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Who Is ?]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


반기문은 한국인 최초로 유엔 사무총장을 역임했으며 유력한 대선후보로 꼽히고 있다.

1944년 6월 13일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당리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 영어에세이 경시대회에서 수상하면서 미국을 방문해 케네디 대통령을 잠시 만난 것을 계기로 외교관이 되기로 결심했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과 동시에 외무고시에 합격했다.

외교통상부 차관과 외교통상부 장관을 거쳐 유엔사무총장에 당선됐다. 5년 임기 뒤 연임에 성공했으며 임기를 마치고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으면서 대선후보로 화려하게 귀국했다.

국민대통합과 정치교체라는 기치를 내걸며 지지세력을 규합하고 있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한국인으로서 처음 유엔 사무총장이 됐다.

편안한 느낌을 주는 외모와 소탈한 성격을 지녀 대인관계가 원만하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일처리에는 빈틈이 없다고 알려졌다.

사무총장으로 재임하면서 성실하고 원칙에 입각해서 조화와 균형을 중시했다. UN 회원국들의 이익 충돌과 마찰을 조절해 기후변화협정을 이끌어냈다.

사무총장으로서 반기문의 가장 큰 공로는 파리협정 체결 1년도 안돼 2016년 11월 파리협정을 공식적으로 발효하게 한 것으로 평가된다. 파리협정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55%를 책임지는 최소 55개국이 비준해야 발효한다는 요건을 2016년 10월 충족했다. 반기문은 온실가스 배출 1, 2위 배출국인 중국과 미국을 포함해 90여 개국이 비준하도록 이끌어냈다.

강한 추진력을 지녔다고 평가받는다. 그와 함께 일해 본 적이 있는 외교관들은 그가 상대에게 정성을 다해 신뢰감을 주면서도 동시에 엄청난 집요함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추진해 결국 문제를 풀어내는 능력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반기문은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에서 대선에 패배한 측이 승복하지 않아 내전 상황으로 번졌을 때 문제에 개입해 승리한 측이 집권하도록 문제를 푸는 데 기여했다.

또 미얀마 군부를 끊임없이 압박해 올해 군부가 약속한 7단계의 민주화 과정 가운데 하나인 '국민총선'을 치르게 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반기문을 놓고 “강하고 일관된 해법을 밀어붙이면서도 인간적으로 다가가서 문제를 바람직하게 해결하는 좋은 선례를 만들었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평가"라고 말했다.

자중자애를 인생의 살아온 방법으로 꼽는다. ‘머리는 항상 구름 위에 두지만 발은 땅을 딛고 있어야 한다. 발까지 떨어져 버리면 넘어진다’를 신념으로 간직해왔다.

반기문이 임기 동안 성소수자 인권을 위해 노력한 점이 높게 평가됐다. 미국의 외교·안보 전문매체인 포린폴리쉬는 반기문은 모든 유엔 직원들의 동성 결혼을 인정한 첫 유엔 수장이고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철폐하도록 세계의 보수적 국가들에 촉구해왔다고 평가했다.

코소보 독립, 미얀마의 민주화, 코트디부아르의 정권 이양 등에서 성과를 낸 점도 그의 공로로 인정된다. 반기문은 또 유엔 인권최고대표로부터 조용한 외교가 생명을 구하고 결과적으로 자유와 정치범들의 석방을 낳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기문은 2004년 이라크에서 발생한 김선일씨 피살 사태로 인해 위기를 맞았다. 그는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 의원들의 비판을 받았다.

2006년에는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고 같은 해 동원호 선원들이 소말리아 해적에 의해 납치됐을때 책임론이 불거져 외교력을 놓고 비판을 받았다.

일부 서구 언론도 반기문을 비판했다. 이는 반기문이 취임당시 안고 있었던 과제가 이라크와 수단 내전 종식, 북한과 이란 핵 해결, 성범죄 등으로 실추된 평화유지군의 명예회복, 유엔 개혁, 지구 온난화 대책 마련 등이었으나 이 가운데 해결한 것은 이란 핵 협상 타결과 파리기후변화협정의 국제조약화 등 뿐이기 때문이다. 그 외의 문제에는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고 또 시리아 내전 중재에 성공하지 못한 점을 꼬집은 것이다.

그는 CNN으로부터도 2017년 초 비판적인 평가를 받았다.

