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Who Is ?] 이동걸 전 KDB산업은행 회장
이동걸 전 KDB산업은행 회장.


이동걸은 전직 KDB산업은행 회장이다. 한일은행에 입행한 뒤 40여 년 동안 은행과 증권, 캐피탈 등 다양한 금융분야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아 온 백전노장이다.

1948년 1월1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를 거쳐 영남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한일은행에 입사해 40년 이상 은행과 증권업계에서 일했다.

신한은행으로 자리를 옮긴 뒤 부행장을 거쳐 굿모닝신한증권(신한금융투자 전신) 사장과 신한금융투자 부회장 겸 이사회 의장을 역임했다.

추진력있는 ‘친박TK' 금융전문가이자 감성경영자로 알려져 있다. 이동걸이 민간출신 금융전문가이기 때문에 정책금융을 잘 다루지 못 한다는 평가와 함께 친박성향을 보인 인사라는 점에서 낙하산 인사라는 평가도 받았다.

2016년 2월 KDB산업은행 회장에 취임했다가 임기를 1년5개월 남겨둔 2017년 9월7일 중도사퇴했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열정과 추진력 있는 CEO로 평가받는다. 스스로 놀고먹는 것을 못 견디는 성격이라고 얘기한다.

평소 “12라운드에 힘이 남아있는 권투 선수는 승패를 떠나 패자다. 11라운드까지 혼신의 에너지를 쏟아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원 모두가 사장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열정을 보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강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소통, 고객감동, 나눔과 배려’를 강조한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동 KDB산업은행 본점에는 시민들에게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를 담은 글귀가 걸려있다. 이 글귀는 매달 바뀌고 있는데 이동걸의 감성경영과 맞닿아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신한금융투자 CEO로 재직 때 새내기 사원들에게 '인디언 기우제' 얘기를 들려주며 "꿈을 크게 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며 소통하는 등 친근한 증권사 문화를 만드는 데 힘썼다. 전국의 직원들에게 “존경하는 사장님, 힘내시라”는 응원메일을 받고 이를 따로 스크랩해뒀다고 한다.

산업은행 회장 취임식장에 이메일 주소(dglee@kdb.co.kr)가 써진 현수막을 내걸기도 했다.

이동걸은 “이 조직에서 아버지 같은 사람인데 자식들이 속병이 있으면 아버지가 해결해야 한다”며 “사적인 일이든 조직과 관련된 아이디어든 이메일을 보내달라. 일주일 안에 답을 주고 보안도 유지하겠다”고 말했다.

굿모닝증권과 신한증권의 합병한 굿모닝신한증권을 화학적으로 완결하고 회사를 대형사로 키우는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듣는다.

금융위원회는 이동걸을 산업은행 회장에 내정하며 “이동걸은 은행과 증권 등 여러 금융분야에서 쌓은 투자금융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산업은행의 기업 구조조정 작업을 추진하고 실물경제의 활력도 적극 뒷받침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업 구조조정을 실질적으로 맡아 진행한 경험이 없고 정책금융 업무를 수행한 경험이 전무한 것이 약점으로 지목됐다. 40년 이상 금융권 경력을 쌓았지만 한일은행과 신한은행 등 민간 금융기관에서만 근무했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70년 한일은행에 입행했다.

1987년 신한은행으로 자리를 옮긴 뒤 1988년 신한은행 무역센터지점 지점장을 맡았다.

1992년 신한은행 홍콩현지법인 사장을 지냈다.

1995년 신한은행 인재개발부 부장을 지낸 뒤 다음해 인사부 부장을 역임했다.

1998년 신한은행 이사대우로 승진했고 1999년 신한은행 상무를 지냈다.

2002년 신한은행 부행장을 역임했다. 같은해 신한캐피탈 대표이사 사장을 지냈다. 당시 기업 구조조정 전문회사(CRC) 시장에 뛰어들어 상당한 수익을 냈다.

