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와 대만 미디어텍의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경쟁이 화웨이와 미국 정부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변수로 미디어텍에 유리하게 전개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화웨이는 최근 미국 정부가 내놓은 반도체 제재를 극복하기 위해 미디어텍으로부터 더 많은 AP를 받는 방안을 선택한 것으로 파악된다.
 
화웨이 미국 제재에 미디어텍과 손잡아, 삼성전자 AP 경쟁 더 힘들어져

▲ 강인엽 삼성전자 시스템LSI사업부장 사장.


27일 외국언론을 종합하면 화웨이는 스마트폰 생산에 필요한 고성능 반도체를 확보하기 위해 미디어텍, 중국 유니SOC 등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기업)와 연계를 강화하고 있다.

특히 주요 AP기업인 미디어텍과 협력이 더욱 굳건해지는 것으로 파악된다.

AP는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의 두뇌 역할을 하는 시스템반도체를 말한다.

화웨이는 24일 중국 내수용 스마트폰 ‘엔조이Z’를 내놨는데 여기에 미디어텍의 최신 5G통신 AP ‘디멘시티800’이 적용됐다.

디멘시티800은 퀄컴 ‘스냅드래곤765’, 삼성전자 ‘엑시노스980’ 등의 대항마로 여겨진다.

그동안 화웨이는 대부분의 AP를 자회사 하이실리콘에서 공급받으면서 저가형 제품에만 미디어텍 AP를 사용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상대적으로 더 가격이 높은 5G통신용으로도 미디어텍 제품 적용을 확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이실리콘이 미국 정부의 제재로 대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기업 TSMC로부터 반도체를 수급하기 쉽지 않게 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앞으로 더 많은 화웨이 스마트폰에 외부업체의 AP가 실릴 수 있다는 시선이 나온다.

기술매체 보이지니어스리포트(BGR)는 “하반기 나오는 하이실리콘의 5나노급 AP ‘기린1000’이 TSMC 기반의 마지막 반도체가 될 수 있다”며 “화웨이는 다른 파트너를 찾아야 할 것”이라고 바라봤다.

개발자 커뮤니티 XDA디벨로퍼도 “화웨이에는 (AP 확보를 위해) 남은 선택지가 없다”며 “화웨이는 이제 미디어텍의 주요 고객 가운데 하나가 됐다”고 전했다.

이는 미디어텍이 삼성전자와 AP시장 점유율 격차를 더 벌릴 수 있음을 의미한다.

현재 AP 시장을 보면 미디어텍은 삼성전자의 주요 경쟁기업으로 꼽힌다.

시장 조사기관 카운터포인트가 집계한 2019년 스마트폰용 AP 출하량 점유율을 보면 미디어텍은 24.6%로 2위를 차지했고 삼성전자는 14.1%로 3위에 올랐다. 미디어텍이 삼성전자보다 더 많은 AP를 판매한 것이다.

하지만 매출 기준 점유율을 보면 두 기업의 차이는 좁혀진다. 시장 조사기관 스트래티지 애널리틱스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2019년 전체 스마트폰용 AP 매출 196억 달러 가운데 12%를 차지했고 미디어텍도 비슷한 수준의 매출을 냈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상황에서 하이실리콘의 AP 물량이 일부라도 미디어텍 쪽으로 이전된다면 미디어텍은 삼성전자보다 AP 매출 및 출하량에서 모두 우위를 점하게 될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이실리콘은 2019년 글로벌 AP 출하량 11.7%, 매출 14%를 보였다.

당초 퀄컴이나 미디어텍은 앞으로 AP 사용처를 넓히기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다. 스마트폰에 자체 AP를 적용하는 애플, 삼성전자, 화웨이 등과 달리 일정한 AP 수요를 확보하는 데 제약이 있다는 점 때문이다.

스트래티지 애널리틱스는 “자체 AP를 설계하는 스마트폰기업들은 퀄컴, 미디어텍과 같은 AP 공급업체들에 전략적 위협이 되고 있다”고 바라봤다.

하지만 미디어텍은 미국 정부가 화웨이를 대상으로 내놓은 반도체 제재안에 힘입어 이런 예상을 뒤집고 오히려 혜택을 받게 됐다. 

AP가 삼성전자 시스템반도체 실적에 기여하는 바는 결코 작지 않은 만큼 결과적으로 삼성전자가 2030년 시스템반도체 1위 목표를 달성하는 일이 더 어려워질 수도 있다.

삼성전자 시스템LSI사업부는 2019년 매출 15조 원가량을 거뒀는데 이 가운데 2조9천억 원이 AP에서 나온 것으로 추산된다.
 
화웨이 미국 제재에 미디어텍과 손잡아, 삼성전자 AP 경쟁 더 힘들어져

▲ 화웨이 스마트폰 '엔조이Z'. 미디어텍 AP '디멘시티800'이 탑재됐다. <화웨이>


물론 미국 정부가 화웨이에 관한 제재안을 실행에 옮길지는 아직 장담하기 어렵다.

미디어텍의 수혜가 삼성전자와 경쟁에 의미 있는 수준으로 확대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화웨이는 자체 반도체 확보가 완전히 막히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미디어텍 등 팹리스와 협력을 더욱 공고히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현재 업계에서는 9월 미국 정부의 반도체 제재가 시행되면 화웨이가 스마트폰에 자체 AP를 사용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진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제재안에 따르면 미국 기술이나 장비를 이용하는 파운드리기업이 화웨이 자회사 하이실리콘에서 설계한 반도체를 생산해 납품하려면 미국 정부로부터 허락을 받아야 한다. 

미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세계 반도체기업 대부분이 미국 기업의 장비나 소프트웨어를 사용한다는 점을 들어 “화웨이와 함께 일할 수 있는 반도체기업(파운드리)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임한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