CNN은 반기문의 뒤를 이은 안토니오 구테헤스 신임 유엔 사무총장 취임 소식을 전하며 구테헤스를 반기문과 비교해 ‘명료’하면서도 ‘여유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구테헤스는 “우리의 결점과 실패를 인식해야 한다”고 반 전 총장과 함께한 지난 10년간 유엔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2010년 7월 잉가 브리트 알레니우스 전 UN 감찰실장이 퇴임한 뒤 50쪽 짜리 장문의 의견서에서 반기문을 비난했다. 알레니우스 전 실장은 반기문을 놓고 “투명성이 없고 책임감이 부족하다. 강력한 리더십과 좋은 관리에 따른 내부감독을 지원하기보다 UN의 지위를 쇠퇴시키려고 분투하고 있다. 나는 조직개혁의 어떠한 신호도 보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인사제도 비서관으로 인사정책에 관여했던 최광웅 데이터정치연구소장이 참여정부의 인사 뒷얘기와 주요인물 20인에 대한 평가를 담은 저서 '노무현이 선택한 사람들'에서 반기문의 운명을 '운칠기삼(운이 7할이고 기가 3할이라는 뜻)'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반기문의 이력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흥미롭게도 흘린 땀 못지 않게 고비마다 절묘하게 행운이 뒤따랐다고 평가했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70년 2월 대학 졸업과 동시에 제3회 외무고시에 차석으로 합격해 그해 3월 외무부에 들어갔다.

1972년 주인도대사관 부영사, 1974년 주인도대사관 2등 서기관, 1976년 주인도 대사관 1등 서기관 등을 거쳤다.

1985년 총리 의전비서관으로 발탁됐다.

1987년 7월 주미대사관 총영사, 1990년 6월 외무부 미주국장, 1992년 2월 외무부장관 특별보좌관, 1992년 9월 주미공사를 역임했다.

1994년 제1차 북한 핵위기 때 주미국대사관 정무공사로 재직하면서 한국과 미국 사이의 대북정책을 조율하는 실무총책을 맡았으며 그해 10월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 체결과정에 기여했다.

1995년 2월 외무부 외교정책실장과 외무부 차관보를, 1996년 11월 외교안보수석를 맡았다.

1998년 외무부 대사가 됐다. 같은 해 주오스트리아 대사관 대사 겸 주비엔나 국제기구대표부 대사를 맡았다.

1999년 1월부터는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기구 준비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2000년 제2대 외교통상부 차관으로 발탁되었으나 2001년 한-러 정상회담 합의문에 탄도탄 요격미사일 제한 조약이 들어가는 실수로 외교부 차관에서 물러났다.

2001년 9월 한승수 당시 외교부 장관이 겸임했던 제 56차 유엔총회의장을 보조하는 비서실장으로 사실상 ‘좌천’됐다.

2002년 외교통상부 유엔본부 대사를 맡았다. 9.11사건이 발생해 그와 관련된 유엔 차원의 테러리즘 대응조치, 그리고 이견조율 업무를 수행하는 등 국제경험을 쌓았다.

2003년 2월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청와대 외교보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4년 1월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취임하여 2006년 11월까지 장관을 맡았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외무부 주UN 1등서기관을, 1991년 외무부 UN 과장을 거쳤다.

2001년 유엔총회의장을 겸임한 한승수 외교통상부 장관을 보조해 비서실장 및 유엔본부 대사로 활동했다.

2006년 10월 인도출신의 샤시 타루트를 제치고 제8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됐다.

2012년 1월부터 2016년 12월까지 연임을 마쳤다.

2017년 1월 12일 임기를 마치고 귀국해 대선예비주자로서 행보에 나섰다.

◆ 학력

충주교현초등학교와 충주중학교를 졸업했다.

1963년 충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0년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85년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2008년 서울대학교 명예 외교학박사학위와 페어리디킨슨대학교 명예 박사학위,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대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0년 난징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및 모스크바국립국제관계대학교 외교대학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5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명예 여성학박사학위를 받았다.

2016년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학 졸업식에서 법학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또 같은 해 미국 로욜라 메리몬트대학교(LMU)에서 명예박사학위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 프랑스 파리1대 팡테옹소르본대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반기문의 가정은 1950년대 말까지 유복한 편이었으나 부친의 창고업이 부도나면서 어려워졌다.

