와대 대변인 출신으로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참여정부 인사들과 함께 이명박 정부를 규탄하는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벤처기업 사외이사 겸직논란
    2015년 4월 서울 관악을 재보궐선거 당시 새누리당은 정태호가 과거 이해찬 의원의 보좌관을 지내며 한 벤처기업의 비상근이사를 수년간 맡아 공무원법을 위반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정준길 당시 새누리당 수석부대변인은 “정 후보는 이해찬 의원 보좌관을 지낼 당시 한 벤처기업의 사외이사를 겸직해 공무원법을 위반했다”며 “2만8천여 주의 주식을 보유했다가 이를 되팔아 시세차익도 얻었다”고 주장했다.

    정태호가 사외이사를 맡았던 벤처기업은 2002년 검찰의 정보화촉진기금 운용비리 수사과정에서 정보통신부 고위공무원에게 뇌물을 준 사실이 드러나 대표이사가 구속되기도 했다.

    정태호는 이와 관련해 근거 없는 억측이라고 반박했다. 정태호 측은 “지금은 국회의장에게 겸직 신고를 해야 하지만 정태호 후보가 보좌관으로 일할 때는 사외이사 겸직이 불법이 아니었다”며 “게다가 급여를 받지 않은 비상근이사로 문제될 게 없다”고 해명했다.

    정태호의 벤처기업 사외이사 겸직 논란은 2004년 청와대 정무기획비서관으로 일할 때도 제기됐다.

    정태호는 당시 “1993년부터 해당업체 사장과 알고 지냈고 자금이 부족하다고 해 1994년 500만 원을 투자했다”며 “1996년 회사가 법인으로 바뀌면서 당시 투자했던 돈이 주식으로 전환됐고 이 과정에서 사외이사로 등재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김만수 당시 청와대 부대변인은 “정 비서관이 1999년부터 2001년까지 미국에 가 있어 비리문제와는 연관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며 “겸직 문제는 청와대 재직 이전 일이고 현직과 연관이 없어 별다른 조치를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정태호는 1998년부터 2002년까지 한 벤처기업의 비상근이사로 재직했다.

    정태호는 1999년까지 이해찬 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했는데 이해찬 의원이 1998년부터 2년 동안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에서 활동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구설수에 올랐다.

    △문재인 후보 위해 선대위 사퇴
    2012년 10월 정태호를 포함한 친노 인사로 분류되던 핵심참모 9명은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의 선대위에서 물러났다.

    정태호는 3철(이호철, 전해철, 양정철) 등 친노 핵심 참모그룹으로 분류되던 인사 8명과 함께 2012년 10월21일 성명을 내고 “선대위의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한 사람의 의원, 시민으로 돌아간다”며 “이름도 직책도 없이 뒤에서 오로지 정권교체와 문 후보의 승리만을 위해 뛰겠다”고 말했다.

    이들은 “우리 퇴진을 계기로 제발 더 이상 친노와 비노를 가르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며 “진보세력이 하나가 돼 ‘정권교체 용광로’ 안에서 혼연일체가 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문재인 당시 후보는 이들의 결정을 놓고 “새로운 정치와 정치 혁신을 이루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고 밑거름이 되겠다는 충정으로 받아들인다”며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당시 선대위 안에서 친노 세력의 독주 논란이 일고 있었는데 이들의 사퇴로 문 후보는 정치쇄신 행보의 폭이 넓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1년 청와대 앞 1인 시위
    정태호는 2011년 10월 천호선 전 청와대 홍보수석 등과 함께 청와대 앞에서 이명박 정부를 규탄하는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이명박 대통령 부끄럽지 않은가? 노무현 대통령 죽인 사람들이 짝퉁 FTA(자유무역협정)홍보에 고인을 팔다니!’라고 적힌 팻말 등을 들었다.

    이명박 정부 기획재정부는 노 전 대통령이 등장하는 한미FTA 광고를 만들었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시작한 한미FTA, 이명박 대통령이 마무리하겠습니다”라는 문구를 넣었다.

    2011년 10월28일 처음 전파를 탄 이 광고는 사회적 논란이 됐고 노무현재단은 “이명박 정부가 허위 사실로 고인이 된 전직 대통령을 모욕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정태호를 비롯한 천호선 전 수석, 김종민 전 대변인 등 참여정부 청와대 인사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육성과 모습이 광고에 이용된 것에 강력히 반발하며 1인 시위를 연달아 진행했다.

