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이노베이션이 미국 국제무역위원회의 배터리 10년 수입금지 결정을 놓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기대하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시선이 늘고 있다.

김준 SK이노베이션 대표이사 총괄사장은 배터리 영업비밀 분쟁과 관련해 LG에너지솔루션과 합의를 지난해 2월 예비판결이 나온 뒤 1년 동안 이뤄내지 못했다.
 
SK이노베이션 미국 대통령 거부권 장담 못해, 김준 합의로 갈수록 몰려

김준 SK이노베이션 대표이사 총괄사장.


바이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가능성이 낮아지면 SK이노베이션 전기차배터리 사업은 궁지에 몰릴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5일 내놓은 SK이노베이션과 LG에너지솔루션 사이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소송에 관한 최종 의견서를 보면 바이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명분이 되는 공익(Public Interest)을 둘러싼 논란 가능성을 차단하는 내용이 포함됐다고 배터리업계는 파악하다.

미국 국제무역위는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고객사인 포드와 폴크스바겐에게도 영업비밀 침해와 관련해 일부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고 SK이노베이션 배터리 수입금지가 미국 산업의 공익(Public Interest)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였다.

국제무역위는 포드에 4년,  폴크스바겐에 2년의 수입금지 유예기간을 부여한 것과 관련해서는 “영업비밀을 침해하지 않은 다른 배터리 공급사로 갈아탈 시간적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고 설명했다.

SK이노베이션은 2월10일 최종판결이 나온 뒤 고객사인 포드와 폴크스바겐의 배터리 확보 차질을 가장 큰 이유로 내세워 바이든 행정부의 전기차정책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하며 거부권을 기대해왔다.

배터리업계에선 미국 국제무역위가 포드와 폴크스바겐도 책임이 있다는 판단을 통해 바이든 대통령에게도 간접적으로 공익적 요인으로 거부권을 행사하는 일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압박한 것이라는 시선이 나온다.

LG에너지솔루션도 미국 국제무역위 최종 의견서에 관한 콘퍼런스콜에서 “국제무역위가 포드와 폴크스바겐에 책임이 있다고 판단한 것은 이들이 낮은 가격을 노리며 SK이노베이션 배터리를 사용하기로 해 다른 전기차회사들의 정상적 영업을 방해한 것으로 해석했다고 볼 수 있다”고 보기도 했다.

게다가 포드와 폴크스바겐이 LG에너지솔루션으로부터 배터리를 공급받을 수 있는 길도 열리고 있어 거부권 행사 가능성이 더욱 낮아지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GM과 테네시주에 두 번째 배터리 공장을 짓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 공장에 생산라인을 증설하면 GM 이외에 포드나 폴크스바겐 등 다른 자동차회사에도 배터리를 공급하는데 기술적 문제는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LG에너지솔루션은 이미 포드의 디트로이트 공장에 배터리를 납품하고 있어 공익적 명분으로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낮아지고 있는 셈이다.

SK이노베이션은 거부권이 행사되지 않는다면 연방항소법원에 항소하겠다는 방침을 내놨다. 하지만 이는 손해배상 규모와 불확실성 기간만 늘리는 소모전일 뿐 결코 유리한 것이 없다는 시선도 만만치 않다.

미국 국제무역위의 최종결정이 나온 만큼 그동안 중단됐던 미국 델라웨어 연방지방법원 소송이 조만간 재개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연방비밀보호법에 따르면 기술탈취와 영업비밀을 통해 입은 과거의 손해배상과 미래에 입게 될 손해배상 등을 포함해 손해배상 금액의 최대 200%까지 징벌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게다가 소송이 이어진다면 투입비용도 만만치 않다.

이와 관련해 글로벌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는 미국 국제무역위 최종결정이 나온 뒤 내놓은 보고서에서 “두 회사의 합의금이 5조 원을 넘을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김준 총괄사장으로서는 LG와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미국 전기차배터리 사업을 철수하는 선택지만 남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미국에서 철수한다면 사실상 다른 지역에서도 배터리사업을 더 이상 진행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미국에서 받은 영업비밀 침해 배터리라는 꼬리표로 다른 고객사와 소비자들에게 신뢰를 주기 어려워 영업에 차질을 빚을 공산이 크다.

SK그룹 내부에서도 지난해 2월 예비판결이 나온 뒤 올해 2월 최종판결이 나오기 전까지 국제무역위 결정이 3차례나 지연되면서 1년 가까이 시간을 벌었는데도 김준 사장이 합의를 하지 않았다는 목소리가 일부에서 나오고 있었다.

만약 거부권이 행사되지 않고 상황이 더욱 악화돼 배터리사업에 차질을 빚게 된다면 김 사장은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을 놓고 보면 김준 사장으로서 합의밖에 남는 길이 없는 쪽으로 몰릴 수도 있다.

합의금 규모로 일각에서 나오는 5조 원도 전기차배터리 사업의 잠재적 수익성을 고려하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까지는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글로벌 전기차배터리 시장은 2025년 1600억 달러(175조 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같은 해 메모리반도체 예상 시장 규모인 1490억 달러를 크게 넘는 규모다.

SK이노베이션은 미국 조지아 1공장 공사를 끝내고 현재 시제품 생산을 앞두고 있어 더는 합의를 미루기 어렵다는 분석도 나온다.

바이든 대통령의 심의기간은 4월10일까지다. SK이노베이션에게 합의를 위한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라는 시선이 우세하다.

LG에너지솔루션은 콘퍼런스콜에서 “시장에서 말하는 대로 합의금 격차가 조 단위로 나고 있는 것이 맞다”며 “갭(차이)이 너무 큰데 어느 정도 근접한 금액이 제시돼야 협상도 본격적으로 진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합의가 되지 않는다면 원칙대로 미국에서 진행 중인 소송에 성실히 임할 수밖에 없다”면서도 “미국 국제무역위가 2년에 걸쳐 깊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을 받아들이고 진정성 있는 태도로 합의에 임하면 합의의 문은 열려 있다”고 덧붙였다. [비즈니스포스트 성보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