1971년 결혼한 배우자 유순택씨는 충주고와 충주여고 간 학생회장단 간부 교류로 만났다.

슬하에 1남2녀를 두었다. 둘째 딸 반현희씨는 유엔 산하기구 유엔아동기금(UNICEF)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 상훈

1975년 녹조근정훈장, 1986년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01년 3년 이상 주재 경력이 없었지만 예외적으로 오스트리아 명예 대훈장을 받았다.

2002년 한국과 브라질의 관계를 증진시킨 공로로 브라질 리오블랑코 대십자훈장을 받았다.

2004년 9월 미국 코리아 소사이어티로부터 밴플린트 상을 받았다.

2006년 페루 태양 대십자훈장과 헝가리 자유의 영웅메달, 알제리 국가유공훈장을 받았다.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으로부터 한국 이미지 디딤돌상과 한국언론인연합회로부터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을 받았다.

2007년 3월 서울대 총동창회에서 수여하는 제9회 관악대상 영광부문을 받았다.

2008년 필리핀 대통령으로부터 필리핀 최고 훈장인 ‘시카투나 훈장’을 수여했다. 또 같은 해 국제 로터리 영예의 상을 받았다.

200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청조근정훈장도 받았다.

2012년 5월 탁월한 국제지도자상과 서울평화상심사위원회로부터 제11회 서울평화상을 받았다. 올림픽훈장 금장을 수상했다.

2014년 1월 제23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과 2014년 미국 하버드대학교로부터 올해의 인도주의자 상을 받았다.

2015년 티퍼래리 국제평화상과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네덜란드 사자기사 대십자 훈장을 받았다.

2016년 6월 푸틴 러시아 대통령으로부터 러시아의 국가 훈장인 ‘우호훈장’(오르덴 드루즈뷔)을 받았다.

2016년 12월 미국의 외교전문지인 ‘포린폴리시’가 선정한 '2016 세계의 사상가 100인'에서 '결정자' 분야에 들었다. 포린폴리시는 결정자, 도전자, 혁신자, 예술가, 기록자, 거물 세계시민, 길잡이, 치유자 등 9개 분야에서 큰 공을 이룬 개인 100인을 선정했다.

2017년 1월 유엔 사무총장으로 재직하면서 국가위상을 높인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 상훈

1975년 녹조근정훈장, 1986년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01년 3년 이상 주재 경력이 없었지만 예외적으로 오스트리아 명예 대훈장을 받았다.

2002년 한국과 브라질의 관계를 증진시킨 공로로 브라질 리오블랑코 대십자훈장을 받았다.

2004년 9월 미국 코리아 소사이어티로부터 밴플린트 상을 받았다.

2006년 페루 태양 대십자훈장과 헝가리 자유의 영웅메달, 알제리 국가유공훈장을 받았다.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으로부터 한국 이미지 디딤돌상과 한국언론인연합회로부터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을 받았다.

2007년 3월 서울대 총동창회에서 수여하는 제9회 관악대상 영광부문을 받았다.

2008년 필리핀 대통령으로부터 필리핀 최고 훈장인 ‘시카투나 훈장’을 수여했다. 또 같은 해 국제 로터리 영예의 상을 받았다.

200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청조근정훈장도 받았다.

2012년 5월 탁월한 국제지도자상과 서울평화상심사위원회로부터 제11회 서울평화상을 받았다. 올림픽훈장 금장을 수상했다.

2014년 1월 제23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과 2014년 미국 하버드대학교로부터 올해의 인도주의자 상을 받았다.

2015년 티퍼래리 국제평화상과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네덜란드 사자기사 대십자 훈장을 받았다.

2016년 6월 푸틴 러시아 대통령으로부터 러시아의 국가 훈장인 ‘우호훈장’(오르덴 드루즈뷔)을 받았다.

2016년 12월 미국의 외교전문지인 ‘포린폴리시’가 선정한 '2016 세계의 사상가 100인'에서 '결정자' 분야에 들었다. 포린폴리시는 결정자, 도전자, 혁신자, 예술가, 기록자, 거물 세계시민, 길잡이, 치유자 등 9개 분야에서 큰 공을 이룬 개인 100인을 선정했다.