    ◆ 경력

    ▲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인수위원회 정책분과위원회 단체 사진. 가운데 동그라미 속 인물이 정태호. <정태호 블로그>

    1991년~1999년 이해찬 의원 보좌관을 지냈다.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의 인수위원회에서도 활동했다.

    1999년 미국 콜롬비아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객원연구원을 지냈고 2001년 귀국 뒤 민주당 정책위원회 연구위원으로 일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인수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일했다. 청와대 정무기획비서관, 정책조정비서관, 기획조정비서관, 대변인, 정무비서관 등을 역임했다.

    2007년 청와대에서 나와 17대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해찬 당시 후보 캠프에서 일했다.

    2009년 노무현 재단 기획위원, 2011년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후보 정책특보, 2011년 민주통합당 정책위원회 부의장 등을 역임했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 당선 뒤 청와대 정책기획비서관을 지냈다.

    2018년 6월 일자리수석비서관에 임명됐다.

    ◆ 학력

    1982년 서울 인창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89년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 미국 뉴욕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 상훈

    ◆ 가족관계

    정태호의 아내는 미국 IBM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기타

    2018년 3월29일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가 관보에 공개한 공직자 재산신고 현황에 따르면 정태호는 12억2천만 원을 보유하고 있다.

    정태호가 살고 있는 서울 관악구의 아파트 3억1200만 원, 아내가 살고 있는 미국 뉴욕의 단독주택 2억5천만 원, 아버지가 살고 있는 인천 서구의 아파트 1억7천만 원 등 모두 7억5575만 원 규모의 부동산이 신고됐다.   

    자동차는 2006년식 소나타 1500만 원, 2013년식 카니발 1800만 원 등 2대를 신고했다. 예금은 정태호와 아내, 아버지와 어머니, 장남이 합쳐 8억8천만 원을 보유하고 있다. 

    ◆ 어록

    ▲ 1980년대 대학시절 정태호. <정태호 블로그>

    “일자리는 문재인 정부의 첫 번째 공약이고, 국가를 위해서도 국민을 위해서도 우리 정부가 항상 역점을 두고 해결해야 할 과제다. 이런 즈음에 수석이 돼서 정말로 어깨가 무겁다. 요즘 사람들을 만나면 걱정부터 해 준다. ‘일자리는 쉽게 늘어나는 게 아닌데, 정말 잘 하기를 기대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라 걱정이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많이 좀 도와주면 고맙겠다.” (2018/07/01, 청와대 기자단 상견례 자리에서) 

    “새해에는 친구들과 자주 연락하며 지내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했다. 모두 2018년이 인생 최고의 한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우리 국민들의 삶이 좋아지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최선을 다하겠다.” (2017/12/31, 트위터에 올린 새해인사에서)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기 바란다. 새해에는 탄핵 빨리 끝내고 국가 대청소 한번 화끈하게 했으면 좋겠다. 주말도 되찾고 싶다. 광화문 촛불 집회 마치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인사드린다. (2016/12/31, 트위터에 올린 새해인사에서)

    “박근혜는 범죄자다. 이제 우리의 대통령이 아니다. 박근혜는 사퇴하라. 서울광장, 광화문, 청계광장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느낀다.” (2016/11/11,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보내주신 성원에 보답하지 못해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많이 부족했다. 국민과 관악주민 여러분께 좋은 정치인이 되고자 했는데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비록 패배했지만 부족한 점을 채워나가며 주민 여러분께 약속드린 것, 반드시 지키겠다.” (2016/04/13, 20대 총선 패배 뒤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사실성, 객관성, 공정성이라는 언론보도의 기능을 넘어서는 언론 이하의 기사가 난무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해 청와대는 두 신문의 취재를 거부하기로 했다. 취재거부는 전화취재 응대와 직접 만나는 것을 거부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2006/07/28, 청와대 대변인 시절 노무현 대통령을 계륵에 비유한 ‘조선일보’, 노무현 정부를 ‘약탈정부’로 규정한 ‘동아일보’를 대상으로 취재거부를 하겠다고 밝히며)

    “노 대통령이 퇴임 뒤 살 집이 없기 때문에 집을 고향에 정하기로 했다. 귀향한다는 큰 방향이 정해져 준비를 하고 있다.” (2006/06/12, 청와대 대변인 시절 노무현 대통령이 경남 김해 진영읍 봉하마을 일대에 택지를 고르고 있다고 전하며)