2006년 굿모닝신한증권 대표이사 사장을 지내며 신한금융투자를 업계 최고의 증권사로 만들었다.

2007년 증권업협회 공익이사를 맡았다.

2009년 굿모닝신한증권에서 이름을 바꾼 신한금융투자 부회장 겸 이사회 의장에 취임했다.

2009년 9월부터 2010년 4월까지 신한금융투자 부회장을 지냈다.

2012년 벌크선업체인 신성해운 회장에 취임했다.

2013년 영남대학교 경제금융학부에서 석좌교수를 지냈다.

2016년 2월 KDB산업은행 회장에 취임했다.

2017년 9월 KDB산업은행 회장에서 물러났다.

◆ 학력

1966년 경북사대 부속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0년 영남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 가족관계

이동재 전 포항시 교육장과 이동건 나남전기 회장이 형이다.

◆ 상훈

2007년 한국증권선물거래소(KRX) 선정 ‘올해의 증권선물인상‘을 수상했다.

◆ 상훈

2007년 한국증권선물거래소(KRX) 선정 ‘올해의 증권선물인상‘을 수상했다.

어록


“기본적으로 채권단은 개별 회상의 외상값을 갚는 데 공적자금을 투입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대주주로부터 내 팔을 자르겠다는 결단이 없었는데 어떻게 지원을 해줄 수 있겠냐. 이제와서 하는 얘기지만 당시 한진해운은 채권단의 추가 지원을 기다리고 있었다.”(2016/10/04, 조선해운업 국정감사 자리에서 현대상선과 달리 한진해운이 법정관리에 들어간 이유를 설명하며)

“한진해운을 살리면 들어갈 수 있는 공적자금도 생각해야 한다. 지금 순간이라도 결단을 내린 것에 평가를 받아야 한다. 구조조정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2016/10/04, 조선해운업 국정감사에서)

“긴 기간은 아니었는데 10년은 지난 것 같습니다.”(2016/09/06,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산업은행 회장에 오른 지 6개월 동안의 소감을 묻자)

“모든 것은 때가 있고 제때 바꾸지 못하면 무너진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면적 쇄신이 필요하다.”(2016/08/19, 2016년 상반기 경영설명회에서)

“선제적 구조조정을 통해 기업경쟁력 강화와 산업구조 개선을 지원하고 국가경제의 흐름이 선순환 되도록 금융의 역할에 최선을 다 해야겠다.” “자구노력이 없는 기업과 한계기업에는 과감한 결단을 보여주겠다.” “매 순간 냉철하게, 적당히 넘어가는 것이 없도록 하라.” (2016/02/12, 산업은행 회장 취임식에서)

“기업 구조조정을 가장 중요한 현안으로 보고 우리나라 경제의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데 역점을 두겠다.” “기업현황을 먼저 파악하고 정리할 부분을 빨리 정리하겠다.” (2016/02/04, 차기 산업은행 회장에 내정된 뒤)

“금융경쟁력이 국가 경쟁력에 비해 떨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금융이 낙후했다고 낙담하지만 나는 앞으로 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고 해석한다.” “출신을 따지기보다 흐트러진 조직을 추스를 수 있는 좋은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 “회장은 전체적으로 외연을 넓히고 비은행 분야를 육성하는 것이 역할이고 은행장은 영업을 책임져야 한다.” (2014/10/11, KB금융지주 회장 후보에 올랐을 당시)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은 여성리더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부패한 사회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리더가 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박근혜 당선인을 지지했다.” (2013/01/02,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대선 당시 박근헤 후보를 지지한 이유에 대해)

“40여 년을 금융인으로서 경제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일상의 혼돈이 곳곳에 남아 감성의 틀을 정리해 나가는 것만으로도 힘이 드는 일이었다. 내 인생에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분야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2009/06/24, 수필가로 등단한 소감으로)