2017년 1월 유엔 사무총장으로 재직하면서 국가위상을 높인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어록


“어느 정당에도 들어가지 않겠다. 중간지대에서 독자적으로 하겠다.” “나에게 '어드바이저(조언가) 그룹이 있으며, 그쪽에서 그런 조언을 하고 있다.”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은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다.” (2017/01/25, 국회 귀빈식당에서 ‘왜 정치교체인가’라는 주제로 의원들과 가진 비공개 간담회에서)

“지도자의 실패가 나라를 망치고 민생을 파탄으로 몰고 가는 것을 생생하게 목격하였으며,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좋은 정치, 좋은 정부, 좋은 국가경영(Good Governance)과 국가지도자의 리더십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최근 우리나라의 현실을 볼 때, 성장 동력은 약해지고, 양극화현상도 심화되며, 이념적 대립은 격화되고 있다. 이 모든 문제의 근원에 나쁜 정치가 자리 잡고 있다. 제가 정치교체를 주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제가 개헌을 추진하는 이유는 정치교체를 하기 위해서다.” (2017/01/25,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본인이 적합한 리더라고 밝히면서)

“개헌을 통해 권력구조와 선거제도를 획기적으로 고쳐서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총선거의 주기를 하나로 맞추어야 한다.” “개헌의 시기는 대통령 선거 전에 이뤄져야 한다.” (2017/01/25,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본인이 적합한 리더라고 밝히면서)

"국회가 불신받고 정치가 지탄받는 이유는 우리 국회나 정치가 국민 대다수의 뜻을 대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는 대다수 국민의 뜻이 정치에 반영되는 선거구제 변경, 분권과 협치의 헌법 개정을 통해 정치 질서와 정치 문화를 확실히 교체하겠다." (2017/01/25,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본인이 적합한 리더라고 밝히면서)

“마하트마 간디가 말한 일곱 가지 악 중에 첫 번째가 원칙이 없는 정치다. 저 반기문의 모든 판단기준은 이념이 아니라 국익이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안보와 경제 모두 위기다. 경제도 외교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시대다. 경제가 외교이고, 외교가 경제다. 글로벌 리더와의 네트워크와 세계무대에서의 폭넓은 경험이 필요한 시기다. ‘N포 세대’, ‘헬 조선’, ‘흙수저?금수저’라는 말들이 사라지고, 청년들의 꿈과 희망이 가득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에 저의 모든 역량과 경륜을 쏟아 붓겠다.” (2017/01/25,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본인이 적합한 리더라고 밝히면서)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대통령이 탄핵소추되는 불행한 일이 한국에서 일어났다.” “회고록이나 쓰고 강의하면서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짧은 시간이 될지도 모르지만 최대한 노력을 해보겠다고 해서 (지난해) 12월에 결정하게 됐다.” "저 자신도 가족과 상의도 했고, 물론 가족은 썩 내켜 하지 않았다." "제가 유엔 사무총장을 하고 회고록이나 쓰면서 강의나 하고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보단, 아주 짧은 시간이 될지 모르지만 제가 최대한 노력을 해보겠다(고 결심했다)." ( 대선 후보들과 경선을 치르는 것에 대해서) "경선을 해야 한다면 얼마든지, 어떤 누구하고도 경선할 준비가 돼 있다" (2017/01/25, 오후 관훈토론에 참석해 대권도전을 결심한 시기에 대한 질문에 대해)

“노 전 대통령 취임식 때 변화와 통합을 외치던 모습이 아직까지 기억에 생생하다." "노 전 대통령이 정치교체를 해야 한다는 한 것이 가슴이 남아있다." "제가 유엔 사무총장에 당선되도록 (노 전 대통령이) 생전에 많은 노력을 해주신 것에 대해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2017/01/17,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봉하마을을 방문해)

“작년에 박근혜 대통령과 전화 통화한 내용에 대해 여러분들의 비판도 있고 오해도 있는 것 같다. 한일 양국 간 오랫동안 현안이 됐던 문제에 대해서 환영을 한 것이다.""유엔 사무총장으로서 분쟁이 있는 당사국들 간에 협상을 통해,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 완벽한 결론은 아니더라도 중간 단계든지 그래서 양국간 합의가 이뤄질 경우 협상을 통한 합의를 환영했다." "다만 궁극적인 완벽한 합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는 수준이 돼야 한다." (2017/01/12, 귀국인사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 관련 발언과 관련해서)