    “노 대통령은 박근혜 대표의 피습사건을 보고 받은 뒤 민주주의 사회에서 테러나 폭력은 어떤 명분으로도 용납될 수 없다며 이번 사건을 놓고 검·경 합동수사를 통해 철저하고 신속하게, 한 점 의혹이 없도록 진상을 규명할 것을 지시했다. 박 대표가 하루 빨리 쾌유하기를 기원하는 깊은 위로의 말도 전했다.” (2006/05/21, 청와대 대변인 시절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의 피습사건을 보고 받은 노무현 대통령의 반응을 전하며)

    “인사를 하면서 노 대통령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그 자리가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지다. 노 대통령은 참여정부 출범 4년차를 맞아 그동안 추진해온 주요 정책들이 차질 없이 진행되고 마무리되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라고 판단했다.”  (2006/05/03, 청와대 대변인 시절 문재인 당시 민정수석의 퇴임 등 청와대 인선을 발표하며)
  • ◆ 활동의 공과

    △양대 노총 위원장과 만남
    정태호는 2018년 7월3일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 중구 옛 서울역사에서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과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을 비공개로 만난 자리에 배석했다.

    문 대통령은 2018년 5월 말 최저임금 산입범위를 변경하는 최저임금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 이후 사회적 대화를 거부하는 노동계의 이야기를 듣고 설득하기 위해 비공개로 이들을 만났다.

    정태호는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 문성현 노사정위원장과 함께 이날 만남에 배석했는데 일자리수석에 오른 뒤 양대 노총 위원장을 만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일자리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노사정 대타협을 전제로 하는 만큼 사회적 대화는 일자리수석을 맡은 정태호에게도 중요한 과제인 셈이다. 

    정태호는 사회적 대화의 복원을 넘어 사회적 대화가 실질적 일자리 성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집중하고 있다.   

    △청와대 일자리수석 임명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6월26일 정태호를 2기 청와대 일자리수석으로 임명했다.

    문 대통령은 2기 청와대에서 일자리수석과 함께 경제수석, 시민사회수석 등 3명의 수석을 교체했다.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은 2018년 6월26일 2기 청와대 인사 개편을 발표하며 일자리수석과 경제수석의 교체 의미를 별도로 설명했다.

    임 실장은 “지난 1년은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라는 문재인 정부의 정책적 방향성을 정립하는 기간이었다”며 “청와대는 문재인 정부 출범 2기에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을 더욱 속도감 있게 실행해 성과를 도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태호 신임 일자리수석은 정당과 청와대에서 정책분야를 두루 경험해 능력이 검증된 정책 전문가”라며 “소득주도성장의 핵심 의제인 일자리 창출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재인 정부는 일자리 문제 해결을 제1의 국정과제로 내세웠으나 출범 1년이 지난 2018년 7월까지도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문재인 정부 2기 청와대에서 정태호가 일자리수석으로 새롭게 임명되자 반장식 전 일자리수석이 존재감을 보이지 못해 이뤄진 문책성 인사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정태호는 2018년 7월1일 문재인 정부 2기 청와대에서 새롭게 임명된 윤종원 경제수석, 이용선 시민사회수석과 함께 청와대 춘추관에서 기자단과 만나 포부를 밝혔다.

    그는 “일자리수석을 맡게 돼 정말로 어깨가 무겁다”며 “‘속도’ ‘성과’ ‘체감’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일자리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 정태호 청와대 일자리수석이 2018년 7월1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취임 인사를 마친 뒤 연단을 내려가고 있다. <연합뉴스>

    △청와대 정책기획비서관 시절
    정태호는 정책기획비서관으로 청와대에 들어가 문재인 정부의 정책을 전반적으로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다. 정책기획비서관은 청와대 내에서 일자리, 경제, 사회 정책을 조율하는 요직으로 꼽힌다. 

    정태호는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한 '광주형 일자리' 정책을 만드는 데 기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광주형 일자리는 친환경차 생산 공장을 광주에서 조성 중인 빛그린산업단지에 유치하는 것이 뼈대다. 이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현대·기아자동차 절반 수준 연 4000만 원 대로 낮추는 대신 광주시는 노동자들에게 급여 보상 차원의 각종 혜택을 지원한다.

    정태호는 문재인 정부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정책기획위원회의 사무처 간사를 맡았고 정책기획위원회가 출범할 때는 기획단장도 겸임했다.

    △20대 총선 낙선
    2016년 4월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서울 관악을에 출마했으나 오신환 새누리당 후보에 밀려 고배를 마셨다.

    정태호는 2016년 3월10일 단수 공천을 받아 더불어민주당 서울 관악을 후보로 확정됐다.

