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톡톡] 현대백화점 오프라인 몰락 거부하다, 정지선 백화점 한계 돌파
등록 : 2021-04-05 13:56:59재생시간 : 13:59조회수 : 8,947임금진
‘리테일 아포칼립스.’ 오프라인 유통업의 몰락을 의미하는 단어다.

2017년 미국의 대형 유통기업들이 오프라인 매장을 대거 폐점하고 파산보호를 신청하면서 널리 통용되기 시작했다.

국내 유통업계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에 따른 온라인 유통업의 급성장으로 오프라인 유통업계의 위기감은 상당하다.

하지만 오히려 오프라인에서 답을 찾는 기업도 있다. 바로 현대백화점그룹이다.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은 왜 백화점과 면세점의 오프라인 출점에 공격적 행보를 보일까? 정 회장이 그리는 현대백화점그룹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 오프라인몰의 미래 보여주는 더현대서울, 현대백화점의 백화점부문 반등 시동

현대백화점 ‘더현대서울’이 성공했다.

더현대서울은 현대백화점이 판교점 이후 5년여 만에 수도권에 새로 점포를 연 백화점으로 이제 갓 개점한지 한 달여 밖에 안 된 신생 백화점이다.

하지만 ‘미래형 백화점’이라는 콘셉트를 앞세워 백화점이라는 장소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사람까지 방문하게 만들 정도로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더현대서울에 인파가 몰리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은 여러 지점에 있다.

더현대서울을 보기 위해 코로나19 상황에도 사람들이 몰려들자 현대백화점은 차량 2부제와 엘리베이터 탑승 인원 제한이라는 대책을 꺼냈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3월11일 더현대서울을 방문해 유동인구 증가에 따른 방역대책을 주문하기도 했다.

더현대서울은 코로나19로 매출 부진을 겪었던 현대백화점에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다.

몰려드는 인파 덕분에 더현대서울은 현대백화점 판교점이 썼던 최단 기간 매출 1조 원 달성이라는 기록을 무난하게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증권가에서도 현대백화점의 실적 증가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증권가 컨센서스를 종합하면 현대백화점은 올해 연결기준으로 매출 2조9257억 원, 영업이익 2828억 원을 낼 것으로 전망된다. 2020년보다 매출은 28.7%, 영업이익은 108.1% 늘어나는 것이다.

2017년부터 이어오던 영업이익 감소세를 4년 만에 반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주가를 살펴봐도 현대백화점에 대한 기대감은 상당한 것으로 파악된다.

현대백화점이 더서울현대를 열기 전만 해도 현대백화점 주가는 주당 8만2천 원대에 머물렀으나 더현대서울 개점 뒤 ‘기대이상’이라는 반응이 쏟아지자 주가는 한때 9만4천 원까지 치솟기도 했다.

◆ 정지선은 어떻게 여의도 업무지구에서 백화점을 흥행시켰나

현대백화점그룹이 오프라인 유통업계의 위기 속에서도 더현대서울의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더현대서울은 개점 전부터 정지선 회장의 야심작으로 꼽혔다. 정 회장은 여의도 파크원이 조성될 때 백화점 건물 입찰에 공격적으로 참여하면서 사업을 진두지휘했다.

업무지구라는 특성상 여의도에 고객을 모으는 효과가 떨어질 수 있다는 그룹 내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의도점을 현대백화점그룹의 위상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플래그십 스토어(대표 매장)'로 개발해야 한다”는 특명을 내렸다.

정 회장이 심혈을 기울여 오픈한 더현대서울을 자세히 뜯어보면 기존 백화점의 틀을 완벽히 깼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백화점 공간을 구성할 때는 ‘창문을 만들지 말 것’ ‘시계를 보이지 않게 할 것’과 같은 불문율이 있다. 쇼핑하는 사람들이 시간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더현대서울은 이런 고정관념을 과감히 버렸다.

더현대서울 천장은 유리로 제작됐으며 1층까지 건물 전체를 여는 건축기법으로 지어졌다. 이 덕분에 천장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이 지하를 제외한 모든 층에 쏟아진다.

고객을 위한 휴식공간을 최대한 확보한 것도 특징이다. 현대백화점은 더현대서울의 전체 영업면적 가운데 매장 면적을 절반만 확보했다. 나머지는 실내 조경이나 휴식, 전시 등 고객들이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채웠다.

백화점 매출이 매장 면적과 비례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매우 파격적 결정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더현대서울을 조성할 때 ‘고객들이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데 중점을 뒀다는 현대백화점의 설명이다.

고객들이 많은 것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이 아닌 즐길 수 있는 공간에 방점을 뒀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과거 유통업계를 생각하면 백화점이 백화점이길 포기했다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전문가들 의견을 종합해보면 더현대서울의 전략은 백화점업계가 나아가야 할 지점을 정확히 짚어냈다고 볼 수 있다.