"나는 지난 10년간 세계를 다니며 가난하고 병들고 악재에 신음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권과 존엄하며서 약자를 배려하면서 그들의 목소리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힘이 없어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사람의 보호자가 됐고 목소리가 없는 사람의 목소리가 되어왔다. 어디를 가든 어려운 사람을 위해 그 사회의 지도자가 해야할 마땅한 일을 촉구했다" (2017/01/12, 인천공항에서 취재진을 상대로 한 귀국메세지에서)

"유감스럽게도 정치권은 아직도 광장의 민심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신들의 이해관계만 따지고 있다. 정말 개탄할 일이다."내 귀국 즈음해 내 개인에 대해 여러 이야기가 떠돌고 있고 보도되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진실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동안 내 경험과 식견을 정치참여를 통해, 조국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내 순수하고 참된, 소박한 뜻을 왜곡, 폄훼하는 내용들이었다." "지난 50여년간 대한민국에서, 그리고 유엔에서 국가와 민족, 세계 일류를 위해 공직자로 일하는 가운데 양심에 부끄러운 일이 없다는 점을 명백히 말씀드린다." "나는 그동안 귀국 후 국민 여러분의 다양한 의견을 들을 기회를 갖겠다고 말씀드렸다. 내일부터 그 기회를 갖겠다. 겸허한 마음으로 사심없는 결정을 하겠다. 그 결정은 오래 걸리지 않을거다." (2017/01/12, 인천공항에서 취재진을 상대로 한 귀국메세지에서)

“1987년 체제는 수명을 다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된다면 임기 초에 개헌에 나서겠다. 개헌이 돼야 한다는데 적극 찬성 입장.” (2016/12/28, 뉴욕의 한 식당에서 경대수 의원, 박덕흠 의원, 이종배 의원 등 새누리당 충청권 의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

“개헌이 반드시 필요하다. (개헌이 된다면 임기를) 유연하게 맞춰야 하지 않겠느냐.” (2016/12/22, 새누리당 의원들의 방문을 받은 자리에서)

“정말 터무니없는 얘기다.” (2016/12/22,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23만 달러를 받았다는 등 의혹에 대해 해명하며)

“우리는 (국제 테러리즘과 극단주의와 전쟁) 때문에 너무 많은 고통을 받고 있으며 이런 상황이 지속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이것이 우리가 시리아에서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에 대항해 싸우는 동맹군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이유다.” (2016/06/16,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개막한 ‘제20회 국제경제포럼’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하면서)

“올해가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마지막 해다. 국제무대에서 이뤄진 당신의 노력에 깊은 감사와 존경을 표한다.” (2016/06/16,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양자회담에 대해 논의하기 전에)

"나는 조용히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며, 막후에서 세게 얘기하는 전통적 외교스타일이다.” (워싱턴포스트와 인터뷰에서)

“오늘 시리아 항구 도시 자발레와 타르투스에서 민간인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간 테러 공격을 규탄한다.” (2016/05/24, 시리아에서 연쇄 폭탄 테러가 발생한 데 대해)

“우리는 역사적인 파리기후협정을 이뤄냈다. 이것을 살리는데 힘을 합쳐달라.” “기후변화 문제를 부인하는 정치인에게는 표를 주지도 말고, 재활용할 수 없는 물건을 사지도 말고, 전등도 좀 꺼달라.” (2016/05/19, 콜롬비아대학에서 법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한반도 평화증진을 위해 필요한 모든 역할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한반도가 도전의 땅에서 진정한 기회의 땅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합니다.” (2012/10/30 대한민국 국회에서 열린 ‘유엔과 한국, 함께 이루는 인류의 꿈’ 연설에서)

“전체 유엔을 대신해 겸허한 마음으로 수락하고자 한다. 특히 한국인으로서 유엔사무총장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해에 수상하게 된 것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한다” (2012/06, 서울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면서)

“우리는 통합과 상호 연결의 시대, 어떤 나라도 혼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시대, 모든 나라가 해결책의 일부가 되어야만 하는 새로운 시대 속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유엔의 역할은 선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 여기서 무거운 책임감을 공유합니다. 그것이 바로 유엔이 과거 어느 때보다 다르고 심오한 방식으로 중요해진 이유입니다. 선도하기 위해 우리는 결과를 만들어내야 합니다.…사람들이 보고 만질 수 있고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결과가 필요합니다.” (2011/06, 유엔 사무총장 두 번째 임기가 결정되고 선서를 하면서)