    정태호는 당시 페이스북에 “감사하다. 관악주민의 힘으로 공천이 확정됐다. 우리 당에서는 새누리당을 이길 후보로 ’정태호‘를 선택했다”고 썼다.

    정태호는 2016년 3월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행자 관악구을 국민의당 후보께 단일화를 제안한다”며 공식적으로 야권후보 단일화를 추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이 적극적으로 지원 유세를 펼쳤으나 정태호는 분열된 야권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면서 2015년 4월 치러진 보궐선거에 이어 또 다시 오신환 후보에게 패배했다.

    정태호는 2016년 4월13일 치러진 선거에서 4만4593표(36.35%)를 얻어 2위를 차지했다. 오신환 후보는 4만5454표(37.05%)로 당선됐다. 표 차이는 1천 표도 나지 않았다.

    이행자 당시 국민의당 후보는 2만8801표(23.47%)를 받아 3위, 19대 총선에서 서울 관악을에서 당선된 이상규 민중연합당 후보는 2354표(1.91%)를 받아 4위에 올랐다.

    △험난한 국회의원 도전기
    정태호의 국회의원 첫 도전은 2008년 18대 총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8년 2월 이해찬 의원은 지역구 서울 관악을을 '정치적 제자'인 정태호에게 물려주고 18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서울 관악을은 1988년 13대 총선부터 2004년 17대 총선까지 이해찬 의원이 내리 5선을 한 지역으로 정태호가 야권 후보로 낙점되면 무난히 당선할 것이라고 예상됐다.

    하지만 '이해찬'이라는 유력 후보가 떠난 서울 관악을에는 출마를 원하는 야권 후보들이 몰렸고 정태호는 당내 경선에서 김희철 전 관악구청장에게 밀려 공천을 받지 못했다.

    김희철 전 관악구청장은 2008년 4월9일 열린 18대 총선에서 4만3235표(46.50%)를 얻어 국회에 입성했다.

    정태호는 2012년 19대 총선에서 관악을에 다시 한 번 도전장을 던졌지만 현역 프리미엄을 지닌 김희철 의원에게 또 다시 당내 경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19대 서울 관악을 총선에서는 '야권 단일화'라는 진통을 겪은 뒤 이상규 통합진보당 후보가 당선됐다.

    당시 야권 단일화 과정에서 당초 서울 관악을에 출마한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 측의 투표 조작 논란이 일었다. 김희철 의원은 단일화 무효를 주장하며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했고 이정희 대표는 후보직에서 사퇴해 결국 이상규 후보가 야권 단일후보로 최종 결정됐다.

    이상규 후보는 총선에서 4만3158표(38.25%)를 받아 금배지를 달았다. 오신환 당시 새누리당 후보가 33.28%를 얻어 2위, 무소속으로 출마한 김희철 의원이 28.47%를 얻어 3위를 차지했다.

    정태호는 2014년 11월 서울 관악을 지역위원장에 뽑히면서 20대 총선 공천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정태호는 관악을 지역위원장 자리를 놓고 김희철 전 의원과 맞붙어 이겼다.

    정태호는 2014년 12월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으로 이상규 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하면서 예상보다 빨리 국회의원 선거를 준비하게 됐다.

    정태호는 2015년 2월 서울 관악을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했고 3월 당내 경선에서 50.3%의 지지를 얻어 김희철 전 의원을 0.6%포인트 차이로 누르고 처음으로 총선 본선에 진출했다.

    서울 관악을이 야권 강세 지역인 만큼 이변이 없는 한 정태호의 당선이 예상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동영 전 의원의 무소속 출마라는 변수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물론 안철수 전 대표 등도 서울 관악을 선거에 총력전을 펼쳤으나 정태호는 야권표가 갈리면서 오신환 새누리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정태호는 2015년 4월29일 치러진 서울 관악을 재보궐 선거에서 2만6427표(34.20%)를 얻어 2위에 그쳤다.

    오신환 새누리당 후보가 3만3913표(43.89%)를 얻어 27년 만에 보수정당 후보로 서울 관악을에서 당선됐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정동영 후보는 1만5569표(20.15%)를 얻어 3위에 그쳤다.

    ▲ 정태호가 2015년 4월28일 서울 관악을 새정치민주연합 재보궐 선거 후보시절 선거를 앞두고 관악구 삼성시장 입구 앞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왼쪽부터) 안철수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전 대표, 정 후보,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우윤근 당시 새정지민주연합 원내대표. <연합뉴스>

    △노무현 정부 청와대 근무
    2003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한 뒤 청와대에 들어가 2007년까지 노무현 정부 청와대에서 정무기획비서관, 정책조정비서관, 기획조정비서관, 대변인, 정무비서관 등을 역임했다.