“한 사람이 꿈을 꾸면 꿈으로 끝날지 모르지만 만인이 꿈을 꾸면 얼마든지 현실로 이뤄낼 수 있다. 신념과 미래를 향한 비전을 함께 가진다면 얼마든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2008/05/16, 서울 명지대학교 강연회에서)

“자본시장통합법이 시행될 경우 증권시장은 다수의 기업이 시장을 분할해 가지는 군웅할거 시대에서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과점 체제로 바뀔 것이다. 자본시장통합법 제정의 진정한 수혜자가 되기 위해 경쟁업체를 압도하는 상품개발능력과 마케팅 역량, 그리고 강력한 네트워크를 갖춰야 한다.” (2006/02/22, 굿모닝신한증권 대표이사에 취임하며)

◆ 평가

열정과 추진력 있는 CEO로 평가받는다. 스스로 놀고먹는 것을 못 견디는 성격이라고 얘기한다.

평소 “12라운드에 힘이 남아있는 권투 선수는 승패를 떠나 패자다. 11라운드까지 혼신의 에너지를 쏟아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원 모두가 사장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열정을 보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강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소통, 고객감동, 나눔과 배려’를 강조한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동 KDB산업은행 본점에는 시민들에게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를 담은 글귀가 걸려있다. 이 글귀는 매달 바뀌고 있는데 이동걸의 감성경영과 맞닿아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신한금융투자 CEO로 재직 때 새내기 사원들에게 '인디언 기우제' 얘기를 들려주며 "꿈을 크게 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며 소통하는 등 친근한 증권사 문화를 만드는 데 힘썼다. 전국의 직원들에게 “존경하는 사장님, 힘내시라”는 응원메일을 받고 이를 따로 스크랩해뒀다고 한다.

산업은행 회장 취임식장에 이메일 주소(dglee@kdb.co.kr)가 써진 현수막을 내걸기도 했다.

이동걸은 “이 조직에서 아버지 같은 사람인데 자식들이 속병이 있으면 아버지가 해결해야 한다”며 “사적인 일이든 조직과 관련된 아이디어든 이메일을 보내달라. 일주일 안에 답을 주고 보안도 유지하겠다”고 말했다.

굿모닝증권과 신한증권의 합병한 굿모닝신한증권을 화학적으로 완결하고 회사를 대형사로 키우는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듣는다.

금융위원회는 이동걸을 산업은행 회장에 내정하며 “이동걸은 은행과 증권 등 여러 금융분야에서 쌓은 투자금융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산업은행의 기업 구조조정 작업을 추진하고 실물경제의 활력도 적극 뒷받침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업 구조조정을 실질적으로 맡아 진행한 경험이 없고 정책금융 업무를 수행한 경험이 전무한 것이 약점으로 지목됐다. 40년 이상 금융권 경력을 쌓았지만 한일은행과 신한은행 등 민간 금융기관에서만 근무했다.

◆ 기타

“남들과 다른 길을 가겠다”는 경영철학을 내세웠다. 신한금융투자에 재직할 당시 와인펀드나 아트펀드 같은 개별상품을 비롯해 낯선 지역인 라오스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지에 네트워크를 확대한 점 등은 이 같은 경영철학의 결과물이었다.

대학시절에 학보사 기자로 활동했다. 학보사 편집장도 지냈는데 이 경력으로 한일은행 노조의 노보(노조신문) 제작을 맡기도 했다. 이후 금융노조로 자리를 옮겨 금융노조 소식지를 발행하는 업무를 담당하면서 28세에 금융노조 간부(기획조정실장)을 맡기도 했다.

홍보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직접 인터뷰 문안이나 인사말을 작성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퇴근 후 틈틈이 책 속에서 좋은 문구나 글귀를 찾아뒀다.

홍기택 전임 KDB산업은행 회장과 유사한 점이 많다. 정책금융기관을 거치지 않은 ‘비전문가’라는 점과 영남대 특임석좌교수를 지낸 교수 출신, 박근혜 정부 금융권 실세로 취임 당시부터 낙하산 인사 논란을 겪은 점 등이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