“사무총장으로 서 있는 저는 결코 완벽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하신 각국 사절단 여러분 모두의 아낌없는 지지와 협력과 신뢰를 필요로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저의 모든 진심과 능력을 아낌없이 발휘하여 여러분을 위해 충실히 봉사할 것을 맹세합니다.” [As your Secretary-General, I am far from being perfect,and I will need the unsparing support,cooperation and trust from all of the representatives present here. But I pledge to serve you well,with all of my heart and to the best of my abilities] (2006/12/15 제8대 유엔 사무총장 취임 선서에서)

“UN의 성공에 관한 진정한 평가는 우리가 얼마나 많이 약속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얼마나 많이 일을 수행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조직(UN)의 항구적 목적과 우리를 고취시키는 원칙들을 감안할 때 우리는 UN을 요란하게 칭송하거나 UN의 미덕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그것들을 하나하나 프로그램 별로 실천해 나가면 됩니다.” [The true measure of success for the UN is not how much we promise, but how much we deliver for those who need us most. Given the enduring purposes and inspiring principles of our Organization, we need not shout its praises or preach its virtues. We simply need to live them every day ; step by step, program by program, mandate by mandate.] (2006/12/15 제8대 유엔 사무총장 취임 선서에서)

"평화적 핵이용을 위해 핵폐기로 신뢰가 회복되면 (핵이용을) 북한과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05/8/22 미국 CNN에 출연해 북핵 문제에 대해 답하면서)

“북한이 지금 현재 진행 중이거나 진행하려고 하는 모든 핵 관련 활동 이것은 6자 회담에서 합의가 이뤄진다면 당연히 중단되고 폐기돼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05/7/14 한 매체의 방송 프로그램에서 6자회담과 북핵 문제를 놓고)

“공직생활을 마감해야 하는 게 아닌가 고심하기도 했지만 묵묵히 일해 결국 새옹지마(塞翁之馬)가 됐다.”(2001년 차관직에서 물러나 유엔 총회 비서실장으로 좌천된 것을 두고)

“(장래희망은) 외교관입니다.” (1963년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비스타(VISTA) 프로그램 연수생인 고등학생 반기문에게 장래희망을 묻자.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대답을 듣고 빙그레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신웅진 저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 : 세계의 대통령,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아름다운 꿈과 도전의 메시지'에서)

◆ 평가

한국인으로서 처음 유엔 사무총장이 됐다.

편안한 느낌을 주는 외모와 소탈한 성격을 지녀 대인관계가 원만하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일처리에는 빈틈이 없다고 알려졌다.

사무총장으로 재임하면서 성실하고 원칙에 입각해서 조화와 균형을 중시했다. UN 회원국들의 이익 충돌과 마찰을 조절해 기후변화협정을 이끌어냈다.

사무총장으로서 반기문의 가장 큰 공로는 파리협정 체결 1년도 안돼 2016년 11월 파리협정을 공식적으로 발효하게 한 것으로 평가된다. 파리협정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55%를 책임지는 최소 55개국이 비준해야 발효한다는 요건을 2016년 10월 충족했다. 반기문은 온실가스 배출 1, 2위 배출국인 중국과 미국을 포함해 90여 개국이 비준하도록 이끌어냈다.

강한 추진력을 지녔다고 평가받는다. 그와 함께 일해 본 적이 있는 외교관들은 그가 상대에게 정성을 다해 신뢰감을 주면서도 동시에 엄청난 집요함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추진해 결국 문제를 풀어내는 능력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반기문은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에서 대선에 패배한 측이 승복하지 않아 내전 상황으로 번졌을 때 문제에 개입해 승리한 측이 집권하도록 문제를 푸는 데 기여했다.

또 미얀마 군부를 끊임없이 압박해 올해 군부가 약속한 7단계의 민주화 과정 가운데 하나인 '국민총선'을 치르게 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반기문을 놓고 “강하고 일관된 해법을 밀어붙이면서도 인간적으로 다가가서 문제를 바람직하게 해결하는 좋은 선례를 만들었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평가"라고 말했다.