    2004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은 정태호를 정무기획비서관에 임명했다. 노 대통령은 2005년 6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연합정부를 제안했는데 정태호는 당시 외국사례 연구를 통해 노 대통령의 구상을 뒷받침했다. 

    2005년 7월에는 정책조정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노 대통령은 당시 정책실장 아래 정책조정비서관실을 새롭게 만들었는데 정태호를 정책조정비서관으로 임명했다.

    이에 따라 정태호는 그동안 정무기능과 정책기능을 모두 담당했던 것과 달리 정책기능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 노 대통령은 정태호가 맡고 있던 정무기능을 분리해 윤후덕 기획조정비서관에게 맡겼다.

    정태호는 이후 정책과 관련해 총리실과 청와대, 열린우리당을 연결하는 당··청의 연결고리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석달 뒤인 2005년 10월 윤후덕 기획조정비서관과 정태호의 자리를 맞바꿨다.

    김만수 당시 청와대 대변인은 “그동안 일을 하면서 윤 비서관은 정책조정비서관을, 정 비서관은 기획조정비서관을 맡는 게 적절하다고 판단해 전보 인사했다”고 말했다.

    2006년 4월 김만수 당시 대변인이 보궐선거 출마를 이유로 사임하자 참여정부의 5번째 대변인으로 임명됐다.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대변인을 맡았던 이들은 모두 언론인 출신이거나 홍보 일을 한 경험이 있었지만 정태호는 이런 경험이 전혀 없어 이례적 인사로 평가됐다. 참여정부 정책의 흐름을 잘 알고 있고 오랜 국회의원 보좌관 생활을 통해 갖춘 정무감각과 정치권내 폭넓은 인맥 등이 강점으로 꼽혔다.

    하지만 대변인 역할은 오래가지 못했다.

    노 대통령은 2006년 8월 열린우리당과 소통하기 위해 정무팀을 새롭게 만들고 정무팀장 겸 정무비서관에 정태호를 앉혔다. 정태호는 당시 “노 대통령은 국회 및 정당의 의견을 수렴하고 당·정 간 상호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무팀을 신설했다”고 말했다. 

    정태호는 정무비서관으로서 열린우리당과 국회를 오가며 정치적 현안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노력은 빛을 보지 못했고 정태호는 2007년 2월 열린우리당 당사를 찾아 송영길 당시 사무총장에게 노 대통령의 탈당계를 제출했다.

    정태호는 2004년 정무기획비서관으로 일하며 노 대통령을 대신해 열린우리당 당사를 찾아 입당원서와 매월 특별당비 200만 원을 내겠다는 약정서를 제출한 경험도 있다.

    정태호는 2007년 6월 대선을 준비하던 이해찬 전 총리의 캠프에 합류하기 위해 사의를 밝히고 노무현 정부 청와대를 떠났다.

    △청와대 입성 이전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82학번으로 1980년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두 차례에 걸쳐 모두 3년6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대학교 4학년 때인 1985년 미국 문화원 점거사건 당시 서울대 학생회 협상 대표로 ‘광주사태 토론회’ 개최를 놓고 미국 대사관과 협상을 했다.

    1985년 9월 ‘서울대학교 삼민투쟁위원회 사건’으로 구속돼 1988년 2월까지 복역했다.

    삼민투쟁위원회는 전국학생총연합 산하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의 약칭으로 미국 문화원 점거사건의 배후세력으로 지목됐다. 정태호는 삼민투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1988년 석방된 뒤 1989년에는 노동운동을 하다가 또다시 구속돼 10개월 동안 형을 살았다.

    1991년 이해찬 의원의 보좌관이 되기 전까지 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노동운동을 했다.

    1991년 평민당 관악을지구당에 입당하며 정치와 연을 맺었고 1999년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8년 동안 이해찬 의원 보좌관을 지냈다.

    1992년 14대 대선과 1997년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당시 후보의 관악을 지구당 선대위 사무장을 지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에게 발탁돼 대통령직 인수위 정책분과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999년 전세보증금을 빼 미국 유학을 떠났다. 

    2001년 미국 뉴욕주립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민주당 정책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일했다.

    민주당 정책위원회 기획예산 전문위원을 지내면서 노무현 대선 후보 선대본부에 자연스럽게 참여했고 당시 정책본부 전문위원으로 노무현 후보의 ‘150대 핵심공약’을 기획했다. 