삼정KPMG 경제연구원은 1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리테일 아포칼립스’시대를 맞이한 유통기업의 대응 전략 가운데 하나로 ‘오프라인 매장의 리포지션’을 꼽았다.

삼정KPMG는 △오프라인 매장별 주력 소비자층에 적합한 공간 설계와 소비자 대응으로 고객경험 높이기 △소비자 데이터 집합소로서의 오프라인 매장, 고객정보 센싱 관련 기술의 적극적 도입 등을 구체적 전략으로 제시했다.

현대백화점이 더현대서울 공간에서 매장 면적을 늘리기보다 고객 친화적으로 최대한 구성한 것은 이렇듯 오프라인만이 줄 수 있는 ‘체험’의 역할을 극대화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오린아 이베스트투자증권 연구원은 더현대서울을 방문해 “유통업 내에서 이런 오프라인들이 강조해야 하는 부분들이 아무래도 체험이나 취식이나 경험 같은 기능들”이라며 “단순히 물건을 구매한다면 사실 온라인으로 사는 게 제일 싸고 편리하다 보니까 목적구매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고 바라봤다.

오 연구원은 “오프라인 유통이 온라인과 비교해 지니는 강점은 직접 보고 만지고 먹는 체험공간의 힘”이라고 덧붙였다.

정지선 회장의 더현대서울은 세계 유통공룡인 아마존을 창업한 제프 베조스 회장의 철학과도 맞닿아있다.

제프 베조스는 1994년 유통의 미래를 꿈꾸며 아마존을 창업했을 때 이런 말을 했다.

“앞으로 살아남을 오프라인 매장은 두 종류밖에는 없다. 재미가 있거나 아니면 소비자에게 즉각적 편의를 안겨주는 것, 이렇게 둘.”

◆ 더현대서울로 이정표 세운 정지선, 앞으로 현대백화점그룹 어디로 이끌까

현대백화점에 더현대서울은 하나의 이정표다. 새 점포의 이름에서 ‘백화점’이라는 단어를 뺀 것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통상 백화점기업들은 새 점포를 낼 때 OO백화점 XX점이라고 이름짓는다. 이 관례대로라면 더현대서울의 이름도 ‘현대백화점 여의도점’이 돼야 했었다.

현대백화점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백화점이 되겠다는 포부를 품고 과감하게 백화점이라는 명칭을 뗐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한 기업이 주력상품에 어떤 이름을 내거느냐가 그 회사의 정체성을 결정지어온 여러 사례가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더현대서울이라는 이름에서 현대백화점그룹을 이끄는 정 회장의 또 다른 계획도 엿볼 수 있다.

백화점이라는 이름을 벗어던진 것은 앞으로 현대백화점그룹이 더는 백화점이라는 한계에 갇히지 않고 다른 분야로 나아가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고 보는 시각도 상당하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SK그룹이 선경직물이라는 이름을 유지했다면, CJ그룹이 제일제당이라는 이름을 유지했다면 현재와 같은 SK그룹과 CJ그룹의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다”며 “더현대서울은 현대백화점그룹이 앞으로 백화점의 틀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사례”라고 말했다.

정지선 회장이 현대백화점그룹을 어디로 이끌려고 하는지 살펴보려면 그룹의 중장기 전략을 봐야 한다.

정 회장이 1월 초 발표한 ‘현대백화점그룹 비전2030’에 이러한 미래 전략이 들어있는데 이를 꿰뚫는 열쇳말은 ‘제조’와 ‘플랫폼’이다.

정 회장이 2010년에 발표했던 비전2020에는 ‘성장’과 ‘내실’이 핵심가치로 담겨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모호한 단어가 아니라 ‘제조’와 ‘플랫폼’이라는 비교적 구체적 사업영역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대비된다.

성장을 위한 도구로서의 인수합병도 과거와 차별화하기로 했다.

비전2020의 핵심은 ‘금융, 건설, 환경, 에너지’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백화점과 큰 연결고리가 없는 사업에 진출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지난 10년 동안 현대백화점그룹은 사실상 비전을 이뤄내지 못했다.

이런 실패를 교훈 삼아 현대백화점그룹은 비전2030을 실현 가능한 계획으로 정교하게 짠 것으로 파악된다. 정 회장은 백화점 고객들이 하는 의식주와 문화의 소비패턴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가겠다는 뜻을 비전2030에 담았다.

현대백화점그룹은 실제로 ‘그룹 사업 방향성에 맞는 유망사업 진출’을 신규사업 진출전략으로 명시했다. 기존사업 성장전략에 더해 ‘생활문화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목표를 세운 것이다.

