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장 지낸 정세균, 경제와 통합 명분으로 총리후보 지명을 받다

정세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7일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뒤 국회 의원회관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정세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경제 살리기’와 ‘통합의 정치’라는 문재인 정부 후반기 양대 과제를 모두 감당할 수 있는 정치인으로 꼽힌다.

정 후보자는 1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가 안팎으로 어려운 시기에 총리라는 중책에 지명돼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며 “경제 살리기와 국민통합에 주력할 것”이라고 국무총리 후보자 지명 소감을 밝혔다.

정 후보자의 국무총리 후보자 지명을 놓고는 비판적 시선도 일부에서 나온다.

정 후보자가 제20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을 지냈기 때문이다. 입법부 수장을 지낸 인물이 행정부의 2인자가 되면 삼권분립의 대원칙이 무시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도 정 후보자의 지명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입법부의 수장을 지내신 분을 국무총리로 모시는데 주저함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집권 후반기 국정운영을 놓고 경제 살리기에 무게를 두고 있는 만큼 정 후보자의 경제분야 경험을 높게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정 후보자는 국회의원 가운데 드문 기업인 출신이다.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뒤 1978년 쌍용그룹 공채로 입사했다.

쌍용그룹에서 일하면서 1982년부터 1990년까지 8년 7개월 동안 미국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서 종합상사 주재원을 지냈다. 

정 후보자는 주재원 생활을 하면서도 학업을 이어갔다. 뉴욕대학교에서 행정학을 공부했고 1990년 페퍼다인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취득했다. 귀국한 뒤 2004년 경희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까지 취득하기도 했다.

정 후보자는 귀국한 뒤 임원으로 승진해 상무이사까지 지낸 뒤 1995년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였던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했다.

정 후보자는 정치에 입문한 뒤에도 경제분야에서 경험을 쌓았다.

고 노무현 대통령 때인 2006년에는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고 현재도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응하기 위한 ‘소재부품장비인력발전위원회’에서 특별위원장을 맡고 있다.

‘통합의 정치’ 역시 국회에서 여야 갈등이 극심한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국무총리로서 정 후보자의 중요한 강점으로 평가한 항목이다.

정 후보자는 온화한 성품과 조정 능력을 비롯해 정치적 경륜까지 갖춘 인물로 평가된다.

정 후보자는 6선 의원으로 8선 서청원 무소속 의원, 7선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이어 문희상 국회의장, 김무성 자유한국당 의원 등과 함께 최다선 그룹에 속하는 국회의원이다.

6선 의원을 지내는 동안 2005년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를 비롯해 통합민주당 대표 등 당 대표만 세 번을 지냈다.

국회 보좌진과 기자들이 1년에 한 번 투표로 가장 신사적 의원을 선정하는 ‘백봉신사상’을 15번 받기도 했다.

젊은 세대와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활발하게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 ‘균블리’ 등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균블리는 ‘정세균’과 ‘러블리(Lovely)’의 합성어다.

문 대통령은 정 후보자를 놓고 “갈등과 분열의 정치가 극심한 이 시기에 야당을 존중하고 협치하면서 국민의 통합과 화합을 이끌 수 있는 능력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국내외 환경이 여러 가지로 어렵지만 새 국무총리 후보자는 서로 화합하고 협력하며 민생과 경제를 우선하도록 내각을 이끌고 국민들께 신뢰와 안정감을 드릴 것”이라고 말했다.

정 후보자는 1950년 9월26일 전북 진안군에서 태어났다.

능길초등학교를 졸업했으나 정규 중학교가 아닌 주천고등공민학교를 다니다 1966년 검정고시를 통해 중학교 졸업 학력을 취득했다.

정 후보자는 전주공고를 다니면서도 대학 진학을 포기하지 않아 무작정 인문계 고등학교인 신흥고를 찾아가 "전주공고에서 1등을 높쳐 본 적 없는 정세균이라고 합니다"며 "신흥고를 다니고 싶은데 장학금이 없으면 학교 다닐 형편이 안 되니 장학금과 전학을 허락해 달라"고 요구한 일화가 알려져 있다. 당시 신흥고 교장은 정 후보자의 성적을 보고 장학금을 주며 전학을 허락했다.

사법시험에 도전하기 위해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했지만 유신헌법을 공부할 수 없다며 고시공부를 포기했다. 학내 신문사 활동을 하면서 언론인의 길을 생각하기도 했으나 1974년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를 보고 언론인이 되기를 포기하고 결국 기업인의 길을 걸었다. 고려대 재학 시절 총학생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비즈니스포스트 이상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