    노 대통령이 당선되자 대통령 인수위 기획조정분과 전문위원을 거쳐 참여정부 청와대에 합류했다.

  • ◆ 비전과 과제

    ▲ 정태호 청와대 일자리수석이 2006년 4월24일 노무현 정부 청와대 대변인에 임명된 뒤 청와대 춘추관에서 마지막 브리핑을 마친 김만수 전 대변인의 소개로 연단에 오르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정부 청와대 2기 일자리수석으로 일자리 정책의 실질적 성과를 내야 하는 막중한 과제를 안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뒤 1호 업무지시로 일자리위원회를 설치한 뒤 직접 위원장을 맡았고 첫 외부 일정으로 인천국제공항을 찾아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약속하는 등 일자리문제 해결을 제1순위 국정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2018년 7월 현재 시점에서 문재인 정부가 지난 1년 동안 내놓은 일자리 성적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2018년 1분기와 2분기 발표된 실업률, 청년실업률, 취업자수, 기업의 채용인원 등 고용 관련 지표들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전보다 악화하며 일자리 정책이 오히려 후퇴했다는 비판까지 받고 있다.

    정태호의 선임을 놓고 반장식 전 일자리수석이 일자리문제 해결에서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하자 이뤄진 문책성 인사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정태호는 문 대통령이 가장 중시하는 일자리 정책이 거센 비판을 받고 있는 만큼 일자리수석으로서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다.

    정태호는 일자리 정책을 추진하는 데 정책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정책 전문가’라는 장점을 십분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정태호는 민주당 정책위원회와 노무현 정부 청와대 비서관,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정책특보를 거쳐 문재인 정부 정책기획비서관을 역임하는 등 문재인 정부 안에서도 정책 전문가로 손꼽힌다.

    노사 문제는 정책적 능력만큼이나 상대와 협상을 통해 합의점을 도출하는 정치적 능력이 중요한 영역으로 평가된다.

    일자리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노사 합의가 중요한 만큼 노사 현안을 다루기 위한 사회적 대화기구 복원과 원활한 운영은 주요 과제 가운데 하나다. 

    정태호는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기획비서관 등으로 일한 경험을 살려 노사 관계를 개선하는 역할에 힘쓸 것으로 보인다. 

    2020년 열릴 21대 총선에서 서울 관악을에 출마할 가능성이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2018년 7월 정태호가 맡았던 서울 관악을 지역위원장 자리를 직무대행 체제로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새로운 지역위원장이 선임되지 않은 만큼 정태호는 21대 총선 공천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정태호는 2008년 18대 총선부터 서울 관악을 선거에 도전했으나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 ◆ 평가

    정책전문가로 손꼽힌다. 

    대표적 정책 전문가로 평가되는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의원 밑에서 정치를 배웠고 오랜 기간 정책기획, 정책조정 등 정책 관련 분야에서 일했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시절부터 문재인 대통령과 오랜 기간 손발을 맞췄고 18대와 19대 대선에서 열심히 선거를 도와 친노이자 친문 인사로 분류된다.

    문 대통령 역시 2015년 서울 관악을 보궐선거와 2016년 20대 총선에서 정태호를 적극 지원했다.

    임종석 비서실장, 한병도 정무수석 등과 함께 청와대의 대표적 운동권 출신 인사로 분류된다.

    존경하는 인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꼽는다.

    정태호는 블로그에 올린 ‘20살 청년 정태호, 정치적 뿌리는 김대중 대통령에서 시작된다’ ‘28살 청년 정태호, 평민당에 입당해 김대중 대통령 당선에 기여하다’라는 제목의 글 등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과의 만남이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라고 밝힌다.

    ◆ 사건/사고

    ▲ 정태호 청와대 일자리수석이 2011년 10월30일 노무현 정부 청와대 대변인 출신으로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참여정부 인사들과 함께 이명박 정부를 규탄하는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벤처기업 사외이사 겸직논란
    2015년 4월 서울 관악을 재보궐선거 당시 새누리당은 정태호가 과거 이해찬 의원의 보좌관을 지내며 한 벤처기업의 비상근이사를 수년간 맡아 공무원법을 위반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정준길 당시 새누리당 수석부대변인은 “정 후보는 이해찬 의원 보좌관을 지낼 당시 한 벤처기업의 사외이사를 겸직해 공무원법을 위반했다”며 “2만8천여 주의 주식을 보유했다가 이를 되팔아 시세차익도 얻었다”고 주장했다.