자중자애를 인생의 살아온 방법으로 꼽는다. ‘머리는 항상 구름 위에 두지만 발은 땅을 딛고 있어야 한다. 발까지 떨어져 버리면 넘어진다’를 신념으로 간직해왔다.

반기문이 임기 동안 성소수자 인권을 위해 노력한 점이 높게 평가됐다. 미국의 외교·안보 전문매체인 포린폴리쉬는 반기문은 모든 유엔 직원들의 동성 결혼을 인정한 첫 유엔 수장이고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철폐하도록 세계의 보수적 국가들에 촉구해왔다고 평가했다.

코소보 독립, 미얀마의 민주화, 코트디부아르의 정권 이양 등에서 성과를 낸 점도 그의 공로로 인정된다. 반기문은 또 유엔 인권최고대표로부터 조용한 외교가 생명을 구하고 결과적으로 자유와 정치범들의 석방을 낳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기문은 2004년 이라크에서 발생한 김선일씨 피살 사태로 인해 위기를 맞았다. 그는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 의원들의 비판을 받았다.

2006년에는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고 같은 해 동원호 선원들이 소말리아 해적에 의해 납치됐을때 책임론이 불거져 외교력을 놓고 비판을 받았다.

일부 서구 언론도 반기문을 비판했다. 이는 반기문이 취임당시 안고 있었던 과제가 이라크와 수단 내전 종식, 북한과 이란 핵 해결, 성범죄 등으로 실추된 평화유지군의 명예회복, 유엔 개혁, 지구 온난화 대책 마련 등이었으나 이 가운데 해결한 것은 이란 핵 협상 타결과 파리기후변화협정의 국제조약화 등 뿐이기 때문이다. 그 외의 문제에는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고 또 시리아 내전 중재에 성공하지 못한 점을 꼬집은 것이다.

그는 CNN으로부터도 2017년 초 비판적인 평가를 받았다.

CNN은 반기문의 뒤를 이은 안토니오 구테헤스 신임 유엔 사무총장 취임 소식을 전하며 구테헤스를 반기문과 비교해 ‘명료’하면서도 ‘여유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구테헤스는 “우리의 결점과 실패를 인식해야 한다”고 반 전 총장과 함께한 지난 10년간 유엔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2010년 7월 잉가 브리트 알레니우스 전 UN 감찰실장이 퇴임한 뒤 50쪽 짜리 장문의 의견서에서 반기문을 비난했다. 알레니우스 전 실장은 반기문을 놓고 “투명성이 없고 책임감이 부족하다. 강력한 리더십과 좋은 관리에 따른 내부감독을 지원하기보다 UN의 지위를 쇠퇴시키려고 분투하고 있다. 나는 조직개혁의 어떠한 신호도 보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인사제도 비서관으로 인사정책에 관여했던 최광웅 데이터정치연구소장이 참여정부의 인사 뒷얘기와 주요인물 20인에 대한 평가를 담은 저서 '노무현이 선택한 사람들'에서 반기문의 운명을 '운칠기삼(운이 7할이고 기가 3할이라는 뜻)'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반기문의 이력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흥미롭게도 흘린 땀 못지 않게 고비마다 절묘하게 행운이 뒤따랐다고 평가했다.

◆ 기타

한때 `반주사' ‘반대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고위직이면서도 그 직급에 관계없이 자질구레한 일도 손수 챙겼다는 데서 붙여진 별명이다.

아무리 바빠도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에게 반드시 회신을 해주며 수많은 연하장을 보낼 때도 이름은 직접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과거 모셨던 노신영 전 총리에게서 '사람관리'의 비법을 배웠다고 한다.

"일하는 것 자체가 체력관리"라고 생각해 별도의 운동을 하지 않는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서 반기문의 강의 노트가 인기 있었다. 강의 노트가 꼼꼼하고 하나도 빠지지 않는 어떤 면에서 교과서보다 더 나았기 때문에 동기생들 사이에서 서로 보겠다고 경쟁이 치열할 정도였다고 한다.

2001년 차관에서 물러나 유엔총회의장 비서실장으로 부임했을 때 반기문은 마지막 보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때의 국제 경험과 인맥이 전화위복돼 유엔 사무총장 당선의 밑거름이 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2009년 노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조문을 하지 않아 친노·친문 그룹으로부터 '배신자' 비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