현대백화점그룹 비전2030을 살펴보면 앞으로 사업의 두 축이 될 제조 기반 사업으로는 뷰티, 헬스케어, 바이오, 친환경 등이 있다. 플랫폼 기반 사업은 헬스케어와 고령친화, 교육엔터, 풀필먼트 등을 아우르게 된다.

현대백화점그룹은 정지선 회장이 내세운 비전2030을 실현하기 위해 앞으로 제조와 플랫폼분야의 인수합병 매물을 꾸준히 검토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 정지선 인수합병 성큼성큼, 현대백화점그룹 어떤 계열사에 힘이 실리나

현대백화점그룹은 이미 최근 몇 년 동안 인수합병시장에서 공격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최근 3년만 훑어보면 딜라이브와 한화L&C, 클린젠고슈메티칼, SK바이오랜드, 이지웰 등을 품에 안았다. 지난해에 인수한 매물만 3건이다.

인수합병을 위한 실탄 마련도 서두르고 있다.

현대백화점그룹은 계열사인 현대HCN을 물적분할해 현대벤처스(존속)와 현대HCN(신설)으로 나누고 현대HCN 및 자회사인 현대미디어까지 KT에 매각해 5200억 원을 확보했다.

현대백화점그룹의 인수합병 주체로 나선 기업들을 보면 현대홈쇼핑과 현대그린푸드에 무게 실리고 있다는 점이 확인된다.

현대홈쇼핑은 한화L&C의 인수 주체였으며 현대홈쇼핑의 종속기업인 한섬은 클린젠코스메슈티칼을 인수했다. 현대홈쇼핑 산하 현대벤처스도 현대바이오랜드 인수주체로 섰다.

현대그린푸드도 복지몰 운영하는 이지웰을 2020년 하반기 인수하며 인수합병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 현대그린푸드는 과거 현대리바트와 에버다임 인수로 몸집을 불린 경험이 있다.

현대그린푸드는 올해 초에도 한화호텔앤드리조트의 중국 급식사업을 인수했다.

정지선 회장이 대표이사를 맡아 이끄는 현대백화점은 본업인 백화점사업에 힘을 주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자회사인 현대백화점면세점을 통해 면세점사업의 기반도 닦고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현대백화점그룹이 앞으로 제조와 플랫폼 분야에서 다양한 인수합병을 시도할 때 백화점과 면세점사업에 집중하는 현대백화점 대신에 현대홈쇼핑 및 산하 계열사와 현대그린푸드가 인수합병의 주체로 나설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 현대백화점그룹 인수합병 행보에서 계열분리 밑그림도 볼 수 있을까

인수합병 과정에서 현대홈쇼핑과 현대그린푸드에 힘이 실리는 것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현대백화점그룹의 인수합병이 향후 일어날 지배구조 개편과도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대백화점그룹은 현재 정지선 회장과 그의 동생 정교선 부회장의 형제경영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재계는 형제가 장기적으로 계열분리해 독자노선을 걸을 가능성이 크다고 바라본다.

정교선 부회장이 2년 전 현대백화점 사내이사로 합류한 것을 놓고 계열분리 가능성이 작아진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정교선 부회장이 현대백화점 미등기임원으로 보수만 받는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한 움직임이라는 해석도 있는 만큼 앞으로 형제가 어떤 길을 걷게 될지는 여전히 지켜봐야 할 문제다.

증권가는 과거부터 현대백화점그룹의 백화점부문을 정지선 회장이 전담하고 나머지 부문을 정교선 부회장이 맡을 공산이 크다고 내다봤다.

지분상으로도 정지선 회장은 현대백화점 지분 17.1%를 보유한 최대주주이며 정교선 부회장은 현대그린푸드 지분 23.8%를 든 최대주주다.

정지선 회장이 들고 있는 현대그린푸드 지분 12.7%와 현대그린푸드가 들고 있는 현대백화점 지분 12.1%를 처분하면 지분상 독립체제를 구축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계열분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현대백화점그룹 중요 계열사인 현대홈쇼핑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점이다.

현대홈쇼핑 최대주주는 현대그린푸드(25%)이며 2대주주는 현대백화점(15.8%)이다.

현대그린푸드 최대주주가 정교선 부회장이지만 정지선 회장의 지분도 적지 않은 만큼 향후 계열분리를 시도하기에 앞서 어떻게 현대홈쇼핑의 사업을 나눌 것인지 합의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정지선 회장이 이끄는 현대백화점의 매출이 그룹 전체 매출의 4분의 1가량에 불과하다는 점에서도 현대홈쇼핑의 사업분할 문제는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앞으로 현대백화점그룹이 진행할 인수합병에서 현대홈쇼핑과 현대그린푸드가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계열분리의 밑그림을 엿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채널Who 남희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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