    정태호가 사외이사를 맡았던 벤처기업은 2002년 검찰의 정보화촉진기금 운용비리 수사과정에서 정보통신부 고위공무원에게 뇌물을 준 사실이 드러나 대표이사가 구속되기도 했다.

    정태호는 이와 관련해 근거 없는 억측이라고 반박했다. 정태호 측은 “지금은 국회의장에게 겸직 신고를 해야 하지만 정태호 후보가 보좌관으로 일할 때는 사외이사 겸직이 불법이 아니었다”며 “게다가 급여를 받지 않은 비상근이사로 문제될 게 없다”고 해명했다.

    정태호의 벤처기업 사외이사 겸직 논란은 2004년 청와대 정무기획비서관으로 일할 때도 제기됐다.

    정태호는 당시 “1993년부터 해당업체 사장과 알고 지냈고 자금이 부족하다고 해 1994년 500만 원을 투자했다”며 “1996년 회사가 법인으로 바뀌면서 당시 투자했던 돈이 주식으로 전환됐고 이 과정에서 사외이사로 등재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김만수 당시 청와대 부대변인은 “정 비서관이 1999년부터 2001년까지 미국에 가 있어 비리문제와는 연관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며 “겸직 문제는 청와대 재직 이전 일이고 현직과 연관이 없어 별다른 조치를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정태호는 1998년부터 2002년까지 한 벤처기업의 비상근이사로 재직했다.

    정태호는 1999년까지 이해찬 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했는데 이해찬 의원이 1998년부터 2년 동안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에서 활동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구설수에 올랐다.

    △문재인 후보 위해 선대위 사퇴
    2012년 10월 정태호를 포함한 친노 인사로 분류되던 핵심참모 9명은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의 선대위에서 물러났다.

    정태호는 3철(이호철, 전해철, 양정철) 등 친노 핵심 참모그룹으로 분류되던 인사 8명과 함께 2012년 10월21일 성명을 내고 “선대위의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한 사람의 의원, 시민으로 돌아간다”며 “이름도 직책도 없이 뒤에서 오로지 정권교체와 문 후보의 승리만을 위해 뛰겠다”고 말했다.

    이들은 “우리 퇴진을 계기로 제발 더 이상 친노와 비노를 가르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며 “진보세력이 하나가 돼 ‘정권교체 용광로’ 안에서 혼연일체가 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문재인 당시 후보는 이들의 결정을 놓고 “새로운 정치와 정치 혁신을 이루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고 밑거름이 되겠다는 충정으로 받아들인다”며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당시 선대위 안에서 친노 세력의 독주 논란이 일고 있었는데 이들의 사퇴로 문 후보는 정치쇄신 행보의 폭이 넓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1년 청와대 앞 1인 시위
    정태호는 2011년 10월 천호선 전 청와대 홍보수석 등과 함께 청와대 앞에서 이명박 정부를 규탄하는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이명박 대통령 부끄럽지 않은가? 노무현 대통령 죽인 사람들이 짝퉁 FTA(자유무역협정)홍보에 고인을 팔다니!’라고 적힌 팻말 등을 들었다.

    이명박 정부 기획재정부는 노 전 대통령이 등장하는 한미FTA 광고를 만들었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시작한 한미FTA, 이명박 대통령이 마무리하겠습니다”라는 문구를 넣었다.

    2011년 10월28일 처음 전파를 탄 이 광고는 사회적 논란이 됐고 노무현재단은 “이명박 정부가 허위 사실로 고인이 된 전직 대통령을 모욕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정태호를 비롯한 천호선 전 수석, 김종민 전 대변인 등 참여정부 청와대 인사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육성과 모습이 광고에 이용된 것에 강력히 반발하며 1인 시위를 연달아 진행했다.

  • ◆ 경력

    ▲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인수위원회 정책분과위원회 단체 사진. 가운데 동그라미 속 인물이 정태호. <정태호 블로그>

    1991년~1999년 이해찬 의원 보좌관을 지냈다.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의 인수위원회에서도 활동했다.

    1999년 미국 콜롬비아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객원연구원을 지냈고 2001년 귀국 뒤 민주당 정책위원회 연구위원으로 일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인수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일했다. 청와대 정무기획비서관, 정책조정비서관, 기획조정비서관, 대변인, 정무비서관 등을 역임했다.

    2007년 청와대에서 나와 17대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해찬 당시 후보 캠프에서 일했다.

    2009년 노무현 재단 기획위원, 2011년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후보 정책특보, 2011년 민주통합당 정책위원회 부의장 등을 역임했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 당선 뒤 청와대 정책기획비서관을 지냈다.

    2018년 6월 일자리수석비서관에 임명됐다.

    ◆ 학력

    1982년 서울 인창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89년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 미국 뉴욕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정태호의 아내는 미국 IBM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상훈

    ◆ 기타

    2018년 3월29일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가 관보에 공개한 공직자 재산신고 현황에 따르면 정태호는 12억2천만 원을 보유하고 있다.

    정태호가 살고 있는 서울 관악구의 아파트 3억1200만 원, 아내가 살고 있는 미국 뉴욕의 단독주택 2억5천만 원, 아버지가 살고 있는 인천 서구의 아파트 1억7천만 원 등 모두 7억5575만 원 규모의 부동산이 신고됐다.   

    자동차는 2006년식 소나타 1500만 원, 2013년식 카니발 1800만 원 등 2대를 신고했다. 예금은 정태호와 아내, 아버지와 어머니, 장남이 합쳐 8억8천만 원을 보유하고 있다. 

  • ◆ 어록

    ▲ 1980년대 대학시절 정태호. <정태호 블로그>

    “일자리는 문재인 정부의 첫 번째 공약이고, 국가를 위해서도 국민을 위해서도 우리 정부가 항상 역점을 두고 해결해야 할 과제다. 이런 즈음에 수석이 돼서 정말로 어깨가 무겁다. 요즘 사람들을 만나면 걱정부터 해 준다. ‘일자리는 쉽게 늘어나는 게 아닌데, 정말 잘 하기를 기대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라 걱정이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많이 좀 도와주면 고맙겠다.” (2018/07/01, 청와대 기자단 상견례 자리에서) 

    “새해에는 친구들과 자주 연락하며 지내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했다. 모두 2018년이 인생 최고의 한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우리 국민들의 삶이 좋아지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최선을 다하겠다.” (2017/12/31, 트위터에 올린 새해인사에서)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기 바란다. 새해에는 탄핵 빨리 끝내고 국가 대청소 한번 화끈하게 했으면 좋겠다. 주말도 되찾고 싶다. 광화문 촛불 집회 마치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인사드린다. (2016/12/31, 트위터에 올린 새해인사에서)

    “박근혜는 범죄자다. 이제 우리의 대통령이 아니다. 박근혜는 사퇴하라. 서울광장, 광화문, 청계광장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느낀다.” (2016/11/11,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보내주신 성원에 보답하지 못해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많이 부족했다. 국민과 관악주민 여러분께 좋은 정치인이 되고자 했는데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비록 패배했지만 부족한 점을 채워나가며 주민 여러분께 약속드린 것, 반드시 지키겠다.” (2016/04/13, 20대 총선 패배 뒤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사실성, 객관성, 공정성이라는 언론보도의 기능을 넘어서는 언론 이하의 기사가 난무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해 청와대는 두 신문의 취재를 거부하기로 했다. 취재거부는 전화취재 응대와 직접 만나는 것을 거부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2006/07/28, 청와대 대변인 시절 노무현 대통령을 계륵에 비유한 ‘조선일보’, 노무현 정부를 ‘약탈정부’로 규정한 ‘동아일보’를 대상으로 취재거부를 하겠다고 밝히며)

    “노 대통령이 퇴임 뒤 살 집이 없기 때문에 집을 고향에 정하기로 했다. 귀향한다는 큰 방향이 정해져 준비를 하고 있다.” (2006/06/12, 청와대 대변인 시절 노무현 대통령이 경남 김해 진영읍 봉하마을 일대에 택지를 고르고 있다고 전하며)

    “노 대통령은 박근혜 대표의 피습사건을 보고 받은 뒤 민주주의 사회에서 테러나 폭력은 어떤 명분으로도 용납될 수 없다며 이번 사건을 놓고 검·경 합동수사를 통해 철저하고 신속하게, 한 점 의혹이 없도록 진상을 규명할 것을 지시했다. 박 대표가 하루 빨리 쾌유하기를 기원하는 깊은 위로의 말도 전했다.” (2006/05/21, 청와대 대변인 시절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의 피습사건을 보고 받은 노무현 대통령의 반응을 전하며)

    “인사를 하면서 노 대통령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그 자리가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지다. 노 대통령은 참여정부 출범 4년차를 맞아 그동안 추진해온 주요 정책들이 차질 없이 진행되고 마무리되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라고 판단했다.”  (2006/05/03, 청와대 대변인 시절 문재인 당시 민정수석의 퇴임 등 청와대 인선을 발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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